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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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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민병석 목사 |
참고 : | http://www.bamjoongsori.org 밤중소리 |
로마서 강해 50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
로마서 7 : 5 - 6
서 론 :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육신에 있었을 때와 율법에서 벗어났을 때의 생활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을 때 에란 그 시기는 우리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 곧 아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아니했을 때의 시기, 중생 이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때는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하는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얽매였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지난날 거듭나지 못했을 때처럼 의문의 묵은 것으로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육신에 있었을 때의 생활
우리가 지난날 육신에 있었을 때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우리 지체 중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역사 했던 하나의 놀라운 세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세력이 바로 죄의 정욕입니다.
(1) 육신에 있을 따란 죄의 정욕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을 때를 의미합니 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서 권능을 가지고 무섭게 역사하는 죄의 정욕을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우리들 마음속에 죄의 정욕을 심어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마음속에 죄라든가 정욕을 심어 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범죄한 우리 인간의 마음속은 온통 불의와 탐욕과 정욕과 음란으로 들어 차 있습니다(롬1:28-31 ; 마15:19,20). 그런데 이것들이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발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율법이 나타나자 그 율법을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은 잠자는 우리 마음속의 죄를 깨웠습니다. 그 죄로 우리 가운데서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 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롬 5:20). 더 한다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존재했던 죄가 밖으로 자꾸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의 세력은 율법의 권능보다 더 강합니다. 강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의 종으로 죄에게 팔린 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11). 우리는 율법이 없었을 때에도 많은 죄를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죄를 행하면서도 인간들은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나타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지 못한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정죄 했습니다. 우리는 그 율법의 정죄함을 바라보고 비로소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결코 우리의 범죄행위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그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롬3:20). 그리고 율법은 믿음의 의를 보여줍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롬3:21).
(3) 이처럼 우리가 육체에 있었을 때에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 하는 죄의 세력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합니다. 율법도 그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치 못합니다. 양심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 다음으로 강력한 세력으로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망을 위한 열매란 인간의 모든 열매를 말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롬1:21). 사람이 선하고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성령 안에 있지 아니하면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죄의 정욕이 그 지체 중에서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생애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은 모두 율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며 율법의 정죄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거듭난 사람,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이제는 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분기점을 말해 줍니다. 육신에 있을 때의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사람의 경우를 말합니다. 이 선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의 분명한 경계선입니다. 우리는 다 이 경계선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2)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얽매였던 것이란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얽매여 왔습니다. 우리는 죄에 팔린 몸으로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그 얽매임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양심과 율법을 통해서 놓임을 받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율법으로 인하여 죄의 세력이 더 강력해 질뿐 아니라 정죄까지 하게 됨으로 율법은 더욱 죄에 얽매이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얽매였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죄로 인한 죽음이기 때문에 곧 우리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일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죄에 얽매임에서 풀려났으며 해방된 것입니다. 이 일은 또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율법의 저주가 미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정죄의 구실을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이제 그 죄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3) 율법에서 벗어난 자의 생활은 새로운 생활입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난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다른 이 곧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율법의 영역 안에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새로운 영역 안에서의 생활을 의미해 주는데 이 영역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생활입니다. 이것은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형태입니다.
(4) 의문의 묵은 것은 이제 쓸모 없어졌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이란 글로 쓴 율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같은 율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 그 법 아래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영의 새로운 것이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받은 부활의 생명,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입니다. 이 생명 안에는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습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제 단순히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한 삶입니다. 이 같은 삶의 자세가 죄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의 진실된 삶의 자세임을 알고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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