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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친해지기 5-8 :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657 추천 수 0 2013.05.27 19: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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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6:13-16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하나님과 친해지기 5 : 예수 그리스도 1

2008년 3월 29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마태복음 16:13-16

  이스라엘 투데이라는 잡지를 아십니까?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만드는 월간지인데 2월호 2쪽을 보니까 이런 글이 있더군요. 작년 크리스마스 때에 한 이스라엘 웹사이트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묘사했답니다.

'오늘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지구상에서 살았던 가장 유명한 유대인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살았던 가장 유명한 유대인',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표현한다는 것은 대단한 진전이라고 생각됩니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배교자, 노쯔리(나사렛 사람, 현재는 기독교인을 뜻하는 말로 쓰임), 나쭈룻(나사렛파, 기독교를 지칭)의 창시자, 이렇게 불렀습니다. 모두가 배타적인 지칭입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시대가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분리되면서 더욱 배타적이 되었고, 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과 착취 등이 더욱 더 예수님과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커지게 되었지요.

그런 역사적인 경험에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닌 자신들을 핍박한 기독교의 창시자 정도로만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예전에도 소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은 늘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 많아지고 있고요. 하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인식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기독교 국가들의 지지에 의해 1948년도 건국되고, 기독교인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그러한 생각이 점점 변화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세계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는 이들은 기독교인들, 특별히 개신교회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예수님은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보면 상당히 뛰어난 랍비였고 선지자였다 라고까지 발전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배타적인 입장이 많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면 이렇게 말한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시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메시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한답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라는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부터 지금까지 있어온 질문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질문이 '누가 유대인이냐?'라는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가 유대인이냐?'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의 대답이 있습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인 경우 그는 유대인입니다. 전통적으로 어머니가 유대인일 경우 유대인으로 인정했고, 지금은 아버지가 유대인이어도 인정해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유대교를 믿을 때 그 사람을 유대인으로 인정해줍니다. 그래서 아시는 것처럼 에디오피아 유대인들도 있고, 인도계 유대인, 심지어 중국계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해 랍비들은 그것은 배신이고 배교라고 말하면서, 그럴 경우 그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가르쳤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이 곧 기독교로의 개종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도 그는 여전히 유대인입니다.

왭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이셨고, 유대인의 왕이시고, 이 땅에 계실 때 그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유대인들을 구원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완전한 유대인, 완전한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샤울(שאול)입니다. 그는 요즘으로 따지면 정통파 유대교인이었고,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였고, 할례 받은 유대인이었고, 랍비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가 유대인이 아니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유대인이었고, 더 확실한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믿을 때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온전한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 교회의 유대인 지체인 가비와 사라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가비가 그러더군요. "나와 사라는 예수님을 믿는다." 사라 역시 그러더군요. "오직 예수님만이 진짜 메시아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가비와 사라를 두고 유대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가비와 사라는 진짜 유대인이고, 완전한 이스라엘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스라엘을 위해, 그리고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동안 교회가 저지른 죄악과 잘못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하고 유대인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더불어 예수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이고 그릇된 선입견들이 사라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유대인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유대인이 아닌 경우에도 많은 답변들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혁명가로 봅니다. 당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파 등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첨예한 입장이 혁명적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이며 구습을 타파하는 과격한 혁명가의 모습으로 이해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인들의 반열에 세웁니다. 그래서 세계의 3대 성인이니 4대 성인의 한 분으로 이해합니다. 보통 인간으로는 이룰수 없는 위업을 달성한 거룩한 인물로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성인을 정신적으로 흠모하면서 그 드높은 정신을 배우고 기리자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과 이사에 매료되어 그분을 기복(祈福)의 대상으로 삼고 삼신할미에게 빌듯 온갖 것을 빕니다. 예수님의 신통력을 통해 부귀와 영화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의 길 순례를 했는데, 골고다와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무덤교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눕혔다고 전해지는 그 자리에 있는 바위에 이것 저것 올려놓고,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 화가 일어나지 않고 복이 임한다고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신앙의 변질중 가장 유치한 단계가 바로 기복신앙이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샤머니즘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복을 빌러 불상 앞에 엎드리거나 무당을 찾아가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변질된 신앙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결국 이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수가 다르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하는 이 질문은 동일하게 주어지는 질문이고 이 질문에 여러분 각자가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먼저 예수님을 직접 따랐던 제자들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16:1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는지'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대해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

  가장 정확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이고, 더불어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에 대한 가장 정확인 대답입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세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주',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 세가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 그리고 다른 영어 성경에는 '주는'이라거 되어 있지 않고 '당신은'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우리 성경에 있는 것처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고백에서는 옳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의 주인이십니까? 온 세상의 주인, 그리고 나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주님이란 표현을 아도나이로 많이 씁니다. 바로 야훼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아도나이 이십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주장하시는 아도나이시고, 더불어 나의 삶의 아도나이, 주인이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제 나는 예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고, 죄와 사망이 나에게 왕노릇 했지만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예수님만이 나의 왕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에게 누구십니까? 주님이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당신의 주인이십니까? 당신의 마음과 삶, 당신의 가정과 직장, 당신의 자녀, 당신의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주인되심을 얼마나 인정하며 사십니까? 말로는 그렇게 말하는데 실제로 내 마음에서는, 그리고 나의 삶에서는 여전히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노릇하길 원하질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믿으신다면 정말 그것을 인정하는 삶을 사십시오. 매 순간 순간마다 확인하시고 선포하십시오.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가정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직장과 사업장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학업에 있어서도 주인이십니다!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인생,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선포하십시오. 손해보는 것 같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랬다지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막내가 드디어 백원의 가치를 알았답니다. 어린 아들에게 백원을 주었는데, 그 백원이 그 아이에게는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백원을 들고 좋아하는 아들에게 이 목사님이 달라고 했습니다. 웃으면서 아빠한테 백원주면 좋은 것 줄께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끝까지 않주더랍니다. 아빠의 다른 손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천원짜리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여러분들의 인생을 맡겨보세요. 정말 횡재하는 겁니다. 돈 이야기를 해서 이 말을 예수믿으면 부자된다는 말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예수님께 여러분들의 인생을 맡기면,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횡재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수지 맞는 겁니다. 저는요, 예수님 믿고나서 손해 본 적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 후에, 그렇게 맡긴 후에 손해 본 적 없어요. 오히려 수지 맞았고요, 횡재했어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뜻대로 내가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나의 주인이 되면 돈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권력이 나의 주인이 되면 권력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성공이 나의 주인이 되면 오직 성공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괘락이 나의 주인이 되면 쾌락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이 나의 주인이 되면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주인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이 나을 것 같습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면 참 좋을 것 같고 참 자유롭고 수지 맞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죄악되고 건강하지 못한 것들이 나의 삶을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죄짓는 것을 좋아해요. 그리고 강한 자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입은 마음과 쓴뿌리가 있습니다. 나의 제한된 판단과 경험과 생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나의 주인이 되어 나의 인생을 이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주인되어 나의 가정을 이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될까요?

  내가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나를 지으시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내가 예수님께 나의 마음과 삶을 드리고 인도하심을 바라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살고자 할 때 예수님은 나의 영혼과 인생과 가정을 풍성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정말로 인정해 보세요. 내가 주인이었던 자리에서 다 내려오시고 예수님께 다 맡기세요. 그리고 나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묵상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세요.

그럴 때 분명한 것은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 의지와 생각과 부딪힐 때가 있어요. 내 자아와 갈등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 싸우세요.

예수 믿는 것은 주님의 말씀 붙들고 나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 사탄과 싸우는 겁니다.

한번 지면 또 지기 쉬워요. 하지만 한번 이기면, 다음에 이기는 것은 쉬워져요. 그러면 순종이 습관이 되고, 주님의 뜻에 따라사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두번째 답은 예수님은 그리스도, 메시아이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 나의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그리스도, 나의 메시아라는 말은 그분의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말하고, 더불어 온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말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되었고,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을 구원하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구원자라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거짓 메시아들이 있었고, 지금도 거짓 구원자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돈이 구원자라고 합니다. 때로는 사상이 구원자라고 합니다. 공산주의가 그랬지요.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깊은 자기 성찰과 수도를 통해 해탈에 이르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가 성행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라는 말씀은 나의 영혼뿐만 아니라 나의 가정의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인생의 모든 순간 순간마다 구원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그 말씀 붙들고 아직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세요.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가족도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려움에서 다른 어떤 것에서 구원을 찾지 마세요. 우리 예수님, 그렇게 무력하신 분 아니에요.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만날 수 있는 질병과 고통과 번민과 암담한 그 모든 것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깊은 수렁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나를 높은 곳에 올리실 분은 오직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에 대한 세번째 대답은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입니다. 돈이 경배의 대상이 아니고, 권력과 명예가 경배의 대상이 아니고, 사람이나 사상이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입니다.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예배합니까? 그분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그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드리십시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곧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한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과 번민과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늘 기억하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붙드십시오. 그것이 곧 예배자에게 주어지는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하는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은 자기 신앙의 현재의 수준입니다. 이 말은 곧 누가 예수님을 가르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 체험'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예수 체험이란 들어서 아는 예수가 아니라, 배워서 아는 예수가 아니라, 교리적으로 설명해서 아는 예수가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 내가 만난 십자가, 내가 무릎꿇고 눈물로 고백하며 만난 그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 그것이 곧 예수 체험입니다. 예수 체험은 여러가지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처럼 그런 강한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 체험은 꼭 사도 바울처럼 극적인 체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저도 그런 예입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하거나 쉽게 돌아오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매 안맞고 오는 것이 훨씬 나은 겁니다.

그런 체험이 없어도 내 안에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나의 주님으로, 나의 구원자로 영접할 때 그것이 곧 예수 체험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여러분들의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면 그때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것이 곧 예수 체험입니다.

  그리고 예수 체험은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세요.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다른 것 아니예요.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세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는지, 또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하세요.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날마다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생명의 빵이에요.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밥입니다. 예수님은 밥이에요. 밥을 먹어야 삽니다. 안 먹으면 영양실조에 걸려요. 힘을 낼 수가 없어요. 무력해져요. 병 들어요. 그리고 죽어요.

  밥을 먹어야 합니다. 날마다 밥을 드세요.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드세요. 그것이 곧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 읽고 큐티하라는 차원이 아니예요. 기도와 성경과 말씀 묵상을 통해, 또한 설교말씀을 통해 누구를 생각하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어요. 그러면 이전에 잘 몰랐던 것을 알게 하시는 은혜가 있어요. 그러면 정말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복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은혜가 있어요.

그러면 정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알게 되는 은혜가 있어요. 또한 성경의 말씀들이 새롭게 이해되고 보여지는 은혜가 있어요.

그것이 곧 밥 먹는 겁니다. 그 밥을 먹는 것이 곧 예수 체험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서 말씀하셨잖아요.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면 예수님과 더불어 먹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에요. 예수님께서 생명의 밥이시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모시면 예수님으로 인해 내 영혼이 살아나죠.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께서 친히 나를 먹이신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은혜 주시고 복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멋있지 않아요? 예수님하고 더불어 먹게 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라는 밥을 많이 먹을수록, 날마다 먹을수록 내 안에 예수님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게 되요. 그분의 성령께서 살아 역사하시게 되요.

그렇게 되면 내 영혼과 내 삶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좋아지겠어요? 나빠지겠어요? 수지 맞겠어요? 손해 보겠어요? 횡재하겠어요? 쪽박 차겠어요? 풍성해지겠어요? 가난해지겠어요? 제가 계속해서 '하나님과 친해지기'란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하나님과 친해지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말씀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더욱 자세하게 말씀 드리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는 그 출발점이자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여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으로 고백하고, 당신의 삶에서 인정하고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을 먹으십시오.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당신과 더불어 먹으시고 당신의 영혼과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지기 6 : 예수 그리스도 (2)
2008년 4월 5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요한복음 14:6-9

대략 한달 전에 우리 교회의 유대인 지체인 사라 성도에게서부터 특별한 볼펜 하나를 받았습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히브리어로 선명하게 글자가 써 있는 볼펜입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아십니까?

"אני הרדך והאמת והחיים"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요?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다"란 뜻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본문 인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눈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리라"

  여러분들이 짐작하듯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들 교회에서 전도용으로 만든 볼펜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양식있고 비교적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지성인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인 유대교가 있다. 그리고 당신들에게는 기독교라는 하는 길이 있다. 우리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길(방법)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는 예수로 주어졌고, 우리 유대인들에게는 토라가 주어졌다."

  이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 생각되시나요? 일리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언듯 듣기에는 상당히 포용적이고 호의적으로 들립니다. 합리적으로도 들립니다. 최소한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해서 저주를 퍼붓으면서 거부하는 말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럴 듯하나 옳은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이른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하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다원주의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여러개가 있다, 즉 구원에 이르는 길은 여러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고,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상당히 그럴 듯하죠. 우리가 혼동해서는 안될 것은 이건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상일뿐이고 이론일뿐입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는 필요하지만, 하나님께 이르는 구원에 관해서는 분명한 이해를 갖고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며,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들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오직 예수라는 그 이름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고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메시아시며 동시에 이방인들의 메시아이십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고 찾았던 것이 바로 길입니다. 작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부터 바르게 살 길이 무엇인지, 나아가 인생의 최종 목적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추구였고 갈증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바로 도덕이고 법이고, 철학과 종교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찾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이 길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청년들이 이 자리에 있는데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에 온 이유 중에 하나도 이것입니다. 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의 진로,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길을 찾습니다. 작든 크던 길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길을 잘 선택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선택을 잘못해서 그릇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선택은 인생의 궁극적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 죄와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리라"

  이 구절은 너무나 유명한데, 이 구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I AM이란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인데,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나는 나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이나 영어 성경에는 '나는 ~이다' 라는 의미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던 말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3:14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는데, 우리 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의역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되어 있고, 영어 번역으로는 'I am who I a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나인 것은 나다, 나는 나다'라고 해야합니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신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이 origin이시고 영원부터 계신 분이시고 창조주이시기에 누가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야훼(여호와, 아도나이, יהוה)입니다.

  어찌되었든 조금 신학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이 말은 예수님께서 곧 누구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아도나이, 하나님이심을 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곧 아도나이, 하나님이므로 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란 뜻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신데, 어찌 구원을 줄 수 있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로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길, 진리, 생명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는다는 것이지요. 우리말에는 정관사나 부정관사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냥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성경이나 히브리어 성경 등 정관사가 있는 언어들은 모두 그 단어들 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정관사의 역할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가지의 길이 있을 때는 부정관사를 붙여서 'a way'를 씁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 혹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을 표현할 때는 'the way'를 씁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종교다원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원에 이르는 여러가지 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길이라고 했을 때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은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죄와 같이 있을 수 없고,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바로 내가 받아야할 죄의 형벌을 대신받으셨습니다. 죄인인 내가 그 형벌을 받아야 하고 죄인인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받으시고 죽으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죄의 댓가인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나의 죄가 용서받고, 죄인인 내가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나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 없이 구원은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나의 공로로 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선하다고 해서, 착하게 살았다고 해서, 내가 좋은 일 많이 했다고 해서, 내가 참선하고 도를 터득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유일한 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믿고 영접할 때 비로서 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죄를 씼기시고 의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시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많이 벌고, 많은 것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궁긍적인 성공은 죄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아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저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복주셔서 태어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내 인생의 목적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시는 거룩한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구인지, 또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된 사람은 성공자입니다.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나를 당신의 거룩한 뜻으로 인도해주시고 의의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은 망하는 법이 없어요. 세상의 눈으로는 망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는 망한 사람이 아니예요.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일어서고,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감사와 찬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 있는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고 행복한 인생입니다. 누가, 무엇이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돈이요? 권력이요? 출세요? 사람이요? 자녀들이요? 아닙니다. 인간은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잠간의 만족을 행복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잠간의 기쁨을 행복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인간은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해야 비로서 자유해지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말한 바 있는데, 제가 21살 때 다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죄 가운데 있었고, 내가 누구인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의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었습니다.

저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요,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나서 제 마음 가운데 충만해진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행복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평화가 있었고, 누구랑 깊은 연애를 하는 것처럼 가슴이 늘 설레는 황홀함이 있었고, 온 세상이 천국처럼 보이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 만나고 나서 행복해졌어요. 성공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행복할 것이고 성공할 것입니다. 왜요? 저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행복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행복의 마지막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시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실 수 있고 나를 성공자로 만드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유일한 진리이십니다. 진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에멧(אמת)입니다. 이 에멧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에멧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철자 세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알렙(א), 멤(מ), 타브(ת)입니다. 알렙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입니다. 처음을 뜻합니다. 멤은 중간쯤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타브는 맨 끝에 위치합니다. 마지막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뜻하는 에멧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지요? 진리는 무엇이냐?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같은 것,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 시작이 아무리 좋고 그럴 듯해도 중간에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 시작이 아무리 좋아도 마지막이 다르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그랬지요. 처음에는 그것이 진리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산주의는 무너지고 말았어요. 진리가 아니었어요.

  시작은 좋고 그럴 듯한데 마지막이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이단입니다. 한자로보면 '다를 異', '끝 端'입니다. 끝, 마지막이 다른 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처음에는 그럴 듯합니다. 기존의 교회들보다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더 말씀이 살아있는 것 같고, 성경공부도 체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예수님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점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달라집니다. 본색이 드러납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줍니다. 성경 외에 다른 계시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구원자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끝이 다른 이단입니다.

  왜 마귀가 진리가 아닙니까? 위장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가장합니다. 진리인 척합니다. 가장한다는 말은 진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말세에 성도들이 구할 것은 영분별의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미혹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사탄의 악한 궤계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우리의 영혼을 지키려면 무엇이 참 진리이고 거짓인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성령의 역사인지 마귀의 역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적이 나타난다느니, 참 진리가 있다느니, 직통계시를 한다느니 하는 말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이미 참 진리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의 진리의 말씀이 있고, 그분의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지 마십시오. 에수님 안에서 진리가 있습니다. 늘 예수님 안에 거하십시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시고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드십시오. 그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고 늘 성령충만함을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있는 참 진리를 마음껏 누리시고 그 진리로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에서 승리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끝이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히브리어가 참 재미있는 것이 진리를 뜻하는 단어 에멧에서 첫 글자인 알렙을 빼면 멧(מת)라는 단어가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데, 이것을 영어나 한글을 쓰는 식으로 보면 마지막 글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든 중간이든 마지막이든 달라지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무엇이다? 죽음이라는 겁니다.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 해석 좋지요? 미드라쉬에 나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그분이 나의 주님이신 것이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신은 곧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할 그 시점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 사람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실 우리는 처음과 같은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나마 완전치는 않지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사랑은 변합니다. 없으면 죽을 것처럼 사랑하던 연인들도 어느샌가 사랑이 식어지면 덤덤해 집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변함없이, 한결같이, 세상 끝 날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한결같고 변함없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세상은 그분을 통해 시작되었고 그분을 통해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예수님께서 나를 영원히 사랑하시고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생명이시며 유일한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 함은 그분만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이 누구에서 나왔습니까? 단백질 덩어리에서 나왔습니까? 박테리아에서입니까? 진화론에서 그렇게 말하잖아요? 우주도 우연히 만들어졌고, 생명도 우연히 만들어졌고, 모든 각종 생물들이 진화를 거쳐 만들어졌고, 인간도 그런 우연의 산물이고, 나 역시 우연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우연의 산물로 태어난 생명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무슨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까? 없어요.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 세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고, 모든 생명체 역시 그분이 만드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하나님께서 손수 당신의 형상을 따라 당신을 닮도록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연의 소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고귀한 생명입니다.

창세기 2: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생령', 히브리어로는 '네페쉬 하야'(נפש חייה)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후 그 코에 직접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흙 덩어리가, 살덩어리가 '네페쉬 하야',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에게서는 이런 기사가 없어요.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왜 인간이 영적인 존재인지 아십니까? 왜 인간만이 영원을 생각하고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분의 호흡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로 인해 인간은 영적인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병들고 말았습니다. 복구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으로 인해? 범죄함으로 인해, 불순종으로 인해, 나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가 파괴되고 훼손되고 치유불가능하게 병들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3장부터의 이야기입니다.

  그 파괴되고 훼손되고 병들어버린 하나님의 생기를 회복시켜주고 다시 살아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 그 자체이시기에 예수님을 만나는 자마다, 예수님을 구주 영접하여 믿는 자마다 그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게 되고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생명뿐입니다. 나무를 보십시오. 나무에 접 부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죽은 나무에는 접부치지 않습니다. 죽은 나무에 접붙히면 그 가지는 죽고맙니다. 살아있는 나무에 접부쳐야합니다. 그래야만 가지가 살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접부쳐진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접붙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새생명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습니다.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하심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포도나무 비유가 나오는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매,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웃과 형제 자매를 사랑하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용서할 줄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웃과 형제 자매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하게 되었고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힌 바 되었기에 그러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열매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포도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열매입니다. 즉 예수님 닮은 인격과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께 꼭 붙어있을 때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꼭 붙어있듯이 예수님께 꼭 붙어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삶에 예수라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꼭 붙어 있으십시오. 이 말은 단순히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되신 예수님께 꼭 붙어 있으십시오. 그분 안에 거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 꼭 붙어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마음에 새김으로 날마다 먹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려고 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닮은 인격과 삶이 있는 작은 예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나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앞선 말씀들의 뜻을 깨달으면 이 말을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진리를 예수님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신학적인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생략하고, 이 말을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찬양한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이란 곡인데, 조준모씨가 아들을 위해 지은 곡입니다. 아들 이름이 요엘인데, 아들에게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고, 그 하나님께서 아들에게도 동일한 사랑과 은혜로 그 삶을 인도해주시고 지켜주실 것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제가 "그의 생각-요엘에게"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부모라면 갖게 되는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자녀들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을 알려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저 말해준다고요? 가르켜준다고 될까요? 필요합니다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보여주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 나의 자녀들에게 보여주면 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고, 그분을 닮아가며 살아가면 나의 자녀들은 나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됩니다.

  그런 욕심을 가져보세요. "아빠를 보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아. 아빠를 보면 정말 하나님은 좋은 분이신 것 같아" "엄마를 보면 정말 예수님을 닮은 것 같아. 엄마를 보면 정말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 이런 말을 자녀들에게서 듣고자 하는 욕심을 내시길 바랍니다.

  세상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만난 예수님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뿐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님,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그분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모습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비극은 교회의 건물을 보여주고 기독교를 가르쳤지만 예수님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데 있다는 지적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교회를 보고 온 것도 아니고 기독교를 믿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매주 예배 때마다 만나시고 날마다 만나십시오.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만나시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예수님 닮은 말과 행동, 예수님 닮은 섬김, 예수님 닮은 사랑, 예수님 닮은 헌신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럴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보게 될 것입니다.

  특히나 이 땅 이스라엘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의 입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들에 대해 '노쯔리'하면서 경멸하거나 외면하는 태도가 아니라, '난 예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것 같다.'라는 변화된 태도가 우리를 통해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친해지기 7 : 예수 그리스도 (3)
2008년 4월 12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 히브리서 3:1

얼마전의 우리집 장남 하림이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름이 히브리어로 '예슈아'가 맞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슈'라고 부르는지 마음에 안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왜 우리나라 말로도 '예슈아'라고 하지 않고 '예수'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정확한 히브리식 이름은 네 말대로 '예슈아'가 맞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예슈'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예수'라고 부르는 이유는 헬라어 성경에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Ίησού)라고 되어 있고, 이것이 후에 라틴어로 'Iesus'가 되고, 영어로 'Jesus'가 되었고, 한자로 '야소'가 되었는데, 우리 성경은 헬라어 성경의 영향을 받아 '예수'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슈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르단다.'

그랬더니, '아하!' 알겠다며 하는 말이, 그래도 예수라고 부르면 안되고 예수님이라고 해야된다는 겁니다. 예슈아의 '아' 대신에 '님'을 붙여야 한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맞는 말이지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는 지 아실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예수님을 예슈아(ישוע)라고 부릅니다. '여호와, 그가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구원'에 관한 뜻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르는 것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신 부르는 이름이 예슈(ישו)입니다.

이 말에 대해 이미 작고한 히브리대학의 교수였던 David Flusser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사람들은 그곳 방언을 썼는데,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히브리어 철자 중에 '아인'(ע)을 발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슈아라고 하지 않고 예슈라고 불렀다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기독교적인 배경에서 예슈아라고 부르지 않고 예슈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다 아주 악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뜻을 부여했다는 겁니다. 예슈라는 이름에는 요드, 쉰, 바브, 세 철자가 있는데, 각 글자에 이런 말을 붙였습니다.

  "ימח שמו וזכרו"(Yimach sh'mo v'zikhro), 이 말은 '그 이름과 그의 기억은 지워질 것이다', 혹은 '사라지기를'이라는 뜻입니다. 상당히 경멸적이고 악한 의도가 담겨 있는 뜻입니다. 시편 109:13에 보면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을 예수님의 이름에다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에 의해 이 이름의 뜻이 새롭게 부여되었습니다. 요셉 바크토르(Yosef Vaktor)라는 예루살렘에 살았던 유대인인데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분입니다. 이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동안 자신도 불렀고 지금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부르고 있는 예슈라는 이름에다 다음과 같은 뜻을 붙였습니다.

  "יתגדל שמו ומלכתו"(Yitgadal sh'mo umalkhuto), 이 말은 "그의 이름과 나라가 커져갈 것이다, 확장될 것이다, 혹은 확장되기를!"이라는 뜻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실제로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2천년 간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의 이름과 기억이 사라질 것이다'라는 경멸적인 뜻으로 불렀던 예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었나요? 사라졌습니까? 아니요. 예수라는 그 이름과 예수님의 나라는 날로 커져서 오늘날 수십억의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 앞에 돌아와 예수님은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너무나도 깊게 자리잡혀 있는 반기독교적인 상처와 선입견들이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들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고, 선입견들이 사라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눈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비늘들이 벗겨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경멸적인 이름인 예슈가 아니라 구원자의 이름 예슈아라고 말하고 고백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이름입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이름은 오직 예슈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우리는 복음, Good News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왜 Good News, 복음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주와 다음주, 두 주에 걸쳐 히브리서를 통해 말씀을 나눌 건데, 오늘은 먼저 히브리서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누구를 믿는가?라고 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데, 그분이 사도시고 대제사장이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도라고 했을 때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후에 열두 사도라고 부르는 것과 혼동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서 사도라는 칭호를 붙인 곳은 히브리서 한 곳뿐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원래 의미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부가적인 의미로 '왕의 명령을 전하는 자', '왕의 대사, 특사'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사도라고 표현했는지 아시겠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왜? 무엇을 위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또한 예수님을 사도라고 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하시고 이루신 분'이란 뜻입니다.

열두 제자가 사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수님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사도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기 때문이고(요 3:16),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하시고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이 땅에 하셨던 사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바로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2절 이하를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을 세우신 일입니다. 6절을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달리 말하면 온 세상입니다. 온 세상을 선하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온 우주에 편만하게 거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좀 더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이고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입니다.

즉,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세상을 맡은 분,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구원하시고 통치하는 분이시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여 가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모세와 대비하고 있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여 하나님의 공동체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는 역할 한 사람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 사람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신 분이십니다.

이 공동체는 이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만 믿고 신실되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는 신앙공동체가 된 것인데, 이러한 구성원들로 모여진 무리를 가리켜 6절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는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사도로 보내심을 받은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나가신 것인데, 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세우신 거룩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예배하고, 자신들이 경험한 그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힘썼던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힘써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성삼위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의 집은 확장되게 됩니다.

이 말은 단순히 교회의 외적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지는 것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에 교회가 힘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것처럼, 열두 사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곧 사도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사도입니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기 위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도가 바로 우리 교회이고, 우리 자신입니다.

사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보내신 왕의 뜻에 충성하여 그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세워나갑시다. 하나님의 집을 더욱 더 확장시켜 갑시다. 작게는 여러분 자신을 온전한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가십시오.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삼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으십시오.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될 때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십시오. 모든 가족이 구원받도록 기도하고 전하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가정을 세워나가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교회가 더욱 더 아름답고 건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더욱 더 확고히 서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뜨거운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이 전에 가득차야 합니다.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며 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고 한 몸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 텔아비브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것을 통해 우리 교회는 더욱 더 아름답고 건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텔아비브 욥바 교회, 우리 교회를 아름답고 건강한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갑시다.

  6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날을 소망하며 그 때까지 변함없이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자랑하며 기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란 의미입니다.

  하나 하나 의미를 보면,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언제 어느 때에 오실 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세상은 심판을 받고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날이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고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우리 역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 소망이 있기에 이 땅에서 더욱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그 소망이 있기에 더욱 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에 힘쓰게 됩니다. 그 소망이 있기에 더욱 더 신앙생활에 힘쓰고 주님 닮아가고자 하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라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한 확신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악귀를 막아내고 복을 불러온다고 믿는 그런 부적과 같은 것 아닙니다. 그저 일신상의 안위나 부귀영화를 위해 믿는 것 아닙니다. 단순히 괜찮은 신앙 하나 가지고 사는 그런 믿음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통치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리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능력주시고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 가득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닮은 사람되게 하시는 성령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놀라운 믿음이고 능력이 있는 믿음이고 권세 있는 믿음입니다. 나약한 믿음이 아닙니다. 샤머니즘 같은 저급한 믿음이 아닙니다. 악세사리와 같은 장식용 믿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믿음이고 능력과 권세가 있는 믿음이고 능히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고 능히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룰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고 더욱 더 주를 위해 살아가라는 겁니다.

  셋째로는 그 믿음을 자랑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자랑하지 못합니다. 기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숨깁니다. 부끄러워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고 능력과 권세 있는 믿음이며 영광스러운 믿음입니다.

분명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자랑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그렇게 자랑하며 기뻐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리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자랑하고 기뻐하는 것 아닙니까?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
고 나에게 복주시고 나를 향한 거룩한 뜻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것, 그것이 곧 전도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자랑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신나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시고 자랑해 보세요. 아침마다 피곤함과 짜증으로 시작하지 말고, 그저 타성에 젖어 억지로 시작하지 말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복주시고 나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까 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보세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키부츠에서도, 사람들을 만날 때도 그런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해보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 순간마다 예수님 생각하면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뻐하고 자랑해보세요. 확신하건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됩니다.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렇게 되요. 하지만 내가 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나를 사랑하시고 힘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늘 기대하고 기뻐하고, 오늘도 나에게 무슨 은혜를 주시고 무슨 일을 행하실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정말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두 주전에 새롭게 온 청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눔을 가졌는데, 이런 기대와 기쁨을 가지고 사는 형제와 자매가 있더라고요.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던지... 자기는 날마다 기대가 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은혜 받고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고 기뻐하고 자랑해보세요. 그러면 신앙의 차원이 틀려지게 됩니다. 10년을 믿어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신앙인 사람이 있고요, 그저 관심은 일신상의 안위와 부귀영화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매 순간 순간마다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으로 인해 기뻐하고 자랑하는 삶은 산다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삶의 바뀌고 우리의 삶 가운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그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자랑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고, 더욱 더 아름답고 건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예수님을 가리켜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했을 때는 대제사장이 했던 일과 관련있다는 말인데, 대제사장은 어떤 일을 했던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죄의 은총을 구했던 사람이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했을 때는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이신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 땅의 대제사장은 불완전한 죄인으로 완전한 중보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제사장 예수께서는 완전한 중보자이십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는 중보자가 필요했으며, 그 중보자는 참 사람인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즉,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르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심으써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사람의 몸을 입으신 참 사람이셨지만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시기에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죄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이 말은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성전이십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거룩하심이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성전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 당하신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성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며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어린 양'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집은 세워집니다. 우리가 믿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우리 서로가 한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Royal Family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세워진 하나님의 집은 더욱 더 확장될 것이며, 견고하게 될 것이고,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이 되면 더욱 더 완전하게 세워져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단순히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설명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집을 세워가시는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면서 온 만유를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쉬지 않고 계십니다.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만나는 그 어떠한 환난이나 핍박, 유혹과 회유의 풍랑 속에서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확신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십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궁핍하고 절박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분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으십시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자기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죽기까지 충성스럽게 수행하신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 예수님께 여러분들의 눈을 고정시키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 가운데 당신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주시고, 능히 세상을 이기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지기 8 : 예수 그리스도 4
2008년 4월 19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히브리서 4:14-16

지난 주에 이어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질문좀 할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굴까요? 바울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히는 모릅니다. 수신자는 누구일까요? 히브리인들. '히브리인들에게'라는 제목이 붙여있는 서신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로마에 있었던 유대인 신자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유대인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유대인 신자들에게 익숙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 성경이고 유대교적인 문화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희생제사입니다. 희생제사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속죄입니다. 그 속죄의 의식을 누가 하는가하면 대제사장이 합니다.

물론 희생제사가 불완전한 것이고 대제사장 역시 불완전한 중보자였지만,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희생 제사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그 중심적인 것이었고, 온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어 속죄의 중보를 하던 대제사장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진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복음을 버리고 다시 옛날의 상태, 즉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는 다니지만 복음에 대해 제대로 확신을 갖지 못하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신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하고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들이 자꾸만 예전의 성전 희생제사를 생각하면서 여전히 죄의식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불분명한 믿음을 유대교가 찌르고 들어오니까 더욱 흔들렸던 겁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들을 보면 당시 유대교에서 교회를 교리적으로 공격했었습니다. 지금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메시아닉 유대인들에 대해 유대교에서 집요한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박해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러한 와중에 복음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없는 연약한 신자들이 복음을 버리고 옛 것으로 다시금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러한 유대인 신자들에게 쓰여진 서신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실제로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 믿음이 흔들리고 복음에서 떠나는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모를 때 우리는 흔들릴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단에 빠지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대로 알면 그렇게 되지 않거든요. 더불어 박해가 있을 때, 고난이 있을 때, 유혹이 있을 때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고 그 믿음에 굳건하게 서 있으면 어떠한 이단적인 가르침이 있다할지라도, 또 어떠한 고난과 유혹과 박해가 있다 할지라도 결코 흔들리거나 넘어지거나 배교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책의 본론에 해당하는 첫부분에 이 책의 결론이자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이 바로 히브리서의 결론이자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아주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알고, 그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으라는 말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흔들립니다. 확신이 없으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는 겁니다. 확신이 없으면 누가 이러더라 하면 그런가 하고, 누가 이러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면 혹시나 해서 흔들리는 겁니다. 분명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지난 주에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말씀인 3:1절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3:1절도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4:14의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와 3:1의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 두 말씀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믿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그분께서 나를 위해서 하신 일과 하시고 계신 일과 앞으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믿음 안에 굳게 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조건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 깊은 묵상과 공부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안에는 예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돈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돈에 대한 욕심과 염려로 채워지게 됩니다. 사람에 대해 안좋았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채워지게 됩니다. 권력과 명예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과 명예만을 채우기 위한 욕심과 계획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생각하는 대로 채워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는 사람은 그 인격과 영혼과 삶에 예수님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이 어찌 예수님에 대해 소홀해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예수님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오고 예배의 자리에 있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과 삶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예수님이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과 삶에 자리잡고 계십니까?

  정말이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인격과 삶을 예수로 채우십시오. 그리하여 단순히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확신이 아니라 전인격과 삶으로 확신하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예수, 우리가 굳게 잡아야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에 대해 히브리서 저자는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만 해도 이미 제사장 그룹에서는 최고의 지위인데 그 앞에 '큰'이란 말을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레위지파 계열의 대제사장 보다 훨씬 더 탁월한 사역을 하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찌 불완전하고 죄인인 대제사장과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비교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사역이 대제사장이 하는 사역과 같으면서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성과 탁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고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대제사장이 하는 중요한 사역이 바로 속죄입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을 대표해서 지성소에 들어가 그곳에서 피를 뿌려 상징적으로 백성들의 모든 죄들을 속죄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면서 죄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먼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의식을 치뤄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자신이 죄인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피를 다 뿌리기까지 그곳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을 것을 대비해서 옷에 방울을 달고 끈을 달고서 말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을 어찌 완전한 속죄라고 할 수 있으며, 대제사장을 어찌 완전한 중보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물의 피로는 결코 온전한 속죄를 얻을 수 없고 죄인된 인간으로서는 결코 완전한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피를 가지고 우리의 죄를 씻기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시면서 또한 죄없으신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속죄하셨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영접하면 모든 죄가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이고 값없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은혜입니다.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가 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굳게 잡아야 하느냐? 이는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해력과 긍휼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의미인데,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신앙고백적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이른바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셨고, 인간처럼 우시기도 하시고 고통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신관이나 철학에 따르면 대단히 놀라운, 아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신화에서는 신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신이 불완전하고 하찮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통하는 주체는 인간이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고통 혹은 수난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passion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passive라는 단어와 어원적으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즉 고통이나 수난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능동적으로 고통을 행한다, 수난을 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고난주간을 영어로 passion week라고 합니다. 이 절기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고난을 당하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고난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수동적인 고난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인 고난입니다. 로마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사람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지만, 실제로는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을 택하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고난이었고, 마굿간에 태어나신 것 자체가 고난이었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신 것 자체가 고난이었고, 결국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고 스스로 그 고난의 길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 사랑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게 하셨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게 만든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이것이 가히 혁명적인 일인데,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죄인된 피조물이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요,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실 만큼 엄청난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계시다는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으며 가난하다고 느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17에 보면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즉, 성육신은 진짜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의 사람에 가까웠다거나 혹은 사람처럼 보였다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의 성육신을 교묘하게 부인하거나 약화시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였고,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시기에 죄는 없으셔도 예수님은 진짜 사람의 몸, 마음 그리고 정서를 소유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본래적인 약점과 연약함을 소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른처럼 걷기 전에 아이처럼 걸어야 했고, 세상 학문을 배우셔야했고, 어른처럼 생각하고 말하기 전에 아이들처럼 생각하고 말하셔야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을 걸은 다음 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우렁찬 목소리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선언을 했다고 하지요?

온 우주에 자기만 존귀한 자란 말인데, 인간인 자를 신격화하려니 이런 말이 나온 겁니다. 모든 신격화된 설화에는 태어났을 때나 어렸을 때 이런 유형의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기에 인간이 가지는 모든 한계와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셨고 복음서는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약점과 연약함을 소유하셨다는 이 사실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성경에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개역한글 성경이 훨씬 더 뜻에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실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한자로 보면 몸소 체험함으로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제외한 모든 인간적인 약점과 연약함을 가지고 이 땅에 사셨고 친히 체험하셨기에 우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C.S.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혹에 저항하는 사람들만이 그 유혹이 얼마나 강한가를 안다. 결국 항복해서가 아니라 전투를 해 보아야 당신은 독일 군대가 얼마나 강한 지를 알게 된다. 오분 후에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은 한 시간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대한 경험도 그 누구보다 크게 하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사람은 유혹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모르고, 또 그 유혹에 넘어갔을 때와 그렇지 않고 이겨냈을 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한 번도 굴복하거나 항복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유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온전히 아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18에서 말씀하기를 "자기가 유혹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유혹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역설적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으셨으나 그 유혹에 한번도 굴복하거나 항복하지 않으셨고 그 유혹으로 인해 죄를 짓지 않으셨기에 우리를 깊이 이해하실 수 있고 도우실 수 있다는 겁니다.

  자신이 유혹을 받아 넘어진 사람은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 위로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로가 깊은 위로가 되지 못하고 해결책은 주지 못합니다. 그저 동병상련일뿐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이겨낸 사람은 차원이 다른 위로를 줄 수 있고 나아가 구체적인 해결책을 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 성경에는 긍휼, 자비, 연민, 인애 등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중에 'רחם'(레헴)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לחם'(레헴, 빵을 의미)이라는 단어와는 다릅니다.

어쨌든 이 단어는 여인의 자궁 혹은 사람의 내장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우리 말에도 극도의 슬픔을 표현할 때 '단장의 슬픔' 혹은 '애가 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표현할 때 바로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사랑인데, 마치 어미가 자신의 자궁 속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순간 죽음의 고통을 넘어 그 생명체로 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고, 그리고 다시금 품에 안아 젖을 먹여 양육하여 온전한 인간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한 긍휼을 바로 이러한 모성적인 본능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실까? 긍휼히 여기신다면 어떻게, 어디까지 그렇게 하실까? 상상하신 적이 있나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 사랑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어미가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몸으로 느끼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느끼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육신과 인생이라는 악기를 철저하게 마스터하셨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어머니의 심정으로 몸소 느끼시면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십시오. 진정한 위로가 필요합니까?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연민과 긍휼이 필요합니까?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하늘의 은총이 필요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들의 모든 약점과 연약함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여러분들의 모든 연약함을 몸소 느끼시며 이해하시는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여러분 위에 충만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16절)

여기서 '담대히'라는 말은 단순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그 원어적인 의미를 보면 '다른 사람과 자유스럽고 공개적으로 하는 말'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당시 노예제도가 있었던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자유스럽고 공개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로마 시민일 때 가능합니다. 노예나 피지배민족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자유로운 시민에게 해당되는 말을 쓴 이유는 우리가 곧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한 신분이기에 당연히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나아가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숨김없이 쏟아놓되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노예로서가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담대하게 자유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놓는 기도를 우리가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대제사장조차 지성소에 들어갈 때 온갖 망설임과 두려움과 주저함을 가졌다는 것을 기억하면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이고, 우리가 받은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를 자유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늘의 시민이 되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영접하면 이러한 자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자유함으로 예배하고 무엇이든 다 쏟아놓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솔직하게 자유하게 확신있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할 두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는 긍휼하심을 받기 위함이고 둘째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긍휼은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이며 또한 과거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여러분들의 죄가 있습니까? 실패의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까? 넘어지고 깨어졌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당신의 부끄러운 허물과 상처를 덮을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한 시라도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때는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돕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왜 날마다 매 순간 기도해야 합니까? 매 순간 매 순간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그 때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때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입니다. 나의 시간과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시간,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완벽한 때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답답하고 현실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계획하신 하늘의 때를 기다리며 구하십시오.

그럴 때 가장 완벽하게 가장 적절하게 가장 필요한 때에 하나님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는 은혜의 보좌가 늘 있습니다. 그 은혜의 보좌가 있음에도, 그 앞에 나아갈 수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의 유혹과 역경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은혜의 보좌 앞에서 떠내려 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연약함을 가지셨고 모든 유혹과 시험을 당하셨으나 이겨내시고 죄가 없으신 그 예수님, 그러기에 능히 우리를 어머니의 같은 심정으로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실 수 있는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오라 하십니다.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욱 자유함으로 솔직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은혜와 축복이 넘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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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1 출애굽기 흘림이 좋으면 흐름이 좋다 출20:1-5  강문호 목사  2013-05-31 2565
9150 사무엘하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삼하3:1  강문호 목사  2013-05-31 3588
9149 출애굽기 조상의 죄 때문에 기도하라 출20:5  강문호 목사  2013-05-31 3037
9148 누가복음 고백할 때마다 성장한다 눅5:1-11  강문호 목사  2013-05-31 2442
9147 출애굽기 나는 애굽에서 피라미드만 쌓다 갈 존재인가? 출1:1-7  김경형 목사  2013-05-31 1794
9146 잠언 성도가 지녀야 할 마음 잠4:23  한태완 목사  2013-05-31 2477
9145 누가복음 현명한 재물관 눅12:13-21  김홍도 목사  2013-05-30 1934
9144 마태복음 주의 마음으로 마25:31-46  신윤식 목사  2013-05-29 1862
9143 마태복음 종의 비유 마25:26-30  신윤식 목사  2013-05-29 1718
9142 마태복음 깨어 있으라 마25:1-13  신윤식 목사  2013-05-29 2244
9141 마태복음 종말 마24:3-14  신윤식 목사  2013-05-29 1844
9140 마태복음 차별 없음 마23:1-12  신윤식 목사  2013-05-29 1717
9139 마태복음 다윗의 주 마22:41-46  신윤식 목사  2013-05-29 1570
9138 마태복음 사랑 마22:23-33  신윤식 목사  2013-05-29 1348
9137 마태복음 신자의 하나님 마22:23-33  신윤식 목사  2013-05-29 1603
9136 마태복음 어떻게 살것인가? 마22:15-22  신윤식 목사  2013-05-29 2148
9135 마태복음 천국은? 마22:1-14  신윤식 목사  2013-05-29 1815
9134 마태복음 머릿돌 마21:42-46  신윤식 목사  2013-05-29 1725
9133 마태복음 악한 농부 마21:33-41  신윤식 목사  2013-05-29 1839
9132 마태복음 회개 마21:28-32  신윤식 목사  2013-05-29 1886
9131 마태복음 저주 받은 나무 마21:18-22  신윤식 목사  2013-05-29 1783
9130 마태복음 나귀 타신 예수 마21:1-11  신윤식 목사  2013-05-29 2375
9129 마태복음 은혜의 나라 마20:1-16  신윤식 목사  2013-05-29 1708
9128 이사야 삶에서 얻는 교훈 사20:1-6  최장환 목사  2013-05-29 2942
9127 예레미야 꼭 필요한 사람 렘17:1-11  최장환 목사  2013-05-29 3313
9126 출애굽기 애굽의 생산 방해작전을 아십니까? 출1:8-14  김경형 목사  2013-05-28 1859
9125 시편 복의 통로가 되세요 시1:1-6  류공석 목사  2013-05-27 2587
9124 시편 복 있는 사람이 되세요 시1:1-10  류공석 목사  2013-05-27 2409
9123 출애굽기 홍해를 건넘같이 출14:10-20  류공석 목사  2013-05-27 2441
9122 빌립보서 그리 하실 수 있었던 까닭 2 빌2:5-11  류공석 목사  2013-05-27 1488
9121 빌립보서 그리 하실 수 있었던 까닭 1 빌2:5-11  류공석 목사  2013-05-27 1845
9120 마태복음 껍데기 성탄절은 가라! 마2:1-12  류공석 목사  2013-05-27 2446
9119 에배소서 내가 기도할 때에 엡1:15-19  류공석 목사  2013-05-27 2196
9118 마태복음 하나님과 친해지기 9: 좋은 밭 되기 마13:3-9  류공석 목사  2013-05-27 2101
» 마태복음 하나님과 친해지기 5-8 : 예수 그리스도 마16:13-16  류공석 목사  2013-05-27 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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