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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1:1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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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내가 기도할 때에"
2007년 11월 24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 에베소서 1:15-19
많은 분들이 사도 바울을 존경합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했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신앙의 인물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저 역시 사도 바울을 존경하는데, 저는 목회자의 측면에서 사도 바울을 보며 그의 목회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보면 볼수록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위대하고 훌륭한 목회자란 요즘 사람들의 판단처럼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그 양들을 마음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며 순전한 말씀으로 먹이며 목회하는 목회자, 그리고 주님의 몸되신 교회를 세워나가기에 모든 수고와 헌신을 다하되 결코 자신이 주인됨을 주장하지 않는 목회자, 그 가슴에 주님 사랑과 영혼 사랑의 뜨거움이 있는 목회자, 그런 목회자를 말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의 목회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아시겠지만 편지마다 그는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고 했는데, 이것이 사도 바울의 위대함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만났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듣게 된 교인들을 위해서도 항상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저같은 경우는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물론 성도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동안 만났고 알아왔던 모든 성도들을 항상 기억하며 기도하지는 못합니다.
지금도 저와 교제를 나누고 있는 분들이나 혹은 어려움에 있음을 아는 경우, 혹은 생각나는 분들이거나 기도 요청을 한 분들을 위해서는 거의 빠지지 않고 기도하지만, 제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놓고는 기도하질 못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들은 사람들까지 기억하며 기도할 때마다 그 이름들을 불러가며 중보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추측이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상당한 분량의 기도 노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기억력이 뛰어나서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의 리스트를 입력해 두어 기도를 시작하면 그들을 위한 기도가 줄줄 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가끔 보면 이런 기도 노트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에 어는 자매의 기도 노트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꽤나 꼼꼼하게 기도노트에 사람들의 이름과 기도제목들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기도노트를 만들어 보십시오. 자신의 기도제목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분들의 기도제목을 노트나 수첩, 다이어리에 적어서 기도에 활용해 보십시오. 기도의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러분들의 기도가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 확대되는 기도의 영역과 내용이 훨씬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의 기도 노트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일부인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에서 우리는 우리가 중보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첫째로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15-16절,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이 감사하고 있는 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참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 안에 있는 긍정적인 면을 잘 찾아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면이나 단점이나 약점을 찾아내는데 거의 천재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려면 마치 시험 감독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위축되고 답답함을 느낍니다. 사람의 부정적인 면이나 단점만을 보는 사람과는 제대로 교제를 나누고 마음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인격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사람 안에 있는 긍정적인 것으로 사람을 보기 마련입니다.
한 사람이 가진 장점은 그 사람의 세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창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장점을 볼 때 그 사람과 마음을 열 수 있는 교제가 가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장점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나쁘고 부정적인 면이나 단점만 보지 말고, 좋은 점, 긍정적인 면과 장점을 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럴 때 서로의 마음이 열려지고 교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장점과 긍정적인 면들을 부각시키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더욱 주님을 향한 깨끗하고 굳은 믿음을 갖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고 봉사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인정해주고 기도해 줌으로써 더욱 믿음과 사랑의 생활을 열심히 해나가길 격려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눈과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열 가지를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몇은 실수를 하고, 몇은 단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만을 지적하면 그 사람은 그나마 잘 하던 것도 잘 못하게 됩니다. 의기소침하게 되고 상처를 받습니다.
하지만 잘 하는 몇 가지를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계속해서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면 정말 그렇게 되어서 잘 해낼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잘 해내게 됩니다.
이것은 자녀 교육에서도 증명이 되는 원리입니다. 단점을 지적받고 자란 아이는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기 쉽지만, 칭찬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감있고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장점을 보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기도해주는 그 자체가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들이 잘하고 있는 것들, 긍정적인 면들과 장점들이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더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 역시 격려에 능하고 칭찬에 능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잘하고 있는 모습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두 번째 내용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즉,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달라는 것입니다. 왭니까? 17-19절까지가 그 이유입니다.
17절을 보면 우선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착각 중에 하나가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철학이고, 종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극히 제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면 성령께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셔서 깨달음을 주실 때 가능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훌륭한 설교를 듣고, 신학서적으로 읽었을지라도, 그 위에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아무런 감동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생기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 참 기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거나 혹은 설교를 준비할 때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깨우쳐주시기 전까지는 성경을 읽어도 별로 기억에 남질 않습니다. 묵상할 때도 깊이 있는 묵상이 되질 않습니다. 설교 준비도 힘듭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조명해주시고 깨달음을 주시면 얼마나 말씀이 새롭고 은혜가 되고 풍성해지는지 모릅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기도하려면 힘들어요. 하지만 성령께서 임하셔서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면 얼마나 즐겁고 깊게 기도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오셔서 조명해주시고 기름 부어주시고 인도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오셔서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식하면 용감한 것이 아니라 망합니다. 죽습니다.
호세아 4:6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망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제임스 패커는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즉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겁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7절 상반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저 두려운 하나님, 역사 속의 하나님, 혹은 종교다원주의에서 말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알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 다원주의다 해서 타 종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더욱 힘써 예수 안에 거해야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생기는 기쁨은 정말 좋습니다. 황홀합니다. 행복합니다. 말로만 듣고 머리로만 알았던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인정이 되고, 내 마음과 삶에서 참으로 깨달아질 때 생기는 기쁨은 정말 황홀합니다.
그럼 저절로 찬양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예배하게 됩니다. 그 지식과 깨달음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더 하나님을 알고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이러한 거룩하고 황홀한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영광의 아버지’라는 표현인데, 영광하면 사람들은 보통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갈채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영광은 원래 깨끗한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것보다 더 깨끗하면 빛이 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신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지닌 개념은 자기 안에 있는 자아의 투영입니다. 그래서 보통, 신이라면 지저분하고 질투와 욕심이 많습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그렇고 무당들이 믿는 신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도 정결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표현도 그분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천사조차 그 앞에서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정결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분이 우리를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정결한 사랑이며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사랑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순도 100%, 아니 그 이상의 깨끗함으로 우리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저들에게 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내 정욕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에 이끌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순하고 정결한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부어주소서. 나의 어둡고 닫혀지고 무뎌진 마음을 성령이여 오셔서 녹여주시고 열어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이런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18절에 있는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셔서 우리의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우리의 흐릿한 영의 눈이 밝아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8절에 보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부르셨습니다.
멸망에서, 죄 가운데서, 시험과 환난을 당한 데서, 가난과 궁핍에서, 온갖 저주에서 우리를 다 불러서 궁핍한 자는 부요하게 하시고, 병든 자는 낫게 하시고, 멸망 중에 있는 자는 구원받게 하시고, 시험 중에 있는 사람은 보호해주시기 위해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꾼으로 우리를 불러주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내 어두운 마음을 밝히시고 내 어둡고 희미한 눈을 밝게 하옵소서. 그래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그래서 소명이 있는 자, 사명이 있는 자, 인생의 목표와 비전이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란 무슨 뜻입니까? 기업은 상속물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을 말합니다.
한번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으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복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놀라운 복과 은혜를 약속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어떻습니까? 이 약속하신 복들을 얼마나 기억하며 사십니까? 얼마나 누리며 사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기억하면 이 땅에서의 잠시 잠간의 고난과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부유한 자로 살 수 있고 강한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설령 내가 가난하고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부유한 자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요셉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고, 또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요셉은 그 상황을 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꿈을 보았고 약속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대로 그 꿈을 이루어주셨고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아침에 가족과 전 재산이 다 날라가버리고 자신도 극심한 피부병에 걸려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그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십니까? 여러분들이 가진 것만 주목하십니까?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과 실패만 보십니까? 그래서 나는 있는 것이 없다고, 내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너무 힘들다고, 그렇게 슬퍼하고 한탄하고 주저앉아 있습니까?
무엇을 봐야 합니까? 기도하십시오. 주님께 부르짖으세요. "하나님, 내 마음의 눈을 밝히사 택하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그 풍성한 복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그것에 나의 두 눈이 고정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부유한 자로 사시고, 강한 자로 사시고, 행복한 자로 사시고, 부름받은 자에 합당한 삶으로 사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는 마음의 눈을 밝히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가를 알기를 원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이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모든 역사는 예수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 안에서의 능력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능력이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는 능력입니다. 예수 안에서 참된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서 참된 소망과 참된 응답이 이루어지고, 예수 안에서 열매가 맺혀지고, 예수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는 능력이 나오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이 능력을 알기 원하시고, 이 능력을 마음껏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셔서 나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고,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의지하게 하시고, 내게도 그 능력을 주셔서 능히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게 하옵소서!’
말씀을 정리합시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더욱 더 깊어지고 풍성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둘째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과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지,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기도는 단지 에베소 교인들에게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해야 할 내용이고,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들의 기도에 빠짐없이 드려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더욱 더 풍성하고 능력있고 은혜가 넘치는 성도가 되고, 그런 공동체가 되길 우리의 능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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