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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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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껍데기 성탄절은 가라!
2007년 12월 8일(토) 텔아비브욥바교회, 대강절 둘째 주일 및 하누카
본문 : 마태복음 2:1-12
전에 예루살렘에 살 때, 우리집 욕실 한켠에 책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책장 중간 단쯤에 전동칫솔이 고정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칫솔을 꺼낼 때마다 눈에 띄는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꽃혀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책제목이 상당히 강렬합니다. 책 제목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이 다른 사람과 공저한 책인데, 제 개인적으로 유진 피터슨의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목회신학에 대한 책이라 구입을 했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한국에서 목회할 때 아내가 그 책 제목을 보더니 저에게 힐긋 이러더군요. "하림아빠,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데?"
'기가 막혀서... 마누라가 이제는 못하는 말이 없구만...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속으로 생각하면서 못 들은 척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가까이 와서 제 얼굴을 빤히 보면서 "여보, 있잖아,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이 껍데기 사모야!" 그랬어요.
저희 부부 이렇게 삽니다. 서로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 당시 저의 상태가 그리 썩 좋지 않아서 상당히 찔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목사이고 사역이 있으니까 주어진 일은 했지만 교회내의 안좋은 일들로 그 교회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 때였고 '이 교회에 계속 있어야 하나'하는 갈등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일들은 어찌어찌 했는데 그 이상은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목사로서의 영성도 눈에 띄게 흐트러진 것이 사실이었고요. 아내가 그걸 모를리가 없지요. 책 제목을 보고 장난끼있게 그런 말을 한 것인데, 저에게는 상당히 강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전에 그 책 제목을 보면서 성탄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하누카죠? 우리가 하누카라는 이스라엘 절기 가운데 있지만, 교회력으로 보면 지금이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강절 둘째 주일이고, 이제 얼마 있으면 성탄절 아닙니까?
이 책을 보면서 그는 생각이 '아, 맞다! 성탄절도 껍데기 성탄절일 수 있겠구나!'생각을 했습니다. 성탄절을 성탄절 되게 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껍데기뿐인 성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세상을 보십시오. 진정한 성탄절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한국에 있을 때를 기억해보면 해마다 12월이 되면 백화점을 중심으로 화려한 장식도 하고 캐럴도 들을 수 있는데, 정작 예수님과는 별로 상관없는 성탄절, 오히려 산타클로스가 주인인 것으로 여겨지고, 그저 하나의 휴일정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 이스라엘에 와보니까 분명 이 땅은 성탄의 현장인데, 전혀 성탄과는 관계없이 이 계절이 지나가더군요. 다만 하누카란 절기가 성탄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쟁중'이라고 합니다. 즉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탄절은 특정 종교의 교주가 태어난 날이므로 교주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름을 크리스마스 대신에 'happy holiday'로 부르자고 주장하는데, 지금 백화점이나 많은 마켓들, 심지어 인터넷 마켓까지도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반면 이들과 이에 맞서 크리스마스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이들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청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세운 나라, 청교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미국이 지금 그 모양이니 다른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탄의 현장인 이스라엘에서도, 청교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미국에서도, 천만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자랑하는 한국에서도 성탄의 참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지고 그저 즐기거나 하루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보내는 휴일 정도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 그러니까 첫번째 성탄절 때도 이러한 현상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한 구절이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 :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헤롯을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다른 헤롯들, 사실은 그의 아들들인데,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 '대헤롯'(Great Herod)이라고 부릅니다. 헤롯가문이 신약성경에 등장하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안티파테르 덕분입니다.
안티파테르는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 출신, 즉 에돔 출신이었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왕조였던 하스모니안 왕가 내의 권력다툼에서 줄서기를 잘 해서 권력을 쥐게 됩니다.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차남 헤롯에게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얼마후 아버지가 정적에 독살되고, 얼마 후에는 대규모의 파르시안 유목민들이 쳐들어 오면서 헤롯의 형까지 살해 당하게 되고, 헤롯만 가족을 이끌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헤롯은 가족들을 사해 변에 있는 천해의 요새 마사다에 남겨놓고 자신은 이집트로 갑니다.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 클레오파트라의 주선으로 로마로 가게 되고, 당시 로마의 권력을 두고 경쟁을 했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두 사람의 눈에 들어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대지방의 왕으로 임명이 됩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땅도 없었지만 로마는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해주었고, 2년후에 그는 이 땅에 들어와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마침내 유대의 왕이 되고 맙니다. 권력을 잡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이겨냈고 정적들과의 전쟁을 치뤘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잡은 정권이고, 유대인이 아니기에 항상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차에, 느닷없이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헤롯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해서 차지하고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데... 그 자리를 뺏을 아기가 태어났다니' 이건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위협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러한 말로 헤롯 뿐만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있었지만, 그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합법적인 왕의 후손도 아니었고, 더욱이 유대인이 아닌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러던차에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고 술렁 거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동하고 그 이후에 아무런 행동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그렇다치고, 헤롯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라면 적어도 그 진위를 알기 위해서라도 박사들을 만나거나 박사들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 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저 술렁거리고 그저 당황하고 그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의 소문으로, 하나의 흥미있는 가십거리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헤롯과 그의 무리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원하는대로 했지요.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싹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말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고 했지만 실상 그들이 원했던 것은 경배가 아니라 제거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성탄절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물론 첫번째 성탄절 때 이런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귀한 예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경배했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군천사들로부터 주 나신 소식을 듣고 달려가 경배했습니다.
또한 얘수님께서 태어나신 지 팔일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은 평생을 기다려온 메시아를 보고 경배하게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첫번째 성탄절에는 두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 더 보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이것은 지난 2천여년 동안 2천번이 넘게 맞이한 성탄절을 통해 동일하게 있었던 일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때쯤 되면 소동하는데, 뭔가 있는 듯이 술렁이고 바쁜 것은 같은데, 속을 보면 전혀 예수님과 상관없는 술렁임이고 소동입니다. 또한 이천년 전처럼 전혀 무관심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켠에서는 조용하지만 성탄의 참 의미를 되새기며 인류의 구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경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절기상으로는 대강절 둘째 주이고, 이제 보름쯤 후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날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술렁입니까? 술렁인다면 어떤 술렁임입니까? 조용하고 차분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조용함 차분함입니까?
아니,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물어서, 여러분들에게는 성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참 의미를 아는 그래서 기다려지고 주님께 기쁨과 감사로 경배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매년 연말에 다가오는 휴일, happy holiday로 다가오거나, 이스라엘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듯이 여러분들도 그러하십니까?
결국 성탄은 우리의 자세에 따라, 우리의 마음에 따라 참된 성탄절로 다가올 수도 있고, 껍데기 성탄절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의미의 성탄입니까? 이것을 이스라엘의 절기인 하누카(חנוכה)와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전 2세기 중반에 시라아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렸던 셀류쿠스 왕가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치세 때였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헬라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헬라화된 유대인들(헬라파 유대인)과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유대인들(민족주의 유대인)간의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로인해서 야기된 사건이 바로 성전을 더럽힌 사건입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생략 하겠고, 에피파네스가 최후의 조치로 내린 칙령들이 있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자신의 헬라화 정책을 거부하며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그들의 종교에 있다고 판단을 한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특혜들을 폐지하고 사실상 유대교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하게 됩니다.
구약 외경 중에 하나인 마카비 1서 1장 후반부터와 2서 6장에 따르면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칙령들을 내렸습니다. 정기적인 희생제사는 물론이고 안식일과 전통적인 절기를 지키는 것도 금지했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라고 명령했고, 어린이들의 할례를 금지했고,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교 제단들이 유대 땅 곳곳에 세워졌고, 그 제단들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고, 먹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이 그 끝을 보게 되는데, 바로 주전 167년 12월에 제우스 신의 제사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게 되는 것입니다.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이 성전 안에 세워졌고, 그 제단 위에서 돼지고기가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 11:31에서 말하고 있는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 "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곧바로 온 유대는 무장 봉기로 들끓게 됩니다. 그중 가장 주도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다 마카비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에 개선하여 더렵혀진 성전의 정화작업을 착수하게 됩니다. 제우스 제의에 씌였던 기구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더렵혀진 제단도 부수워 버렸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성전이 모독된 날로부터 꼭 3년이 되는 주전 164년 12월, 정확하게는 유대력으로 키슬레브 월(12월에 해당) 25일에 축제의 큰 기쁨 가운데 성전은 다시 봉헌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전을 재봉헌했다는 의미가 바로 '하누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때는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구별되어 거룩하게 세워진 성전이라도 할지라도 그것이 더렵혀지고,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곳으로 사용될 때 그곳은 더 이상이 성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르켜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과 그분의 말씀이 거하시기에 우리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정말 성전입니까? 정말 성전으로서 합당한 모습이냐 그 말입니다. 아니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때처럼,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던 그 때처럼, 더렵혀진 성전으로 있지는 않습니까?
성전은 정결하게 유지되어야하고 구별되어 거룩함으로 유지되어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성전이 더렵혀지면, 성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닌 다른 더러움이나 음란이나 우상으로 채워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구절을 대할 때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기도합니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내 생각이 나의 무지함이나 교만으로 인한 착각은 아닌지, 행여 내가 성전으로서의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라면 긍휼히 여기사 나를 정결케 해주시고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유다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성전을 정화했을 때 일어났던 일을 우리는 압니다. 성전을 정화할 때 성전을 밝히기위해 따로 준비된 오염되지 않은 기름, 올리브 유가 하루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하루치의 기름으로 여드레 동안, 팔일 동안 불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누카 때는 촛대를 칠지 촛대인 '메노라'를 쓰지 않고 특별히 아홉개의 줄기가 있는 촛대를 쓰고 그것을 '하누키야'라고 합니다. 이것을 기념해서 지금도 하누카는 팔일 동안 지키는데 날마다 불을 밝히게됩니다. 그래서 하누카를 다른 말로는 "빛의 절기", 혹은 "광명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하루치 기름으로 팔일 동안 불을 밝혔는데 왜 촛대의 줄기가 아홉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아실 겁니다. 보통 가운데에 있는 줄기인데, 제일 깁니다. 그 가운데 있는 촛대의 이름을 "샤마쉬(שמש)"라고 하는데 그 뜻이 "종,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 촛대를 제일 먼저 밝히고 그 촛대로부터 차례 차례 점화되어 절기가 끝나기 전에 모두 점화됩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촛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누카가 성탄절과 얼마나 유사한 지를 알게 됩니다. 이 두 절기는 모두 이 땅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두 절기 모두 같은 날짜입니다. 비록 하누카가 음력인 유대력으로 지켜지기 때문에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만 유대력에 따르면 성탄절과 같은 날짜입니다.
또한 이 날에는 특별한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성탄 캐럴을 부르고 유대인들은 하누카와 관련된 노래를 부릅니다. 두 사건 모두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두 절기에는 모두 빛이 밝혀집니다.
또한 두 절기에는 '종'(servant)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데, 하누카 때는 중앙에 있는 촛대인 "샤마쉬"가(종을 의미), 그리고 성탄절 때는 고난의 종이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중심에 계십니다.
결국 하누카는 성탄절을 상징적이고 예표적으로 보여준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유대교 랍비들이 모르고 있거나 알더라도 거부하고 있을 뿐이지요.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의미는 바로 '빛'이라는 겁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 팔일 동안 빛이 비추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하누키야에 있는 제일 긴 중앙의 촛대인 '샤마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8:1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2:32에서는 예수님을 가르켜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누카의 촛대 하누키야의 중앙 줄기인 "샤마쉬"가 다른 모든 줄기를 점화시키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 즉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 영접하여 믿는 모든 사람에게 빛으로 들어오실뿐만 아니라 빛을 부여해 주십니다.
빛이 무엇입니까? 빛은 어두움을 내어쫓습니다. 빛은 더러움을 밝히 드러내줍니다. 그래서 그 더러움을 보게하고 부끄럽게 하고 그것을 쫓아냅니다. 빛은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빛은 생명을 주고 정화시키며 치유해줍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셨고, 지금도 행하시고 계십니다.
더렵혀진 성전이 다시 성전으로 회복되는데 빛이 필요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역시 성전으로 회복되고, 성전으로 살아가고 성전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빛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이 필요하고 그분의 능력있는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으로 살아계셔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목사이고 집사이고 성도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 안에 빛되신 예수님이 없고, 그분의 말씀이 없고, 그분의 영이 없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하는 삶의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고,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 역시 껍데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껍데기 성탄절이 아닌 참된 성탄절로 맞이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참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지금의 흐트러지고, 더렵혀지고, 메말라버리고, 미지근하며 아무런 감동도 의미도 없는 모습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무감각해지고 변화되지 못한 그런 모습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안에 다시금 빛되신 예수님을 모시어 그분의 빛으로 우리의 더러움과 어두움을 내어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분의 빛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영적 무감각과 모든 죄악을 쫓아내고 치유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성전으로 회복될 수 있고, 참된 성탄의 의미를 알아 기쁨과 감사로 예수님을 맞이하며 경배할 수 있습니다.
설교 서두에 껍데기 목회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말인 알맹이 목회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임지, 좋은 사례, 교회가 커지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것. 속된 말로 뜨는 것? 아니죠.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은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확고한 소명의식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확고한 소명의식만 있다면 임지가 않좋아도, 사례가 안좋아도, 세상적으로 주목받지 못해도, 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소명의식만 확고히 살아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참된 목회자로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자리에 올라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행함으로써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기쁨이 곧 종의 기쁨입니다. 종은 주인의 양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합니다. 종은 주인의 집을 목숨을 다해 관리하고 이끌어갑니다. 왭니까? 주인이 종을 사랑하고 있고, 종도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목회자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껍데기 목회자로 서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목회를 하던 주님의 종으로 묵묵히 맡겨주신 사명들을 감당하는 알맹이 목회자,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참된 목회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바램은 모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뿐인 성도, 그 안에 빛도 없고 말씀도 없고 순종의 삶도 없는 성도는 껍데기 성도에 불과합니다. 알맹이 성도, 참된 성도라고 할 때는 그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하고 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아실겁니다.
우리가 껍데기가 아닌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빛되시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 빛으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우리를 치유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빛을 비추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리할 때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참된 성도로 거듭날 수 있고,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도 참된 성탄절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참된 성탄절의 의미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리고 성탄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빛되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이 말씀이 우리에게 성육신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빛을 주신 예수님의 그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고, 특별히 이 땅에 덮혀 있는 어두움의 장막을 겉어내어 예수께서 바로 온 세상의 왕이요,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심을 유대인들이 알고 주님께 경배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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