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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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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복 있는 사람이 되세요
2008년 1월 12일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 시편 1편
새해가 되면 늘 입에 달고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하는 인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워낙 좋아해서 이 인사를 두 번이나 합니다. 1월 1일, 그리고 음력 설날에 또 합니다. 참 복을 좋아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에 오니까 세번 인사를 해요. 로쉬하샤나 때. '샤나 토바 우 메투카'(복되고 달콤한 새해가 되길) 이스라엘 사람들도 복을 참 좋아해요. 사실 사람치고 복받는 것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어요. 복이 무얼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로또복권에 당첨되어서 세금 떼고 5십 몇억인가를 탄 사람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부럽습니까? 솔직히 부러운 마음도 조금 있지요? 그 사람을 보면서 질문해 보는 것은 그것이 과연 복일까 하는 겁니다.
복일까요? 일단 좋지요?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왔으니 좋잖아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그 사람 그 복권 당첨될 때까지 수억원을 복권 사는데 썼더군요. 저는 그 사람 복권 당첨된 돈 때문에 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원래 돈이 많았던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엄청난 돈이 주어졌고, 그것도 땀흘려 일해서 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 하면 그 사람 그 돈 때문에 사람 망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그건 복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말 복이 뭡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복 하면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자녀들 잘 되면 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복이니 칠복이니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교인들의 복에 대한 개념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복개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되면 복받은 것이고, 출세하고 건강해야 복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입니다.
그러나 정말 성경적인 복의 개념은 이와는 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 말하는 복에는 물질의 복도 있고, 건강의 복, 명예의 복, 자녀의 복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 전부는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인 시편 1편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우선 복은 존재적인 개념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의 사람됨이 우선되는 복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돈은 많은데 인격이 안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복이 아닙니다. 출세해서 권력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앉고 유명해 졌는데, 사람됨이 영 아니다. 그걸 복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런 자리는 복이 아니고 치욕이고 화입니다.
지식은 있는데, 덕이 없습니다. 많이 공부해서 무엇을 알기는 아는데 덕이 없어서 모든 인간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불행합니다. 자녀들은 있는데,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자식은 많이 두었는데, 자식들이 전부 부모를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식이 어떻게 복이 되겠습니까?
건강은 있는데, 오직 건강을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쾌락의 도구로 씁니다. 그건 복이 아닙니다. 오래 사는데, 그 삶이 부정직하고 도무지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오래 사는 것이 오히려 치욕입니다. 그것을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입니다.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가 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가 어떠냐, 그 삶이 어떠냐가 복에 대한 진정한 의미입니다.
설령 가난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낮고 배운 것이 없고 건강하지 못하고 오래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고, 그 됨됨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되고 성실하다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진정한 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소유보다는 존재의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무엇을 가져야 복이 있다, 무엇을 알아야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존재로 살아야 복 있는 자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해야 할 것과 따라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피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절을 보겠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하나 하나 봅시다. 첫째,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 원문대로 보면 악인의 길을 쫓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악인의 길을 왜 갔을 것 같습니까? 왜 악인인 줄 알면서 그 길을 따라갔겠습니까? 욕심이 많아서입니다.
그래서 속이는 자도 잘못이지만, 속는 자도 잘못이 있습니다. 욕심 없이 속는 것 보셨습니까? 누가 사기를 쳤다. 왜 사기를 당했습니까?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은 것입니다. 악한 길에 잘못된 것을 알면서 가고 끌릴 수밖에 없도록 사는 사람, 뻔히 망할 길인 줄 알면서도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선다는 말은 망설인다는 말입니다. 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머뭇머뭇 기웃거린다는 말입니다. 망설이긴 무엇을 망설입니까? 잘못된 길인 줄 알았으면 단호하게 끊어야지 무엇을 망설이고 있습니까?
바로 이 자세, 이 미온적인 자세가 불행의 이유입니다. 좀 더 산뜻하게 관계를 끊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망설이다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오만한 자가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얻어먹었습니다. 왜 같이 앉았습니까? 오만한 자가 오만을 떨고 있는데, 거기에 같이 앉았습니다. 무엇을 듣겠다고?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선하려고 했고, 악과 타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던 것만 가지고도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피하는 것이 복있는 사람의 우선되는 조건입니다. 쉽게 말하면 피할 것은 피하고, 끊을 것은 끊고, 있지 말아야 할 자리는 떠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까요? 요셉을 잘 알 겁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피끓는 나이에 아리땁고 요염한 고관대작의 부인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순간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님에게 사랑을 받으면 내 팔자가 피겠구나, 종놈이 무슨 순결이냐’
만약 요셉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유혹에 넘어갔다면, 요셉의 이야기는 부자집 마님과 머슴과의 불륜 이야기로 끝나는 삼류영화의 스토리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자리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피했습니다. 뿌리치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순결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고생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저는 요셉을 볼 때마다 우리가 배워야 하고 가져야 할 태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단순히 청년 시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유혹이 많습니다. 성적인 유혹뿐만 아니라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유혹이 올 때 어떻게 합니까? 안돼요, 돼요, 돼요..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갑니까?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피해야 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지도했던 청년 중에 한 명이 예전에 참 술을 좋아했어요. 술만 좋아한 것이 아니예요. 정말 노는 것을 좋아했던 친구에요. 자기 말로도 방탕하게 지냈다고 하는 친구예요. 그런데 이 친구가 은혜를 받고 나서 이제는 바르게 살아야겠다 결심을 했는데, 환경이 따르지 않아요. 친구들이 가만 두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요셉을 닮은 데가 있어서 그 친구들의 요구하는 술 자리, 노는 자리를 피했습니다. 술, 마실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술로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 자리에 있으면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음란과 타락의 길로 빠진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한 자리를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기에 그 자리를 피했던 겁니다. 그것 때문에 욕을 많이 들었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얼마나 신앙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 많이 성장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한 예이지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와 내가 있어서는 안될 자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복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가치관 혹은 양심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비디오점에서 DVD를 빌려 온 적이 있습니다. 영화 한편 보려고 빌려왔는데, 케이스가 전에 보던 것과 다른 겁니다. 이전에는 옆에서 들어올리면 되는 건데 이건 옆에서 올리는데 잘 안되는 겁니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무식하면 힘만 세진다고, 그걸 힘을 가해서 올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틱'하는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깨졌어요. 어쩔 수 없이 대여점에 가서 반납을 하고 돈을 지불했습니다.
돌아 오면서 그런 생각이 듭디다. 대여점 주인이 처음에 DVD를 확인 안하고 꽃더라고요.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와도 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DVD 타이틀 가격으로 2만원을 내고 왔는데 말 안하고 그냥 오면 2만원을 버는 것이 되겠더라고요. 제가 목산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사람들이 돈 벌었다고 좋아하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이와 비슷한 경우 많이 보았을 겁니다. 직접 격어보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양심에는 조금 찔리지만, 까짓것 남들 다 그렇게 하는데... 하면서 적당히 넘어가셨나요? 아니면 그것을 이미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신가요?
저는 예수 믿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라고 믿습니다. 이전에는 그럴 수 있지만 예수 믿은 후에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고, 그릇된 가치관과 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 양심을 돈 몇 푼에 파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사람들의 양심이 무뎌지고 타락해도 그것 좇아가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어떻든 사람들이 어떻든, 나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영향력도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다른 것 아니예요. 우리가 다르게 살면되요. 그럼 처음에는 우리를 비난하고 조롱할지 몰라요. 그것 때문에 손해 볼지도 몰라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공동체가 변화가 되고 우리 사회가 깨끗해 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소금입니다. 소금은 다른 것들을 맛나게 하고 썩는 것을 막아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맛을 잃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가운데서 자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썩어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중심이 있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원칙이 있고 끊고 맺음이 있는 사람되어 복있는 사람이 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복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본문에 보면 결론적으로 복은 하나님의 말씀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2절을 볼까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자로다”
어떤 사람이 꼭 자신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말 죽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데가 천국 입구였어요. 베드로가 자기 앞에 있고 묻더랍니다. '너 지옥 갈래? 천당 갈래?' 이렇게 고마울 때가 어디 있습니까? 자신보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왕 선택하게 할 바에는 자비를 베풀어서 한 번씩 구경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갔다 오라고 해서, 천국에 갔더니 천사들이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찬송을 부르는데, 한참 앉아 있었는데 따분해서 못 있겠더랍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보았더니 카지노도 있고, 술집도 있고, 늘씬하고 요염한 아가씨도 많고 왁자지껄한데, 괜찮더란 말입니다. 상당히 친근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저는 아무래도 지옥체질인 것 같아서 지옥에 가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베드로가 그러면 지옥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다 보니 갔던 곳이 아니고, 깊은 굴 속에 들어가서 뜨거운 곳에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왔던 곳과 다르다고 했더니, 설명하기를 그 때에는 관광비자로 왔고, 이번엔 영주권으로 왔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더랍니다.
이 우스운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들더군요. "맞다! 천국 체질이어야 천국 간다." 안 그렇습니까? 찬송 부르기 싫은데 어떻게 천국에 가서 앉아 있겠습니까? 말씀 보고 듣는 것이 따분해 죽겠는데 어떻게 천국에 가서 앉아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체질은 어떤 체질입니까? 천국 체질입니까 지옥 체질입니까? 좋기는 술집이 좋은 데 그래도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오늘 말씀에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이 즐겁고, 사랑하는 것이 즐겁고, 찬송하는 것이 즐겁고, 예배하는 것이 즐겁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즐겁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천국 체질입니다. 이런 체질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되어있는데, 묵상이 무엇입니까?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그 외의 일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억울한 마음도 분한 마음도 슬픈 마음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깊이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사라집니다. 이 묵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내가 소중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로 인하여 기뻐하고 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는 말씀이 그렇게 가까이 들려오고, 그렇게 느껴지고 체험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복된 사람을 무엇에 비유합니까? 3절을 봅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에 보면 복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참 멋진 표현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고 오히려 열매를 맺습니다. 늘 푸르름과 싱싱함을 유지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시냇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을 말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서 망설이지도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게 앉아 있지 않으므로 자신을 지키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깊게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깊게 뿌리가 내려져서, 세상에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시험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말라 죽지 않고, 오히려 그 생명력을 가지고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평탄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너무나 힘든 일이 연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실패 때문에 내가 마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실패라는 가뭄이 와도 나의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께 깊게 내려져 있으면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고 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그 푸르름과 열매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겪은 후에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전에는 내가 귀로만 하나님을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고난이 있고 없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어디에 내려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께 내려져 있는 사람은 고난이라는 용광로에 들어가도 타죽지 않아요. 살아남아요. 오히려 정금과 같이 단련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예전에 어느 자매가 가정에 큰 문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자매에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너의 믿음이 이 때를 위한 믿음이 아니겠니’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 하고 모든 노력을 해보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힘든 때에 너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당장은 힘들고 당황스럽고 눈물이 쏟아지지만,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 믿음이 있기에 견딜 수 있고, 이길 수 있고, 흔들리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이다. 너의 믿음이 바로 이 때를 위한 믿음이 아니겠니."
저는 지금도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때 자매에게 했던 말로 기도합니다.“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께 더욱 깊게 뿌리를 내리게 하옵소서. 지금 그 가정에 엄청난 가뭄이 찾아왔지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께 뿌리내리게 하시고 그래서 이겨내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에는 분명 가뭄이 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실패이든, 고난이든, 큰 슬픔이든, 질병이든, 시험이든 분명 가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뭄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으면 가뭄이 와도 나는 말라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형통하게 되는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형통은 무조건 잘 되고 길이 펑펑 뚫리는 것이 아닙니다. 형통은 내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는 막아주시는 것이 형통이고. 길이 막혔을 때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길이 있는 것, 이것이 형통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깊게 묵상해봐야 할 것이 바로 3절에 있는 '시내'의 의미입니다. 시내도 마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내가 마르지 않는 방법은 그 폭이 넓고 깊으면 됩니다. 그리고 물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잘 흐르고 많이 흐르면 됩니다. 그러면 가뭄이 와도 까딱 없습니다. 시내는 말라도 한강은 마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내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시내에 흐르는 물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강물이 막힘없이 잘 흐르고 있습니까? 은혜의 강물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입니까? 또랑의 수준입니까? 강물의 수준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 깊이와 넓이와 양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즉 나의 믿음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내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만큼 커집니다.
시편 81:10에 보면 하나님게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올해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그릇이 넓어지기 바랍니다. 말씀의 그릇이 넓어지고 기도의 그릇이 넓어지고 순종의 그릇이 넓어지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영적인 시내의 폭과 깊이가 커지길 바랍니다.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의 영혼과 가정과 삶의 현장위에 물 붓듯이 쏟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소유해서 복있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가 있어서 복되고, 죄악을 멀리함으로 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순종함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복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떤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아니하고 늘 푸르름을 간직하고 열매맺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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