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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자본에 모독당한 책의 운명
강신주 | 철학자 경향신문 2013.5.26
2년 전 일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5위 안에 들어가는 거대 출판사에 강의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출판사 직원들에게 인문학 특강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이다. 저자로서 어떻게 출판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강연하기에 앞서 이미 나와 책을 함께 만들었던 편집자가 출판사의 최근 동향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충격이었다. 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이 출판 기획회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당장 5000부 이상 나갈 책이 아니면 기획회의에서 말도 꺼내기 힘들다는 푸념을 들었다.
일러스트 | 김상민
이런 식이라면 니체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나타나도 출간 제안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경우 3년이 되어도 판매량이 200권을 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당시 니체가 자신의 주저를 출간하지 않았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담겨 있는 니체의 자유정신을 어떻게 지금 우리가 맛볼 수 있었겠는가.
순간적으로 잘 나가는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순간적으로 별로 반응이 없는 책이 영원히 잊히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모든 베스트셀러들이 스테디셀러, 즉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바꾸어 말해도 좋다. 마케터가 출판 기획회의에 참여하는 순간, 아니라면 출판사 사장이 마케팅 마인드로 출판을 결정하는 순간, 베스트셀러들은 나올 수는 있지만 고전들이 나오기는 어려운 법이다. 독자들이 원하는 책을 만들면 베스트셀러가 탄생하기 쉽다. 그러니 소비자의 취향과 요구를 읽어서 그에 영합하는 상품을 내놓으려는 마케터의 논리, 그러니까 자본주의 논리가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책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출판사라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출판사도 경쟁적으로 자본주의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우연히 만난 인문 출판사 사장이 지금까지 미망에 살다가 갑작스럽게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혹은 자신이 모던한 경영 기법이라도 배운 세련된 오너로 거듭나기라도 한 것처럼, 마케팅의 논리를 설파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구역질이 나는 것을 애써 참는다.
몇 년 전 어떤 편집자가 내게 제안했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쓰고 싶은 책을 쓰세요. 대신 제목만 제가 달도록 해주세요. 인문 서적으로 분류되지 않고 경영과 처세 서적으로 분류되어야 하니까요. 최소 10만 권 이상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독자들의 사유를 깨우고, 자신의 삶 나아가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고민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인문 저자에게 돈을 위해 글을 쓰라는 제안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뿐이었다. 저자도 이렇게 모독하는 데 그 편집자가 독자들을 세치 혀로 어떻게 모독할지는 명약관화한 일 아닌가.
▲ “돈의 논리에 잠식당해 가는 출판계
사재기는 ‘저자와 독자의 관계’ 왜곡
인간의 사유를 깨우는 것이 좋은 책
인문 출판사들, 책의 본령 되새기길”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수많은 책들이 오늘도 쏟아져 나오지만, 책이라는 외양만 갖고 있는 상품도 있고 동시에 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책도 있다. 상품으로서의 책은 독자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주거나 아니면 재미를 주는 것이다. 반면 책으로서의 책은 독자들을 불편하도록 만들어 사유를 자극한다. 위대한 작가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새디스트적인 취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들, 그러니까 이웃들과 후손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입에 쓰지만 몸에 좋은 약을 기꺼이 먹거나 혹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기꺼이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것이 바로 진정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 어려운 이유, 혹은 잘해야 고전의 반열에 올라 스테디셀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긴 누가 자신에게 아첨하는 책, 장자의 표현을 빌리면 “똥구멍을 핥는” 책이 아니라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품으로서의 책은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모든 종이 매체가 그렇듯이 통신과 영상 기술의 발달은 정보와 재미를 제공하는 책의 기능을 현저히 축소시키고 있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열면 필요한 정보나 재미를 충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책으로서의 책은 결코 수명이 다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다하지 않아야만 한다. 인간이 인간을 깨우려는 노력이 멈추어지는 순간, 우리에게 어떤 소망스러운 미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e북의 형태를 취하든 무엇이든 간에 자본보다는 인간적 가치에 무게를 두는 책은 계속 나와야 한다. 우리 공동체가 탁류처럼 되더라도, 작으나마 맑은 샘물 한 줄기라도 흘러들어야 그나마 완전히 썩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바로 여기에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 저자와 출판사들의 존재 이유가 있다.
어느 대형 작가와 관련된 사재기 사건은 아직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고 있다. 물론 여러 사건들에 묻혀 그 충격을 어느새 잊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 충격의 상처를 아프게 아로새겨야만 한다. 저자와 독자, 그러니까 책을 매개로 만나야 하는 인간관계를 왜곡한 사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출판사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만 만들면 된다는 장사치에 가까운 출판사가 아니라, 인문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을 표방했던 출판사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탁류를 정화시키는 작은 샘물마저 오염된 꼴이니까 말이다. 저자와 독자를 이보다 심하게 모독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돌아보면 출판사 탓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저자나 독자가 책의 정신을 올바르게 세우고 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자본에 모독당한 출판사가 내건 베스트셀러라는 유혹에 저자나 독자들도 모두 매혹되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문 저자나 출판사들에 이익을 버리고 자선 사업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애써 집필한 책이나 출간한 책이 많이 팔려서 수익이 증가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얻어진 수입은 일차적으로 책의 정신에 독자들이 많은 공감을 표시했다는 증거, 다시 말해 아이를 돌보듯이 정성들여 집필했고 출판했던 책을 독자들도 사랑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가장 보수적인 사상가라고 비판되기도 하는 공자(孔子)마저도 말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녹재기중(祿在其中)!”, 그러니까 “봉록은 그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을 언제까지 배워야 출세해 돈을 잘 벌 수 있는지를 묻자, 실망감을 간신히 이기고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공자도 돈, 그러니까 봉록을 부정한 적은 결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때 발생하는 부차적인 효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인문 저자들도 그렇지만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출판사 사장도 반드시 아로새겨야 할 가르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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