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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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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5절-22절.
15절-22절: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참고로 창세기 14장에 보면 롯의 사건이 나오는데, 롯을 들어서 주시는 계시가 있고, 아브라함을 들어서 주는 계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성경에서 계시의 다양성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계시가 다양성인 반면에 성경 66권 전체적 사상 면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현대교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설교를 참고해 보면 첫째는 주해설교가 많아요. 주해설교 많이 들어봤지요? 성경 밑에 주해 다 해 놨지요? 주해설교가 많아요. 그런데 주해설교를 하게 되면 사상확립이 안 됩니다. 사상확립이 안 돼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 면을 강조하는 설교가 있어요. 하나님 주권을 강조하는 게 칼빈이지요? 많이 배웠지요? 하나님의 주권 면만 강조하게 되면 인간의 노력이 문제가 되지요?
또 세 번째는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설교가 있어요. 하나님의 주권을 말을 안 하면 인간의 노력만 강조하게 된단 말이요.
여러분들, 혹시 부정을 얘기하다 보면 뭘 강조하게 되지요? 긍정을 강조하게 된단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다 보면 인간의 노력이 무시가 되고,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가 된단 말이요.
그리고 현재 시대적으로 보면 교회들이 활동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예배당도 많지 않고 건물도 없을 때에 자기 집을 팔아가지고 예배당을 짓는 사람도 혹 있고, 또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주 시골구석이라도 그런 사람이 별로 없고,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기 위한 작정헌금을 하면 많은 돈이 걷히지요? 그리고 또 어떤 자들은 작정헌금을 하는데 자기 집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작정헌금을 하기도 하고. 그런 활동들을 많이 한다 그 말이지요.
그리고 옛날에야 교통이 불편해서 그렇게 멀리는 가지 않았습니다마는 요새야 차가 많고 교통이 워낙 좋으니까 심방을 수 십리 수 백리까지도 가지요? 그런데 문제는 뭔가 하니 차를 가지고 돌던, 걸어서 심방을 하던 문제는 구원목적으로 하느냐 그게 문제란 말이요.
전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그렇게 활동하는 그 속의 왕이 누구냐 그 말이지요. 왕을 심사하라 그 말이요. 심방을 가는데도 왕이 갑니다. 그렇지요? 갈 때 자기 속의 그게 누구냐 그 말이요. 그런데 보면 이런 것은 심사를 안 하려고 그러지요.
그리고 활동을 많이 하는데, 고난주간에 금식기도 많이 하지요? 그런데 휩쓸리면 환경의 소산이 돼버립니다. 그 환경에 놀아나는 소산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그건 하나의 종교행위다’ 단순히 그렇게만 보지 말고 무엇들을 하는데 있어서 기독교회가 온통 그 환경으로 돌아갈 때에 나도 그렇게 돌아가면 환경의 소산이 된다. 인간이 환경의 소산이라는 게 참 불쌍하잖아요?
그리고 이 시대에 교회의 가장 빈약성은 방향과 사상이 없다는 것. 방향과 사상이 없는 기독교회의 삶은 개개인적으로 보면 무목적적으로 사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목적 즉, 나를 향하신 목적이 있으니 나는 그 목적에 단일이 되게 살아야 되는 건데 그 목적이 없단 말이요. 그러니까 이게 무목적적으로 사는 거다 그 말이요.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활동을 하는 자기네들이야 ‘나는 복음활동이다’ 하는 거지만 하나님의 목적에서 볼 때에 목적이 없다 그 말이요. 그러니 무목적적으로 사는 거다.
또 하나 심사를 해 봅시다. 거지가 동냥을 왔을 때에 성도의 마음에 새사람은 ‘주자’ 그러고, 옛사람은 ‘주지 말자’ 그럽니까? 그러니까 거지가 동냥 왔을 때에 ‘주자’ 그러면 그게 새사람이고, ‘주지 말자’ 그러면 그게 옛사람인지?
그렇다면 불신자들 마음속에도 ‘주자’ 하는 마음이 있고, ‘주지 말자’ 하는 마음이 있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불신자들 마음속에서 ‘주자’ 하는 것은 새사람이고, ‘주지 말자’ 하는 것은 옛사람입니까? 한참 생각해야 돼요? ‘주자’ 그러니까 그거는 새사람이고, ‘주지 말자’ 하는 것은 옛사람이요?
믿는 사람이 ‘주자’ 하는 것과, 불신자나 이방종교인들이 ‘주자’ 하는 것은 똑같은 말이고 똑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불신자나 이방종교인의 마음이나 성격이나 성질 등의 그 요소는 예수 믿는 새사람의 성질 성분과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제일 많이 빠지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니 우리 기독자들입니다. 불신자들이나 이방종교인들이 ‘주자’ 하는 그걸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새사람인 것처럼 말들을 하고 생각을 한단 말이요. 또한 새사람인지 헌 사람인지 생각지도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거니까 새사람으로 하겠지’ 그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요.
우리가 바른 기준이 없이는 옳은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자가 뚜렷한 방향의식과 목적의식이 없으면 혼돈이 됩니다. 흔들린다 그 말이요. 그러므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기준을 바로 세우는 거.
우리는 신의적 믿음을 가져야지요. 신의적인 믿음의 바탕은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의 절대성, 하나님의 완전성, 하나님의 소원 목적성입니다. 그 점을 알아야 된다 그 말이요. 그런 신의적 믿음의 바탕에서 신앙적으로 나가야 된다 그 말이요. 기준이 없으면 옳은 믿음을 못 가져요. 절대로 가질 수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신학적으로도 알고, 성경 전체가 신학이지 뭐. 신학적으로도 알고, 그리고 인격적인 면에서 신앙적으로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의적 믿음에서 신행(神行)이 나오고, 신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신(神). 신행에서 그 다음에 영행(靈行)으로 건너오고, 영행에서 심(心), 마음 심, 심행으로 건너오고, 심행에서 물행(物行)으로 건너오고. 즉 몸으로 건너온다. 그게 바로 된 거라 그 말이요.
그렇게 되어 나올 때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되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달라져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기의 가졌던 기존적인 그것이 서서히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져 나갑니다.
빨리 만들어지는 사람도 있고, 늦게 만들어지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리고 완전은 아니나 그러나 만들어진 것만큼 빨리 만들어지고, 바꿔진 사람은 이를 테면 한 3년 내지 5년만 되면 딴 사람이 돼 있단 말이요. 사상이 전혀 딴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게 옳은 믿음이란 말이요. 그게 잘 믿는 사람이라 그 말이요.
이런 사람은 취미도 바꾸어지고, 사상도 바꾸어지고, 육신의 생명관도 바꾸어지고, 투쟁관도 바꾸어지고, 삶의 투쟁 말이요. 투쟁관도 바꾸어지고, 자기의 안고관도 바꾸어집니다. 고생스럽고 편안하고 한 이 안고관이 바꾸어져요. 옛날에는 육신 편한 주의로 살았지만 이제는 육신 편한 주의가 아니고 마음의 평강, 영의 평강,
여러분들, 이 세상에 살며 못 살고 없이 사는 걸 절대로 고생으로 여기지 말아요. 그게 고생이 아니에요. 그건 고생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밥이지요.
물론 없이 살고 못 살면 힘은 들겠지만 그걸 당하는 사람이 그걸 고생이라고 말을 한다면 왜 그렇게 말을 하는 거지요? 편안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하는 육에다 소원성을 둔 생각에서 나온 말이란 말이요. 우리 기독자는 그건 구원을 이루어가는 하나의 재료거리지 고생이 아니에요.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우리의 고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못 깨닫는 그게 고생이다. 못 깨닫는 게 고생이다. 괴롭단 말이요. 그 인생은 괴로워. 깨닫지를 못하니까 괴롭게 산다 그 말이요. 여러분들이 하나 둘 말씀을 깨달아 가는 것이 있다면 마음이 즐거워요. 사는 게 즐겁단 말이요. 부자로 살아서 즐겁다는 그 말이 아니고.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 한 번 태어났다 하면 자기가 알던 모르던 건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망적인 건축이던 생명적인 건축이던 건축을 하고 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사는 거야 그냥 먹고 그냥 살다가 죽는 거라고 하는 거지만 우리는 늘 그 면을 의식을 해야 되겠어요.
여러분들에게 ‘성도의 기본자세’ 자료 나눠준 거 있을 겁니다. 거기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있지요? 나는 예정적으로 하나님의 제 1 목적물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요, 또 하나는 하나님 자녀는 출애굽을 하니까 출애굽 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두 번째는 ‘이 세상은 나의 영존처가 아니다.’ 나는 나그네다 그 말이요.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애굽은 나의 영존처가 아니다 그 말이요.
세 번째는 ‘나는 조만간에 이 세상을 떠난다.’ 조만간 나는 애굽에서 탈출한다 그 말이요. 육의 세상, 애굽 같은 이 세상을 탈출한다.
네 번째는 ‘이 세상은 나의 훈련장이요 전투장이요 교육장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뭐 하는 곳이냐? 영적 실력배양의 장소다 그 말이지요.
다섯 번째는 ‘나의 영원히 누릴 곳은 천국이다.’ 즉 나의 영존처는 천국이다. 고로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할 때 항상 목적을 둘 곳은 그 때 당시로 말한다면 가나안이라 그 말이요. 지금으로는 천국이고.
모세가 앞서서 가면서 하는 말이 ‘가나안에 가자. 가나안을 바라보라’ 하는 거지 애굽을 바라보라는 말은 없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타락된 기독교가 애굽을 자꾸 쳐다보게 만들지요?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볼 때에 바로는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못 합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어떤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게 자기 마음대로 못 해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먼저 인식해야 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의 주권섭리로 세상은 돌아가잖아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거.
우리가 로마서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를 들어서 쓰신다고 그랬지요? 그게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이요. 물론 마귀도 하나님이 창조했고, 하나님 외에 자존자는 없는 거고.
그리고 창조도 하나님의 직접 창조가 있고 간접 창조가 있는데, 간접 창조는 우리가 자녀를 낳는 거, 그리고 땅이 식물을 내는 거 등등입니다. 그런데 타락된 인간 자기가 보기에는 인간 자기가 꼭 창조자 같아요.
하나님의 주권이 있고 인간의 주권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인간의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내가 이렇게 이렇게 뭘 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합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을 생각을 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사건 환경과 대립이 돼요.
그러면 자기가 대립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섭리가 어그러지느냐? 그건 없어요. 문제는 자기 속에서 대립적인 성분으로 나가고 있는 거지. 그런 면에서 바로는 대립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모세는 호응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가만 보면 모든 사람들이 그래요.
그리고 천하 사람이 다 방해를 해도 구원사건은 계속 추진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 심지어 사단 마귀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구원역사는 어그러뜨리지를 못해요. 여러분들, 이게 믿어집니까? 눈에 보이는 창조 속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대 구원이 목적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신앙성도가 얼마나 멋있어요.
이스라엘 70명이 대 애굽 속에 들어가면 애굽으로 녹아질 것 같지만, 인간 자기 생각으로는 소금 한 줌을 한강 속에 집어넣어 놓으면 모두 녹아져서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70명이 들어가서 애굽을 흡수해서 이기는 거 참 살아있는 생명력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확대시키고 확장시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으리라’ 그랬지요?
바로가 대립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아이가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살리라고 했지요? 그리고 고역을 시키면 이스라엘 여자들이 아이를 못 낳을 줄 알았는데 더 잘 낳았어. 바로는 이스라엘을 없애려고 모세가 나기 전부터 그 정책을 썼습니다. 근 80년 이상을 바로가 방해를 계속 했지요? 그래도 이스라엘은 확장이 돼 갔단 말이지요.
그걸 보면 참 생명탄생은 박해 속에서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육신적으로야 자녀를 낳는 거겠지만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에 박해 속에서 생명력이 있는 신앙이 나온다. 그런 면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박해 속에서도 그렇게 확장이 돼 나갔으니 박해를 안 하면 더 확장이 잘 될 것 같지요? 박해 속에서도 확장이 잘 돼 나갔으니 박해를 안 하면 더 잘 될 것이 아니겠느냐? 안 그렇습니까? 어때요? 박해 속에 신앙이 더 잘 됩니까, 날마다 편안한 가운데서 살면 신앙이 더 잘 될까? 어떤 거지요? 어떤 거 같아요? 편안하면 신앙이 더 잘 될 것 같으나 그건 인간 제 생각이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역사적이지만 이걸 영적 신앙 면으로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신앙이 있는 자가 출애굽을 합니까, 신앙이 없는 자가 출애굽을 합니까? 신앙이 있는 자가 출애굽을 하지요. 애굽사람은 그런 생각조차도 없는 거고.
우리가 이걸 성화구원으로 볼 때는 인간의 노력을 말을 해야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전제로 하면서 인간의 노력을 말할 때는 성화구원을 의미하는 건데, 아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갈 때는 2세들이 나가서 이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계산을 해 보면 출애굽 당시는 60만 3천 5백 50명이었고, 광야에서는 60만 1천 7백 30명. 그러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출애굽에서는 더 적어지고 광야에 나오면 막 불어날 것 같지요. 즉, 어려운 가운데서는 신앙이 잘 안 될 것 같고, 편안하면 신앙이 더 잘 될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광야로 나오면 노예생활보다는 더 편안할 테니까 광야에서는 숫자가 불어날 것 같지만 더 적어졌단 말이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살 건 광야에서 살 건 문제는 ‘내가 그 환경에서 피동적 피동자로 사느냐, 대립적으로 사느냐, 호응적 자원적 순종으로 사느냐?’ 이게 문제란 말이요. 여기서 그런 면을 보여준다 그 말이요.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목적적인 계획이 있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 속에서 건축 재료를 끄집어내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전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구절 뒤에 성경구절 끼워 맞추는 그것은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첫째는 주경적으로 보는 신학, 두 번째는 개괄적으로 보는 신학, 세 번째는 신앙적으로 보고 계시를 찾으면 유익합니다.
기도 올립시다.
평안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고, 평안하면 확장이 될 것 같으나 그러나 알고 보면 환난 핍박 속에서 신앙이 더 깊이 박히고 생명력이 있는 신앙으로 나온다고 하는 걸 저희들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하고 잘 먹고 호화스러운 가운데 살면 자녀생산이 많이 될 것 같지만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애굽여자들보다도 자녀생산이 더 잘 되어 나갔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적으로 사상적으로 신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환난 핍박 속에서 신앙이 더 잘 성장되어 나간다는 면을 우리는 계시 사상적으로 알 수 있겠습니다.
하오나 저희들이 보는 것이 세상이요, 듣는 것이 세상이요, 생각하는 것이 세상이요 ,먹는 것이 세상이니 이런 세상 속에 사는 저희들 입장에서 볼 때에 행복한 삶 속에서 복음이 더 잘 될 것 같고 믿음도 더 잘 클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고로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 모두가 육신 쪽으로 기울어져서 하나님의 일이 잘 되는 그 면을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않게 해 주시고, 어찌하든지 하루 생활 속에 어떤 사건 환경을 주던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면을 먼저 생각을 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사건 환난 환경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련히 알아서 주는 것인 줄 알고 감사함으로 받고, 그 속에서 큰 수입을 잡고 나갈 수 있는 힘 있고 능력 있고 슬기롭고 총명하고 실속 있는 믿음을 가진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꼭 붙잡아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미련하고 둔탁해서 하나님의 뜻을 일일이 생각지도 못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깨달은 것도 생활 속에서 써먹는 면에 너무나도 둔탁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붙잡고 놓치지 아니하고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만 있어도 우리 성령님께서 그러한 성도를 붙잡아 주시고 조명적 영감 각성적 영감을 주시어서 그 환경 처소에서 성화구원을 잘 이루어 나가고 연관구원을 잘 이루어 나갈 수 있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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