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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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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피영민 목사 |
참고 : |
출11장4-8
구별하시는 줄 알리라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세상과 구분 되었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큰 부흥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교회가 너무나 세속적이 되어 버렸고,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우리가 세상 사람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에 혼란과 위기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좇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출애굽기 11장 4~8절
바로왕은 아홉 가지 재앙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제 열 번째 재앙을 경고한 후에 심히 노하여 바로 왕 앞에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성질한번 내지 못하더니, 열 번째 재앙을 선포할때쯤 되니까 모세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왕 앞에 노하며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밤중에 애굽에 들어가셔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시작해서 여종의 장자 뿐 아니라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은 모두 죽일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왕위 보좌에 앉아 있든지 맷돌 옆에서 곡식을 가는 여종이든지 신분의 고하, 성별의 차이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애굽의 장자와 첫 소생을 죽일 것이라는 것이 열 번째 재앙입니다. 이 열 번째 재앙으로 애굽 전역에는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 11:7). 개가 혀를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집에서 곡소리가 나고 짐승 죽어서 쓰러져 나가면 개들이 짖는 이치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고센 지역에는 개들도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편안히 누워 자는 고요와 평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시는 줄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구별하시는 하나님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비교해 보면 처음에는 애굽 사람이 압도적으로 강했습니다. 애굽 사람의 손에는 채찍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 사람의 등을 때렸습니다. 애굽 사람의 뒤에는 강한 군대의 무력이 뒷받침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벽돌을 만들라고 명령하는 명령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등에 채찍을 맞으며 명령에 순종해서 지푸라기를 주워서 만든 벽돌을 가지고 집을 만들면 애굽 사람이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애굽은 강하고 이스라엘은 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둘 사이에 개입을 하시니 전세가 역전이 된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에게는 큰 곡성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평안과 고요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저주하셔도 이스라엘 백성은 축복하신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피부색으로 보면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있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대한민국, 일본,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가 있습니다만, 성경을 볼 때에 영적으로 인류는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영적으로 인류는 애굽 사람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인가 나누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애굽사람은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백성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양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애굽백성은 염소의 모형입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요,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요, 알곡 아니면 가라지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중간은 없습니다. 단지 영적으로 두 부류만 존재할 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 속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택함에는 관심 없는 사람에 속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에는 양과 염소가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섞여서 살고 같이 밥 먹고 살고 때론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만, 최후 심판의 날에는 양과 염소는 정확하게 갈라질 것입니다. 그 날이 최후의 심판날입니다.
그러면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며, 어떤 때에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또 왜 그런 차이가 중요할까요?
두 부류의 차이
택하심의 차이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날마다 잔치하며 잘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거지였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고 버리는 음식을 주워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섬기던 백성이었습니다. 그 둘이 죽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고 부자는 음부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지옥에서 얼마나 뜨겁고 목마른지 손가락에 물을 축여서 자신의 혀에 대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가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도 건너올 수 없게 하셨느니라”(눅 16:26). 하나님께서 큰 구렁을 두셔서 음부와 그리고 천국 사이에 왕래할 수 없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천국백성과 지옥백성 사이에는 큰 구렁 같은 차이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영원 전부터 차이가 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영원한 때,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받은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한 백성들을 미리 사랑하시고 미리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 받지 못한 백성들은 뱀의 후손으로서, 가라지로서, 염소로서 미리 사랑하심과 미리 예정하심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부류는 시작점은 똑같다가 점차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영원 전부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아니 그것을 어떻게 체험했소?”라고 물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원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원전의 일을 알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알고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 수 없는 세계를 문서계시인 성경에 영감을 받은 계시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차이
이 두 부류 사이에는 은혜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자든 불택자든 공통으로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물도 주시고 밥도 주시고 옷도 주십니다. 여러분 악인이라고 밥을 안 먹습니까? 악인이라고 햇볕 쬐는데 구름이 갑자기 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하나님은 공통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보통은혜 혹은 일반은혜(Common grace)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지 못한 백성들도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보통은혜를 넘어선 특별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애통하게 하시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을 주시고 지옥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시고 거듭나게 되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택자에게 주시는 특별은혜요, 이 은혜를 가리켜 구원받는 은혜(Saving grace) 라고 말합니다. 불택자들은 보통 은혜만 받습니다. 그러나 택자들은 보통은혜와 더불어 구원받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택자들은 심령의 본질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납니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싫어하던 본성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사랑하는 본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차이는 인간 본질의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
법적인 차이
또한 이 두 부류는 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심판할 때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죄를 반드시 처벌하는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죄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처벌받습니다.
여러분 죄가 있으십니까? 그 죄는 다 처벌받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죄가 있다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죄가 어디 있습니까? 죄인은 반드시 벌 받게 되어있습니다. 지옥 가는데 필요한 죄는 호리같은 죄만 있어도 충분한 것입니다.
애굽백성으로 상징되는 이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때에 자신들이 지은 죄 값으로 말미암아 영영히 불타는 지옥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누가 변호해 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으로 상징되는 택자들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석에서 “너는 지옥으로 떨어질 찌어다”라고 심판 받을 때,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변호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능한 변호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족제비가 빵을 훔쳐 먹는 죄를 지었습니다. 원숭이가 변호사가 되고 사자가 판사가 되었습니다. 원숭이가 변호를 하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증인이 다섯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원숭이가 변호를 시작합니다. “재판관이시여 저 족제비가 빵 훔쳐 먹은 것을 본 증인은 다섯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 족제비가 빵을 훔쳐 먹은 것을 못 본 증인은 수천수만 명이 됩니다. 고로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그러자 멍청한 사자가 무죄라고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변호사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변호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예수를 믿은 백성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는 그들 앞에 유능한 변호사가 나타납니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못 박힌 손의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요, 불택자보다 더 많은 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제가 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저 사람의 죄 값을 내가 대신 갚았나이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지옥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한번 죄를 가지고 두 번 처벌할 수 있습니까? 한번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서 두 번 벌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 원칙을 가리켜서 대한민국 형법에서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고 말합니다. 대한민국 형법에도 일사부재리가 있는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벌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 벌을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택자들은 죄가 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한번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벌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불을 면제받고 천상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벌 받으셨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택자와 택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유능한 변호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모시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뽑아주시는 천선 변호사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변호사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않고,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섭리의 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결국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떻게 슬픈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이 늘 없겠습니까? 고생은 없겠습니까? 때로는 축복도 있고 기쁨이 있을 수 있고, 때론 기쁨 뒤에 슬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합력해서 다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는 다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 선을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결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애굽백성으로 상징되는 불택자들의 생애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게 됩니다.
불택자들은 돈 좀 벌었다 하면 그 돈 때문에 타락하고 부패하고 악인이 됩니다. 출세 좀 했다고 해서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다가 망하게 되고 사람취급도 못 받게 됩니다. 좀 일이 잘 풀린다 해서 기분 좋다고 술을 너무 많이 먹다 보면 그것이 나중에 병의 원인이 됩니다. 또한 불택자들에게는 슬픈 일이 생기면 그 슬픔은 점점 심해지고 절망이 되고 좌절이 됩니다. 슬픔을 이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불택자들은 지금 당장은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보면 그것은 악이 됩니다.
현세에는 그 악이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더라도 내세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서 “네가 평생에 한 것이 다 모여서 이런 악이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차이는 영원한 차이요, 은혜의 차이요, 본질의 차이요, 심판의 차이요, 섭리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큰 구렁은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 나는 양인가 염소인가? 나는 택자인가 불택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부류의 인간이 차이를 드러내는 다섯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차이는 언제 드러나는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이 진리이다, 내가 이 말씀에 다 순종은 못하지만 순종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분은 택자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죄를 지었던 분들은 괴로워합니다. 어떻게 나는 죄에 넘어질까? 그러나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나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말씀의 삶이 나의 삶이 되게 하소서 이런 기도가 나온다면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도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이 말씀을 믿지도 않고 듣지도 않겠다. 어찌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므로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마음이 들면 불택자인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모두 택자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있으며 양과 염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말씀을 들을 때에 나타납니다.
죄를 지었을때
그리고 택자와 불택자는 죄를 지었을 때에도 차이가 납니다.
택자들은 죄를 지으면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슬퍼합니다. “나는 예수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 어째 이 모양인가? 내가 왜 이렇게 자꾸 죄에 빠지는가!”하며 죄짓는 자신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성령님을 의지해 벗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죄를 미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어디 재미난 죄 더 없을까하며 그들은 죄짓는 기회를 찾아다니고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죄를 두려워 하기 보다 오히려 죄를 품고 즐거워하고 그 기회를 노립니다. 죄를 지어도 불택자들은 회개할 대상도 없거니와 회개할 필요도 느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택자와 불택자는 차이가 납니다.
강한 유혹이 올 때
택자와 불택자는 강한 유혹이 왔을 때에도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무역을 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는 사람이 마약을 한번만 밀수하면 부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제안해 왔는데 어떡하지?’ 택자들은 내가 신앙의 양심을 포기하고 수입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양심을 포기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신앙의 양심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정직하게 부자가 되느니 차라리 의로운 가난한 사람이 되겠다. 내가 내세에 멸망을 하느니 차라리 현세에 가난하고 양심적인 쪽을 택하겠다. 라면을 먹어도 발 뻗고 먹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그런 갈등이 없습니다. ‘이게 왠 떡이냐 내가 그 동안에 바라고 노리던 노마크 찬스가 오게 되었구나’ 좋아하며 양심보다는 이익을 우선 삼습니다. 정의보다는 돈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밀수를 해가지고 돈 버는 것은 백억이고 이것을 걸려서 감옥을 가면 몇 년이라. 내가 몇 년에 백억을 벌 수 있나? 그러면 걸려서 감옥에 가더라도 하자!’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택자들입니다.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이 없습니다.
이처럼 강한 유혹이 올 때에 택자와 불택자는 선택이 다릅니다.
실패했을 때
그리고 인생이 실패했을 때에도 차이가 드러납니다.
언제나 성공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욥과 같은 위대한 사람도 큰 실패를 보았습니다. 자식 열 명이 모두 죽고, 재산도 하루아침에 날아가고, 몸도 병들어 기왓장으로 긁어야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며 입술로도 죄를 범치 아니했습니다.
모태에서 나오실 때 기저귀 차고 나온 사람 없듯이 우리는 모두 다 적신으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돌아갈 때도 알몸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분은 돌아가실 때 가슴에 은행통 장을 품고 간다는데 그거 가지고 가서 어디서 쓰시려고 가지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은 올 때에도 적신이요, 갈 때도 적신인 것입니다. 살면서 그저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고백이 참으로 의로운 고백인 것입니다.
의인들은 인생을 살다가 실패를 해도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치 않습니다. 도리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하나님 내가 살다가 이렇게 어렵게 되었으니 날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로운 기도를 들으시고 두 배로 축복하셔서 자식 열을 더 주시고 재산은 두 배로 더 주십니다. 욥은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실패하면 평소에 믿지도 않던 하나님부터 원망합니다. 언제 믿었다고 원망합니까?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국가를 원망하고, 대통령도 원망하고, 심지어 아내도 원망합니다. 또 자식들도 원망하고, 친척도 원망하고, 다 원망하고 반항하다가 실패와 좌절을 겪고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그렇기 때문에 인생 실패시에 하나님의 택자와 불택자는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생의 끝에서
그런데 제일 큰 차이는 죽을 때 납니다.
목사들은 임종의 현장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돌아가시는 분과 믿지 않고 돌아가시는 분은 죽는 순간이 다르다는 것을 매번 경험합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 믿고 돌아가시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와서 그 영혼을 받들어서 천국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고통 받을지라도 죽는 순간만큼은 큰 평화가 있고, 그 얼굴에 심지어는 미소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검은 사자가 와서 지옥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안간힘을 쓰고 버팁니다. “안가! 안가!” 라고 소리 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앗! 뜨거! 뜨거” 이런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죽을 때 모습이 굉장히 다릅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여섯 살 된 에드워드라는 아이가 뇌종양으로 죽었습니다. 그 아이는 죽을 때 혼수상태로 한 열흘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기 한 5분전에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보고 말합니다. “Daddy, I love you. Don’t cry Daddy. Don’t cry Mommy. Jesus is calling me. Granddaddy calling me!” 그 여섯 살짜리 아이가 죽기 전에 잠깐 깨어나더니 “아빠 엄마 울지마, 예수님이 날 불러, 할아버지도 날 부르고 있어. 아빠 엄마 사랑해” 말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 이후 그 부모가 교회에 아주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비록 여섯 살에 죽었지만 죽는 순간이 평온하도록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를 축복하셔서 천사들이 그 영혼을 받들어 천국에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자와 불신자, 택자와 불택자는 삶의 다양한 순간에 넘을 수 없는 차이가 큰 구렁처럼 존재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런 차이를 이야기해야 되고 이런 차이를 우리가 마음에 두고 살아야 되는 것일까요?
두 부류의 차이는 무엇이며 왜 이런 차이를 드러내야 하는가?
교회와 세상은 다릅니다. 달라도 많이 달라야 됩니다. 세상과 교회가 똑같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악하고, 교회가 세상인지 세상이 교회인지 알 수가 없고, 교회가 세상의 방법을 쓰게 되면 소망 없는 사회가 됩니다.
저의 전공은 교회역사입니다. 역사학자로서 교회역사를 보면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고 교회와 세상이 구별될 때에는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우리도 대 부흥을 목표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 부흥을 이루려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달라져야 됩니다. 지금 다르다고 할지라도 더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1세기 초대교회 때부터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될 때까지는 세상과 아주 달랐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로마의 열 명의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카타콤으로 들어가고, 사자에 물려죽는 핍박을 당하고, 모든 권리를 빼앗기는 등의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크리스천이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그때, 교회가 세상과 구분 되었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큰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300년대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기독교를 인정해준 위대한 황제라고 추앙하지만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콘스탄틴만큼 가짜신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십자가를 칼과 방패에 그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권다툼을 할 때에 십자가를 이용했습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전쟁에 승리하리라는 목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그려 넣은 칼을 가지고 사람을 찔러 죽였습니다. 십자가를 그려 넣은 방패로 칼을 막았습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서 성공을 하고 로마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313년에 소위 ‘밀라노칙령’이라는 것을 발표해서 기독교를 로마에서 인정받는 공인된 종교로 인정을 해 준 것입니다.
콘스탄틴 황제 후 테오도시우스 2세라고 하는 황제는 381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을 해줍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상과 다른 종교에서 점점 세상과 합해진 국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국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다 교회소속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인지 세상인지 알 수 없는 잡탕밥, 비빔밥, 돌솥밥이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로 들어가게 되었고 참된 부흥은 사라지고 교회의 진리는 죽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너무나 세속적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교회가 너무나 세상과 구별과 차이가 없어지지 않았는가, 우리가 지금 세상 사람과 뭐 다른 점이 있는가. 이런 문제에서 오늘날 우리의 혼란과 위기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영원 전부터 차이가 났고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의 차이를 더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과는 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방법 쓰지 말고 세상의 복수, 원수 이런 것 쓰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과는 다른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지금 다르다고 할지라도 더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지는 만큼 하나님은 교회에 부흥의 영을 내려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불택자를 택자로 바꿀 능력은 없습니다. 택자를 불택자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권리도 없습니다. 단지 제가 권할 수 있는 것은 마가복음 16장 16절의 말씀뿐입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영히 고통을 받을 것이요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침례교가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성공회 등과 비교할 때 다른 점은 국가교회에 있습니다. 다른 교단은 국가교회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다른 종교를 배격하고 기독교 국가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침례교회는 아닙니다. 우리의 이상은 자유교회(free church in a free state)입니다. 침례교회는 국가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므로 국가교회를 반대합니다.
침례교회는 국교를 멀리하고 부정하고, 국교는 가짜교회라 하고 하나님의 백성 택한 백성들이 참되게 모여서 분리된 교회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분리주의(separatism)입니다. 세상으로 분리되고 국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침례교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침례교회가 물 많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침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순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것이고 우리는 세상과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론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우리가 하나님의 큰 부흥을 체험하려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더욱 세상과 분리되어 신앙으로 순수하고 깨끗하며,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교회가 되고, 성도 개개인이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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