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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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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양의섭 목사 |
참고 : | 2007-12-03 왕십리중앙교회 http://www.wangjoong.org/ |
출11장 4-8
임마누엘, 찾아오시는 하나님
1. 심한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이른바 고독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은 많은데 나는 언제나 혼자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매일매일 만나는 익숙한 얼굴들, 그러나 그 얼굴들은 나를 모르고, 나는 언제나 외롭고 홀로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이럴 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친구입니다. 어느 글에 보니 친구에는 4가지 부류가 있다고 합디다.
첫째 꽃과 같은 친구.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 /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는 / 바로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둘째 저울과 같은 친구. 저울은 무게에 따라 /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웁니다. / 그와 같이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입니다.
셋째 산과 같은 친구.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줍니다. /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 마음 든든한 친구가 / 바로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넷째 땅과 같은 친구.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 바로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좋지요? 그런데 나는 반드시 가져야 할 친구는 이런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전쟁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인데, 총알이 빗발치고, 여기저기 폭탄이 터지며, 적군이 몰려오는 현장에서 저 앞에 무방비 상태로 홀로 부상을 당해 버려진 전우,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그러나 구하러 가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 그럼에도 전우를 구하겠다고 뛰어 들어가는 친구, 이런 친구가 있는 사람, 복된 인생입니다.
2. 마음이 쓸쓸하고 힘들 때, 마치 홀로 전쟁터에 버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한 낭보(朗報), 복음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현장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그렇게 이 추잡하고 더러운 내 삶의 현장에 찾아오셨다는 소식!
그 소식이 바로 성탄절의 축복이고, 그것을 기다리는 기쁨이 대림절의 의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겠다는 소식.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의 애환 속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겠다는 소식. 그리고 그 날을 기다림!
성경은 그것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성경을 보면 삶의 현장에서 두렵고 떨리고 절망스러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 주십시오!’ 벌어지는 현상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금송아지 숭배로 심기가 불편하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3)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화가 나고 서운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약속하신 것이 있어서 약속대로 그들을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동행하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먹고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또 다시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참을 수 없을 것 같으니 동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반응,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4). 그리고 지도자 모세의 반응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5)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겐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복이지 하나님이 떠나버린 상태,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이미 잘려버린, 마치 꽃병 속에서 활짝 핀 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건 이미 시한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좌우에서 무서운 현상이 벌어져도, 자기의 삶을 당장에 무너뜨릴 것 같아도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면 그것들은 모두 종이호랑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사 41:10a)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사 43:1b-2a)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네 삶 속에 찾아오십니다. 그리곤 임마누엘,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축복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b)
3. 그런데 조금 이상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통치자 바로를 치시는 장면인데, 그 마지막 재앙 장자(長子) 죽음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바로에게 전합니다. 장차 애굽 온 땅에 장자, 처음 난 것은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조리 죽을 것이며, 애굽 온 땅에 이 비극으로 인하여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 애통과 절규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곤 실제로 이 비극은 그대로 시행되어 교만하던 통치자 바로는 즉시 두 손을 들고 말았고,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유월절이 유래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자손대대로 가르치고 전해주는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본문에서 조금 흥미로운 것을 봅니다. 4절,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즉 그 무서운 장자 죽음의 재앙은 하나님께서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심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신다는 것은 우리 성경적 표현으로 본다면 이 또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데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 계십니다.
그런데 보세요. 어떤 이들에게는 이 임마누엘이 환희와 기쁨, 능력과 소망이요,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과 아픔, 절망과 죽음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임마누엘이 너무너무 기다려온 축복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에게는 임마누엘은 너무너무 두려운 저주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보입니다. 환호하는 무리, 절망하는 무리!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애굽인에겐 임마누엘이 고통이요, 이스라엘에겐 임마누엘이 축복입니다. 저주받은 백성에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고통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백성에겐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임마누엘에겐 이렇게 이중성이 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심이 여러분에겐 축복이요 기쁨인가요, 아니면 고통이요 부담인가요?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날 때 아닌가요? 술집에 앉아 있을 때가 아닌가요? 범죄의 현장에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게 여겨진다면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납시다. 그 상황에서 나갑시다! 그것이 바른 것인지, 그른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때, 심령이 불편하고, 하나님이 이곳에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편치 않을 때에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 박차고 나갑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곳이 못된다는 증거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기쁘고 즐거운 그런 자리로, 그런 삶으로 전환합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아멘!
4.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류시화의 시가 있습니다.
물 속에는 /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 하늘에는 /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내 안에는 /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 그대가 곁에 있어도 / 나는 그대가 그립다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임마누엘, 내 안에 찾아와 계시는 하나님. 늘 그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그 분과 함께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하면서도 마치 이 시구(詩句)와 같이 그 분이 그립습니다. 왜 그럴까?
어쩌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주님과 나는 영원한 평행선을 그으며 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주님의 길, 나는 나의 길, 그렇게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적당한 간격으로 평행을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서도 나는 주님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닐까요?
임마누엘, 하나님은 나를 찾아오십니다. 내가 그 분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너무 바쁜 나머지 하나님을 잊고 사는 나의 삶의 현장에, 내 복잡한 심리 상태 속으로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노크하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 나에겐 축복임을 믿습니다. 때론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이 부담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그러나 내 모든 삶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내게 복이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뭘까요?
내가 그 분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 분을 좋아하면서도, 함께 한다고 하면서도 그 분의 삶을 내가 살지 않고, 내 욕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굳이 내 삶 속에 찾아오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 하나님과 평행선을 달리지 말고, 그 분의 사랑 안에 함께 녹아져, 그 분의 삶을 삽시다.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사랑, 그 타오르는 심장으로 예수님의 삶을 이어갑시다.
대림절, 우리를 찾아오기 위해 하늘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박차고 내려오신 우리 예수님, 그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 대림절에, 우리도 그 분과 함께 우리의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를 박차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기뻐하실 그 일들을 찾아 행합시다. 그리스도인, 아니 예수쟁이로 우리 한번 남은 세월을 멋지게 그리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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