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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군 70명이 60만 대군으로 확대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출애굽기 궁극이............... 조회 수 2079 추천 수 0 2013.06.09 17: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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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1:15-22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15-22.

 

15-22: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성경구절 끼워 맞추는 그게 관주성경입니까? 관주성경적으로 설교하면 안 되겠지요? 성경구절 끼워 맞추는 이거 조심해야 되고, 또 성경 속에는 많은 재료들이 있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자기의 사상대로 성경 속에서 구절적으로 해당 구절을 끄집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성경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만드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예를 들어서 신명기 128절에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리라하는 그 뛰어나리라그것만 빼다가 정치적으로도 갖다 붙여 쓸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도 갖다 붙여 쓸 수도 있고. 그렇게 쓴다 그 말이요.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건데 그렇게 쓴다 그 말이요.

 

또 성경에 복이 임하리니하는 게 있는데 믿는 가정에 가 보면 액자 같은데 복이 임하리니그런 구절이 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영원한 복, 신령계의 복입니다. 복은 없어지지를 않아야지요. 없어지는 건 복이 아니란 말이요. 성경에서는 없어지지 아니하는 그 복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데 액자를 만들어서 복이 임하리니하는 그 성경구절을 넣을 때는 없어지는 복을 생각하고 달아놓는 겁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주로 보면 없어지는 복을 생각을 하고 달아놓지요,

 

물질부요는 없어지지요.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없어지는 물질적인 복으로 생각을 하고 말을 하지요? 그러니까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 말을 했는데 문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목적하고는 엄청나게 달라져 버린다. 성경은 하늘나라를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말하고 있고, 신령한 것을 말하고 있는데 자기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경을 써먹는다 그 말이요. 엄청나게 달라진다.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져 버려요. 하나님은 하늘을 말하고 있는데 인간 자기는 하늘을 말하는 그 성경구절을 갖다가 땅의 것을 말하고 있단 말이요.

 

그러면 그렇게 써먹는 그 사람 속의 사상은 뭐요? 땅이지요. 그렇게 달라요. 엄청나게 달라요. 하나는 영생이고, 하나는 사망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 목적이 그러니까 인간 속에 들어있는 사상과 개념도 그렇다 그 말이지요. 목적이 다르면 개념이 그렇게 달라져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구절 갖다가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구절을 따가지고 말을 만들진대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하는 그 구절이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그 구절 하나 따고, 그 다음에 성경에 지옥이란 말이 있지요? 그러니까 지옥 간다하는 그 말을 똑 따가지고 예수 믿으면 어디 간다? 따서 갖다 붙이면? 예수 믿으면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붙일 수 있단 말이요. 이것도 성경구절이니 성경이지. 그렇지요? 그래요?

 

이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에서도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지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다하고 알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의사적인 면을 보고, 그 다음에 역사적인 면을 보고, 또 불신자적 인간의 마음에서 또 한 번 보고, 그렇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축복을 했지요. 그런 축복을 했는데 이스라엘이 70명이 애굽에 들어갔는데 출애굽을 하면서 장정만도 60만 대군이 됐어요. 그런데 역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에 그 때 당시 가나안으로 올라가면 그곳에는 몇 족속이 있지요? 일곱 족속.

 

그래, 이스라엘이 60만 대군이라 할지라도 그런 곳에 올라가면 그 가운데서 보호를 입을 수 있을까요? 또 그 이전으로 올라가서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도 그 대 애굽 속에서 이 70명이 보호를 입을 수 있을까요? 참 어렵지요.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요.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정신을 갖는 면을 여러분들이 한 번 살펴보란 말이요. 우리나라에 기독교인들이 몇 명? 천만 명? 천만 명이면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4천 만 명이 넘나? 그렇다면 네다섯 사람 중에 기독교인이 한 명인데, 여러분들,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사상적인 면으로 세상적으로 흡수가 되지 않고 살아 있습니까?

 

네다섯 사람 중에 한 명이 기독교인인 이곳에서도 자신의 신앙사상을 보호하기가 어려운 건데 이스라엘 70명이 대 애굽 속에 살면서 애굽으로 녹아버리지 않으면 천만다행이지요. 우리 인간은 감염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일터에 나가면 감염이 될 거고, 아무리 진리를 받았다 해도 많은 사람들 틈에 가서 있으면 감염이 될 거고, 더더군다나 학생들은 감염성이 더 빠르지. 그 분위기 그런 가르침에 그만 감염이 될 거고.

 

아브라함의 그 신앙심, 요셉의 그 신앙심, 다윗의 그 신앙심을 보호하기가 굉장히 어려울 거다. 보호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라기 보다도 측은하단 말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미리 보낸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건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이 되겠지요? 역사적인 면으로는 요셉이 왜 애굽에 내려갔지요? 형들이 팔아먹어서 지요.

 

하나님께서 미리 요셉을 애굽에 보내가지고 국무총리를 시키고, 또 셈 계통인 힉소스족이 애굽의 왕이 되게 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보호를 입도록 해서 430년 만에 603550명으로 불어나게 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70명이 들어가 가지고 계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번식을 시켜서 나오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어느 면으로 보니까 그렇단 말이요? 역사적인 면으로 보니까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으로 보니까 그렇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느 면으로 본 거지요? 그렇지요. 역사인 것 같으나 하나님의 주권 면을 염두에 두고 역사적으로 말한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430년 전에, 그리고 430년 후에 대대의 흐름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계속되어 나온 것을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이 이러하니 하나님의 그 일을 막으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지요.

 

우리가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 봅시다. 무슨 뜻인가 하니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이게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냐?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우리 신학생들? 이게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된 거요?

 

공회가 공포함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냐? 맞아요?

 

그 다음에는 이 성경을 성경으로 편집을 하기 전에는, 하나의 책으로 꿰어 맞추기 전에는 각 권이 두루마리로 각각 떨어져 있었다 그 말이지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모세가 썼지요? 구전적으로 죽 내려오던 것을 모세가 기록영감의 감화를 받아서 썼단 말이요. 그래서 모세가 오경을 기록을 했어. 그 뒤로 죽 나가면 이제 모세로부터 약 500, 1,000년 이렇게 나간단 말이요.

 

그러니까 몇 백 년 후에 기록해 놓은 게 있고, 몇 십 년 후에 기록해 놓은 게 있고, 몇 천 년 전에 기록해 놓은 게 죽 있는데, 그러니까 기록된 시대가 각기 다른 각 권의 책들이 각각 누구 집에, 어느 굴속에 등등에 처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전부 다 찾아내가지고 72칸의 방을 만들어서 70명이 각 방에 들어가서 금식기도를 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하고 추려낸 것이 오늘날의 성경이란 말이요. 이렇게 편집하기 전에 모아놓은 것 중에는 물론 외경도 많이 있었지요. 잡신이 들려가지고 성경 비슷하게 기록한 것도 있었을 거고. 그런 여러 기록 중에 추려낸 것이 오늘날의 성경이란 말이요.

 

그러니까 편집을 해서 성경이 된 기록물이라 할지라도 편집을 하기 전에는 성경이 아니었는데 편집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기록 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을 기록하기 이전에는 사건이 있었지요? 그러면 모세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홍수의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요?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얘기를 해주듯이 사람들 귀로 입으로 노아홍수의 사건이 구전적으로 전해 내려왔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 사건들을 기록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는데 모세가 기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하기 이전 구전적으로 전해 내려올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게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기록을 할 때에 모세 생각에 내가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앞으로 성경이 될 것이다하고 기록을 한 겁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신약성경의 사도바울의 편지도 보면 마찬가지에요. 사도바울 자신도 내가 이걸 써놓으면 앞으로 성경이 될 거다하고서 기록한 게 아니란 말이요. 자신은 모르지요. 성경으로 된 것 외에 사도바울의 편지가 많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이 다 성경에 안 들어갔느냐 그 말이요.

 

그러면 현재 66권의 성경 중에 어느 한 권을 빼버린다면 빼버린 그것은 성경일까요, 아닐까요? 그것도 성경이지요. 그러면 다 빼버리면? 그래도 성경입니까? 그럼 어디까지가 성경이요? 성령의 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계시목적으로 활동된 것만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기록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록하기 이전, 즉 문서계시 이전은, 성경으로 만들어지기 이전은 불문계시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 때 그 때 그 시대에 필요한 대로 하나님께서 보여준 겁니다.

 

모세가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활동이 된 것은 모두 다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기틀을 삼아가지고 신앙적으로 순종해 나가야 한다 그 말이요. 신의적에서 신앙적으로 나가야 한다. 신의적인 기틀에서 신앙적으로 순종하면서 나가야 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신의적이 없이 하나님이 해 주시겠지하는 그 신앙은 무슨 신앙이지요? 신념적 신앙이요, 신뢰적 신앙이요? 물론 신앙 속에는 신뢰적 신앙도 들어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신뢰적 신앙으로만 나가면 안 돼요. 신의적에서 신뢰적인 게 있어야지 신의적도 없으면서 신뢰적인 거는 신앙이 아니에요. 오늘날 신의적도 없는 신뢰적 신앙이 얼마나 많아요.

 

그리고 70명이 애굽 속에서 60만 대군으로 나오는 그 과정 속에서 애굽에서 피와 땀을 흘린 선민 이스라엘의 노력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사건이 와봐야 알 수가 있지요? 배부르고 시간 날 때는 누군들 예수 못 믿어. 그렇지 않아요? 사건이 와봐야 아는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이거 믿음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믿음이다하는 그 속에는 뭐가 바탕이 돼 있지요? 그냥 믿사오니하는 게 믿음입니까? 믿음이 뭐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제 고집대로 나가며 하나의 신념적 신뢰적으로 믿는 걸 믿음이라고 하는 걸 많이 봅니다.

 

이건 기반도 없고 기틀도 없는 허황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냥 힘만 쓰는 거지. 신의적도 없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순종도 안 하고 맹탕이야. 그러니까 속이 텅 비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주권이라든지 그런 건 아무 것도 없고, 그런 건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믿는 거. 오늘날 이게 기독교 현상이란 말이요. 속에 알맹이가 하나도 없어요. 껍데기뿐이야.

 

그러니까 사건이 오면 휙 날려가고 휙 날려가고, ‘누구 돌잔치다그러면 돌잔치 바람에 휙 날려가고, ‘누구 생일잔치다그러면 휙 날려가고, ‘누구 결혼식이다그러면 휙 날려가고. 웬 바람에 그렇게 잘 날려 가는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는 그게 무슨 믿음이야. 제 좋은 대로 할 것 같으면 그게 무슨 믿음이야. 아직 덜 커서 그래?

 

덜 큰 아이는 자기 스스로 걷지는 못해도 엄마 손을 잡고 뒤뚱거리면서 따라가지요. 그런데 조금 더 큰 이이가 엄마 손을 잡고 가지를 않고, 부모 뒤로 따라오는 게 아니고 제 가고 싶은 대로 딴 길로 새버렸어. 그러면 그 아이 속에는 뭐가 있어요, 없어요? 엄마를 따라오는 게 자기 고집이요, 제 마음대로 내빼는 게 자기 고집이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거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사울과 요나단은 다윗과 함께 나와서 싸웠습니까, 꼼짝도 안 했습니까? 꼼작도 안 했지요. 그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그 믿음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없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드러내실 때에 내가 그것을 청부 맡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청부는 내가 맡고, 청부는 다윗이 맡았고 일은 누가 했지요? 하나님이 하셨고. 그러면 상급은 누가 받고? 하나님이 받았어요, 다윗이 받았어요? 다윗이 받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인정을 하고 신의적 믿음의 바탕에서 신뢰적으로 잘 순종해 나가면 하나님의 일을 누가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지요.

 

기독교의 일이 신적인 일입니까, 인적인 일입니까? 신적인 일. 확실합니까? 우리 믿는 사람에게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된 그 전부가 신적으로 된 겁니까, 인적으로 된 겁니까? 신적으로 된 거.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된 거. 그리고 성화구원도 신령성인데 이게 신적인 면에 속하는 거요, 인적인 면에 속하는 거요? 신적인 면. 그렇지요. 하나님의 일이란 말이요.

 

그러면 기독자들이 신앙적으로 활동하는 일들이 전부 다 신적입니까, 인적입니까? 우리가 인적인 일을 하는 겁니까, 신적인 일을 하는 겁니까? 신적인 일. 확실하지요? 확실한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일은, 기독자의 일은 전부 다 하나님의 일이지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일이 아니란 말이요.

 

그러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는 겁니까, 인간이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라야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 일에 순종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이 됨으로써 또한 거기에는 자기에게 성화구원이 입어지는 것인데 이것도 하나님의 일이란 말이요. 우리의 신앙심, 신앙 믿음하는 것도 전부 다 신적인 거고 신령한 거고, 인적인 것은 없단 말이요.

 

그러면 불신자를 데리고 와서 앞에서 말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의 일이냐? 아니란 말이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건데 하나님이 성도에게 능력을 주어서, 진리지식을 주어서, 성령을 주어서 그 일을 하게 한단 말이요. 그러니까 불신세상의 회사나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처럼 교회를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돼요.

 

기독자가 하나하나 움직여나가는 거, 전도하고 기도하고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하는 거 전부 다 하나님의 일이란 말이요. 방편적으로는 인간의 일처럼 보이지만 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니 엄청난 긍지를 가져야 돼요.

 

이스라엘 70명이 애굽에 들어가서 60만 대군으로 강하게 그리고 많게 불어나오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일이 보이지 않아요? 누가 그 일을 막겠느냐 그 말이지. 아무도 못 막지요.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알고 신의적 바탕에서 믿음으로 순종이 돼나가는 그런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드러내실 때에 그건 내가 하겠습니다하고 나가는 것이 믿음이라 그 말이요. 그럴 때 자기가 쏙 들어가 버리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그 말이요.

 

개인에게 오는 사건이 있고 단체에게 오는 사건이 있고 전체에게 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있고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때에 이런 사건이 올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갈 수 있을 수 있게 예비적으로 미래적으로 준비를 하고 사는 것도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궁극적 섭리의 역사 그게 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사적 주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그 목적과 나의 목적이 단일이 돼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건선택의 목적은 뭐였지요? 사건선택의 목적? 존재선택을 하기 전에 사건선택이 있지요. 우리 신학에서 배웠지 않았나? 뭐였어요?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존재적으로 선택하기 전에 존재는 안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의지세계 속에서 존재를 선택하는 그 의지가 있단 말이요.

 

이 일을 하려면 누구 누구가 필요하다할 때 이 일을 하려면하는 이거는 무슨 선택이요? 사건선택이요, 존재선택이요? 사건선택이지요. 그러면 누구 누구가 필요하다고 하는 거는 존재선택이요, 사건선택이요? 존재선택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건선택의 그 목적은 뭡니까? 왜 그 사건을 하나님의 의지 속에서 선택을 했느냐 그 말이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때문에. 그 목적 때문에 존재를 선택한단 말이요. 존재를 만든단 말이요. 좀 깊게 들어가려니까 왜 이렇게 힘드냐? 맨날 예수 믿고 복 받는다그러면 좋을 텐데.

 

하나님의 설계성은 그 무엇에 의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설계성에 대립적인가 호응적인가, 아니면 자원적 순종인가 구경꾼인가? 구경꾼은 하나님 앞에 자원적 순종으로 들어갑니까, 그냥 따로 있습니까?

 

우리가 성화구원 면에 있어서도 부분적인 면에서 출애굽을 해야지요. 그렇지 않아요? 존재적으로 교회에 나와 있지만 내 존재 속에서 애굽성이 얼마든지 들어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성분적 사상적인 면에서 계속적으로 출애굽을 해 나가야 돼요. 그러면 출애굽을 하려면 대립을 해야 만이 될는지, 자원적 순종으로 나가야 만이 될는지?

 

모세가 신뢰적인 신앙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진리사상의 진리지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넣어주는 그 교훈이 아주 피눈물 나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모세나 여호수아를 볼 때에 이들은 자원적 순종으로 나갔지요.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왕들은 그만한 믿음이 못 되니까 자원적이 아니고 피동적으로 순종이 돼 나갔고, 그런가 하면 바로 왕은 대립적이었지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가룟유다는 대 공로자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면 바로 왕은 대 공로잡니까? 가룟유다가 아니었다면 성도들의 구원이 이루어지지를 않지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 구원사역 면에서 볼 때에 이 가룟유다는 협조를 한 거지요. 그게 아니라 제 좋아서 했어? 그러니까 우리가 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서 누가 주격이냐에 따라서 그 해석 면이 확 달라진단 말이요. 그렇지 않아요?

 

가룟유다 당시에 불신자들 입장에서 그 사건을 보면 누가 주격으로 놀고 있지? 대제사장과 가룟유가 주격으로 놀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이면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대 주권 섭리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이 주격이 돼 있지요. 딴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주권적 섭리에 전부 다 동원이 돼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인간 편에서 보면 그 사건에서 하나님은 안 보이고 대제사장과 가룟유다가 주격적으로 동원이 돼 있는 것으로 보이지요.

 

우리가 어떤 눈을 가지고 봐야 바로 보는 눈이고 바른 신앙입니까? 돌아가는 분위기를 봐야 되는 겁니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 누가 주격이다하는 이게 안 보입니까? 그게 안 보여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였다고 해도 그 가운데 진리적으로 나간다면 거기에는 누가 주격이지요? 그건 하나님이 주격이 되고, 그러나 먹고 놀고 판치고 하는 거기에는 뭐가 주격이지요? 뭐가 주격이요? 세상이 주격이지. 그렇지 않아요? 그런 걸 빨리 보란 말이요. 그런 걸 빨리 봐야 하나님이 역사가 보이지. 그래야 자기가 설 곳을 아는 거고, 할 일을 아는 거지 안 그러면 같이 휘말려서 죽는 거요.

 

하나님께서 궁극적 목적적 영원적인 구원역사를 하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대국적 구원입니다.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 어떤 사건이 어떻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전부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이 대국적인 구원의 역사로 다 돌아가는 거요. 그걸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아요.

 

그러면 왜 그렇게 잡아 돌리느냐? 나를 하나님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주려고, 나로 하여금 천국을 하나님처럼 누리고 느끼게 하려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영원히 받아서 느끼게 하려고. 그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해서이다그거 하나만 달랑하게 생각을 하면 안 된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진리대로 살라고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줄지 말지가 아니고 천국은 이미 법적으로 우리에게 주었고, 문제는 내가 그곳에서 그 천국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누리느냐하는 그 면이지요.

 

부모가 자식을 생산해 냈으면 내 자식이 될지 말지그게 아니고 인간으로 나왔으니 이 세상에서 얼마나 효율적인 실력을 닦느냐하는 그걸 걱정하는 거지요. 고깃덩어리만 크면 그게 무슨 인간의 가치가 있어.

 

이 세상도 가만 보면요, 하기야 돈이 많으니까 그 짓하는지 모르겠지만 돈이 워낙 많으니까 맨날 자기 몸을 씻고 닦고 꾸미고 처바르고 하지요. 그게 자기 인격을 꾸미는 거요, 자기 고깃덩어리를 꾸미는 거요?

 

주름살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펴야 되고, 코가 납작해지면 올려야 되고, 쌍꺼풀 없으면 찢어서 쌍꺼풀을 만들어야 되고, 내장도 썩으면 돈이 많으니까 딴 사람의 내장을 잘라다 붙이고. 그 뭐하는 거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고, 이제 나이 들면 워낙 일을 안 해 가지고 또 병이 들고. 이스라엘 여자들을 봐요.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얼마나 생산이 잘 됐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들이 많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따로 있지요. 그리고 느끼는 자가 또 따로 있고. 종류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누구지? 인간이지요. 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를 종류적으로 보면? 인간이지요. 또 같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특수한 사랑을 받을 자는 성도들이지. 따로 있어요, 따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시키고, 광야생활을 시키고. 지금 우리가 광야생활 하는 거지요? 광야교회, 광야생활을 시키고.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수 천 년을 내려오면서 싸우고 있단 말이요. 지금도 저 중동의 이스라엘 쪽에 싸우고 있지요? 역사적으로 그걸 죽 보란 말이요.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그걸 딱 남겨놨어요.

 

이스라엘이 싸우는 거 보면 참 지독해요. 여자들도 전부 다 무장을 하지요. 영적인 선민 이스라엘들에게 일반계시를 들어 신앙적으로 깨닫게 하려고 놔둔 거란 말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어떻게 돼 있지요? 여러분 싸웁니까? 딴 교회는 몰라. 딴 교회는 모르는데 우리교회 성도들은 신앙사상적으로 싸워요? 대내적으로 싸우고 내외적으로 싸우고. ‘신앙사상적으로 내 속에 세상의 물이 안 들겠다.’ 그 다음에 신앙사상적으로 정복을 해야 되겠다하는 그런 싸움이 있습니까? 그거 없으면 믿는 맛이 없어. 싸울 줄 모르면 그건 죽었어요. 죽은 거는 못 싸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성은 그대로 있으면서 우리의 대국적인 구원을 위한 역사를 물질세계에서 마지막 그날까지 계속적으로 진행해 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그 하나님의 주권성에 호응할 것이냐, 대립을 할 것이냐, 아니면 자원적 순종으로 나갈 것이냐?

 

성도인 자기는 이 구원을 기준해 가지고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타의 구원을 위해 이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안 해야 할 것인가? 많은 사람의 비난이 있고 환난이 있고 핍박이 있다 하더라도 자타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궁극적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이 길을 간다하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 때 70명의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서 60만 대군으로 되어 애굽을 나왔고, 그러면서 또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아주 그냥 혈투에요. 혈투. 하나님의 대국적인 그 구원의 신앙사상을 가지고 싸우는 겁니다. 애굽에 있는 동안에는 애굽화 되지 않게 대내적으로 향락주의와 싸워서 승리를 하고, 안일주의와 싸워서 승리를 하고, 영웅심이나 공명심과 싸워서 승리를 하고. 이거는 몸 안의 것과의 싸움인데 이 싸움에서 승리를 못한다면 대외적인 싸움에서도 모두 패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치적으로 본다면 먼저 자기 속에서 이스라엘을 확장시키고 확대를 시켜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상과 성분과 인격으로 확대시키고 확장을 시켜야 돼요. 자기 속에서. ‘, 이런 것은 하나님의 사상이구나. 진리구나. 하나님의 기준이구나. 아니구나이걸 빨리 빨리 바로 세우고 집어넣고. 그 계산법은 언제든지 궁극적 그 나라를 목적으로 되어야 하고. 70명이 60만 명의 히브리인으로 되도록 성장을 하라 그 말이요. 그런데 보통 보면 애굽의 성장이 앞섭니다. 자기 속에서 애굽의 성장이 앞선단 말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대외적으로 바로 왕과 또 싸웠지요. 바로 왕의 운동은 생명적 계대운동을 못하게 뭐를 죽이라고 그랬지요? 아들을 죽이라. 아들을 죽이면 계대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도 그래요. 바로 왕의 운동은 이스라엘의 생명적 계대운동을 못하게, 못 잇게 합니다.

 

그 생명적 계대를 이어나가는 일을 하는 것이 기독교의 운동이요 성도의 운동이란 말이요. 그런데 바로 왕은 그 운동을 못하게 남자아기를 죽이라, 상속자를 죽이라, 힘 있는 자를 죽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면으로 말씀드리면 바로 왕의 운동은 진리와 생명운동을 못하게 한다 그 말이요. 성도 속에 진리와 생명이 들어있어야 그게 힘이 있는 거고, 그것이 자기의 후대 후계가 이어지는 거지요. 그런데 그 운동을 못하게 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그 운동을 못하게 하는데 있어서 그 방편이 대립적으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유혹적 미혹적으로도 들어오고, 호응적으로도 들어온다 그 말이요. 아들은 죽여라. 진리는 죽여라. 생명은 죽여라. 딸을 낳거든 더 낳도록 하고.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대한 바로 왕의 운동은 우리 앞에 확대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고 교훈적인 측면에서 성도들에게 이질적인 교훈을 주어서 진리생명을 죽여 나간다 그 말이요. 이게 누구 운동이요? 진리생명을 죽여 나가는 이 운동은 누구 운동이요? 바로의 운동이란 말이요. 그 때의 그 역사를 통해 오늘날 사상적으로 보란 말이요. 그러면 기독교 안에도 바로 왕의 운동이 있고, 좁혀서 보면 자기 속에도 바로 왕의 운동이 있을 수 있단 말이요.

 

그 바로 왕의 운동이 때로는 대립적으로도 오고, 때로는 호응적으로도 오고, 또는 대립을 일으키기 위해서 호응적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유혹적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미혹적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그런 이치를 발견하란 말이요. 안 그러면 70명이 들어가서 60만 대군으로 나오지를 못한다. 애굽에서 녹아져 버린다. 애굽에 물들어서 애굽족화 돼버려. 애굽성으로 물들어 버려. 물론 하나님의 자녀인 경우야 지옥은 안 가지만 지옥 맛을 보고 이제 기어 나올 테지만.

 

우리가 출애굽기를 보면서 그런 걸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안 그러면 출애굽 못해요. 이렇게 되면 절대로 신앙이 못 들어가고 예수 백날 믿어봐야 애굽 같은 그 성분에서 탈피를 못해요. 율법성이 안 들어가요. 말씀성이 들어가지를 않아요. 그러면 신앙은 못 자라요. 이러면 교회에 헛 다니는 셈이고 헛 믿는 셈이야.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는데 있어서 박해 때가 평범할 때보다도 더 진하게 입혀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그 시간 그 찰나 그 순간 그 시대를 놓치면 안 됩니다. 그거 놓치면 자기의 구원은 없습니다. 이룰구원이 없어요. 사건을 통과를 못하는데 어떻게 실력이 생기느냐 그 말이요.

 

실력이 없으면 사건이 올 때에 그 자는 노상 얻어터지지요. 실력은커녕 정복은커녕 실력이 없으면 노상 얻어터지다가 그 사람 일생 다 가요. 그 소용이 없어요. 실력이 없어서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천국은 법적으로 자기 것이 돼 있지만 효율적으로는 천국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누릴 실력이 없다 그 말이지요. 그런고로 자기는 부지런히 잠재적인 것을 발견하고 대내전으로 싸우고 대외전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싸웠다 그러면 절대로 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사상적인 싸움에서는 절대로 져서는 안 돼요. 혈육싸움에는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고 그렇지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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