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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7:2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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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9-09-13 http://www.yullin.org |
자녀를 위해 울 때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5-30).
Ⅰ.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깨끗케 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당시는 이미 예수님이 베푸신 큰 능력과 이적,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넘치시는 성품을 드러내시는 사역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진 때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에 둘러싸여 함께 두로 지방을 걷고 계셨을 것입니다.
Ⅱ. 예수께 엎드린 여인
그때 예수께 와서 급히 엎드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 여인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여인은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A. 힐라인· 수로보니게 여자
유대인과 헬라인은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지식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못 미친다고 하대하였고, 유대인들은 기적에 있어서 헬라인들이 자신들을 따를 수 없다고 자랑하였습니다. 더욱이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여자였습니다. 페니키아 태생이었던 것입니다. 페니키아는 해상민족이었는데 그야말로 그녀는 고향과 거리가 먼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물의 구주이시지만 혈육의 계통으로는 유대인이셨습니다. 유대인인 예수 그리스도께 헬라인인 이 여인이 엎드린 것은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귀신들린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B. 귀신들린 딸
귀신들린 딸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성경이 “더러운” 귀신이라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우리는 귀신의 영적 추함뿐만 아니라 그 귀신들린 딸의 상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은 녹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소위 축귀사들이 있었고 아마 그런 사람들의 도움도 받았을 것입니다. 민간에서 전해오는 비방들도 이미 사용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절망 속에서 어미인 수로보니게 여자가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간구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인에게는 간구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C. 간구하는 믿음
물론 우리는 이 믿음을 과대평가 하거나 과소평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간구했다는 점에서는 과소평가 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과대평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종의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에 의지해서 간구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라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직접 뵙지는 못 했지만 수많은 병자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하시는 큰 능력, 그리고 그 모든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긍휼과 자비를 경험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그 소문들은 실낱같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여인에게 그분을 만나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을 것이라는 절박한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소문을 듣고 곧”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이 이전에 행하신 일과 그분이 오신 소식이 거의 같이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고 그분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III. 참척(慘慽)과 부모의 간구
간구의 내용은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쫒아 주시길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타는 듯한 마음으로 예수께 와서 빌었습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이 “내 믿음이 크도다. 걱정마라.”고 말씀하시면서 위로하고 돌려보내실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탄원을 부러뜨리기라도 하시듯이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차가운 대답이었습니다. 여기서 “떡”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진리 혹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든 언약백성에게 나아가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떡은 유대인에게나 주는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합당치 않다.” 더욱이 개들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간구하는 어미와 귀신들린 딸을 묶어 말씀하시는 호된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는 어긋난 반응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그 말씀은 매우 훌륭한 은혜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할 때만 해도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병든 딸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었고, 예수님을 찾았지만 그것은 오직 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냉정하게 말씀을 하셨을 때 이 여인의 마음이 이번에는 병든 딸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주권을 가지신 예수께 모아졌던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를 향하여 불타오르게 되자 그녀는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당신이 나와 내 딸을 개로 취급해도 좋겠으니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고 남은 긍휼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주옵소서.” 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단번에 들어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생각만 품어도 들어주신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가혹할 만큼 긴 시간동안 가슴 아프게 기도했는데도 응답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을 때도 있지만 명백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우리를 바꾸시기 위한 오묘한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섭리 가운데 우리를 이끄시기 위하여, 기도제목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좌절된 기도 제목 가운데 주님께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예수를 바라보게 하셔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들이 마음에 원하는 제목을 품고 아무리 뜨거워졌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께 집중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강한 역사가 불붙어 타오를 때 내 마음에 그 불꽃은 아주 작은 불꽃이지만 쇠도 녹일 수 있는 집중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불꽃과 같은 집중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무엇으로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우리의 본성을 깨뜨려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임에도 가혹하리만큼 그것을 연기하셔서 마치 쇠를 단련하듯 단련하여 순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어미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냉정한 취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더 치열하게 타올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을 채우고 그분께 영혼의 응시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은 예수님을 절대 의존하는 마음이 되었고 그 절대의존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어려움을 통해 기도하는 과정으로 우리를 바꾸시고자 하는 신앙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믿음으로 승화시켜 예수께 간절히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미의 마음입니다.
A. 영적 참척이란?
본문을 통해 우리는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무엇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여인을 보며 여러분들의 자식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 여자처럼 부모로서 가장 기본적인, 자식을 긍휼히 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 아이들은 여인의 딸처럼 귀신들리지 않았고, 나이도 어리지 않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체가 이렇게 병들고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혔을 때 믿음이 없는 여인이 이렇게 매달렸다면, 이미 믿음이 있고, 예수를 알고, 영적으로 죽은 것 같은 자녀를 둔 아이들이 있는 부모가 얼마나 더 매달려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도 삯꾼 부모가 있습니다. 아무 목적도 없고 그저 자신의 인생을 위한 장신구처럼 생각하고 되는 대로 기르는 부모입니다. 자녀의 영혼과 정신을 위해서는 황폐하도록 내버려두고 육신만을 보양하는 부모도 삯꾼 부모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지와 어두움 때문에 삯꾼 부모가 되고, 어떤 이들은 사랑 없음과 자기 욕망에 붙잡힘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과 출산이 가장 거룩할 수도 있고, 가장 세속적인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를 주셨을 때 그것은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하기 위한 훌륭한 교사로 하나님의 본보기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까? 부모의 가장 참된 사명은 바로 자신을 통해 자식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주고 그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어떻게 아름답고, 어떻게 그 아름다움으로부터 멀어졌는지 발견하여 고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또 이 모든 일을 위해서 죄악 아래 태어난 자식들이 구원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참된 부모의 길은 포기하고, 삯꾼 부모의 길만 택하여 걸어간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 자식들의 부모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것처럼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자녀들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성경을 통해 주어지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분의 사람으로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참척(慘慽)과 부모의 간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참척이란 한자어는 부모를 앞두고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뜻합니다. 그때 부모의 비통한 마음을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어미와 아비는 미친 듯이 울부짖을 것이며, 자신의 생명과 죽은 자식의 생명을 바꿀 수 있다면 백만 번이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체의 죽음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잠시 살다 지나가는 것이고 십년 이십 년을 더 살고 덜 사는 것이 영원 속에 한 점처럼 왔다가 사는 인생사를 볼 때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이미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이 잠시 머무는 육체의 죽음은, 사랑이라는 버릇을 급히 끊어 놓느라고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도록 만들기는 하지만 결국 육체 안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끊임없는 만남과 이별의 사슬을 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육체를 벗게 될 때 영원히 함께 살 동고동락의 행복이며 부활 시에 다시 입을 거룩한 육체의 옷을 덧입기 위한 준비인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그러니 육체의 참척보다 더 두려운 것은 영혼의 참척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녀가 생기발랄하게 뛰어놀고 있지만 영혼은 죽은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어떤 교제도 없이, 육신의 빛 가운데 거할 때도 영혼은 흑암 속에 있고 육신은 자유로워도 영혼은 결박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영혼의 참척입니다. 누가 그 자녀들을 위해서 울어줄 것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기업이며, 태의 열매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죽어 있는데 어떻게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눕고, 밥을 먹고, 무엇이 그리 행복해서 재잘거리며 매일 생활 할 수 있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영적인 눈이 감긴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영혼이라는 있는 줄도 몰랐고, 자기도 죽은 영혼이었기 때문에 참척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어두운 부모 밑에서 영혼을 돌봄 받지 못함으로 그 긴 세월 동안 방황하며 어두움과 죄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림받은 자식처럼 살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있었기에 친히 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의 영혼에 손을 내미시고, 당신의 주권으로 참척의 상태에서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을 만났고, 은혜, 심판, 죄, 주의 사랑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울어주지 않습니까?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적나라하게 복음의 빛으로 이야기 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자녀들은 회심하였을 것입니다. 방심치 말고 자녀의 신앙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5년 뒤에는 저절로 회심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의 집안에 태어났으나 끝까지 신앙을 거부함으로 불신자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할 때에 주님이 천국에서 물으십니다. 네가 너에게 기업으로 준 네 자녀는 어디 있느냐? 여러분이 서 있는 거기가 천국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자녀의 위험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부모의 영혼의 병든 상태를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찼을 때 남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의 피붙이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 흘릴 수 없다는 것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녀가 날이 지날수록 마음이 강퍅하게 되고 지성은 이 세상의 사상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점점 어리석은 것으로 비추고, 그의 감정은 점점 육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무슨 좋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B. 부모의 믿음을 사용하심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의 믿음이 자기 딸을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그 딸이 더럽고 흉악한 상태가 되었는데 어떻게 믿음을 갖겠습니까? 그러나 이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이 여자 아이를 낳게 했고, 우리는 틀림없이 귀신이 내어 쫓기는 과정을 통해서 이 딸에게도 자기를 고쳐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모종의 믿음이 심겨졌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이 믿는 것으로 구원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간절히 믿고 자식의 영혼을 위해 자기 영혼처럼 안타깝게 매달릴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셔서 자녀에게 믿을 마음을 주시고 순종할 뜻을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할 의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로 회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단 한번이라도 마음에 꽉 찬 사랑과 자녀의 영혼을 향한 눈물을 머금고 자녀의 손을 붙들고 복음의 진실을 말해주어 보십시오. 그리고 네가 참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해보십시오. 잘 아는 가족들끼리는 진리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진리와 합치하는 삶이 있을 때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행하는 가장 무서운 일은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는 허탄한 일에 온 마음을 빼앗기며 살기에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에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참척의 상태가 있는데 어떻게 여러분이 울지 않을 수 있습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고(마 11:17), 가슴 치는 사람들이 있어도 눈물 흘리지 않는 부모들이 여러분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잠시 후 여러분의 자녀들의 신앙과 회심에 대해 무관심한 쓰디쓴 열매를 인생을 살며 거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고 두 가지만 하면 다 한 것입니다. 교육을 받게 하고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기독교 가정에 더 많은 자녀를 위한 눈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부모가 많아야 하는 것은 참된 목자가 더 있어야 할 필요성보다 절대로 덜하지 않습니다.
Ⅳ. 결론: 자녀를 위해 울라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세상을 위해 울기 전에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더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예수님이 얼마나 쓰라리셨을까요? 많은 여인들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통곡과 눈물로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겹게 고개를 들리시며 예언과 같은 말을 하십니다. 가슴에 새기십시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하나님 용서해 주심시오. 우리에게는 자녀를 위해 흘릴 눈물도 없나이다. 내 영혼을 버린 것처럼 자식의 영혼도 팽개쳤고 나는 삯꾼 부모입니다.”라고 고백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일천하고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여자가 예수께 와서 간절히 구하며 매달렸을 때 주님은 한 번 만나 보지도 못한 딸을 고쳐주셔서 그 가정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이런 영적인 생명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한 자녀의 태도가 변하기를 기다리지만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변화되기를 이제껏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음을 다해 영혼의 힘으로 “이 아이에게 회심을 주시든지 나에게 죽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에 영적 생명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009-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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