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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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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인생의 분기점에서(하프타임)
창 35:1-7
08. 6. 29, 오전
2002 월드컵 축구가 축구열풍을 가져왔습니다. 요즘도 월드컵 예선경기가 진행중입니다. 축구를 보시면 90분 경기 중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하프타임이라고 있습니다. 대개의 운동에 하프 타임이 있습니다. 전반전과 후반전 중간에 쉬는 시간입니다. 아니 작전타임입니다. 전반전에 성적을 올렸다면 후반전에는 유지해야 합니다. 반대로 전반전에 부진했다면 후반전에는 무슨 수를 내야 합니다. 전반전은 희망과 두려움이 겹칩니다. 후반전에는 희망보다 두려움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하프타임에 잘 해야 합니다. 특히 감독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러한 축구와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인생의 전반전에서는 열심히 뜁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다 얻어지는 결과를 언젠가 바라보면서 인생을 수정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정의 필요성을 느낄 때, 인생의 하프 타임시간에 전략과 작전을 바꾸고 실재 자신의 걸음걸음을 바꾸면서 인생의 후반전으로 들어간다면 정말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분기점주일입니다. 한 해의 절반에 서서 전반기를 돌아보고 후반기를 바라보는 주일입니다. 인생에도 하프타임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시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빈둥거려도 여전히 나이는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살날이 아주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뛰었는가? 돈은 충분히 벌었는가? 이제 후반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금년의 후반부는 어떻게 보낼까요?
잠시 늦추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하프타임은 반드시 나이와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40이면 중간이고 60이나 70이면 늦은 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보다 훨씬 늦어서도 하프 타임을 맞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아주 젊어서 하프 타임을 맞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변화가 없다면 여전히 전반전을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뛰다가 퇴장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아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돈을 얻기도 하고, 권세를 얻기도 하고, 명예를 얻기도 하고, 지식을 얻기도 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해서 또는 성공하기 위해서 달려온 우리의 인생,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혀 자기의 삶을 돌아볼 때, 그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생애는 더욱 보람되게, 복되게 살아야지 하며 마음을 고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에게는 성공을 얻었던 기억보다 실패와 아픔, 좌절의 기억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것이 아닌데......내가 원했던 모습은 이것이 아닌데......’
여러분, 저는 성경의 인물 중에 야곱처럼 되기를 참으로 원합니다. 야곱은 참으로 놀라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 그 이유는 그의 인생 전반전에서는 정말 형편없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얻었습니다. 출생 서열은 바뀌지 않았는데 장자가 갖는 권리를 자기가 가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자기가 원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서 14년 간이나 일합니다. 삼촌의 재산도 자신의 재산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형 에서를 어떻게 설득해서든지 화해하게 만들었던 야곱! 야곱의 전반전 인생은 성공을 향해서 내달리는 삶, 무엇인가 성취를 하기 위해 무엇인가 얻기 위해 정신 없이 달려온 인생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인생이 끝났다면, 야곱은 사기꾼으로 그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생 하프타임 때 수정을 합니다. 삶의 모습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단순히 자기 일을 성취했던 사람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서 믿음의 조상의 한 사람으로 그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게 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러분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오셨습니까? 꿈을 많이 이루셨습니까? 노력해서 물질도 얻고, 결혼도 해서 자녀도 낳고 ‘나는 이만하면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단계에 계십니까? 아니면, 열심히 살았는데 오히려 남은 것은 씁쓸한 패배의 기억과 병든 몸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쨌든 좋습니다. 이제 남은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하프타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기로 볼 때 주로 중년의 시기가 인생의 전환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중년은 정신 없이 살아온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시기입니다. 40-50정도가 되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얻고자 이렇듯 달려왔는지 생각하는 시기가 바로 중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크로노스] 즉,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때이든지 인생의 방향을 조정하는 시간을 하프타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입니다. 참고로 지금부터 1930년대 미국 사람의 평균 수명은 50세였습니다. 130년 전에 미국 사람의 평균 수명은 35살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평균 수명이 70, 80이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하프타임은 정해진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닌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 간에,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 인생의 하프타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자기의 작전타임을 어떻게 활용했을까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조정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기를 원하는 말씀입니다.
첫 째로, 그는 인생의 하프타임 때 하나님을 진지하게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3절 말씀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그 동안 하나님의 도움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자기의 지혜를 썼고, 아내를 얻을 때도 자기가 14년간 애써서 얻었습니다.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때도 삼촌의 집에서 자기가 노력했고, 자기가 머리를 잘 써서 삼촌의 재산이 자기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죽이러 왔을 때도 에서와 잘 이야기해서, 결국 자기의 지혜로 원수 관계가 풀어지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기의 노력과 애씀과 재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인생의 변화가 왔습니다. 형 에서와 화해를 한 후 숙곳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동산 투기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녀들과 영원히 함께 살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딸 디나가 세겜 추장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을 당하여 야곱의 아들들은 종교적인 이유를 빌미 삼아 세겜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 다음, 세겜 사람들이 고통 당할 때 습격해서 다 죽여버리고 여자들과 제물을 노략하는 엄청난 범죄를 행하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더욱 힘든 것은 자기의 아들들 내면 속에 있는 잔인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잔인하게 행하는 복수극을 보면서 야곱은 깊은 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결과란 말인가? 이것이 내가 얻기 위해서 추구하고 또 추구했던 결과란 말인가?’ 마음 속에 깊은 생각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꾸합니다. 더군다나 그 지역에 있는 다른 족속들이 야곱의 집을 공격해 오리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야곱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의 결과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녀들에게 기댈 수도 없고, 이방 민족으로부터도 피할 곳이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잊혀졌던 한 가지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형의 칼을 피해서 도망갈 때 제단을 쌓았던 그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거하라”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피할 길을 또 열어주신 것을 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잊혀졌던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28장에 약속하신 그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축복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잘나서 돈도 벌고, 공부도 잘 하고, 괜찮은 가정도 꾸리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는다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기도하거나 온전히 믿거나 섬기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지금껏 내 힘으로 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부모를 선택했습니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의 가정에서 자라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러분이 북한에서 태어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프카니스탄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시작부터 고초와 고비를 넘겨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면 말입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일입니까? 아니라면 저와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금까지의 삶이 때로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때로는 원치 않는 장애인의 모습으로 삶을 허락해 주셨지만, 결국 나를 구원해 주셨고, 인도해 주셨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고, 연약한 자를 더 가까이 하시며, 방황하는 자를 이끄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 힘으로 다 했다는 것입니까?
믿음, 하나님의 진정한 발견은 내 힘으로 살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하는 고백의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28장 14-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자손이 땅에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잊고 있던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자기 안에 회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제일 먼저 생각해 냈습니다. 창세기 28장 20-22절에서 그는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서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야곱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는 창세기 43장 2절에서 자기 자녀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갈 때, 예전 같으면 모두 사와라 했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3장 14절에 자기 막내 아들 베냐민을 데려갈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순간에 비통한 심정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신 이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쓰지 않았던 표현을 그가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했고, 하나님은 약간 도와주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고 난 이후에,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주님께서 들어와 사셨고 약속대로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로부터 자녀들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 곱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기에 더 이상 사기를 칠 일이 없었습니다. 형을 속일 일도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통하셔서 인도하시기에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만 살면 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7절 말씀을 보면 야곱이 비로소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부릅니다. 엘벧엘이라고 부르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정말 곤고하고 외로울 때, 힘들고 지칠 때 함께 동행하셨던 주님, 그 주님을 마음으로 신앙고백 드리면서 불렀던 이름입니다.
야곱이 찾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후반부를 위해서 그는 하나님과 약속한 것 중에 지키지 못한 것이 있는가를 찾았습니다. 먼저 그는 십일조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열의 하나를 드리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전히 드리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물질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이란 것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런데 물질 중 일부를 과감하게 떼어서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린다는 것은 물질을 드린다는 것 이외에도 나의 인생 주권이 하나님 장중에 있어 이 삶을 오늘도 살아가게 하셨다는 신앙 표현이 십일조입니다.
주일 날 와서 드리는 예배시간을 봅시다. 우리의 인생이 길지 않습니다. 70-80인데, 일주일에 하루를 교회에서 쓴다면 인생의 1/7을 이 바쁘고 힘든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1/7이라면 굉장히 많은 시간입니다. 생명과 같은 시간을 떼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물질과 시간, 그 외 모든 것이 하나님 주권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참 하나님이 되신다는 그 신앙고백이 바로 물질을 드리는 십일조와 성수 주일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침례 교회에서는 침례탕에 다 들어가 침례를 받습니다. 목사님이 들어가 있고, 성도들도 옷을 다 갈아입고 들어가는데, 한 분만 안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님 빨리 들어오세요.” “목사님 제 지갑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갑 채로 들어오세요. 지갑까지 침례를 받아야 온전한 침례가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생각했습니다. 예배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피조물임을 깨닫고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기다리는 진지함이 예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만들어 주십시오.’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 보셨습니까? 주일 날 되니까 당연히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다 주일 예배에 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주님, 이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 하심이 넘치게 하시고, 예배에 감격이 있게 하시고, 인생에 무거운 짐들이 벗겨지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예배 전에 드리고 오십니까? 이런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자세부터 다릅니다. 기도하는 모습부터 다릅니다. 진지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합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나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찬양 속에 감격이 있습니다. 말씀들을 때에 진지함이 있습니다. 들려주시는 말씀에 따라 나를 바꾸기를 원하는 하나님께 드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회복입니다.
야곱, 야곱은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도움 없이도 살아가니까, 스스로 살아가니까 예배가 필요 없었습니다. 와서 구경만 하는 예배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예배의 정신이 살아나게 됩니다. 정성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고백 속에 있게 됩니다. 야곱은 인생의 후반전을 위해 하나님의 관계부터 돌아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주님을 처음 만났던 곳, 주님께 처음으로 순수한 사랑을 드렸던 그 벧엘. 그 때는 의자가 딱딱해도 원망이 없었습니다. 그 때는 더워서 모든 환경이 마땅치 않아도 감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내 모든 삶을 드려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처음 여러분을 불러 주셨던 그 기쁨과 감격의 벧엘. 주님은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후반전을 위해서 준비하는 자들이여. 벧엘로 올라가라.”
두 번째 야곱은 삶의 자세를 바꿨습니다.
야곱이 인생의 후반전을 위해서 세운 작전은, 2절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그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들조차도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형님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장자의 권리만 얻을 수 있다면, 가정에 불화를 만들게 되어도 상관치 않았습니다. 원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서 먼저 얻었던 아내의 자존심이 짓밟혀도 상관치 않았습니다. 자기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얍봅강에서 형 에서가 죽이러 올 때에 앞장 선 것이 아니라 재물을 앞세우고, 다음에 식구를 앞세우고, 정작 자신은 맨 뒤에 숨어 있다가 급하게 되면 도망갈 준비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그렇습니다.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을 때,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했느냐? 왜 이런 일을 저질러서 나에게 이런 곤란한 일을 닥치게 만드느냐?”라고 합니다. 이에 아들들은 “누이를 창녀처럼 대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딸이 당하는 서러움과 상처와 아픔보다 그리고, 세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그 아들들의 죄성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자기에게 닥칠 불필요한 피곤함과 지침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함께 거하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자녀들뿐 아니라 함께 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고 더불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적인 책임자로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어떤 면에서는 자녀 교육에 대해서 무책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고 했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디나가 강간당하기 전에 먼저 그 문화에 젖어들어 있었습니다. 그 문화에서 머물다가 갑자기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유혹 속에 노출된 딸을 하나님 앞에 바로 살도록 하는 교육을 게을리 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방인들보다 더 잔인한 자기 자녀들의 죄성과 용서치 못하는 참혹한 모습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아버지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책임지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자녀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이제는 정말 이렇게 살아서는 되지 않겠다고 하며 하나님께 다시 함께 나아가는 신앙의 책임있는 아버지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특별히 부인은 열심히 돈을 벌고, 남편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아내가 주는 돈을 가지고 자기 생활만 하는 남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 일이 바쁘다고 가족과 자녀들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이제 인생의 후반부에서는 회복하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영적인 책임을 지는 책임자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나를 위해서 가족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들과 더불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기 위한 삶의 계획을 더불어 세우십시오. 왜냐하면 거기에 새로운 삶이 약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여러 제직들을 세우시고 귀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 직분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직분은 자신의 인격과 신앙 정도를 표현해 주는 명함과 같은 것입니까? 어느 정도 타이틀이 붙으면 그것이 그분의 인격과 삶이 되고 위치가 되고 신앙의 정도가 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제직이라는 위치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 내에 연약한 자, 어려움 당한 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주어 세우기 위한 책임을 맡기신 것이 아닐까요? 나를 위한 직분이라면 직분의 삶은 아름답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내세우기 위한 타이틀이라면 그 직분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어떤 봉사직도 소용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후반부 계획 속에 하난미의 일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돌아보는 전도는 행사가 아닙니다. 전도는 사업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 할 주님께서 맡겨주신 책임입니다. 야곱은 영적인 책임자의 위치로 자기의 삶을 전환시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을 위해서- 책임지는 존재로 서서 인생의 후반부를 위한 전략을 갖습니다.
세 째로 인생의 후반전을 위해서 모든 익숙한 것과 소유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4절에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야곱은 자기인생의 전략을 수정하고 지금까지 익숙해졌던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미와 권력을 유지시켜왔고 자기의 부와 명예를 지지해주던 것들을 다 버려버립니다. 그것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립니다. 더 이상 세상의 죄악이 주는 혜택과 즐거움을 누리지 않겠노라고 선포하고 그 내용대로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라헬은 자기 조상으로부터 받은 드라빔이라는 우상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 상수리나무는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제사를 드렸던 곳이었습니다. 이 의미는 그 나무아래 버림으로 인해서‘참 하나님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공급 받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의 표현이자 새로운 결단입니다.
담배와 술을 버리는 것은 과거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던 익숙한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에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는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과감하게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후반전을 위해서 필요한 생각과 사고와 가치관을 우리는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것이 나를 존재케 했던 것이었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는 벧엘로 가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다시 버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버린 만큼 삶을 채워주십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면서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보니, 요셉을 하나님의 역사무대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게 한 구체적인 영적 훈련이 바로 벧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인생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후반전을 아름답게 살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인생의 후반전을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고자 한다면, 야곱이 취했던 전략과 전술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고,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께 올려드리지 못했던 서원을 갚아가는 일로 인생의 후반전을 계획하는 하프타임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그래서 하나님 역사 무대에서 쓰임 받는 귀한 생애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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