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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5: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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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명기식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길
요15:12-17.
설교자 : 명기식 목사(진주사랑교회)
08. 9. 14, 오전
헨리 나우웬은 생애의 말년에 서커스 구경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공중 그네뛰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이 묘기를 너무 좋아해서 서커스 단원들과 직접 사귀기도 하고, 실제로 그들에게서 공중 그네뛰기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공중 그네뛰기는 두 사람이 그네를 타다가 한 사람이 그네에서 손을 놓고 전할 때, 매달려 있던 다른 사람이 손을 놓은 파트너의 손을 잡는 묘기입니다. 이 공중 그네뛰기에서는 그네에 매달려 있는 사람보다 그네에서 손을 놓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두 가지 원칙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생명을 붙들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던 그네에서 과감하게 손을 놓는 것입니다. 만일 잠시라도 손을 놓는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네에서 손을 놓은 후에, 절대로 파트너의 손을 자신이 잡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파트너가 자신의 손을 잡도록 완전히 믿고 맡겨야만 이 묘기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우웬은 공중그네뛰기의 원리를 들으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기가막힌 원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붙들고 있었던 것들에서 손을 놓는 것입니다.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것들,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었던 것들,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 그것들에서 손을 놓는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늦기 전에 손을 놓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빈손을 잡으시도록 그분께 완전히 내어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항복을 선언하며 빈손을 내어 맡길 때, 능숙하고 세련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강하고 힘센 팔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굳게 붙잡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집착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진정한 안식과 평강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교회에 서윤혜라고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아내가 담임한 반의 학생을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한 그 녀석을 처음봤을 때에는 머리는 헝클어졌고 세수도 하지 않아서 눈꺼풀이 매달려 있었고 아침밥도 먹지 않고 아침에 교회에 왔기 때문에 홈리스의 딸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저는 물을 먹이고 빵을 먹이고 찬양을 가르쳐주고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아이가 점점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엄마와 같이 윤혜가 교회에 나왔는데 천사처럼 밝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부진아였는데 요즘에는 학교생활도 얼마나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학교생활에 혁명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도 않던 엄마가 이제는 교회에 나오기로 하였습니다. 윤혜가 엄마를 전도하여 열매가 열린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라도 내면 성령으로 역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통로입니다.
지난 여름에 우리 부부는 단둘이서 여름성경학교를 열었습니다. 저는 찬양을 주로 가르치고 설교를 하고 운전을 하고 제 아내는 분반공부를 맡고 그림을 그려서 부치고 사무적인 일을 하고 밥을 해서 먹이고 예산은 제로로 시작해서 일단 개교하니까 하나님이 여러 통로를 통해서 물질을 채워주셔서 성경학교를 마치니까 10만원이 남았습니다. 말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게다가 성경학교를 마친 다음에 우리교회가 아닌 다른 교인이 교사위로회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보신탕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들의 엄마가 교회에 나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분들이 하나씩 둘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전염되고 퍼져 나간다고 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진주사랑교회는 전임자가 10년동안 목회하였으나 질병으로 인해 교회의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목회자가 떠난 후에 제가 부임하였습니다. 그동안 10년 동안에 교인이 70명 교인들이 10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제가 가보니까 교회는 폐광촌과 같았습니다. 예배분위기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날리는 사람이나 먼 산을 쳐다보는 사람과 부엌에서 점심밥을 준비하는 사람, 옆에 사람과 인사하라고 하면 외면하고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친후에는 식사를 하고 예배당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집사가 있는 교회, 교회당 청소를 하자고 하면 인상을 쓰고 머리를 숙이고 아무소리를 하지 않는 교회, 전도할 줄 모르는 교회, 날마다 기회만 되면 핑계하고 떠날 준비를 하는 교회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교회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부임하고도 그 버릇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진주에 와서 4년동안 예배당에서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땀을 흘리면서 섬기고 충성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사례비도 받지 못하면서도 진심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통로를 통해서 우리를 먹여주셨습니다. 진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교인이 없어서 외로울 때마다 하나님이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 부터 소쩍새가 그토록 울었나보다’ 하는 시의 구절이 있는데 요즈음에 이제는 새싹이 나기 시작하였고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날마다 사는 것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지난주간에는 어찌나 기쁜지 잠이 안 올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불가능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모든 사람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는 모두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는1894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난, 프랜시스회 수도회 소속의 신부였습니다.
그가 한창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헌신할 때,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합니다. 이 때, 콜베 신부도 역시 수감되었고, 1941년에는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41년 7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캠프에서는 탈출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이 탈출하면 같은 막사에 있던 열 사람을 ‘아사 창고’(starvation bunker)에 보내어 굶어 죽게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콜베 신부가 소속된 막사에서 한 사람이 변기통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나치군은 점호를 하다가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을 알고는 탈출한 줄로 착각하고 수색을 나섰지만,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도살자’(Butcher)라는 별명의 나치 대장 카를 프릿츠(Karl Fritsch)가 콜베 신부의 막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집합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아사 창고로 보낼 열 사람을 골랐습니다. 줄 지어 선 사람들 앞을 지나가면서 부관에게 눈짓하면, 부관은 그 사람의 번호를 적어 넣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쓰러져 통곡하고, 부관은 달려가 매질을 하면서 움직이지 말고 서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열 명이 뽑혔습니다. 대장은 그 열 명을 아사 창고로 데리고 가도록 명령합니다. 이윽고, 줄 지어 선 열 명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중 한 사람이 울면서 부르짖습니다. "내 불쌍한 아내! 내 불쌍한 자식들! 대체 어쩌면 좋나?" 비통한 순간이었지만, 모두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무 표정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잘 못 했다가는 뭇매를 맞거나 아사 창고로 보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적을 깨뜨리고 대오를 천천히 이탈하여 대장 프릿츠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콜베 신부였습니다. 그는 모자를 벗고, 프릿츠에게 말합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제가 저 사람 대신 가게 해 주십시오. 저는 늙어서 아무 쓸 모가 없고,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폴란드 말을 못 알아듣는 대장은 부관에게 묻습니다. "이 폴란드 돼지 새끼가 뭐라고 하는가?" 부관의 통역을 듣고, 대장은 잠시 멈칫했습니다. 순간 모두 다 긴장했습니다. 그런 청이 받아들여질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대장은 아마도, "부관,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보다. 이놈까지 끌고 가!"라고 소리칠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일어 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장 프릿츠가 잠시 콜베 신부를 노려보더니, 부관에게 명령합니다. "부관, 그 자를 풀어주고, 이 신부를 데려 가!" 무엇이 대장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청년은 울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서고, 콜베 신부는 대장에게 감사하다는 표정을 짓고, 나머지 아홉 사람을 따라 아사 창고로 갑니다.
아사 창고에서는 보통 비명 소리와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사람이 숨을 거두기까지, 때로는 일주일, 때로는 열흘, 그 창고에서는 음산한 신음과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콜베 신부와 함께 한 아홉 명의 사형수들은 그곳에서 굶어 죽어가면서도 함께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 기도 소리가 다른 아사 창고에 들릴 때면, 다른 창고에 있던 사람들도 그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 그 창고에 들어가 죽은 사람의 시신을 꺼내는 일을 맡았던 브루노 보르고윅(Bruno Borgowiec)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중 하나였는데, 그는 나중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제가 검사하러 갈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바닥에 누워 있었어요. 하지만 콜베 신부님만은 무릎을 꿇거나 방 한 가운데 서서 밝은 표정으로 나치 친위대 병사를 바라보고 계셨어요. 그분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았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격려했어요. 사라진 사람이 발견되면 모두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친위대 병사조차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저 신부는 정말 위대한 사람이야. 나는 저런 사람을 본 적이 없어’라고 말했지요.
그들이 아사 창고로 들어간 지 열 이틀 째 되던 날, 수용소 대장은 또 다른 열 명을 그 아사 창고에 보내야 할 상황을 만납니다. 창고를 비우기 위해 그는 의사를 시켜서 남은 사람들에게 극약 주사를 놓아 죽게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의사와 브루노가 그 창고의 문을 열었을 때, 네 사람이 살아남아 있었는데, 세 사람은 의식을 잃고 바닥에 누워 있었고, 콜베 신부만이 아직 의식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했던 브루노는 후에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콜베 신부님께서는 눈을 뜬 채로 벽에 기대 앉아 계셨어요. 정말 평온하고 빛나는 표정이셨습니다." 의사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가자, 콜베 신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는 잠시 기도를 하더니, 주사를 맞기 위해 왼쪽 팔을 내밀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삶이 이런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처럼 친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대신 바치고도 콜베 신부는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고, 한쪽 폐가 구실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약했던 콜베 신부에게서 어떻게 그런 엄청난 힘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분 안에 계셨던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었을까요?
혹시 이렇게 말씀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사람의 예를 말하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보고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글쎄요. 콜베 신부가 처음부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을까요? 처음부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합니까? 아닙니다. 그분도 처음에는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마침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루하루 하나님과 사귀는 삶을 살아갔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어느 순간 그분이 영웅이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의 아픔과 고난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한 순간에 영웅적인 기개를 발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이렇게 묻고 싶은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예수를 믿는 사람은 꼭 다른 사람을 위해 죽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저는 소위 ‘순교자 콤플렉스’를 아주 위험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뭔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희생당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것은 정신병에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 주어야만 한다고 믿는 것도 정신병에 가깝습니다.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문제입니다. 이 세상을 상처내고 있는 죄악과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을 마음에 품고, 하루하루 그 날에 당하는 일을 정성으로 섬기면서, 이웃의 아픔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일을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작은 일에 정성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도 없는 것이며,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그것은 참된 사랑의 행동이 아니라, 자기의 공명심을 위해 저지르는 만용이 되고 맙니다.
이 세상에 죄악은 참으로 깊고 고난은 많습니다만, 온 세상의 죄악과 고난을 일거에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조급하게 일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을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일깨워, 그 사람의 주변에 있는 죄악과 고난을 하루하루,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꿈 꿀 일은 오늘 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바쳐 이웃의 죄악과 고난의 문제를 위해 매일 헌신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루씩, 매일 반복하는 것입니다. 매일, 전 생애를 살듯,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작은 것이라도 이웃의 죄악과 고난의 짐을 짊어지기 위해 힘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작은 기적을 이루어 갈 때, 그것이 결국은 큰 기적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우리는 큰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얼 하시는가?"이라고 질문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느냐?"이라고 묻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 말이 아니라 20세기 미국의 예언자라고 존경받았던 윌리엄 슬로운 커핀(William Sloan Coffin)이 한 말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도대체 무얼 하시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양심을 향해 물어 오시는 질문을 회피하려는 수단일지 모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질문하면서 죽어갔을까요? 하지만 콜베 신부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따라 그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영원히 살아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이렇게 고백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기적입니다. 제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기적입니다. 기적들의 광채에 눈이 부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이 직접 완력으로 개입하시기보다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 악을 없애기 위해 헌신해 주기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시고, 병든 사람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시며, 전쟁으로 고통 받는 땅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악한 사람들이 마구 휘두르는 주먹으로부터 연약한 사람들을 보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력으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꼭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시겠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다른 방법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픔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근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헌신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읽어드린 말씀, 즉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왜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친구의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곧, 이 세상에 널려 있는 고난을 해결하기 위한 삶이었고, 그분의 죽음도 역시 그것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의 역설적 신비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넓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기"를 꿈꾸는 것은 기복교인들이 바라는 헛된 꿈입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괴로워하는 것"은 금욕주의자들이 추구하는, 희망 없는 구원의 길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을 택하고는 어영부영, 우왕좌왕, 너무나 심심해서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시비나 거는, 그런 무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 도대체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길,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길을 택하고 그 길 위에서 바르게 걷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도 줄어들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뭔가 큰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군 분투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꿈은 요셉의 마음 어디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이야기를 성공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잘 못 읽은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전심을 다하고 진실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불굴의 투지로써 ‘성공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성실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 태도가 결국 그를 이집트의 총리로 만든 것입니다.
요셉의 성실성은 항상 그에게 이롭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성실성 때문에 감옥에 떨어졌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진실이 언제나 먹히고 성실성이 언제나 먹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살다가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성공하기 위해 성실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바른 길이므로 성실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성실성을 통해 이집트의 총리에 오르지만, 그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아, 내가 드디어 성공을 이루었다!”고 만세 부르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총리가 된 다음에 필경 부패하고 타락했을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성실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리가 된 다음에도 그는 일관되게 성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살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사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요셉의 성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그렇게 일관되게 성실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일관된 성실성의 원인을, 저는 그의 하나님 신앙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고는 성실함으로 삶을 일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진실할 것을 기대하시며, 하나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바라시며, 그렇게 살아가는 나를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이 없이는, 그렇게 일관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살아 있다면, 마땅히 성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산다고 해서 늘 만사형통하고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장담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성공한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 있는 한 그 어떤 일을 이룬다 해도 성공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성경에서는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고, “성실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이 아니라 ‘성실’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성공을 이루는 데 있기보다는 성실하게 사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실하게 살아 성공할 때, 우리는 그 성공으로 인해 타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공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성공 때문에 타락하게 됩니다. 성실하게 살아갈 때, 실패도 영원히 실패로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그 사람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입니다. 성실함과 진실함과 신실함은 하나님의 길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을 때, 지금의 상황과 상관없이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술수와 요령과 사기와 반칙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고 승진할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희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견뎠을까요? 그는 지하 감옥에서 간수들의 신임을 받고 높임을 얻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살아야 했을까요?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미래의 모든 일을 그분께 맡기고, 오늘은 다만 주어지는 일에 성실했고 진실했으며 또한 신실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작은 일에 성실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때까지, 여러분이 하실 일은 그저 전심을 다하고, 맡겨진 일에 진실하게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공 바이러스가 유행입니다.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일에 성공할 수 있기를 추구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믿음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싸구려 성공주의에 마음 팔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하셨듯이 앞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즉 성실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삶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허황된 성공의 꿈을 찾아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그날그날 주어진 여건속에서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길로 인생을 성실하게 살므로 참된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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