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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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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생명의 동산
창세기 2 : 4 - 17
09. 6. 7, 환경주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들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모든 인간들이 행복을 누리며 평화롭고 복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Ⅰ. 에덴이란 어떤 곳입니까?
에덴이란 '즐거움, 행복, 만족, 기쁨'이란 뜻입니다. 에덴은 4개의 강이 흐리고 은금이 풍성하고 땅이 비옥하고 축복받은 땅입니다. 각종 실과(實果)가 사계절 열리고 선악과도 있었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에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최상의 환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삶은 최상의 삶이며, 에덴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녘에 아름다운 동산을 꾸미고 인간을 그곳에 살게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에덴의 어원은 몇 가지로 나누어 해석합니다. ‘초원 속의 오아시스’란 뜻으로, 또는 ‘기쁨’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낙원(파라다이스)이라는 뜻은, ‘담장, 울타리 두른 땅’이란 뜻의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여 ‘환희의 동산’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창세기에서 이야기 하는 에덴동산을 ‘기쁨의 땅’, ‘행복의 땅’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① 사람이 살아 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풍성함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질세계에 있어서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풍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과 같은 에덴동산에서는 의·식·주에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과일과 채소를 먹고, 옷은 입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의 몸을 감싸고 있어 수치스러운 것이 전혀 보이지 않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웠습니다. 에덴동산은 춥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으며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편히 살 수 있었습니다.
②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함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명수의 강(계 22:1)이며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히게 하는 강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은 영적 생명의 열매를 잘 맺히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풍성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상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③ 지혜와 지식이 풍성함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짖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아담에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지혜와 지식이 충만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 살 때는 현재 우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한 지혜와 지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④ 사람 사이에도 사랑이 풍성함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짝지워 가정을 이루게 했을 때에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외친 것은 하와를 극진히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살 때는 사람 사이에도 사랑이 충만하여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것을 가르쳐 줍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기면서 살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넘치게 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 때 비록 가난 하더라도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을 이루고 살 수 있습니다.
Ⅱ.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에덴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아름다운 동산으로부터 실낙원(失樂園)하게 됩니다.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참되게 사는 길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뜻을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마치 사고가 잦은 길목에 세워 놓은 ‘위험 표지판’과도 같습니다. 그 표지판은 해당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 여행자들의 안전을 위해 세워 놓은 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시험하거나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는 방종과 독선으로서 인간 공동체는 물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선한 관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곧 죽음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시작된 ‘인간의 역사’는 놀라운 속도로 변화를 가져옵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또한 더욱 깊어지고 넓어져 또다시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던 사건은 구약의 시대에만 있던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욕망은 하늘을 향해 끝 모를 비상중이며, 편리함과 풍요로움에 대한 탐욕은, 하나님 창조세계의 곳곳을 헤집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전체가 이러한 인간들의 탐욕으로 몸살과 열병을 앓고 있음에도, 브레이크 고장 난 열차처럼 멈출 줄을 모릅니다.
오늘 아침에 환경스폐셜 ‘연어의 최후’를 보았습니다. 물고기들의 귀향을 막는 보 때문에, 잘못된 어도에서 최후를 맞는 연어를 보면서 4대강 살리기가 죽이는 일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 전, ‘북극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인류가 운영하면서 지구가 치명적인 한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북극지역의 자연 동물 인간 모두가 본래의 형태에서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를, 조그만 얼음덩어리 위에 간신히 서있는 북극곰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아프게 다가오는 다큐입니다. 온난화의 징후가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는 지금, 말 그대로 북극의 눈물은 지구의 눈물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악과’의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TV 나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탐스런 나무열매(창 3:6)가 우리의 눈과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이미 세상의 죄악은 가득차고도 넘칠 지경입니다.
문제는, 이 죄악의 책임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회피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가 뱀에게 자신들의 책임과 잘못을 돌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풍요로움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의 책임‘탓’만 하고 있기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대재앙의 경고는 수시로,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한, 개발과 성장이라는 달콤한 선악과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산천은 허리가 잘리고, 생명의 강들은 그 밑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뜨거워진 지구는 빙하를 녹이고 바닷물의 수위를 높여 대지를 덮을 것입니다. 그제서야 소리쳐 후회해도 미련한 다섯 처녀가 맞이한 것(마태 25장)과 같이 생명의 문은 우리에게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에덴이 회복되었습니다.
에덴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에덴이 회복되기 건에는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평화와 안정과 만족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의지하고 순종해야 에덴의 삶, 승리의 삶이 가능합니다.
에덴이 낙원인 까닭은 바로 이곳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위치를 깨닫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기쁨을 항상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낙원은 풍요의 상태이기 보다는, 삶의 근원을 찾고 그 위에서 인간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생명과 사랑의 원상태인 것입니다.
이제 동산 ‘한 가운데’ 곧 우리들 삶의 중심에서 생명과 죽음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자유와 이성을 가지고 선택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자기 실존의 한계선이자 한 가운데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한계 내에서 자유와 생명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 한계선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자신이 생명의 중심이 되려 할 것인가?
에덴의 불행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죄문제를 처리해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긍휼하심(자비하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데 있습니다. 행복한 삶(승리의 삶)은 행위를 바꾸는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거(居)하는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잠시도 주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생명과 풍성한 열매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삶은 열매가 풍성한 삶이며 평강과 만족과 기적의 삶입니다.
당신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 현상으로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그 해결책까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동산’. 그 품에서 참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희망의 내일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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