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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nhp
글방 식구 한 명이 고향의 집안 어른을 찾아뵙고 얘기를 나누던 중, 퇴직 후 3년 째 서당을 다닌다니 서당교육만 받았던 그 분은 반색하며 배우는 과목을 물었다.
이번 학기는 ‘논어’ ‘소학’ ‘고문진보’ ‘묘도문자(墓道文字)’등을 읽는 중이라니 놀라는 기색이었다. ‘천자문’ 다음 ‘동몽선습’ ‘소학’처럼 차례로 가는 옛 서당과 달리 한꺼번에 공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미덥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잖으면 한문독해력 즉 문리(文理)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얘긴데 그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이어 슬그머니 ‘고문진보’를 펼치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제갈량의 ‘출사표’였다. 다행히 배운 적이 있던 글이라 적이 안심하고 읽기 시작했다.
“선제창업미반이중도붕조하시고 금천하삼분에 익주피폐하니 차성위급존망지추야니이다. 연이나..(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이나..)하면서 막 다음 줄로 넘어가려는데 곧 중단시켰다.
“그러면 그렇지. 아직 개만도 못하구나.”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읽는 품새를 보아하니 어림없다는 진단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터라, 속으로 웃으며 입산한 초보자가 도사를 만나는 무협지 첫 장면 같은 것을 떠올렸다.
이쯤 되면 바로 하산하거나, 아니면 기약 없이 땔나무 하고, 밥이나 짓다가 스승이 다시 부르길 기다려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 서울로 돌아와 여전히 서당을 다닌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우리 역시 한바탕 웃으며 ‘개만도 못하다’는 평이야말로 촌철살인의 경지라며 전적으로 동감했다. 항간에 나도는 ‘개와 달리기’ 우스개까지 생각나 마음 놓고 뒤집어진 것이다. 개보다 잘 달리면 ‘개보다 더한 놈’, 같이 결승점을 통과하면 ‘개 같은 놈’, 못 달리면 ‘개만도 못한 놈’이라 어쨌든 개 신세는 면하기 어렵게 됐지만...
아마 그 어른이 우리 서당을 직접 와서 본다면 ‘이건 그야말로 개판이네’라며 또 다른 개타령을 할지 모른다. 예전과 달리, 여러 강좌가 한꺼번에 개설돼 과목마다 선생님 다르고, 수강생들은 자기 수준도 모르고 분수없이 이 과목 저 과목을 두루 듣는 걸 보면 혀를 찰 것이다.
실제 우리 선생님들 가운데도 이런 행태가 한심해 개탄하시는 분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핑계 없는 무덤이 없더라고 우린들 할 말이 없겠는가.
우리도 옛 서당 방법 좋은 줄 안다. 그러나 시대가 너무 바뀌었고, 여건도 달라졌다. 世異則事異 事異則備變(세상이 바뀌면 일도 바뀌고, 일이 바뀌면 방법도 변해야 한다)이라고 하지 않던가. 인터넷 사이버서당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단순기억력이 왕성한 어린 시절 무조건 읽고 외워두어야 하는데 현행교육과정에 한문이 없으니 그 절차를 밟지 못했다. 따라서 한문전공 학생이나, 어려서 어른 밑에서 글 읽는 법을 조금이라도 깨친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이 들어 시작하니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러면 대신 그렇게 매달렸던 영어는 능숙하냐고 반문하면 할 말이 없다. 결론은 게으른 탓인데, 모두 그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해독 못해 선생님이 읽어주는 걸 듣기만 하지만, 말로만 듣던 원전을 접하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즐거움이다. 그 맛과 깊이가 상당히 괜찮다. 이를테면 사기의 ‘항우본기’편을 당시 지도 펴놓고, 유방과 항우의 치열했던 전적지를 짚어가며 읽으면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아무리 잘 된 번역본이라도 낼 수 없는 맛과, TV나 영화가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깊이가 거기에 있다.
비유가 좀 발칙할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가이드, 수강생은 여행객이 되어 고전을 찾아가는 패키지여행이라 할 수 있다. 사서삼경과 ‘사기’ ‘통감절요’ ‘장자’ ‘손자병법’ 등이 일반적인 코스라면, ‘동래박의’ ‘고려사열전’ ‘대승기신론’ ‘대동기문’ ‘동경대전’ ‘성학십도’ 강독 같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오지여행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견해에 대해 한문 정통수학법을 강조하는 분들은 펄쩍 뛰겠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인 것만큼은 분명해 우리는 오늘도 글방을 드나든다. 나아가 ‘삼국지’ ‘춘향전’처럼 익숙한 내용을 한문으로 읽는 과정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들 한다. 예전 장바닥에서 팔던 딱지본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건 잘 아는 여행지를 다른 시각으로 돌아보는 독특한 맛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가이드 없이 홀로 가는 것이 궁극적 목표임은 변함없다. 문리가 터지길 원하는 것이다. 즉 ‘개와 달리기 시합’ 한번 제대로 해서, 최소한 ‘개만도 못한’ 수준을 벗어나겠다는 꿈은 결코 버리지 않고 있다.
-국민일보 2013년 5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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