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출2:1-10 |
---|---|
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2장 1절-10절.
1절-10절: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이 출애굽기를 볼 때에 70명의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430년을 4대로 지나는 중에 그 430년의 세월 속에 눈에 보이지 않게 흘러가는 게 있지요. 그게 뭐지요? 70명이 들어가서 60만 대군으로 나오기까지의 430년의 그 흐름 속에서 흘러가는 게 있다. 그게 뭐지요? 뭐가 흘러가고 있습니까? 야곱의 신앙이 요셉에게, 요셉의 신앙이 그 아들로 죽죽 내려가는 거. 이거는 눈에는 안 보여요. 표면적으로는 애굽 안에서 애굽생활이야.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게 흘러가는 게 뭐지요? 뭐요? 그래, 이스라엘의 뜻이 뭐지요? 그 이름 속에 들어있는 게 뭐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 그래, 자자손손으로 가정으로 또는 그 가르침 속에서 흘러가는 게 있지요. 애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의 특수한 교훈이 흘러가고 있지요? 생수처럼 흘러가고 내려가고 있는 그게 보여져야 된다. 그게 역력하게 보여져야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속에는 교회도 들어있고 나도 들어있는데 교훈적으로 진리지식이 흘러가고 있다. 원래 애굽이 이스라엘의 고향은 아니지요? 그런데 이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 것이요, 또한 영토도 없이 공노로 산 거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나라가 무형적으로 애굽 속에 존재하고 있지요. 땅은 없지만 사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 ‘아무리 내 땅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히브리인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하는 그 긍지가 없었을까요? 긍지가 있다 그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저번 주일날 따로 했지만 그 애굽 안에서 사는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요 또 하나님의 택한 성민으로서 갖는 기본자세가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 애굽세상은 나의 영존처가 아니다. 조만간에 나는 이 애굽세상에서 떠난다. 이 애굽세상은 내가 있는 동안에 나의 영적 실력 배양장이다. 나의 영원히 누릴 곳은 천국이다. 그 때로 말하면 가나안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말한다면 천국은 실력대로 누린다’ 하는 신앙자세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애굽에서 종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늘 ‘나는 이런 선민이다’ 하는 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요. 애굽사람과는 다른 아주 긍지가 있는 우월성입니다. 애굽사람을 부러워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되지요? 애굽화 돼버리지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 살고 있으니까 가정적으로 자식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책도 없으니 모이면 자녀들에게 입으로 귀로 350여 년 동안의 그 박해 속에서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육적으로 볼 때에 그 때에 이스라엘의 교육은 타락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단 말이요. 그런데 오늘날 보면 오늘날 기독교가 교육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얼마나 타락이 많은지 몰라요. 이 무슨 말이냐? 애굽화 된 교육이 많단 말이요. 세상화 된 교육이 많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민족적 공노적으로 있어도 그 노예들이 모여서 하는 공부는 애굽화 된 애굽적인 공부가 아니고 천국복음 공부라 그 말이요. 그리고 그 때에 선생은 어디 학박사가 있겠어요? 학박사가 없어. 아무리 무식해도 진리와 신앙이 있으면 가르칩니다. 교회가 그래요. 우리가 모세를 그렇게 훌륭하게 길러놓은 모세 어머니를 볼 때에 이 모세의 어머니는 애굽의 어느 유치원을 나오고, 국민학교를 나오고, 중학교를 나오고,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교를 나오고 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공부는 전혀 못했단 말이요. 할 수도 없고. 대학교 공부라든지, 요즘처럼 부모교육 그런 것을 애굽학교에서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자기의 전 민족이 노예니까 배울 수도 없다 그 말이요. 그래서 모세 어머니가 모세를 못 가르쳤느냐 그 말이요. 모세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모세를 앉고 석 달을 숨기며 키울 때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안 들리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 거요? 그런데 배기다 못해서 이제 갈대상자를 만들어가지고 나일강 하수에다 띄워 보내는 거지요. 그럴 정도의 모성애가 있는데 그 어린 모세를 앉고 어떤 교육을 시켰을까요? 모세의 어머니는 요게벳인데 요게벳이 뭐 책을 본들 글을 알겠습니까? 공부도 할 수 없지만. 이 요게벳은 진리지식적 신앙이 자기 자체화 돼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 모세에게 어머니가 눈물로 젖을 먹일 때에 남이 볼 때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인다’ 하는 거지만 어머니의 간절한 그 신앙의 소원성, 진리지식적 신앙이 어머니의 젖줄을 통해 모세에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중하다 그 말이요. 오늘날 우리 부모님들이, 특히 믿는 부모님들이 자기 자식을 앉고 기를 때에 부모 자기가 말씀 자체화 되어가지고 그 어린아이에게 그런 교육이 흘러 내려가도록 하는 어머니가 얼마나 있겠느냐? 참 드물겠지요? 바로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서 이 바로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 여자가 남자를 낳으면 제 손으로 죽여라. 하수에 던져라’ 하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참 이상하지요? 그러면 모세를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바로를 통해서 그 역사가 되어 있습니까? 인간 편에서 보면 바로가 하는 것으로 보이지요. 또 바로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에도 ‘내가 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주권적으로 섭리 역사 보존하시는 창조주 그 분을 먼저 생각을 해야지요. 그러니까 그 역사를 주권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섭리자가 누구요?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바로로 통해서 ‘네 손으로 자식을 죽여서 던져라’ 하게 한 거라 그 말이요. 그러면 모세와 모든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를 죽일 목적으로 하나님이 그 명령을 하는 거냐 그 말이요. 어떤 목적으로 그 명령을 할까요? 죽이지 말라고. 틀림이 없습니까? 여러분들, 그게 보입니까?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아들을 낳은 여자가 있었을 거라 그 말이요. 우리가 눈으로 직접은 안 봤지만 장정만 하더라도 60만 대군이고, 또 자라는 어린아이들이 있고 하니까. 딸만 낳았다는 그건 말이 안 되는 거고. 우리가 눈으로는 안 봤지만 아들을 낳은 집들도 분명히 많아. 다른 집도 아들을 낳았을 거라 그 말이요. 이 때 이스라엘 여자 중에 자기 아들을 죽인 자가 하나도 없을까요? 바로 왕은 전체 히브리 여자들을 향해서 ‘아들을 낳으면 네 손으로 죽이든지 강에 버려 죽여라. 악어 밥이 되게 하라’ 했습니다. 이거는 모세 가정에게만 준 명령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적 명령입니다. 히브리인에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내려진 전체적 공동적인 명령입니다. 바로의 입을 열어서 ‘아들을 죽이라’ 이렇게 명령이 돼 있고, 또 하나님의 허락이 그렇게 돼 있지만 그러나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좀 더 들어가서 볼진대 바로를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러니까 그 명령을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은, 즉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은, 전체 히브리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즉은 아들을 낳으면 너희들은 죽이라? 아니면 죽이지 말라? 어느 쪽입니까? 죽이지 말라는 쪽이지요. 분명합니까? 확실합니까?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에게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은밀한 뜻은 ‘너희들은 아들을 낳으면 죽이지 말아라.’ 그 음성이 들리느냔 말이요. 자, 우리 학생들한테 물어봅시다. 자식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아버지가 ‘에이 이놈, 나가서 한강 물에 빠져 죽어라’ 했습니다. 그러면 진정코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자식이 물에 빠져 죽기를 소원해서 한 말입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은밀한 아버지의 마음이 따로 있습니까? 따로 있어요, 그 말 그대로요? 따로 있지요. 그래, 우리 인간세상에 생활할 때에 그런 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요. 우리가 말 속의 말뜻을 알아야 되겠어요. 우리가 모든 사건 환경을 볼 때에 믿음이 있든 없던, 하기야 믿음 있는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아, 이거는 하나님께서 하시는구나’ 하게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거에 대해 대립을 일으킬 수 있어요? 인간이 무슨 힘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구나’ 아예 그렇게 생각을 해버려. 특히 나는 바로 하려고 그러고, 나는 잘 하려고 그러고, 바로 살려고 그러고, 옳게 살려고 그러는데 누가 나를 못살게 구는 그런 아주 혹독한 사건이 일어났으면 ‘아, 이거 하나님이 하신다’ 하며 거기서 깨닫고 가면 되는 거고, 또 하나는 자기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내가 하나님 앞에 대립을 일으키는 그런 일은 없는가? 그런 성분은 없는가?’ 하는 점을 살펴야 합니다. 모세의 생모가 요게벳이지요? 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게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성인 여자들에게는 너도 나도 다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아들을 주었고,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들이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그 은밀한 명령에 의해, 이 은밀한 명령은 귀에 들리는 명령이 아닙니다. 바로를 통해서 나오는 명령이 아니지요. 이 은밀한 명령에 의해서 자기 아들을 안 죽이려 해야 할 텐데 다른 여자들은 다 죽였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누구의 명령대로 죽인 거지요? 하나님의 명령대로 죽인 겁니까, 바로의 명령대로 죽인 겁니까? 바로의 명령대로 죽였다 그 말이요. 그러면 지금도 하나님의 명령은 전체 이스라엘에게 하시는데 무슨 명령이냐? 세상이라고 하는 바로를 통해서 하시는 말은 아들을 어떻게 하라? 죽여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은? 아들을 죽이지 말라? 지금도 그 역사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도 그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 말이요. 씨 중에 제일 작은 씨는 무슨 씨? 겨자씨. 그러니까 우리 각자 성도 속에 작지만 그 생명력이 있는 신앙양심 신앙지식이 있는데 그거는 다 자기 아들입니다. 성도는 그걸 자꾸 키워야 자기 영광이 되고, 그게 자기 자체적으로 자기에게 후대가 되는 거지요. 그게 있어야 또 자기 상속이 되는 거고. 무슨 얘긴지 알 수 있겠지요? 오늘날 기독자들에게 그 때처럼 소리는 들리지는 않으나 그러나 세상 바로를 통해서 무형적으로 하는 말인즉 ‘아들을 배거들랑 낳거들랑 죽이라’ 하고 있는데 기독자들이 그 소리에 자기 속의 신앙양심 신앙지식을 다 죽이고 돌아가고 있다 그 말이요. 육적으로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식도 하나님께서 하락하면 날아가는 거요. 별 수 없어요. 그러면 그 때는 실감이 날 거요. 꼭 눈에 보이는 자식이 죽어야 만이 정신을 차린다 그 말이요. 신앙이 그렇고 그렇게 살면 그렇게 죽이도록 돼 있어요. 그거는 각본대로 되는 거란 말이요. 부모가 신앙대로 살지 못할 때 자식은 그 양심이 어디로 나와 있지요? 천국으로? 부모가 신앙대로 살지 못할 때 자식은 그 양심의 방향성이 천국 쪽으로 나가 있는 겁니까, 항상 세상 쪽으로 나가 있을까요? 세상 쪽으로 나가 있지요. 아무리 한 집에 살아도 방향과 소원과 목적이 그렇게 나와 있으면 그건 자식 잃어버린 거요. 자기 후대는 아니에요. 별 수가 없어요. 자기 사상을 정신을 이어받는 그거는 있을 수가 없어요. 부모가 세상을 이어받았으니까 그거는 세상으로 팔려먹은 거고. 팔아먹은 거고, 세상의 제물에 갖다 집어넣은 거고, 세상 불 탈 때에 그 자식도 타질 거고. 타지는 거요. 신앙적으로 보면 그건 자식 잃어버린 거요. 아무리 고깃덩어리 에워싸고 다듬고 해봐야 속이 세상으로 나와 있는데 그거 뭐 세상으로 안 나가고 배겨요? 돈만 있으면 세상이고, 시간만 있으면 세상이요. 그건 세상으로 향한 거요. 그 자식은 잃어버렸어요. 이렇게 되면 부모가 신앙적인 명령도 안 나오지만, 혹 명령을 한다고 해도 세상명령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인데 자식이 그 명령을 받아요? 안 받아요. 우리 신앙성도들이 자기 속의 신앙양심 신앙지식을 죽였으면 세상으로 돼 있는 거지 그게 어떻게 믿음으로 돼 있어요? 여러분들, 이 진리사상을 받고 극장에 한 번 갖다 와 봐요. 그 신앙양심이 살아서 맥박을 치나? 뭔가 허전하고 은혜 까먹어요. 그 다음에는 만성이 돼가지고 이제는 밟히기 시작하는 거요. 그건 하나님의 애정권 사랑권 밖으로 벌써 벗어난 거요. 그 때에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 놓고 울기는 했겠지요. 자기 자식을 죽여 놓고 왜 안 울겠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오늘날 신앙성도들은 자기의 신앙양심을 죽여 놓고 우는 사람이 있어요? 울기는커녕 분위기 맞잡고 희희낙락거리지 자기 속에 뭐가 죽었는지, 제 손으로 제가 뭘 죽였는지 알기나 합니까? 그러면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용서해주고, 하나님이 자기 속의 신앙양심이 안 죽도록 해 줍니까? 천만의 말씀이요. 자기의 신앙양심, 자기의 옳은 진리지식을 자기가 죽일 때에는 하나님도 어쩌지를 못해요.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으로 그걸 못 죽이도록 해주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에요. 오늘날 기독자들이 영적인 면에 얼마나 무뎌 빠졌는지? 우리 신앙성도들은 영적 신앙양심으로 예민해져야 되겠는데 무뎌 빠져가지고 세상 이 남자가 부르면 휙 따라가고, 저 남자가 부르면 휙 따라가고, 세상이라고 하는 남자가 와서 ‘네 손 한 번 붙들자’ 그러면 붙들려 주고, 저 남자가 ‘한 번 붙들자’ 그러면 붙들려 주고. 그게 무슨 신앙정조가 있단 말이요. 신앙정조 관념 없이 다 팔아먹은 거지요. 이걸 보고 뭐라고 그래요? 창녀지요. 여러분들, 신앙적으로 그런 걸 못 깨닫습니까? 사람에게 중요한 게 뭐지요? 고깃덩어리입니까? 일반적으로 볼 때에 여자들은 정조관념 아니요? 단순한 육체가 값이 있는 게 아니지요. 그 속에 들어있는 정조. 우리 신앙성도들은 영적인 신앙정조. 그래서 나중에 주님 만날 때에 공중에 혼인잔치가 있는 거라고요.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들도 영적으로 본다면 아마 아기들이 몇 명이나 딸릴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 남자에게 붙들려서 끌려가고, 저 남자에게 붙들려서 끌려가고. 한 남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식이 죽 달려오는데 각각 자기 아버지가 다 달라. 여러분들, 그런 거 이 세상에서 연상할 수가 있지요. 안 그렇습니까? 신앙이라는 게 뭐요? 교회 들락날락 왔다 갔다 하는 그겁니까? 영적인 면에서의 얘기지요. 모세만 모세입니까? 모세 같은 아들이 많이 있지요? 말하자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신앙심의 그 마음을 가지고 자기 아들을 안 죽이고 기른다면 다 모세가 될 수 있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그런 면을 염두에 둘 때에 지금 기독교인들이 자기 속의 모세 같은 아들을 죽여서 악어 밥이 되게 전부 다 나일강 하구에 집어던졌단 말이요. 여러분들, 살아온 세월 속에 그게 다 들어있습니다. 성경은 거짓이 아니고 영적으로 보면 틀림이 없단 말이요. 그러니까 성경 어느 구절을 볼 때도 ‘이게 하나의 역사로구나’ 그렇게만 보지 말고 ‘이 역사가 지금 나에게 눈에 안 보이게 영적으로 진행돼 가고 있구나’ 하는 걸 아주 피부로 느끼듯이 느껴야 돼요. 그게 신앙이요, 그게 성화구원을 잘 이뤄갈 신앙이요, 신앙적으로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뭐가 와서 집어삼키려고 그러지요? 용. 여러분들 속의 선한 신앙양심 진리지식 이걸 죽이려고 하는 거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걸 갖다가 예수 당시의 헤롯이라고 갖다 붙이는데, 그렇게만 보면 안 된단 말이요. 역사로만 보면 현재 자기 속에서 성화구원은 이뤄지지를 않아요. 영적으로 알지 못하면 ‘헤롯이 나쁘다’ 그러면서 자기가 헤롯 짓을 하는 거거든. 여러분들,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구약에 보면 자기 산 아들을 불에 태워서 몰렉에게 바치지요? 영적으로 보면 그것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거요. 기독자가 자기의 삶의 목적이 세상의 우상제물, 세상을 위해서 몸 바쳐서 사는 거는 우상에게 바쳐진 자식입니다. 알겠어요? 우리는 생활적 활동방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연은총으로 주신 것이 있는 것이므로 그런 걸 이용 활용해가지고 복음에 투자되고, 복음적으로 살게 하고, 복음적으로 연관관계성을 맺게 하는 이게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거지요. 우리 기독자는 그렇게 살아야 돼. 그 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아들을 죽인 자와 같은 동등한 심판을 받을 자가 많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 때에 자기의 혈육적인 아들을 죽인 것처럼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이 진리 따라가는 자기의 신앙양심을 죽여 놓고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나간다면 그 때에 아들을 죽인 그런 여자나 오늘날 진리 따라가는 신앙양심을 죽인 그런 성도나 심판을 받을 자가 많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런 자는 심판이 대상일까요, 심판의 대상이 아닐까요? 심판의 대상이지요. 히브리서에도 그런 게 있지요? 하나님의 은사를 맛보고 범죄 하면 다시 회개할 길이 없다고 그랬지요? 여러분들이 받아서 깨달아지면서 말하자면 장소적으로 ‘여기가 최고다’ 그런 뜻은 아니고 교훈의 본질적인 면으로 들어가서 ‘이것이 참 옳다’ 하고 깨달아지는데도 그것을 떠난다면 그 자기는 살 길은 없어요. 알겠어요? 이제 그거는 심판밖에 없어. 교회면 다 같은 교회인줄 압니까? 교회의 교훈이 복음의 질이라면 그건 어디든지 옳아요. 그런 데로 가야 자기가 사는 거고, 자기 신앙이 커져나가는 거요. 질적으로 그런 것을 벗어나서는 자기는 살 도리가 없습니다. 심판밖에 없어요. 회개할 길도 없고. 아무 교회나 나간다고? 천만에요. 하나님의 용서가 있느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만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진리본질이 신앙을 찾아서 신앙을 해야 하고, 자기를 질적으로 진리 자체화 시켜야 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등의 심판을 받을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이스라엘 여자들이 자기 아들을 죽여 놓고 요게벳이 모세를 기르는 것을 보니까 탐이 나거든. 그래서 ‘저 모세 같은 그런 아들을 안 주십니까? 주시면 나도 모세처럼 길러보겠습니다’ 그런다면 하나님이 뭐라고 그럴까요? 첫째는 ‘너에게 줬다.’ 또 하나는 ‘모세 같은 아들을 주면 네가 또 죽일까 싶어서 못 주겠다’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이요.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그 때 실지로 이스라엘 여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약적으로 아들을 다 줬다 그 말이요. 그런데 왜 못 기르느냐 그 말이지요. 왜 죽여 버렸느냐 그 말이지. 그러니까 그 때에 그 여자가 자기 아들을 죽인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자기 속에 있는 진리 따라가는 신앙양심, 그 아들을 죽인 죄를 근본적으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 회개는 남이 아닌 자기가 해야 돼요. 각자 자기 양심을 다른 사람이 와서 밟아놓지 않습니다. 문제는 진리 따르는 자기 양심을 자기가 죽여요. 자기가 목숨 내놓고 지키면 지킬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자기가 죽여. 그런데 남보고 ‘너 때문에 그렇다’ 그러지. 처음에는 바로가 아들을 죽일 것 같아도 그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이 허락이 없는 한 어떻게 하겠어요? 이 성경의 이스라엘 여자에게 준 말씀은 우리 남자에게도 주는 겁니다. 영적으로 계시적으로 주는 거니까. 또 하나는 우리가 현실적인 면에서 여자가 예수를 바로 믿고, 옳게 살고, 살림 바로 하고, 옳은 정신으로 살 때에 자기 남자가 ‘너 예수 믿지?’ 하며 칼로 찔러 죽이거나 때려죽이거나 하는 그런 거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어디 가서 귀신 섬기는 그런 것을 배워와 가지고 귀신 섬기듯이 예수를 믿어가지고 자기 집안을 일반적도 못되게 홀랑 뒤집어놓고 그러니까 그걸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어? 그거는 실컷 얻어터지고 그래야지. 그렇게 가르치는 교역자를 나도 교역자라는 면에서 볼 때에 할 말이 없어요.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여러분들이 신앙성도로서 이렇게 한 번 생각을 해봐요. 그 때에 애굽 속에 들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선생을 하나 데려다가 ‘우리를 천국적 복음적 내세주의 신앙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절대로 할 수 없는 겁니다. 한다고 그래도 그건 밀어내 버려야 돼요. 안 그렇습니까? 천국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는 애굽의 학박사를 모셔서 ‘당신이 우리의 목자요.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되는 거요. 불가능이요. 그런데 오늘날 보면 애굽의 학박사를 강대상에 턱 올려놓고 ‘당신이 우리들의 참 목자요’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목사 위의 박사계급장이 있습니까? 세상이 다 알아줍니까?’ 하고 그런 자를 모셔가지 않습니까? 그건 쫄딱 망해야 돼. 실컷 이용당해야 돼. 자기가 몰라서 속고, 자기가 사기당한 건데 누구한테 말하겠어. 교회만 아니라 보면 세상이 그런 게 많아요. 여자들이 화장품을 워낙 좋아하니까 값싼 수입품을 사다가 ‘이건 외제품이다’ 하고 값비싸게 팔아먹습니까? 그건 당연한 거요. 당연한 거야. 가짜 갖다가 실컷 받아먹고 팔아먹어야 돼. 그렇지 않아요?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런 사건 그런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요. 그건 당연한 거지. 더러운 냄새 나는 곳에 똥파리가 날아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게 이치지. 그래놓고는 뭐 세상 법정 앞에 가서 ‘저 놈이 나를 속였습니다. 저 놈 좀 잡아 가두십시오’ 하는데 나 같으면 ‘너는 왜 몰랐느냐’ 하고 두들겨 패버리겠어. 이 말을 하니까 이 생각도 나네. 아니 돈이 많아서 쓸 데가 없으면 고아원이나 갖다 주고, 아닌 말로 옳은 교회에 헌금이나 하지 무슨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 둘이서 잡고 춤추는 게 뭐냐? 그래가지고 남녀가 몸을 대고 비벼대는데 가만있을 수 있어? 실컷 당해가지고 이혼당하고 가정 망하고 자식들 죽고 그랬는데도 자기는 그렇게 된 이유를 모르겠대요. 아이고, 참 이거. 그게 뭐야? 그러니까 요지경속이에요. 아니, 똥구덩이에 내려가면 구더기가 일기 미련이지 자기가 무슨 깨끗하다고. 자기는 불안전합니다. 자기에게는 감염성이 있어요. ‘나는 안 그렇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그건 벌써 교만이요. 그런 자는 자기 스스로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자기 속에 있는 진리적 신앙양심을 자기가 죽인다. 자기가 안 죽이면 마귀도 못 죽이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지요? ‘아들인가, 딸인가’ 감별해서 자기가 병원에 가서 낙태하는 거지 의사선생이 자기 집에 와서 일부러 죽입니까? 요게벳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그 부담성이 있지요?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요게벳에게 하고 싶은 말, 혹은 하나님이 요게벳에게 바라는 게 있는 겁니다. 아들을 줄 때는 ‘너도 다른 여자처럼 아들을 죽여서 나일강의 악어 밥이 되게 하라’ 하고 준 겁니까? 하나님이 요게벳에게 아들을 줄 때는 살려서 기르라고 준 것이 분명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식을 주실 때는 어떻게 하라고 준 것일까요? ‘모세처럼 길러봐라’ 하고 준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부모들은 그렇게 알아야지요. 그리고 우리 지식들은 모두가 모세를 볼 때에 ‘나도 모세처럼 자라야지’ 그렇게 돼야지요. 좋은 것을 왜 버려. 좋은 정신을 왜 버려. 좋은 아들을 바로 기르려고 그래야지. 그런데 참 세상은 요지경속이라. ‘하나만 낳아 잘 지르자’ 하는 그 말의 뜻이 ‘하나만 낳아서 모세처럼 기르자’ 그 말입니까, ‘세상적으로 기르자’ 그 말입니까? 하나님이 요게벳에게 아들을 줄 때에 그 때 상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를 받으면 죽는다고 하는 것은 전제가 돼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요게벳 입장에서 볼 때에 그렇지 않느냐 그 말이요.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도 그렇습니다. 안 죽는다고 하는 보장이 없어요. ‘죽이라’ 하는 그 명령은 공동적으로 내려가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죽는다고 하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그래서 요게벳이 하나님께 말을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요게벳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그랬을 때에 요게벳이 ‘네, 주십시오’ 그렇게 말을 할까요, ‘아이고, 주지 마십시오. 주면 죽습니다. 아예 안 주는 게 좋습니다’ 그럴까요? 여러분들이 현재적으로 신앙적으로 어떤 대답을 해야 옳습니까? 그 때 역사적으로 본다면 ‘아이고, 주지 마십시오’ 그럴 것 같고, 현재적 여러분들이 진리적 신앙적으로 이걸 볼 때에 ‘예, 주십시오’ 이렇게 대답이 나와야 할 거 아니요? 그러면 그 때 아들을 주시는 건 요게벳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요게벳을 완전히 똥 되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요? 영광스럽게. 확실히 그럴까요? 그게 보입니까? 우리가 세상에서도 그런 사건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예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부모형제 다 죽고 자기가 밥 해 먹어가면서 돈 벌어가면서 자수성가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나는 환경이 나빠서 공부 못했습니다. 나는 환경이 나빠서 성공을 못했습니다’ 그런 말이 있을까요? 부모 탓하는 거, 형제 탓하는 거 있을 수 없어요. 그런 탓할진대 모세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모세가 모세로 되지 않는 거지요. 부모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우리가 성경을 바로 깨닫고 보면 부모고 자식이고 간에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어.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남 탓하고 돌아가느라고 너도 나도 다 고통당하고 그러지. 이건 자기가 자기 마음을 쑤시는 거나 같아. 부모가 잘못된 게 있으면 자식 입장에서 자기는 잘하는 쪽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 탓을 한다는 이거는 불효막심한 거야. 자식 입장에서 ‘왜 많은 재산을 나에게 안 물려줬습니까? 그러니 내가 고생합니다’ 이건 있을 수 없어. 이런 자식은 몽둥이로 맞아야 돼. ‘너보다 더 못한 자식도 너보다 더 훌륭하게 된 자식도 많다’ 하면서. 또 자기가 잘못된 것이 있을 때도 그것을 계기로 얼마든지 자기에게 큰 이익을 갖고 올 수도 있는 일인데 자기가 일을 저질러가지고 늘 남 탓으로 돌리는 이거는 그냥 감옥 속에 넣고 콩밥을 먹여야 돼. 죄송합니다. 내가 성질이 못돼서 고약한 말을 하는데, 성질 좋은 여러분들은 부드럽게 들어주세요. 이면적으로 보면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그런다. 한 사건 속에 한 이치를 가지고 다양적인 면에 이용이 되는 거요. ‘아,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려고 이런 사건을 나에게 줬구나’ 하고 얼마든지 깨달을 수가 있어요. 그것이 디딤돌이 돼가지고 얼마든지 앞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이요. 자식입장에서 볼 때도 그렇고, 부모입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과거가 잘못되어 있고, 현실이 나에게 고통스런 현실이 왔을 때에 그런 것을 전부 다시 되돌려서 깨달아 앞으로 나갈 때에 또 영광스러운 자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항상 과거를 물고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니 현실에 만족이 어디 있어. 현실에 감사가 어디 있어. 늘 고통이고 그 속은 늘 지옥이지. 그런 사람이 어디를 가도 자기 마음에 딱 맞는 곳은 없어요. 어디를 간들 그건 지옥이에요. 그러니까 문제는 너부터 고치자 그 말이요. 외부의 것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걸 대하는 자기의 자세 그게 문제란 말이요. 자기 자세 그것부터 고치자. 그거 고치기 전에는 소용이 없어요. 어쩔 수가 없어. 잠언서에 있지? 미련한 놈은 절구통에 넣어서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게 부서진다고 그랬어요, 안 부서진다고 그랬어요? 안 부서진다. 그건 그대로 죽어야지 할 수 없어. 그거 어떻게 하겠어? 사람 머리통이 콩 같으면 솥에 삶아서 절구통에 넣고 빻으면 잘 부서지기나 하지. 그런데 사람 머리통은 그렇지를 못 해. 보면 속에 강한 것이 들어있어서 그냥. 우리 인생은 이래저래 한 번 죽기 마련이요. 한 번 죽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그런데 자기가 모세를 주워다가 기르면 자기가 영광이 될까요, 앙화가 될까요? 영광. 확실합니까? 오늘 이 시간에 죄다 모세를 주워다가 길러봅시다. 또 자기 목숨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주워온 모세를 다시 죽이지 말고. 또 죽일래요? 하OO집사지? 모세 주워다가 죽일 테요? 안 죽여? 확실해? 속에 그게 있어야 돼. 우리 믿는 가정에서 남 보기는 혹 나쁘게 보일지 모르지만 믿는 여자들이 리더십이 있어야 되고, 강한 데가 있어야 돼. 강하면서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안 믿는 남편은 어떤 수단을 쓰던지 녹여놔. 아주 녹여버려. 어떤 방식으로 녹여놓든지 녹여서 이 진리 받도록 해야지. 안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 죽을 때까지 맨날 그렇게 살 거야? 한 번 전쟁은 일어나야지 뭐. 안 그래요? 평소 때 싹싹하게 잘 해주고 사랑 면에 아주 민감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녹여놓는 데는 아주 그만이고 그래야지. 그런 게 죄는 아니에요. 죄로 보면 안 돼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