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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습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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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본문: 습3:17, 찬송가 304장(통404장)
미국의 목사인 칼 터틀은 결손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학대당하는 몹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크리스천이 된 후, 어느 날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가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방해를 받지 않고 하루 종일 기도할 수 있는 교외로 나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5분이 지났을 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몹시 실망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두 달 된 아기인 재커리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방에 들어가 아기를 안아 올렸습니다. 아기를 안고 있으려니 이 어린 아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 가슴에서부터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울음을 터트리며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재커리,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한다.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언제나 보호해줄게. 나는 언제나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의 친구가 되고, 너를 보살필 거다. 네가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네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네가 나나 하나님을 외면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갑자기 칼은 자신이 하나님의 팔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칼, 너는 내 아들이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너를 사랑하고, 필요한 것을 주고, 인도하겠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사로 사랑 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10- 12)
옛날에 거북이를 사랑한 토끼가 있었습니다. 토끼는 혼자 속으로만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는 줄 몰랐고, 거북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을 너무 자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토끼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나랑 달리기 해보지 않을래!" 그날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질 때는 지더라도 토끼와 같이 달려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 한번 붙어보자!"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그냥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같이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자기 옆을 지나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 하던 토끼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 후에 동네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들로부터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거북이의 기쁨이 자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티 내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소리 없는 헌신이 사랑이고, 양보하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하는 대상이 높여지고 내가 무너지기를 기뻐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이 토끼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고, 우리도 그런 주님의 마음을 가지면 내 신앙생활과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에는 결코 실패와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놀라운 권세를 주셨고(창1:28),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심히 좋아하셨습니다(창1:31).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죄가 인간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간은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자학하고, 한과 상처와 다툼으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시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출발하시고, 인생의 경주를 같이 달려가시면서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시다가 삶의 중간쯤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 거북이와 같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는 어떤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고 퇴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월전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어떤 목사님에게 20대 후반의 젊은 여자가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그녀는 대학시절에 남자를 알게 되었고 결혼을 하자는 감언이설에 속아 몸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었습니다. 그래서 뒷조사를 해 보니까 그 남자는 아기 하나 둔 유부남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녀는 삶의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렸고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녀는 그 남자가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새로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녀는 스스로 '마구 짓밟힌 인생'이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희망도 없고, 살아갈 기력도 없게 되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죽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남자를 만나면 그를 찌르고 자기도 죽으려고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목사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녀의 얘기를 다 듣고 이런 말을 조심스럽게 해주었습니다. "자매님! 하루에 두 번 이상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은 그래도 너를 사랑하신다'고 말해보십시오." 그녀는 목사님이 가르쳐 준 그대로 했습니다. 거울 앞에서 "하나님은 그래도 너를 사랑하신다!" 고 외치고는 눈을 감고 예수님이 자신을 품어 주시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습니다. 그 후 그녀는 새 사람이 되었고, 지금은 중견 커리어 우먼으로서 매우 활기차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은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비참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유괴범에게 천만 원을 주고 간신히 자식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만 원을 주고 생명을 얻은 '천만 원짜리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고 생명을 얻은 '예수님 짜리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평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환경에 맡기고, 돈에 맡기고, 학력에 맡겨서는 안됩니다. 그 순간부터 그 인생은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평가를 오직 주님의 시각에 맡겨야 합니다. 주님은 별 볼일 없는 베드로에게 "너는 장차 게바(반석)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은 "너는 장차 게바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가8:7)
어느 날, 미켈란젤로는 성당 뒤뜰에서 그냥 굴러다니는 거대한 돌덩어리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돌덩어리를 유심히 보더니 소리쳤습니다. "저 안에 다윗상이 보인다!" 얼마 후, 그 흉한 돌은 거인의 손에서 다윗상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빚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실망하지 말고, 약해지지 마십시오. 성경은 우리를 뭐라고 말합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시각으로 우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그 고통과 환난과 기도제목이 주어져도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잘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사랑하시는 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 신가를 알아봅시다.
1.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신 분입니다.(요3:16)
어느 가난한 부부가 여섯 자녀를 어렵게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절친한 부자 친구가 한 아이를 자기에게 양자로 주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습니다. 그 날 저녁 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어간 다음에 아내와 그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 어떤 아이를 양자로 보낼까? 그들은 첫째 아이인 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맏아들을 남 주기에는 너무나 귀하고 아까웠습니다. 둘째 아이는 딸이었습니다. 이번에 역시 첫 딸이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셋째 아이도 딸인데 너무나 몸이 약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넷째 아이는 장모님과 너무 닮아서 보낼 수 없다고 부인이 거절했습니다. 다섯째 아이는 아버님과 너무 닮아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애기 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 부인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며 "우리 애기, 귀여운 것 남 줄 수 없어요"하며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여섯 자녀가 있었지만 그 하나라도 기꺼이 내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 하나의 독생자밖에 없었으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내어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롬8:32)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주검들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독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그 집에 아기와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소방대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방대원들은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길을 다 잡고 난 소방대원들은 다시 그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기와 엄마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엄마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위나 학력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계십니까?
2. 우리 가운데 계셔서 구원을 베푸십니다.(요14:23)
본문을 보십시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계시고, 우리가 가는 어느 곳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면 어떤 고난과 문제에서도 우리는 행복을 노래하며 살 수 있고,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크리소스톰이라는 위대한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아무도 대화를 못하게 독방에 가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때 신하가 말했습니다. "황제님!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독방에 가두면 기도한다고 더 좋아합니다." 그 말을 듣고 황제가 "그러면 사형수들이 있는 감옥에 넣어라."고 다시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말했습니다. "황제님! 그것은 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전도 기회가 생겼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얼마 후에는 사형수들도 다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황제는 다시 명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끌어다 목을 쳐라." 그때 신하가 또 말했습니다. "황제님! 그것도 안됩니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하면 큰 상급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형당할 때 우는 사람을 볼 수 없고,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그러자 황제가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하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사방으로 에워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는 보배와 같은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십니까? 무엇보다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구원은 인간 축복의 극치입니다. 그 구원에는 우리가 천국 가는 구원도 있지만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이 있게 하시는 구원도 있고, 문제를 풀어주시는 구원도 있고, 병든 부분을 회복시켜주시는 구원도 있고, 우리의 모난 부분을 변화시켜주시는 구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해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신다"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도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보면 우리 인생이 참 가치 있는 인생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어떤 믿음 좋은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입에는 항상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어요"라는 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별명도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목사님을 찾아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목사님이 "알아!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지?" 하니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예요. 이번에는 그것보다 좀더 위대한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예수님도 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으면 살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토록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연약한 모습이 있어도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상사병에 걸리실 정도로 사랑하시고, 거룩한 스토커처럼 우리를 찾아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때 시험이 들어서 얼마 동안 하나님의 품을 떠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자는 기필코, 어떤 계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살 것 같다." 여러분! 최선을 다해 전도하십시오. 가정에서 전도하시고, 아파트에서 전도하시고, 친척들 만나면 전도하시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전도하십시오. 우리가 한 영혼을 전도하면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하나님이 최고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4.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이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소리가 적습니다. 크게 떠드는 사랑은 대개 진실한 모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지 신앙, 이벤트 신앙을 별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소리 없이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실제로 하나님의 대부분의 은혜는 소리 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진짜 은혜는 소리는 나지 않지만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해를 주신 것, 공기를 주신 것, 물을 주신 것 등, 따지고 보면 한이 없습니다. 그처럼 엄청난 은혜 속에 살면서도 한두 가지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1)
어떤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추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고기 한 근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일이 추석인데 목사님과 아이들에게 고기 국도 줄 수 없네요. 하나님, 고기 좀 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밖으로 나오니, 대문간에 청둥오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마치 "날 잡아 드세요." 하는 듯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목사님을 급히 불렀고, 급히 달려 나온 목사님이 가까이 갔는데도 그 청둥오리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상처난 곳이 없는 멀쩡한 청둥오리였습니다. 결국 사모님의 기도 응답이라 여기고 그 청둥오리를 잡아서 먹었는데, 그 오리고기를 먹으면서 온 식구들이 다 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면 기적적으로 청둥오리도 보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지켜 주시면서도 결코 생색내지 않으십니다. 그저 잠잠히 사랑해주십니다.
마르틴 루터의 명저 '탁상어록'에 등장하는 '고학생과 자선의 손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고학생이 길에서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체격이 건장한 남자가 큼직한 물건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고학생은 남자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나온 줄 알고 겁에 질렸습니다. 남자가 다가가자 학생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도망쳤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흔들며 학생에게 소리쳤습니다. "멈춰라. 이것은 너를 위해 마련한 빵이란다." 학생은 더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 남자는 불쌍한 학생을 위해 커다란 빵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몰랐던 학생은 남자의 인자한 표정과 손에 들린 빵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며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자꾸만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소견과 이해가 부족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마12:20)
5.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히13:5, 렘31: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 6백만 명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가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아들 둘을 둔 어떤 일가족도 그렇게 수용소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수용소에 들어가서는 노동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먼저 처형하느냐 마느냐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중 하나는 어리고 매우 병약하였습니다. 부모는 그것이 걱정되었습니다.
"저 아이는 몸이 약해서 틀림없이 가스실로 끌려갈 텐데 어떻게 하나...."
강제노역에서 돌아온 일가족은 밤마다 서로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저녁에 아들의 얼굴을 보면 그 날은 생명을 부지한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둘러보니 몸이 약한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자는 이미 가스실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끌려갈 때 함께 있던 이들이 모자가 끌려가던 당시의 애끓는 모습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리고 약한 아들은 감시원이 끌고 가려 하자 마구 울며 발버둥쳤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참으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울지 마라. 이 어미가 같이 간다." 그러자 아들은 순순히 엄마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당당하게 가스실로 걸어갔습니다.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의 길을, 자식 홀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함께 간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의 애통함에 함께 한 사랑입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6. 우리를 자녀라 부르시고 자식과 같이 여기시는 분이십니다.(히12:6,7)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3:1) 저는 어렸을 때 몸이 약해 폐병에 걸렸었고, 늘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약국도 드물고 병원에도 쉽게 갈 수 없던 가난한 시절, 몸이 아파 오면 밤새 끙끙 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저를 등에 업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품에 안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아이고 네가 아플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 어미가 아파야 하는데, 이 못난 어미 만나 네가 고생하는구나!" 어머니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머니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저의 얼굴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몸이 아파서 고통스런 중에도 어머니의 그 말씀과 눈물로 위로를 받으며 잠을 청했습니다. "내가 아파야 하는데 네가 아프니 내 마음이 아프다. 내가 대신 아파 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어머니의 이 음성이 제 귓가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어머니의 참 사랑은 아들의 아픔을 대신하려는 것이요, 아들의 죽음에 함께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이토록 크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당신을 사랑하듯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아무리 사랑해도 부모가 자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자녀대신 아퍼하거나 아픔을 덜어 줄 수 없으며 더욱이 부모가 자녀를 대신해서 죽을 생명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생명이 위급할 때 부모를 대신해서 죽을 자녀가 없으며, 서로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남녀의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갈라지기도 하고, 죽음이 아니더라도 변하는 것이며 인간적인 모든 사랑은 기대하는 자로 하여금 실망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1서2:5)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 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주었습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천만에! 다만 한 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모험해 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 다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구해 주실만한 귀중한 사람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차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을 어느 누구에게든지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옵소서. 사랑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조건 없는 크신 사랑을 마음속에 풍성히 채워주소서. 나의 이웃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갈릴리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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