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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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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4월 22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주기도문 연속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9
"우리는 공범이다" (We Are Accomplices)
--요한복음(John) 20:19-2
1.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인간성을 정화시키고 인류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것으로 인정받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고등종교'(enduring religions)라고 부릅니다. 이 종교들은 각자 나름대로 인간과 인류 사회의 문제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합니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진단에 있어서 종교마다 뚜렷이 다르고 그 해법 또한 다릅니다. 그 다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다원 종교 시대를 제대로 사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종교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령, 불교는 인간 문제의 핵심을 '집착'에서 봅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성제’ (四聖諦, The Four Noble Truth)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욕심과 무지가 집착을 일으키고, 그것이 모든 인생고를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따라서 불교는 집착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해탈’(nirvana)을 구원이라고 봅니다.
반면, 유교는 인간의 문제가 '예'(禮, propriety)를 벗어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예'란 인간 사회와 우주를 유지해 주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예'를 벗어나는 이유는 욕망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의 유익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면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그래서
'극기복례'(克己復禮, overcoming the self and coming back to propriety)를 구원의 길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인간과 인류 사회의 문제의 뿌리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기독교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신'이 있습니다. 불교와 유교는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을 배제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불교와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철학에 가깝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신이 세계관의 중심입니다. 신을 배제하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문제 그리고 인류 사회의 문제와 그 해법은 신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단입니다.
기독교의 신 즉 하나님은 선하고 정의로운 창조자입니다. 창조자의 원래 계획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잘 그려져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면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위로 하나님과 사귀며 아래로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 질서가 지켜지는 한 만물은 제 자리를 찾고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낙원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뒤집혔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천사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동기이며 또한 결과입니다. 그 이후로 인간은 제각기 하나님을 자기 밑으로 끌어 내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서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끌어 내린다고 해서 끌려 내려 올 하나님이 아닙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신이 되어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했고, 그로 인해 사탄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이렇게, 원래의 질서가 무너지자 고난과 재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부릅니다. 보통 단수로 '죄'라고 하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복수형으로 '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인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의 악행들을 가리킵니다. 비유하자면, 나무가 대지로부터 뿌리가 뽑힌 것과 같습니다. 뿌리 뽑힌 나무에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잎이 시들고 열매가 부실해지며 벌레들이 꼬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아가면, 그로 인해서 여러 가지의 현상이 생깁니다. 마음은 이기심으로 물들고, 헛된 욕망이 들끓고, 혈기는 통제가 되지 않고, 유혹에 쉽게 이끌립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 그리고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모든 고난과 혼란의 뿌리를 캐들어가면 결국 죄에 닿습니다.
2.
바로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올려야 할 두 번째 기도 제목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로써 삶의 기본 조건이 마련된다면, 그 다음의 문제는 삶의 환경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의 삶을 가장 어렵게 하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그 죄를 해결하는 열쇠가 용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한 다음 곧바로 용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 기도의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소서.
우리 또한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탕감해 주었습니다.
빚을 경험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어느 정도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는 '빚 권하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 없이는 살 수 없고, 빚을 지지 않고는 신용을 쌓기가 어려우며, 신용을 쌓으면 더 많은 빚을 얻을 수 있고 또 그러고 싶습니다. 집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빚을 져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빚을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그래서 빚으로 빚을 내고 또 그 빚으로 빚을 내는 위험한 모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만해 보이던 빚이 어떤 한계를 벗어나면 한 순간에 우리는 그 밑에 깔려 버립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짓누릅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경기 침체로 인해 이와 같은 경험을 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 중 어떤 분이 제게 그럽니다.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번에 뼈져리게 경험했습니다."
죄를 빚에 비유한 것은 예수님 당시보다 오늘 우리에게 더 적절하다 싶습니다. 신용 사회라는 보기 좋은 허울로 인해 빚을 하찮케 생각하는 것처럼, 죄를 하찮케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널리 그리고 깊이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죄라는 단어가 요즈음에는 '기피 단어'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에게 상처가 되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는 Political Correctness라는 가치 때문에 앞으로 어떤 행동을 죄라고 부르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죄를 부정하고 죄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고 살기 원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죄'라고 부르던 것을 요즈음에는 '선택'(choice)이라고 부르고, 과거에 '죄'라고 부끄러워 했던 것을 요즈음에는 '자신의 기호'(taste)라고 자랑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죄를 쌓아갑니다.
문제는 아무리 이름을 달리 지어도 죄는 죄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미화해도 간음은 죄입니다. 표현의 자유라고 포장해도 막말이 미화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지나친 험담은 성경이 경고하는 가장 심각한 죄 중 하나입니다. 단순한 오락이라고 혹은 취미생활이라고 미화해도 중독은 죄입니다. 야망이니 비전이니 미화해도 탐욕은 죄입니다. 정당한 방어라고 이름 붙여도, 살인은 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죄를 하찮게 생각해 가면서 죄를 쌓아 올립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되어 버립니다. 죄가 짓누르는 힘은 빚이 짓누르는 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지난 사순절 동안 저는 외국에 사는 어느 여성을 이메일로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인 그분은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한 남성과 순수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분은 그 만남이 절대로 이성적인 것이 아니며, 죄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분명히 지킬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 만남은 죄가 아니라 단순한 기분 전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자신감은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하나님과 남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지난 몇 달 동안 진정으로 회개하고 새롭게 지어지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몇 번의 이메일을 통해 그분의 회개의 과정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리는 조언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분은 여전히 죄의 짐에 짓눌려 신음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온 메일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많이 힘들고 슬픈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갈수록 이번 상처가 더욱 크게 다가오네요. 죄라는 것이 이렇게 강력한 것인데, 너무나 안일하고 경솔하게 대처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를 어떻게든 죄 아닌 것으로 미화하며 즐기려 합니다. 때로 믿는 사람들이 "이것도 죄가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이 즐기는 것을 죄의 목록에서 제외시키고는 마음 놓고 즐기고 싶은 것입니다. 한 눈으로는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가며 크게 혼나지 않을 일들을 즐겨가며 죄를 쌓아갑니다. 그것을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죄 관리'(sin management)라고 불렀습니다. 전적으로 죄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만큼만 죄를 즐기며 살고 싶어하는 심정을 꼬집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죄의 짐에 눌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는 날을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지 않아도 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게에 짓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오기 전에 회개하고 죄 쌓기를 멈추어야 합니다. 죄는 관리할 대상이 아닙니다. 버려야 할 대상이고 완전히 해방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물론, 죄의 짐에 깔린 다음이라 해도 늦은 것은 아닙니다. 이 때, 선택할 방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예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개를 통해 새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당장은 아주 손쉬운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파멸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바른 선택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새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두고 두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 참으로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죄의 짐에 눌린 사람에게는 너무 쉬워서 오히려 용서의 은혜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교리적으로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믿겠다는 식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상담하고 있는 그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는 용서의 은혜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죄가 무거울수록 회개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3.
우리를 위한 두 번째 기도에서도 '우리'라는 대명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나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원문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용서해 주소서"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할 죄는 나 자신만의 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지은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인류가 공동으로 짓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예컨대, 무분별한 소비로 인한 환경 파괴의 죄에 대해 우리 모두는 공범입니다. 특별히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의 죄가 더 무겁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우리에게 관리하도록 맡기신 환경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무분별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 혼자만의 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죄의 결과가 먼 훗날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같은 죄에 대해 둔감합니다. 그렇게 둔감하게 살아오는 동안 이 죄는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환경 파괴로 인해 인류가 당할 참혹한 미래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당하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도 우리 모두의 탐욕으로 인해 생긴 결과입니다. 내로라는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통제되지 않은 탐욕으로 인해 세계 경제 특히 자본주의 경제가 망가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같은 공동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진정으로 참회해야 합니다. 환경 파괴의 범죄에 대해 진실로 참회하는 사람이라면, 분리 수거에 누구보다 열심일 것이며, 소비를 줄이는 데 힘쓸 것이며, 환경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아 행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오염물질을 불법으로 폐기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탐욕의 죄에 대해 진실로 참회하는 사람이라면, 기도와 묵상을 통해 탐욕을 비우고 자신의 개인의 삶에서 정의를 실천하며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편하고 귀찮고 때로 짜증나는 일입니다만, 불편을 겪지 않으면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이 짓는 죄에 대해 나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우리를 속여 나의 죄는 내 문제고 다른 사람의 죄는 그 사람의 문제라고 단정짓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어떻게든 서로의 삶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가정의 문제이며, 그 사람의 사회의 문제이고, 또한 인류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지구 반대쪽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얼마 전, 오클랜드에 있는 대학교에서 어느 한인 이민자가 여러 사람을 총으로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벽에 세워놓고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처럼 총격을 가했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가 영어 실력 때문에 다른 학생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 그것 하나 때문에 그처럼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가정 안에서 그리고 이 사회에서 받은 상처들이 쌓이고 쌓인 까닭입니다. 쌓이고 쌓인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하자 마침내 총을 든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먼저 고수남이라는 한 사람의 죄입니다만, 또한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지난 주간에 있었던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에서 네 분의 은퇴 목사님을 찬하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렸는데, 그 중 하나가 "나의 좌우명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분 중 한 분이 그 질문에 대해 던진 대답이 저에게 참으로 공감이 되었습니다. "악한 사람은 없다. 상처받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저것은 저 목사님이 평생의 목회를 통해 체득한 진리로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저 자신도 목회 여정을 통해 이 진실을 거듭 확인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그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너무 민첩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성을 부인하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긴밀하게 그리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안다면, 한 사람의 범죄를 볼 때, "주님,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상 선생의 시 중에 '자수'(自首)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어린애를 치어 죽인 운전수도
바로 저구요,
그 여인을 교살(矯殺)한 하수인(下手人)도
바로 저구요,
그 은행 강도 도주범(逃走犯)도
바로 저구요,
실은 지금까지 미궁에 빠진 사건이란
사건의 정범(正犯)이야말로
바로 저올시다.
범행동기요, 글쎄?
가난과 무지(無知)와 역사(歷史)의 악순환(惡循環)
아니, 저의 안을 흐르는 카인의 피가
저런 죄를 저질렀다고나 할까요?
저런 악을 빚었다고나 할까요?
이제 기꺼이 포승을 받으며
고요히 교수대(絞首臺)에 오르렵니다.
최후에 할 말이 없느냐구요?
솔직히 말하면 죽는 이 순간에도
저는 최소한 4천만과 공범(共犯)이라는
이 느낌을 버리지 못해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 시를 어떻게 느끼십니까? 지나친 감수성이 빚어낸 신경증적 반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느 문학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시적 표현이라고 느끼십니까? 둘 다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실제입니다. 진실입니다. 오늘날 인류의 문제는 죄에 대한 우리의 연대성을 깨닫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 상황인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죄에서 자신의 책임을 느끼기를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적어도, 믿는 사람은 이 점에서 달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당신의 죄로 인정하고 그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죄 안에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분의 대속이 우리에게 미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속죄해 주셨기에 용서를 입고 하나님 앞에서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에서 나의 몫을 발견하고 진실하게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인들이 기도할 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다 내 탓이오"라고 고백하는 것은 개신교에서도 배워야 할 좋은 자세입니다.
4.
어거스틴은 우리를 위한 두 번째의 기도를 '끔찍한 기도'(terrible petition)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용서해 주소서"로 끝나지 않고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용서해 주소서"라는 말로 끝났다면, 나 개인의 죄와 우리 모두의 죄에 대해 용서 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나님에게서 받은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행해야 한다는 부담이 덧붙여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말 주기도문 번역은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 하면,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제가 제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했으니, 하나님도 저를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하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이며 왜곡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는다 해도 하나님의 용서를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해 놓고 하나님에게 용서를 흥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거래하실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히 거래를 청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짓는 죄는 우리가 용서해야 할 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비유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빚 진 사람에게 탕감해 주어야 할 빚이 일만 달러 정도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일천억 달러입니다. 이웃에게 일만 달러를 탕감해 주고는 하나님께 일천억 달러를 탕감해 달라고 흥정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우리는 다만 그분의 은혜를 구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값비싼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몸을 불살라 바쳐도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의 죄의 무게를 생각하면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너무도 쉬어 오히려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도를 찾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죄를 깨닫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자신의 수단이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십자가 앞에 무너져 염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구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값비싼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용서받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나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압도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압도된 사람은 그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니, 그 은혜로써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에게 용서했습니다"라는 기도는 "이만큼 했으니 잘 했지요?"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은혜를 제가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늘 아버지에게 시작된 용서의 흐름이 나에게서 멈추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기도의 어투와 시제로 볼 때, 예수님은 우리가 매일같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또한 매일 같이 용서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한 사람의 기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또한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인간이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는 매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죄성에 빠진 우리는 이웃과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받기에 매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드리는 이 기도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시켜 줄 것이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도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그러니 용서는 일용할 양식만큼이나 절실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우리가 마땅히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이 기도는 끔직하게 들릴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이 때로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건이 아니라 고백이요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며, 용서의 물결을 퍼져 나가게 하고 있다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결국 용서할 수 있게 만들 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은혜에 뻔뻔한 자로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절)이라고 인사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샬롬!"이라는 인삿말이었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가서 처형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는 가장 절실한 것이 평화였습니다. 둘째, ""성령을 받아라"(22절)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했던 성령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다음, 세 번째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3절)
기독교의 교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읽고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기독교는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서 하라시는 용서는 사제가 고해소에서 하는 것과 같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하다'라고 번역된 말이 원래는 '풀다'라는 뜻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죄로 인해 묶인 매듭을 푸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로써 죄의 매듭을 풀면 풀리고, 용서하지 않으면 죄의 매듭이 그대로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인생은 죄로 인해 수 없는 매듭이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수 없는 매듭이 있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매듭을 만들게 됩니다. 누구에겐가 분노를 품으면 자신의 마음에 매듭을 만드는 것입니다. 분노가 강하면 강할수록 매듭은 크고 단단해집니다. 스스로 묶어 맨 마음의 매듭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무엇보다도 그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분노가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노를 어떤 방식으로든 당사자에게 표출하면 그 사람과 매듭이 묶여집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수 많은 매듭이 존재합니다. 인간 관계 중에서 가장 심하게 꼬이고 엉킨 매듭은 부부나 가족 사이에 만들어집니다. 가족들 사이에 엉키고 꼬이면, 누구를 만나든 매듭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매듭은 쉽게 풀리지만, 어떤 매듭은 가위로 싹뚝 잘라버리는 것이 나을 정도로 단단히 묶여 있습니다. 조승희나 고수남은 얼키고 설킨 매듭을 어쩌지 못해 가위로 싹뚝 잘라버리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사에서 겪는 모든 문제들은 결국 이 매듭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함으로써 이 매듭을 풀도록 힘쓰고, 동시에 이웃과의 매듭을 용서로써 풀기에 힘써야 합니다. 굳이 나와 직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 묶인 매듭을 풀기 위해 할 수 있는대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씨시의 프랜시스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용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수 많은 매듭으로 엉키고 설킨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마리가 됩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령하실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떠맡으라고, 세상을 바꾸라고, 끝없이 돌고 도는 보복과 복수의 쳇바퀴를 멈춰 세우라고 초대하고 계시는 것이다. (<Lord, Teach Us>)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을 할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써 한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죄와 상처에 의해 결정되지 않도록 풀어주는 것이며,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악의 요새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한 일이기에 예수님은 우리 자신에 대한 기도의 두 번째 항목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죄를 죄로 알게 되기를, 죄를 우습게 보지 않게 되기를, 죄에 관한 한 우리 모두가 공범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 진실되게 기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받은 용서의 능력으로 용서하고 용서 받으며 살게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꽁꽁 묶고 있는 매듭이 풀려 나가고, 우리의 삶을 짓누르던 빚을 청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때마다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를 결단하며 다짐하여 화해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용서의 주님,
저희의 죄를 고백합니다.
마음을 찢어
저희 자신의 죄와
이웃의 죄와
인류의 죄에 대해 회개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를 베풀어 주시고
그 용서의 능력으로
저희 또한 용서하게 하소서.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어내는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속회 자료> 2012년 4월 22일 주일 설교 <주기도문 연속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9
"우리는 공범이다"(We Are Accomplices)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483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요한복음 20:19-23을 읽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모든 고난의 근원이 죄에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말로 이야기해 보십시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3) 모두가 공범이라는 사실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동의합니까? 당신의 생각을 말해 보십시오.
4) 용서 받은 경험 혹은 용서한 경험을 나누십시오. 용서하지 못한 혹은 용서 받지 못한 경험도 나누어 보십시오.
5. 기도
1)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2) 받지 못한 용서 그리고 하지 못한 용서에 대해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270장
8.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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