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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소중함에 대해 (Love, About Its Preciousness)
아가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32 추천 수 0 2013.06.21 21:56:53성경본문 : | 아2: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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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9월 2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사랑, 그 소중함에 대해 (Love, About Its Preciousness)
아가(Song of Songs) 2:8-14
1.
성경 안에 묶여 있는 66권의 책 가운데 '성인용' 책도 하나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구약성경의 중간에 있는 <아가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책을 <The Song of Solomon> 혹은 <The Song of Songs> 혹은 <The Song of Songs of Solom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경은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으로 <아가>(雅歌)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노래는 솔로몬이 술람미 출신의 한 여인과 주고 받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전체 8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한 남자와 여자가 노래로 대화를 주고 받고, 중간 중간에 합창단이 나와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합니다.
이 책을 '성인용'으로 규정한 것은 제가 아니라 유대교 랍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향해 부르는 사랑의 노래 가사에 성적인 은유(metaphor)가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미숙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그 모든 은유들을 성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이 책은 인간의 잠재된 성적 욕망을 자극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랍비들은 30세가 되기 이전에는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곤 했습니다.
사실, <아가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과연 경전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책인가?"라는 주제로 여전히 토론이 되고 있는 책입니다. 8장으로 펼쳐진 긴 노래의 묶음 안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주고 받는 사랑 노래입니다. 그것도 때로 아주 야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경전 안에 끼인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 책을 성경 중에서 최고의 책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초기 유대교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랍비 아키바(Rabbi Akiba)는 "이 책이 거룩하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하나도 없기를 바란다"(Heaven forbid that any man in Israel ever disputed that Song of Songs is holy)고 말하면서, "성경의 다른 책들이 거룩하다면, 이 책은 가장 거룩하다"(all the Writings are holy and Song of Songs is holy of holies)고 말했습니다. 랍비 아키바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지만, <아가서>가 성경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인정 받았기에 경전 안에 포함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이 모습대로 만들어진 것은 어느 한 시대에 몇몇 사람들이 앉아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동안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읽고 묵상하고 배우면서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은 것들이 묶여진 것입니다. <아가서>도 역시 그렇게 읽혀지고 묵상되면서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았기에 성경 66권 중 하나로서의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2.
<아가서>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는 책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우리는 '세속적인 것'(the secular)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것'(the material) 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의 육신, 가족, 매일의 삶을 살도록 해 주는 가정, 직장, 친구가 여기에 속합니다. 매일 먹는 음식도 여기에 속하고, 우리의 삶을 즐겁게 해 주는 놀이도 여기에 속합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여기에 속합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결혼을 하고, 가정 안에서 서로 섬기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늘 결혼을 통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선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육신과 물질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시고 "좋다!"고 감탄하셨고 또한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고 물질이 전부라고 믿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유물론자'(materialist)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물질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물질을 있게 한 창조주를 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즐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즐기는 것이 가장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은"(빌 3:19)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배를 채우는 것, 즉 육체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쾌락주의자'(epicureans)라고 부릅니다.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만족이면 만사가 오케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태도로는 결코 참된 만족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차원에서 만족되지 않는 한 물질적인 쾌락으로는 결코 만족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진실을 모르고 더 강하고 더 깊은 만족을 얻으면 되는 줄 알고 물질과 육신에 집착합니다. 그러한 집착은 결국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그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을 재앙의 도구로 바꾸어 버립니다.
다른 한편, 물질과 육신을 죄의 뿌리라고 생각하고는 그 모든 것을 멀리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영적인 세계에 눈을 떴다는 사람들 혹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금욕주의자'(ascetics)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 모든 종류의 육체적인 쾌락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들을 죄의 원인으로 보고 그것을 억압하려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이 세상을 흑백으로 구분해 생각합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어 모든 부정한 것을 멀리하려 합니다. 영적 음식은 거룩한 것이고, 식탁에 오르는 음식은 생존하기 위해 먹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거룩한 일이고, 직장에서 하는 일은 '썩어빠질 세상 일'이라고 폄하합니다. 육체적인 사랑은 가급적 피할 일이고, 영적인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거룩한 사람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부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고, 나머지 날은 세속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거룩하게 성별하셨으며 축복해 주신 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구분짓고 단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 두 가지 입장 중 하나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둘 다 아닌 것 같은데, 딱히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꼬집어 말하기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아가서>를 한 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아가서>는 육신과 물질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에 대해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가집니다. 이 책은 전체가 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 노래입니다. 매우 낭만적이고 때로 황홀합니다. 그러한 노래가 거룩한 책의 중심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이성적인 사랑이 결코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나누는 사랑의 밀어들과 육체적인 접촉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다른 모든 욕망이 그렇듯, 성적인 욕망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것은 축복받아 마땅한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누릴만한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사랑에 대해 전부 알았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더 영원하고 참된 사랑에 눈 떠야 합니다. <아가서>가 노래하고 있는 남녀의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은유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간절히 찾는 남자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마음 설레이는 여인은 우리 인간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관계 안에서 육체적인 사랑을 누리면서 그 보다 더 크고 높고 깊고 영원한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 교우 사이의 사랑, 나라 사랑, 교회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생각나게 해 주는 도구이며, 그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본질에 속합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 중에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이 있는데, 그 가사는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 받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지어진 존재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음으로써만 인간은 인간이 되며, 인생은 그 사랑을 완성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된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눈 감고, 사랑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성은 갈수록 타락하고 악해집니다. 요즈음 신문에 보도되는 성범죄 사건을 읽다 보면, 인간의 타락성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사랑에 굶주린 인간들이 더러운 욕망으로 그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굳이 그런 범죄가 아니어도, 요즈음 진정한 사랑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서로를 진실하게 아끼고 돌보는 부부가, 아니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진실하게 노력하는 부부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관한 한, 전적인 파산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당신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참된 사랑에 깨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 본문에 그 같은 하나님의 심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남자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치고,
비구름도 걷혔소.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계절이 이 땅에 돌아왔소.
비둘기 우는 소리, 우리 땅에 들리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무화과가 열려 있고,
포도나무에는 활짝 핀 꽃이 향기를 내뿜고 있소.
일어나 나오오, 사랑하는 임이여!
나의 귀여운 그대,
어서 나오오. (10-14절)
인간은 사랑 안에서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기에, 참된 사랑을 찾아야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것은 마치 봄날에 정원을 거니는 것과 같이 복된 일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나 겨울비를 맞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실상입니다. 겨울비에 온 몸이 젖어 오한이 들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을 찾아 몸을 녹이려 합니다. 그러라고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고, 친구를 주셨으며, 교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 안에서 참되고 영원한 사랑을 찾기까지 우리는 겨울비를 피할 수가 없고 몸에 스며든 오한을 떨칠 수 없습니다. 사람들끼리 나누는 사랑이 때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하늘을 뒤덮은 비구름이 걷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사랑을 찾을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인간의 사랑만을 추구한다면, 우리 몸의 한기는 영영 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아가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결코 남녀간의 이성적인 사랑과 부부간에 나누는 육체적인 사랑을 부정하거나 죄악시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누릴 사랑의 전부인 양 탐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가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적인 사랑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이라는 진실과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깨어나야 한다는 진실을 전해줍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랑을 감사히 받고 누리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그 사랑을 누리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제가 지금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세속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 즉 이 땅에서 우리가 보고 만지고 먹고 즐기는 모든 '물질적인 것'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지으셨고 그 모든 것을 축복하셨고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물질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그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받게 될 영원한 선물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물질을 제대로 관리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만지고 먹고 즐기는 모든 것은 성찬 식탁에 올려진 성찬 빵과 포도즙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성찬 식탁에 올려진 빵과 포도즙은 어디에서든 쉽게 살 수 있는 보통의 빵이며 보통의 포도즙입니다. 우리는 성찬 예식을 통해 그 빵과 포도즙을 받습니다. 부드러운 빵의 맛과 달콤한 포도즙을 우리는 맛 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빵을 먹으면서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참된 양식을 생각하며, 포도즙을 마시면서 영적 갈증을 해갈해 줄 참된 음료를 생각합니다.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성찬 식탁에 놓은 빵은 눈에 보인는 것 이상입니다.
집에서 식탁을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을 또 다른 성찬으로 대해야 합니다. 먹는 것으로 다 된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배만 채워지면 행복한 동물이 아닙니다. 인간이 배만 채워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동물보다 더 못한 수준으로 전락합니다. 아무리 잔인해 보이는 야수라도 당장의 허기만 면하면 더 이상 살생을 하지 않고 먹다 남은 것을 다른 동물에게 양보합니다. 하지만 먹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한 없이 살생을 하며 한 없이 욕심을 부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먹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양식을 사모한다는 이유로 육적인 양식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성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함으로 먹어야 합니다. 마치 성찬 식탁을 대하듯 감사함으로 받되,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음식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예민해져서, 하루 세끼 음식을 찾아먹듯 영적인 양식을 위해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거울에 보이는 그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 나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건강하게 보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몸을 축복하시고 성별하셔서 이 땅에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하고 학대하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지으시고 "좋다!"고 감탄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분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작품을 귀하게 다루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몸을 보면서 "저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라고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거울에는 비추어지지 않는 '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 이하에 보니,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고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만 보이는 '나'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까지 보아야만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육신의 건강을 살피려는 열심이 있다면, 당연히 그 열심이 영혼을 살피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눈 뜬 사람은 모든 것을 이렇게 바라보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히 받고 누리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것에 대한 그림자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에 탐닉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자라가기를 힘씁니다. 하나님 나라에 눈 뜬 사람은 매일 예배를 드리는 셈이며, 매일 성찬을 나누는 셈입니다.
5.
다시 사랑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지난 주간에 참 아름다운 사랑을 보았습니다. 최근에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교우가 계십니다. 성공적인 수술 후에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먹는 것을 자꾸만 토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랫배가 불러오고 통증이 심해집니다. 그 교우는 다시금 응급실로 가서 검사해 보니, 장이 움직이지 않아서 막혀 버렸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여러 가지 노력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담당 의사는 재수술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가 알았던 그분은 아주 점잖고 예의 바른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드려 "어떠신가요?"하고 여쭈었더니, 신음섞인 음성으로 "아이고, 목사님, 저 죽을 것 같아요. 목사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저 좀 살려 주세요!" 하십니다. 개스로 인한 통증은 몰핀으로도 듣지 않는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저는 당장 달려갈 상황이 아니어서 전화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는데, 뒤에서 뭔가가 툭 떨어지더랍니다. "이게 뭐지?"하고 돌아보니, 나흘 동안 막혀 있던 장이 풀어지면서 변이 나온 것입니다. 마음 졸이던 남편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바깥에 나가 닥치는 대로 간호사들을 끌어다가 변기를 보여주며 "저것 좀 보라!"고 했다는 겁니다. 당신이 좋으니, 다른 사람도 좋을 거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얼마 후, 재수술을 위해 사진을 찍어 보니, 장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수술이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다음 날, 병실에 들렀을 때, 그 남편이 그러십니다. "똥이 그렇게 예뻐 보이기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먹으라면 먹기라도 하셨겠네요?"라고 했더니, "그러고도 남았을 겁니다"라고 답하십니다. 저는 그 말씀 속에서 그분께서 아내를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시는지를 느꼈습니다. 속으로 '아, 이분이 진정으로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사랑을 나눌 배우자가 옆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 참되게 사랑하도록 힘쓰십시다. 아직 없습니까? 아름답고 귀한 사랑을 꿈꾸시고 또한 기도하십시오. 이 시대는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고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성숙한 사랑은 배우자의 똥을 예쁘게 볼만큼 마음으로 하나되고 영혼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진실하게 사랑하십시다. 인생의 행복은 사랑에 있습니다.
때로,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배우자가 끊임없이 사랑의 한계를 시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때가 있습니다. 나의 사랑을 끊임없이 악용하는 배우자를 참는 것은 연약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힘겨운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분들에게 저는 "끝까지 견디십시오"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는 그것이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결별한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나중에 그 선택을 후회하십니다. 깊이 생각해 볼만한 대목입니다.
우리 중에는 배우자가 옆에 없는 분들도 계십니다. 바울처럼 독신을 선택한 분도 계시고, 의도와는 달리 독신으로 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혹은, 원치 않는 일로 인해 홀로 남겨진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영 포기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남녀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고,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기만 하면,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의 맛을 맛보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할 사람을 찾고, 마음을 쏟아 사랑하십시다. 사랑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다. 가장 좋은 사랑, 가장 온전한 사랑,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온통 만족시켜 주는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채워질 수 없는 내면의 자리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 가운데서 그분의 참되고 영원한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찾지 못하면,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랑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허비될 것입니다. 반면, 그 사랑을 찾으면, 그 사랑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의 사랑에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 힘겹고 때로 아프지만, 그것 없이는 인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먹고 사랑을 꿈꾸고 사랑을 향해 자라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오, 주님
저희 귀를 열어 주소서.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참 사랑 발견하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2년 9월 2일 주일 설교
"사랑, 그 소중함에 대해"(Love, About Its Preciousness)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418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아가서 전체를 교독하여 읽습니다.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2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유물론적인 태도'와 '금욕주의적인 태도'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까? 그러한 태도로 인해 생긴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3) 오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제 3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해 보십시오.
4) 사랑에 있어서 당신은 어떤 상태입니까? 배우자에 대한 사랑 혹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들어 말해 보십시오.
5. 기도
1) 영원을 바라보며 순간에 신실하게 살도록 기도하십시오.
2) 참된 사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18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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