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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에 서라 (Stand By the Side of the Road)
마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57 추천 수 0 2013.06.21 21:56:53성경본문 : | 막10:4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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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10월 28일 주일 설교
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길 가에 서라 (Stand By the Side of the Road)
--마가복음 10:46-52
1.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덟 분의 교우들과 함께 멕시코 나다니엘 센터를 다녀왔습니다. 한 팀은 침술 봉사로 주민들을 만났고, 한 팀은 교육관 증축을 위해 현장 조사를 하고 계획도 세웠습니다. 김승석 선교사 부부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인해 나다니엘 센터가 활짝 꽃 피우고 있음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헌신이 까깔첸의 어린이들의 삶에 귀하게 열매 맺고 있음을 증언하는 바입니다.
멕시코로 떠나기 전 날, 저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Lectionary)가 정한 오늘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졌던 '가이사랴 수양회' 이후에 '제자됨'(discipleship)에 대해 주신 말씀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 여행을 앞 두고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데, 46절의 한 대목이 제 마음에 와서 박혔습니다. "길 가에 앉아 있다가"라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는 대로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51절에서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답한 것을 보면, 사고 혹은 질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장애를 지고 태어났거나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고 버림받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자신 혹은 그의 부모 혹은 그의 조상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징벌을 받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장애를 입은 사람들은 이중고를 앓아야 했습니다. 숨겨진 흉악한 죄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냉대했고 외면했고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 받았으니, 인간에게도 버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들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께서 노하실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가까이 하면 부정타거나 재수에 옴이 붙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로 인한 불편과 아픔을 겪는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배척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47절을 보니, 바디매오를 ”눈먼 거지"라고 묘사합니다. '눈먼 거지'라는 표현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안에 담긴 슬픔과 비애와 눈물이 느껴집니다. 그는 아마 장애 때문에 부모에게서조차 버림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고, 그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값싼 동냥에 의지하여 하루 하루를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길 가에 앉아 있던 이유입니다. 그는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났습니다. 이 세상에 그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모든 길은 온전한 사람들, 잘 난 사람들, 힘 있는 사람들이 몰려 다니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하는 곳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길 위에 설 수 없었습니다. 길 위에 선다 해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치이다가 길가로 밀려나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디매오 같은 사람이 길 위에 서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길 가에 물러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정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길 가에 앉은 바디매오', 아니 '길 가로 밀려난 바디매오.' 멕시코로 떠나기 전 날, 이 단어가 제 마음에 와서 박혔습니다. 멕시코에 도착하고 나서 저는 그것이 성령께서 저의 여행을 위해 준비해 주신 선물임을 알았습니다. 나다니엘 선교관이 세워져 있는 까깔첸에 이르러 일과를 시작하면서 제가 선 곳이 바디매오가 앉아 있던 길 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까깔첸과 주변 마을들은 실로 그곳은 이 세상의 가장자리, 길 가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 팀이 방문했던 집들은 도저히 사람이 살아서도 안 되고 살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잠을 자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움막과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생기 없는 얼굴 표정, 그리고 매직펜으로 그어 놓은 듯한 깊은 주름은 저절로 깊은 한숨을 짓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만난 가난한 마야족 사람들은 세상에서 밀려나 길 가에 물러 앉은 바디매오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저는 길 한 복판에 주인공처럼 살고 있는 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그 나라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와싱톤에 살고 있으니, 저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 편에서 보면 우리는 까마득히 먼 세상, 높고 높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 없고, 부족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이 넘쳐나서 어떻게 살을 뺄까 고민합니다. 살고 죽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로 인해 증오심을 불태우며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저는 가장 자리로 밀려난 그들을 돕기 위해 그 자리로 내려 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나다니엘 센터를 짓고 그곳에 김승석 선교사 가정을 파송하고 이제 교육관을 증축하려는 모든 계획은 길 가로 밀려난 그들을 돕기 위한 일입니다. 그곳은 살고 죽는 것이 문제인 세상입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없어 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불쌍하다고, 그들을 돕기 위해 그곳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며칠 지내다 보니, 우리가 그곳에 도움을 주러 갔지만 실은 도움을 받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했지만, 진정한 변화는 우리 자신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 날, 팀원들이 돌아가며 그곳에서 겪은 경험을 나누는 시간에 어느 교우께서 그러십니다. 별로 심각하게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만, 저는 그 말이 마치 예언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변화된 것처럼 와싱톤한인교회 전체가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까깔첸에 필요한 변화와는 다른 종류의 변화가 와싱톤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꼈던 것입니다.
무엇이 팀원들로 하여금 이러한 자각을 하게 만들었습니까?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가 세상의 가장자리로 내려 서자 세상이 달라 보인 것입니다. 길 한 복판에서 보는 세상과 길 가에서 보는 세상이 다릅니다. 길 한 복판에서 보는 세상보다 길 가에서 보는 세상이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길 한 복판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진실이 길 가로 내려서면 환히 드러납니다. 이런 까닭에 선교 여행을 다녀 온 사람들이 자주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길 가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서 더 잘 보입니다. 밝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보기 어렵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더 잘 보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장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곳에서 그분을 만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잘 난 사람들, 잘 된 사람들, 멋진 사람들을 만날 때는 하나님이 증발된 것 같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만날 때 하나님은 가까이 오십니다.
3.
오늘의 이야기와 바로 앞에 나오는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이 역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자기가 앉아 있는 곳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높이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47절)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너처럼 부정한 사람이 어찌 예수님처럼 거룩한 분을 찾느냐?'는 뜻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불러 오라고 하신 다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51절)
바디매오는 지체 없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51절) 그러자 예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바디매오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즉석에서 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본문을 보면,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35절) 그러자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36절)
예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은 것과 동일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37절)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정부를 재건하게 되면, 자기 형제 두 사람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열 두 제자 중에서 가장 높은 영광과 권력을 달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38절)
아, 이 얼마나 큰 대조입니까?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고 그래서 즉시로 응답을 받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 같은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까? 그들이 선 자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서도 예수께서 특별히 신뢰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신뢰와 애정이 그들의 눈을 가렸습니다. 능력자 예수님의 마음을 얻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마치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오해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그들의 눈을 가렸습니다. 그들이 선 자리가 그들의 눈을 가렸습니다. 그래서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라고,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바디매오는 길 가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조차도 채워지지 않은 상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아무 것도 그의 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바디매오도 구할 것이 많았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고, 옷도 부족했을 것이며, 돈도 없었습니다. 살아갈 집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 중에서 하나를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 있는 모습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의 선 자리가 그로 하여금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누가 진정으로 눈먼 사람인지, 헷갈립니다. 육신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바디매오는 눈먼 사람이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눈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고 진실을 보는 면에 있어서는 반대였습니다. 바디매오는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났지만 그 자리에 있었기에 세상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반면, 야고보와 요한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착각했기에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개안(開眼)의 기적이 필요한 사람은 바디매오가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나다니엘 센터 바로 옆집에는 네 남매가 살고 있습니다. 네 남매의 아버지는 모두 다릅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아침 일찍 나가 밤 늦게 돌아오고, 아이들은 할머니가 돌보고 있습니다. 그 남매 중 제일 큰 누나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김승석 선교사는 매일 자신의 차로 그 소녀를 학교에 데려다 줍니다.
이번에 동행했던 교우 중 한 분이 그 차를 타고 학교를 다녀오면서 그 소녀와의 만남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날 저녁, 함께 기도를 하는데, 그 교우가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오늘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 소녀의 맑은 얼굴과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소녀 앞에서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소녀로 인해 제 마음의 눈이 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교우는 육신의 눈이 먼 소녀를 대하고 나서 자신의 마음의 눈이 어두어져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교우도 역시 길 가로 내려 서는 순간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4.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질문은 "당신은 제대로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눈은 참 중요합니다. 저는 연초에 백내장 수술을 하고 난 이후 참 밝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밝은 곳인지, 우리 눈이 원래 이렇게 정확하게 보게 되어 있었는지, 자주 놀라고 있습니다. 더구나, 단풍이 눈부신 요즈음, 밝아진 눈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처럼, 육신의 눈이 밝은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눈만큼이나 중요한 눈이 있습니다. 마음의 눈입니다. 마음의 변화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어떤 때는 세상이 지옥같아 보이다가, 또 어떤 때는 세상이 천국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살만한 것 같다가도 또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손에 잡힐듯이 분명히 보이다가 또 어떤 때는 도무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모두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도 눈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제대로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육신의 눈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관한 질문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느냐는 질문이며, 진실을 제대로 보고 있느냐는 질문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눈에 보이느냐는 질문입니다. 마음의 눈이 감겨져 있으면 육신의 눈이 아무리 잘 보여도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어도 마음의 눈이 밝으면 장애의 짐을 상당히 덜 수 있습니다. 인생을 속박하는 것은 육신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눈은 어떤 상태입니까? 혹시 "제 마음의 눈은 환합니다. 저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삽니다. 제 눈에는 하나님이 환히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진실이기를 바랍니다만, 혹시나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입장은 아닌지,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제대로 보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려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의 마음의 눈은 멀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중에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이 착각이 아닌지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제대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겸손히 주님 앞에 고개 숙이고, 바디매오처럼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51절)라고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5.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당신은 제대로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마음의 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보기 원한다면 자신의 선 자리가 어딘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세상의 중심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이곳을 바라보고 있고 선망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도 있고, 돈도 있고, 최고의 교육도 있으며, 미래도 있습니다. 최근에 저희 옆집에 인디아 출신의 가정이 이사를 왔는데, 차 한 대는 벤츠, 한 대는 BMW, 그리고 나머지 한 대는 렉서스입니다. 모두가 이러한 번영과 성공을 잡고 싶어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와 있는 이유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선 이 자리가 우리의 눈을 가려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부잣집 아이가 학교에서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친구를 보고 어디 아프냐고 물었답니다. 그 아이가 집에 쌀이 없어서 굶었다고 대답하자, 부잣집 아이가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아니, 쌀이 없으면 돈 가지고 가서 사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 그 아이의 부가 그 아이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안전하고 평화롭고 풍족한 환경에 살다 보면, 세상이 다 그런 줄 압니다. 안전과 평화와 풍족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이상의 것에 욕심을 냅니다. 살고 죽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때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밤잠을 못 이루고, 세상이 두쪽 난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미 가진 것에 자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갖고 더 누리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는 그것만이 그 사람의 눈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물질적으로는 가장 안전하고 복된 곳일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 속에 머물러 살도 보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고,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며, 인생을 헛된 것에 허비하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가시려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듯, 우리가 가진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시는 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때로 길 가로 내려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 세상의 가장자리에 서 보아야 합니다.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에게 줄 대려고 두리번 거릴 것이 아니라, 밀려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진실이 보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인생을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바칠지 알게 됩니다.
며칠 전, 어렵게 사는 어느 노인이 자신의 전 재산과 시신을 기증했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습니다. 왜 그런 결심을 했느냐는 물음에 그 노인이 대답합니다. "죽음의 문턱에 갔다 오니 무엇이 중요한 줄 알겠습디다." 그렇습니다. 삶의 한 복판에 있을 때는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생의 끝자락에 한 번 매달려 보면 무엇이 중요한 줄 알게 됩니다. 오직 살고 죽는 것만이 문제인 상황에 서 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입니다. 세상의 가장자리에 서 보아야 비로소 마음의 눈이 맑아져 진실이 보입니다. 그 동안 내가 지향하고 있던 방향이 얼마나 빗나갔는지! 나를 붙들고 있던 고민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그 동안 나를 잠 못 자게 했던 문제들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이었는지!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사치스럽게 살았는지! 내 기도와 열망이 얼마나 빗나간 것이었는지! 그 동안 내가 자랑했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얼마나 어두웠던지! 그러고 나면 앞으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 가로 내려 가십시다. 세상의 가장 자리로 내려가기를 힘쓰십시다. 오직 살고 죽는 것만이 문제가 되는 곳으로 내려 서 보십시다. 사람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가 그 앞에 무릎 꿇어 보십시다. 마음의 눈이 맑아질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그토록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일 것입니다. 제자로 사는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단기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세상의 가장 자리로 내려 서는 일입니다. 나에게 특별한 기술이 없다고 핑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 조건 없이 낮고 어둡고 냄새나는 곳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덩이의 음식이나 약 한 봉지보다 진실한 눈길과 따뜻한 손길입니다. 멕시코 나다니엘 센터는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지어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 교회는 니카라구아와 탄자니아에 그리고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단기 선교팀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용기를 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멕시코 선교팀에도 선교 경험이 처음인 분이 절반이 넘었습니다. 나중에 속 마음을 나누다 보니, 특히 두 분은 아주 큰 용기를 내어 참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마음에 품고 선교길에 올랐습니다. 나중에 두 분이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 교인들 모두 이곳에 한 번씩 다녀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길 한 복판에 있다가 길 가로 내려 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 보였기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굳이 단기 선교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지역 노숙자들을 섬기는 사역에 혹은 지역 라티노들을 섬기는 사역에 참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어렵다면, 교우들 가운데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을 찾아가셔서 시간을 보내십시오. 높이, 높이, 더 높이 오르려고만 하지 마시고, 낮게, 낮게, 더 낮게 내려가기를 힘써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몸은 세상의 정상, 세상의 한 가운데 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세상의 가장 자리에 있도록 늘 힘써 보십시오. 추수감사절을 앞 두고 그로써리 카드를 모으는 것도 그 마음을 품자는 뜻이고, 굿네이버스와 함께 아동 결연 사업을 하려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길 가에 서십시다. 그곳에서 바디매오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고, 어두워졌던 마음의 눈을 뜨게 될 것이며, 그분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헛된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며, 헛된 일에 돈을 쓰지 않을 것이고, 헛된 일로 잠 못 이루는 일이 없을 것이며,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하나님의 영원한 창고에 모아질 것입니다. 이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
저희로 낮은 곳에 서게 하소서.
어두운 곳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
저희로 어두운 곳을 찾게 하소서.
야고보와 요한처럼
본다고 하면서 눈 어둔 사람으로 살지 말게 하소서.
바디매오처럼
저희의 눈 어두움을 인정하게 하시고
주님의 빛을 받아 눈 뜨게 하시어
주님 따라 가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2년 10월 28일 주일 설교
"길 가에 서라"(Stand By the Side of the Road)
--마가복음 10:46-52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366장(통 485)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마가복음 10장 35절부터 52절까지를 읽고,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와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십시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세상이 달라보이는 경험을 한 적이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무엇이 달라 보이게 만들었으며, 어떻게 달라 보였습니까?
3) 요즈음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문제는 당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4) 길 가로 내려 서기 위해 당신은 어떤 노력을 하겠습니까?
5. 기도
1) 나다니엘 센터의 김승석 선교사 가정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 낮고 어둡고 냄새나는 곳을 찾아갈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323장(통 355)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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