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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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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2장 1절-10절.(참고: 히 11장 23절-26절)
출 2장 1절-10절: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히 11장 23절-31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본문만으로 설교함) 기도 올립시다. 세상 끝 날까지 저희를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어떤 지역에 어느 환경 처소에서 어떻게 살았던 간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날을 저희에게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다 모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를 갈망하고 또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불러주셨사오니 저희들에게 필요한 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뜻을 저희들에게 밝히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먼저 참고적으로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부흥회의 본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잃어버렸던 것을 바로 찾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부흥회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것을 찾게 하는 것. 사람 긁어모으는 것이 부흥회가 아니라 그 말이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 모세가 모세만큼 된 것은 어머니의 교육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에게 대한 교훈은 어머니에게 큰 책임이 있는 것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특히 어머니에게 책임이 더 커요. 교인들이 이질적인 길로 나가는 것은 교회 교역자에게 책임이 큽니다. 교회에서 교역자는 양육자요,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어머니가 양육잡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에게 책임이 크다 그 말이요. 책임이 많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어린 모세를 믿음으로 양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어머니들은 믿음을 가지고 기르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세상적으로 나가는 예수 믿는 어머니들 역시 자기 자식을 키울 때에 믿음으로 기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모세에게 진리교육을 한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가 아니고 실모지요. 그러니까 유모 같은 실모입니다. 요게벳이 공주로부터 어린 모세를 맡아서 기르게 되었으니까 공주입장에서 보면 이 요게벳은 모세에게 있어서 유모고, 그러나 신앙의 질적인 면이라든지 또 직접 모세를 낳았으니까 어머니라는 혈육적인 면에서라든지 보면 실모지요. 진짜 어머니지요. 그러면 이 실모가 어린 모세에게 무엇을 넣어주었겠느냐? 그 때 그 상황적으로 보면 요게벳이 아주 지혜가 있었던 것 같아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시대적 상황을 사상적 신앙적으로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모세를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시대에 이 어린아이를 나에게 왜 주었느냐’ 하는 그런 면을 믿음으로 생각을 하고 어린 모세에게 진리지식을 넣어주어서 신앙인격이 자라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어머니들이나 교회의 교역자들도 자식들에게 성도들에게 진리지식을 넣어주어서 신앙인격이 자라도록 해야 된다는 것. 딴 것을 다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큼은 분명히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딴 것을 아무리 날고 기고 잘 해도 신앙인격이 자라지를 못했다면 그것은 큰 실패입니다. 신앙인격이 자라지 못했다면 받는 자 입장에서는 인생 존재적 실패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창조의 목적적인 면에 있어서, 또한 교육적인 면으로 볼 때에 실패란 말이요. 하나님이야 실패하겠습니까마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추어서 교육되는 면에서 볼 때 그렇다 그 말이요. 오늘날 모든 부모들의 교육을 분석을 해 볼 것 같으면 첫째는 육의 성장 즉, 육체의 성장을 위해 힘을 쓰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그런 소리 많이 들을 수 있어요. 부모들이 어린아이 낳아서 앉고 이웃집이나 길 밖에 나가게 되면 ‘아따 그 놈 참 잘 생겼다. 아따 그 놈 참 장군감이다. 아따 그 놈 참 인물이 훤하구나’ 하지요? 이건 뭘 보고 그러는 거지요? 육체. 육체의 미모성을 보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렇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육체의 미모에 신경을 썼다. 더 나쁘게 말하면 육 성장, 고깃덩어리 성장을 먼저 보고 있다. 이게 세상 부모들이 자식을 보는 눈입니다. 어린아이가 건강하게 잘 생겼으면 어머니들이 욕심을 갖지요? 여러분들,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 섰는 이 사람이 커서도 이만큼 적은데 어린아이로 태어났을 때 어떻게 생겼었을까요? 보나마나 갖다 내버려도 누가 주워가지는 않았을 거야. 눈이 얼마나 작은지 어머니가 그러더라고요. 손톱을 가지고 얼굴 두 군데를 콕 눌러놓은 것 같더라고. 커서 어른이 돼서도 이렇게 눈이 적은데 뭐. 이 세상 부모들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육모의 미모성을 먼저 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뭘 보는가 하니 자식을 걱정을 하는 면에 있어서 일반 지식적인 면의 일반 인격성장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자식들을 학원을 여러 군데로 보내지요? 일반 지식적인 면에, 일반 인격성장 면에 신경을 쓴다. 육의 미모성보다도,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도 일반적인 지식, 일반인격이 더 고상하지요. 인간으로 본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이게 값이 나가는 거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이건 좀 더 고상한 건데 많은 부모들이 이 고상한 것을 몰라요. 안 믿는 부모로서 먼저 일반 인격적인 면을 생각을 해야 옳은데 그걸 몰라요. 육신에 관한 것은 두 번짼데 두 번째로 돌아갈 이것을 첫째로 꼽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순서가 뒤바꼈지요. 순서가 뒤바껴서 그렇게 교육을 시켜 나갈 때에 그 어린아이 머리통 속에 뭐가 자라겠어요? 고깃덩어리만 자라지. 모양새, 눈으로 보는 것, 즉흥적인 것만 알게 되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이런 자는 미래가 없이 산다 그 말이요. 미래 없이 사는 자식으로 부모가 길러 놨다 그 말이요. 오늘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걸 라디오 방송으로 뉴스로 듣고서 ‘패륜아라, 몹쓸 자식이라’ 다 말하는 거지만 그 자식이 태어날 때부터 뱃속에서 ‘내가 몇 살 되면 부모인 당신을 죽이리라’ 그렇게 마음을 품고 태어났습니까? 그 자식이 술 먹는 거 누가 가르쳐 줬어요? 담배 피우는 거 누가 가르쳐 줬어요? 춤추고 노래 부르는 거, 못된 짓하는 거 누가 가르쳐 줬어요? 다 부모가 가르쳐 줬지 뭐.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부모들은 그런 소리 들으면 ‘그 놈 몹쓸 놈이다. 죽일 놈이다’ 하는데, 물론 그런 짓을 하는 게 좋은 자식은 아니지요. 그러나 교육을 생각하는 지식적인 면이 앞에서 말했듯이 근본적으로 비뚤어져 버렸어. 원리가 어그러져 버렸어. 순서가 어그러졌어. 오늘날 부모들이 순서가 어그러진 채 교육을 시키는 한 천 년 만 년 가봐야 절대로 하나님 앞에 옳은 자식은 태어나지 않아요. 사람 같은 자식이 안 태어나요. 절대로 태어나지를 않습니다. 그건 성경이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은 오늘날 부모들에게 자식을 바로 교육하는 지킴서예요. 학원 여러 곳에 보내 봐요. 그 면에 대해 능통하고 통달한 지식을 가질 런지는 모르지만 인간 인격적인 면에는 깨달음이 없어요. 사람이 더 무서워져요. 자기 이익만 챙기고. ‘교육 교육 질서’ 운운해도 여러분들, 전철 간에서 사람 탈 때의 모습들을 가만 보라고요. 당장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다 드러나지. 전철 안에서 누구 하나 자기 주위를 둘러보고 나이 많은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그런 마음은 없어. 젊은이들이 먼저 뛰어가서 먼저 자리에 앉는 거야. 그게 우선적으로 돼 있어요. 그런 교육을 누가 시켜놨어? 뱃속에서 배워 나왔어요? 부모들이 다 그렇게 시켜놓은 거야. 세 번째는 진리지식으로 자라는 신앙인격 성장 면에 신경을 쓰는 부모가 있어요. 순서적으로 따져봅시다. 제일 먼저 육체성장, 그 다음에 일반 지식적 성장, 그 다음에 진리지식적 영적 인격성장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자녀를 교육하는 면에 있어서 앞의 두 가지는 모든 부모들 속에 다 들어있어요. 그러나 진리지식으로 자라게 하는, 신앙인격으로 자라게 하는 그 교육은 일반사람들은 모르는 거고,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을 믿는 부모는 그 지식을 갖고 있느냐? 부모가 예수를 믿어도 그 지식이 없으면 안 믿는 사람들처럼 자식을 기르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인격 성장, 일반 지식성장, 육체성장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우리 믿는 부모들 중에도 특히 이 진리의 깨달음을 받고 진리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은 자식을 키울 때에 신앙인격 성장이 먼저 들어가지요. 그렇지요? 자식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던, 눈이 찌그러졌던 그게 문제가 아니고 먼저 영의 성장, 진리지식이고, 두 번째는 일반지식은 보조물로 생활에 써먹을 것. 세 번째는 육체의 건강을 돌보는 거. 그런데 안 믿는 부모들은 인격성장의 교육 이게 있어요, 없어요? 이건 없어요. 모르니까 없는 거고. 왜 몰랐느냐? 누구는 뱃속에서 배워 나왔느냐? 그러니까 사람의 속에 하나님께서 종교성을 넣어주었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지으면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은연중에 ‘아이고, 하나님이 무섭구나. 하늘로부터 벼락을 맞을 거다’ 그러지요. 그럴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같지. 그러나 평소에 두뇌 속에 들어있는 그 사상성이 하나님은 잘라놨어요. 위로부터 오는 거, 신령한 것, 최고의 좋은 것,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는 이건 다 잘라놨어요. 잘라놓으니까 뭣과 같은가 하니 인간이 자기 머리를 잘라놓은 것과 같아.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따라 살아야 바로 사는 건데. 자식이 부모로부터 명령을 받아야 바로 될 터인데 부모부터 하나님을 잘라놓고 사니 그 자식이 부모를 잘라놓을 수밖에. 그건 당연한 거지. 이건 자기가 자기 머리를 잘라놓는 거나 마찬가지. 인간이 자기 머리를 잘라놓고 뭘 생각하겠어요? 아무 생각이 없는 거지. 머리 없는 인간이지요. 어른 없는 인간이고 하나님 없는 인간이지. 그게 뭐요? 이런 자가 인간이 되겠어요? 괴물단지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물 중에 최고의 아름다운 창조물이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의 영적인 면의 보이지 않는 감각성 사상 정신 마음 이런 걸 버리고 인간의 육체적 모양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창조가 어떻게 그렇게 고상한지 몰라요. 정말 하나님은 예술가야. 더 들어가서 사람의 보이지 아니하는 마음, 마음의 모양도 고상해요. 그리고 더 고상한 것은 영의 미모, 영적인 모양이 있어요. 다른 어떤 유능한 동물에게도 이런 건 없어요. 우리 인간에게만 이것이 있어.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그런 것이 자라야 하고, 그런 것으로써 관계성을 지으며 최고의 고상한 인간으로 성장이 되어야 할 인간인데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이 수두룩하다. 차라리 짐승일 것 같으면 갖다 팔면 고기값이나 나갈 것 아니겠어요? 썩은 나무덩어리라면 주워다 불이나 때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쓸모없는 사람은 누가 주워가요? 아무도 안 주워가요. 주워갔다가는 큰 앙화가 되게요. 그런 가치 없는 인간으로 누가 길렀느냐? 오늘날 우리 부모들은 큰 책임을 느낄 줄 알아야 돼요. 자식들은 자라면서 자기가 직접 경험은 안 했지만 눈으로 보는 면에는 경험이 되는 거니까 ‘나도 부모가 되어서 저렇게 하면 내 자식도 그렇겠구나’ 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깨닫고 좋은 것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돼야지요. 그런데 자기에게 언젠가 반드시 부딪힐 그런 일들은 왜 모를까 그 말이요. 자식들이 왜 그렇게 됐느냐? 부모가 자식들의 육체의 미모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생김새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이건 둔해요. 이런 사람 희망 없어요. 사회적으로 나가도 희망이 없어요. 남에게 이용물밖에 안 돼요. 그런가 하면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학구열이 많지. 배움의 열기가 대단하지. 그래서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게 하려고 여러 군데 학원에 아이를 보내지요. 이렇게 되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면에 대해서 전문가는 될는지 모르지만 사람이 안 돼. 학원에 여러 군데 보내는 것이 인격이 성장되는 줄 알아요? 인격성장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참 인격성장은 오직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이래야만이 너의 인격성장이 된다’ 하셨는데 어련히 알아서 이 성경을 줬겠느냐 그 말이요. 절간에 가서 절을 한들 인격성장이 됩니까? 유교를 배우면 어른행세 하려고 ‘에헴’ 하며 권위의식이나 세우려고 하지 인격성장은 안 되는 거예요. 이거는 세상에서 국가적으로도 볼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겁니다. 자식에게 일을 시키는 가정보다도 가르치는 가정의 자식이 희망이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배우라 그 말이요. 배우는 시간이 있을 때 배우라 그 말이요. 예를 들면 학생이 배우는 시간에 안 배우고 놀러 다니고 노는데 신경 쓰고 하면 얼마 안 가서 자기가 뿌린 대로 자기가 거두게 돼. 그러면 무슨 희망이 있어. 부모 애나 먹이지. 부모들이 돈 벌어가지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놨더니 자식은 노래방에 가서 놀고, 끼리 끼리 숲속에 모여앉아서 오그락 짝짝이나 하고, 데모대에 끼어서 외치기나 하면 그 무슨 인격이 성장이 돼. 인격성장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요. 사람은 인격이 성장이 돼야 돼. 다른 건 못하더라도 사람에게는 최고의 값나는 인격이 성장이 돼야 돼. 특히 우리 기독자는 신앙인격이 성장이 돼야 돼요. 신앙인격 성장시키려고 교회 나가고, 신앙인격 성장시키려고 예수 믿고, 신앙인격 성장하려고 교회에서 충성봉사 하고. 안 그럴 바에야 뭐하려고 예수 믿어요. 안 그래요? 교회에서 헌금 강조하면 갖다 주고, 그 헌금가지고 뾰족하게 건물이나 올려서 자기 이름 하나 새겨놓고 그 짓 하려고 교회 다녀요? 자기 속에 어느 지식이 더 많이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그 지식이 그 사람의 주격적 지식이 돼버려요. 신앙인격으로 커지면, 진리지식적으로 커지면 그 사람은 그 면으로 커져나가고, 일반 지식적인 그 면이 그 사람 속에서 주격적 지식이 돼버리면 그 사람은 그 면으로 커져나가고, 진리지식의 인격도 아니고 일반지식 면도 아니고 육체의 미모에 신경을 써서 ‘어떻게 하면 내 육체를 아름답게 만들까’ 하는 그 면에 신경을 쓰면 그 사람은 그 면으로 커져요. 많이 보지요? ‘세상이 이렇다’ 하고 우리들에게 다 보여주지 않아요? ‘미스 유니버살, 또 코리아 진선미’ 하는 그게 다 뭐요? 또 남자들도 이렇게 하면 힘살이 어떻게 되고, 저렇게 하면 힘살이 어떻게 되고 하는 그건 뭐요? 육체의 미모 아니요? 사람이 그 면에 대해 신경 쓰고 연구를 하니까 그 면으로 커지는 거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어느 면으로 커지겠어요? 오늘날 우리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어느 면으로 크게 하겠느냐 그 말이요. 모세 어머니는 모세를 교육을 시킬 때에 어느 면으로 크게 하려고 신경을 썼을까요? 성경에 뭐라고 그랬지요? 아까 읽을 때에? ‘믿음으로’ 그렇게 됐단 말이요. 믿음으로 하는 교육, 신앙인격 교육으로 모세가 모세만큼 된 거에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그 어머니의 피땀 흘리는 그 수고로 인해서. 모세 어머니가 ‘모세야 너는 육체적으로 자라서 애굽을 때려눕혀라. 주먹가지고 때려눕혀라’ 하고 가르쳤을까요? ‘모세야, 너는 애굽사람이 돼가지고 애굽지식을 많이 배워가지고 애굽에서 왕이 되라’ 그랬을까요? 여러분들, 솔직히 말해서 모세가 부럽지요? 부러워요, 안 부러워요? 안 믿는 사람도 십계 영화에 모세가 나와서 지팡이 하나 탁 들면 홍해가 착착 갈라지는 거 보고 ‘나도 저 지팡이 하나 가졌으면’ 하고 굉장히 부러워할 거라.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하나 더 알고 있어야 될 게 있습니다. 뭐냐? 일반적인 환경에 의해서 어린아이 속에서 죄악성이 자꾸 커져가고 있다고 하는 이것을 우리 부모들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앙지식을 집어넣어주는 이 면에 적극적이라야지 이 일을 조금이라도 쉬게 되면 쉬는 그 통에 곡식밭의 풀은 안 가꿔도 잘 자라듯이 자녀들 속에서 죄악적인 성분이 자라요. 알겠어요? 이렇게 되면 일반적으로 배우는 지식은 그 면에 전부 다 이용이 되는 거지요. 범죄 하는데 전부 다 이용이 되는 거지. 그런데 오늘날 우리 부모들은 이러한 것을 알고 있느냐? 도둑질도 안 하고 거짓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그 사람의 속에서 죄악성은 자라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중들이 죄 안 짓겠다고 저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고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 속에서 죄악성이 안 커져요? 여러분들, 물론 우리 기독자들은 절간은 좋아하지도 않는 거지만. 그런데 절간 벽에 붙여놓은 거 고상히 볼 것도 없어요.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거니까. 자식교육을 말을 하니까 그 생각이 나네. 저기 충청도 해미에 있을 때에 우리 집 옆에 장로님 댁이 있었어. 그 장로님 댁에 생일이다, 무슨 환갑이다 하는 잔치가 있으면 그 교회 교인들이 의례히 와요. 그런데 그 교회 어느 집사님이 자기 아이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대요. 내가 보니까 그 어머니 신앙이 개떡 같은데 모세라고 이름을 지어놓으면 그 자식이 모세처럼 될까? 여러분들, 이름 좋다고 부자 되고 잘 살고 오래 살고 훌륭하게 되는 겁니까? 그러면 이름이 나빠서 다 빨리 죽고 그럽니까? 낳자마자 죽는 아이도 있는데 아직 이름도 안 지었는데 왜 죽어? 이름이 없어서 죽었나? 이름을 좋게 예쁘게 짓는 그게 문제가 아니요. 문제는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무슨 교육을 시키느냐? 무슨 교육이 들어가게 하느냐? 무슨 지식이 들어가게 하느냐? 이게 매우 중요하다 그 말이요. 목사가 이름을 지어주면 훌륭하게 됩니까? 천만에요. 부모가 신앙 인격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뭐. 그 집사님이 자기 아이를 최고로 훌륭한 세계적인 부흥강사를 만들고 싶다는 소원을 가졌어. 그래서 내가 그 집사님보고 그랬어. ‘집사님, 오늘날 부흥강사 사기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귓구멍이 좀 뚫리라고 그 말을 했어요. 아주 사기꾼이 굉장히 많아요. 이름 있는 부흥강사가 어딨어. 하나님 앞에 뭐가 이름 있는 부흥강사요? 내가 눈이 작아서 잘못 봤는지 모르지만 이름 있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별로 못 봤어요. 사기 치는 사람은 봤지. 이용해 먹고 신앙 사기 치는 이건 사기인 줄을 몰라. 유명하긴 뭐가 유명해. 세상 독물 먹이면서 뭐가 유명하다는 거요? 세 가지 성장 중에서 어느 것이 성장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어린아이의 영원이 좌우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고로 우리 부모들은 태아교육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고, 유아교육을 알아야 하고, 소아교육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애굽의 박사가 볼 때에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에게 한 교육은 극히 제한되어 있는 교육입니다. 모세를 어머니가 몇 살까지 길러서 애굽의 궁중으로 데리고 가지요? 젖 떨어지면 데리고 갈 거 아니요? 그러니까 어머니의 교육은 젖떼기 전까지라 그 말이지요. 그러나 이 어머니의 교육은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교육입니다. 영원에 대한 교육이고, 영적인 면에서 무한성에 대한 교육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한 교육이요, 즉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를 만들어서 태어나게 하고, 세상에 살다 가게 하는 그 신적인 목적에 대한 교육입니다. 이 교육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사상과 정신이 모세에게 정통적으로 들어가는 교육 아닙니까? 이 얼마나 신나는 교육입니까? 교육의 점수로 본다면 100점짜리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신적인 교육이라야 신적인 신앙인격이 자라지. 그리고 인간의 나이가 극히 짧은 시간인데 어머니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살아있는 그 동안에 그것도 아주 은밀히 봉쇄되어 있는 교육입니다. 어머니의 이 교육이 애굽의 교육청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나는 이렇게 모세에게 교육을 시킵니다’ 하고 내놓고 하는 교육은 아니잖습니까? 어린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가슴에 않고 젖줄로 통해서 들어가는 교육입니다. 이 모세 어머니가 외국유학을 해서 유명합니까? 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속에는 요셉의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모세 어머니 속에는 400년 전에 형들의 미움을 사가지고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신앙, 요셉의 사상, 요셉의 그 살아있는 혼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런데 다른 이스라엘 여성들도 많고 많을 텐데 왜 그 사상이 꼭 요게벳 속에만 들어갔을까? 딴 어머니들을 뭘 했을까? 왜 그 사상이 꼭 그 한 여자에게만 들어갔을까? 왜 다른 여자는 그 신앙정신과 사상을 못 받았느냐 그 말이지요. 다른 여자들은 귀가 없었지요? 안 그럴까요? 전부 다 귀가 먹었지? 그리고 발이 없어서 못 받았지? 딴 말 할 것 없어. 요셉의 그 신앙사상을 받으면, 그 교훈을 받으면 애굽에서 출세를 못하니까, 애굽에서 성공을 못하고 애굽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니까 안 받았어요. 그만큼 가치 있게 여긴 게 아니란 말이요. 간단히 말하면 그래요. 모세가 젖 뗄 때까지 그 속에는 은밀적인 진리지식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궁궐에 들어가서는 공주가 그 어린 모세를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극히 짧은 시간에 비공개적으로, 그것도 애굽에서 볼 때에 애굽 식으로 말한다면 무식한 선생이 진리지식의 교육을 했고, 모세를 교육시키는 이 공주의 교육은 공개적인 교육입니다. 애굽의 각지에 광고를 해서 인류선생을 다 데려다가 많은 시간을 가지고 모세를 가르칩니다. 어린아이가 교육이 되는 것은 모든 게 교육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전부 다 교육이요. 애굽에서는 궁궐 속으로 들어가서 유명한 학박사들이 우 몰려와가지고 각 학과마다 선생이 따로 있지요? 각 선생이 각기 공개적인 교육을 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세상교육이 다 공개적인 교육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교회적으로 보면 은밀교육 이에요. 봉쇄교육. 그렇지만 이 어린 모세 속에서는 진리지식이 원 지식이 되고 일반지식은 보조지식이 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그 훌륭하고 유명한 학박사들이 몰려와가지고 그런 모세에게 아무리 가르쳐도 모세에게 있어서는 애굽의 지식은 임시적인 지식이고 보조적인 지식입니다. 그 정신으로 자라는 모세가 참 훌륭합니다. 그렇게 넣어준 어머니의 교육도 훌륭했고. 고로 모세는 자라면서 그 신앙정신 인격을 가지고 바로를 이용하고 애굽을 이용했고 애굽세상을 이긴 겁니다. 세 가지 교육의 원리 중에서 우리는 먼저 진리지식입니다. 자기를 신앙 인격적으로 성장시키고 만들면 거기에서 뭐가 나올까요? 진리지식 신앙인격이 주격이 되어서 그렇게 자라게 하면 그 속에서 무엇이 나올까요? 뭐가 나올까요? 모세가 나오지요. 그런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모세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이 모세가 나오는 원리를 우리는 이 교육에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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