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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1:2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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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머물지 않는 신앙
2008년 5월 31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창세기 11:27-32
작년 교회창립예배와 거의 때를 같이 해서 우리 교회는 전교인 영성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나누어 드리는 '가정예배 및 큐티 나눔지'가 바로 그것이고, 더불어 성경일독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그저 주일에 한번 교회와서 예배 드리고 말씀 듣는 것에 익숙하거나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성장을 하려면 날마다 주님을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만나고 실천하는 경건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우리 영혼의 호흡인 기도가 일주일간의 삶 가운데 있어야만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고, 세상에서의 삶에서도 힘과 지혜를 얻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영성훈련을 시작한 것인데, 요즘 즐거운 소리들이 들립니다.
어느 집사님 가정은 얼마전부터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가정 분위기가 좋아지고, 특히 자녀들이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가정예배가 있는 가정과 없는 가정의 차이는 큽니다. 가정이 무너져가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을 지키고 가꾸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가정예배입니다. 온 가족이 예배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어느 분은 큐티를 통해 새롭게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다며 감사드린다는 말을 합니다. 큐티는 단순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큐티를 잘하시는 분들을 보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저 역시 20대에 큐티 훈련을 했고, 큐티를 통해 7년 동안 기도했던 응답을 받았고, 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큐티로 시작해 보십시오. 하루가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어느 분은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답니다. 제가 알기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경을 읽으시는 셈인데, 다소 어렵기도 하지만 끝까지 읽으실 것 같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러셨다지요? 이 분이 박정희 정권 때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를 했다가 감옥에 갇혔던 분인데, 감옥에서 할 일이 없어 성경을 쭉 읽었답니다. 읽다보니까 속도가 붙어서 일주일에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주에 성경일독을 하던 중에 일곱째 주가 되니까 성경이 갑자기 살아있는 활자가 되어 자기에게 다가 오더라는 겁니다. 성경의 글짜들이 살아 움직이면서 자신에게 들어오는데,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답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날마다 먹는 사람들에게는 깨달음과 변화와 성장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여러분들도 이 경지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어렵게 느껴지거나 막히는 곳이 있는데 대개 족보입니다. 입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그 이름 같고, 특히 그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없을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족보는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식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 바탕에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 어떻게 일하셨는지가 담겨져 있고, 악한 사람의 경우는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 자체가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 기록이 바로 족보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 대한 흐름과 내용을 알게 되면 족보가 쉬워지고 또 보여지고, 그 족보를 통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족보 가운데 있는 부분입니다. 데라라는 사람에 대한 간략한 내용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족보는 재미도 없고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대충 읽으며 넘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좀 찬찬히 읽고 있는데, 족보에 보면 가끔 어떤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기록이 있다는 것을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말씀을 나누었던 야베스가 그런 인물입니다. 역대상 4장에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 야베스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짧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기록을 통해 야베스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픈 과거를 통해 어떻게 일하셨고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입니다.
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누가 몇 살에 누구를 낳았다는 식의 나열인데 비해 데라는 다른 사람들보다 6줄 정도 더 기록이 많습니다. 왤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워낙 중요한 인물이다 보니 그의 아버지 데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더 기록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본문에 기록된 데라의 가정을 보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데라와 그의 가정의 문제와 여정을 통해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데라가 누구인지부터 보면, 일반적으로 아는 것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의 족보를 보면 데라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의 족보가 시작되는 10절을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합니까?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이 누구입니까? 노아의 세 아들 중 장남입니다. 그러니까 데라는 어떤 사람이라는 겁니까? 노아와 셈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데라가 노아의 신앙을 유산으로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데라에게서 노아에게 있었던 그 신앙의 흔적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녔던 장로회 신학대학교 교수 중에 주씨 성을 가진 교수님 한 분이 계신데, 이 분은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 당하신 분입니다. 그런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라고 할 때 우리는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자적인 신앙의 유산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교수님은 그런 신앙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신앙인격과 삶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데라가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가 노아와 셈의 후손이라는 점이 노아에게 있었던 순종의 믿음, 순수한 믿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겁니다. 본문의 짧은 기록으로는 데라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지, 특별한 신앙체험을 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노아로부터 유산으로 내려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인생과 가정 이야기를 살펴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데라는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동시에 한 부족의 족장이었습니다. 가장이자 족장인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아브람, 나홀, 하란이 그의 아들들입니다. 분문을 보면 그의 가정에 세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27절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란이 롯을 낳았습니다. 본문에 있는 데라의 아들들의 순서를 잘 보십시오. 아브람이 첫째, 나홀이 둘째, 하란이 막내입니다. 그런데 형인 아브람과 나홀이 아직 장가들기 전인데, 막내 하란이 어디에서 덜컥 롯이라는 자식을 낳아 가지고 왔습니다.
형보다 먼저 동생이 자식을 본 것입니다. 순서가 바뀐 것이었습니다. 짐작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사고쳤구나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이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결혼 주례 때 세 사람을 놓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요즘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가정 풍속에는 아우가 형을 제치고 먼저 짝을 보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들은 아직 결혼 전인데 아우가 먼저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풍속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형들이 아직 총각인데, 결혼도 하지 않은 막내가 먼저 자식을 낳아 가지고 집안으로 안고 온다는 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데라 집안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데라의 가정이 흔들리는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온다고, 형들을 제치고 아들을 낳아 데리고 온 하란이 데라 가정에 큰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비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옵니다. 핏덩이 손자 롯을 데리고 온 아들 하란이 갈대아땅 우르에서 그만 죽고 맙니다. 갈대아 우르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했던 지역입니다. 지금의 이라크 남동쪽에 있습니다. 데라가 살던 당시의 우르는 커다란 도시국가였습니다. 문명국가였습니다. 그곳은 비옥한 땅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 강이 서로 합쳐 비옥한 평원을 이루던 곳입니다.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풍요로움을 누리던 갈대아 우르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별다른 부족함이 없는 상황에서 막내 아들 하란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비극이었습니다.
자식을 앞세워 보내는 비극,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아픔입니다. 자식이 죽으면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먼저 자식을 보낸 슬픔과 아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큰 상처입니다.
제가 예전에 섬겼던 교회에 노부부가 계셨는데, 교회에 나오시기 몇 년 전에 외아들 부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큰 슬픔을 겪으신 분들입니다. 그 충격으로 인해 할머니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었습니다. 두 분 다 교회에 나오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아픔이 많이 치유됐지만, 죽은 아들 생각이 날 때면 눈물을 흘리곤 했던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보낸다는 것은 가장 큰 아픔입니다. 데라는 바로 그러한 아픔을 경험한 것입니다. 데라는 자식의 죽음을 면전에서 목도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먼저 가는 아들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던 가련한 아버지였습니다. 하란의 죽음에 데라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짧은 구절에서 인생의 아픔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문명의 중심지에 살았던 데라였습니다. 주위의 환경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것 같은데,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있는 자식마저도 잃어버리는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인생의 위기를 다루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1장에서 만나는 데라라는 인물은 그러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 다음으로 데라 집안의 두 번째 사건은 아들들을 장가 보내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막내 아들이 죽은 후에, 데라는 아직 장가 보내지 않았던 두 아들을 서둘러 장가 보냅니다. 장남인 아브람은 사래와, 둘째 아들 나홀은 밀가란 여인을 아내로 맞아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문제가 터집니다. 30절을 보겠습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며느리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데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 책임은 데라에게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자식을 못 낳는 것이 왜 시아버지 탓인가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그 책임이 족장인 시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장성한 아들이 비록 결혼했을지라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면, 그 가정의 모든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태가 닫혀 있는 며느리, 자식을 잇지 못하는 장남 아브람, 이 모든 것의 책임이 족장 데라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데라의 비극이 부모로서 겪는 비극이었다면, 장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데라의 처지는 족장으로서 당하는 수치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데라에게 수치일뿐만 아니라 큰 손실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는 노동력이 중요시되던 사회였습니다. 아들이 많을수록, 자손이 많을수록 그 노동력과 힘이 강해지는 것으로 여겨지던 사회였습니다.
당시 자식을 많이 낳는다는 것은 그 가족의 힘을 상징했습니다. 유목민 사회에서, 농경사회에서, 아들이 많다는 것은 일꾼이 많다는 의미였고, 유사시에는 전쟁 용사가 많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사회적인 표준이 한 가족의 번영을 다산(多産)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의 가정을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라는 문명의 중심지이자 비옥한 곡창지대에 살던 데라의 가정에 아들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고, 게다가 있어야 할 후손도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라의 삶에 닥친 위기가 극에 달한 순간입니다.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이 그 가운데 있고, 아들도 죽고 장손도 잇지 못하므로 비옥한 땅에서 생산력이 부족한 가정, 그래서 집안의 권위와 경제력도 점점 기울어 가는 현실, 이것은 당시의 삶에서 삶의 가장 기초가 되는 그 무엇을 상실해 버린 모습입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이것은 단지 데라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위기는 사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어느 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위기가 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행동을 취하시겠습니까?
위기의 순간 데라는 이런 행동을 취합니다. 31절을 보겠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이러한 비극과 아픔은 데라로 하여금 고향 땅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는 결심을 합니다. 그렇지 않았겠어요? 자식을 잃고, 후손도 얻지 못해 아픔과 수치를 당한 가정에 무슨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풍요로운 땅에서 한 가정을 이끌어가기에는 그 힘이 부족했었고, 이러한 것들이 결국 데라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이사하도록 만든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때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창세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도행전 7:2-4절을 보면 이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데라가 죽은 후 다시 한번 아브람을 부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따르면 아브람은 두 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데라의 가정은 지금 계속되는 비극으로 인해 슬픔과 아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출발을 해 보려고 고향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데라의 가정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된 것은 단순히 데라의 상황이나 데라 자신의 결정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고, 아브람이 이 사실을 아버지 데라에게 말하자 데라가 동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의 어려운 상황이 더욱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고통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이 비극을 당하고 쓰러져 가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시작해 나가십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신 뜻에 따라 새로운 축복을 준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한 아들이 죽음으로 슬퍼하는 데라의 가정에 또 다른 아들 아브람을 통해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시고, 장손을 잇지 못하는 수치를 당한 데라의 가정에 축복의 아들 이삭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한 데라의 가정에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을 주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통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순간, 고통의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새로운 계획을 가지시고 새로운 축복을 주시고자 일하신다는 것, 이것을 믿는 까닭 아닙니까? 이 믿음과 소망이 있길 바랍니다.
성경에는 길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가는 야곱 가족의 이야기가 있고, 애굽을 떠나 광야 길로 들어서는 이스라엘 민족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수에 의해 낯선 땅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이야기가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다시금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에서 한가지 공통점은 어떤 위기 때마다 그들은 새 땅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비극은 삶의 종지부, 끝장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길을 향한 방향전환이었습니다. 고통이란 새로운 상황을 개척해 나가도록 만드는 삶의 전환점입니다.
시련이란 우리의 삶을 가두어 버리는 감옥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강건해지는 인생을 배우도록 만드는 교과서입니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데라가 길을 떠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합니다. “떠난다”는 말과 “간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순례자의 용어입니다. 한번만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끊임없이 떠나는 생활입니다.
이런 단어의 의미로 볼 때 데라가 지금 갈대아 우르를 떠나 점점 더 가나안 땅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그런데, 돌연 본문 말씀은 데라의 미완성을 보도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31절 하반절부터 32절을 보겠습니다.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기서 “거류하였다”는 말은 한 곳에 아주 정착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으로 향해 나가던 데라가 하란에 이르러 돌연 순례의 길을 포기하고 거기에 머물러 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 그 위기를 박차고 가나안으로 향해가던 순례자 데라가 돌연 순례를 중단하고만 것입니다. 우리는 왜 데라가 순례를 중단했는지를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본문에는 그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 다른 곳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4:2이 그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호수아서에는 데라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나 모두 달(月)신을 섬기던 곳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도착해보니 하란의 풍습이 옛 고향 갈대아 우르의 풍속과 너무나 비슷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종교가 같으면 그 문화는 거의 같았습니다. 종교가 곧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고향 땅과 너무나 비슷한 곳, 하란에서 데라는 그만 가나안 행을 포기하고 거기에 주저앉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곳의 익숙함과 안락함에 취해 그는 자신의 신앙, 그 조상 노아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조차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다시금 집안을 일으키고 부귀를 누렸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신앙의 경주는 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데라의 신앙여정이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란이란 곳은 당시에는 약대상 무역의 교차로였습니다. 북동으로는 앗수르의 니느웨로, 서쪽과 서남쪽으로는 소아시아 지방과 가나안으로, 남동쪽으로는 갈대아 우르 지방으로 내려가는 교차로에 있었습니다.‘하란’이란 지명도 그 뜻이‘교차로’입니다.
교차로는 다음 길의 방향을 점검하는 곳이지 결코 눌러 앉아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데라는 교차로인 하란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까지 가야하는데,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한번 떠났으면 갈 곳까지 다 가야하는데, 그 가야할 길을 다 가지 못했기에 미완성입니다.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했기에 미완성이고, 목적을 다 감당하지 못했기에 미완성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갈림길에서 결단을 하지 못했기에 미완성입니다.
순례길을 떠난 자는 누구나 하란을 거치게 됩니다. 순례를 떠난 자체는 위대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순례가 관습 속에, 타성 속에, 현실의 안락함 속에 머물러 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런 순간이 나의 하란이 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미완성의 순례자들에 머물고 맙니다. 신앙은 미완성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습관에, 타성에, 현실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데라에게서 느끼는 것이 미완성의 아쉬움이라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환경이나 현실, 관습이나 타성에 머무르지 않는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 신앙의 순례를 머루르게 만드는 하란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곳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순례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머무르지 않는 신앙입니다.
전에 어느 분의 자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그 목사님이 그랬답니다. 당신은 불타는 숯덩이인가 아니면 다 타버린 숯덩이인가?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보니까 불타는 숯덩이가 아니라 다 타버린 숯덩이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그런 분들이 있습니까? 한 때는 불타는 숯덩이처럼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고 신앙생활 했는데, 지금은 다 소진되고 식어져서 마치 다 타버린 숯덩이처럼 되어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있다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불붙기 바랍니다.
현실과 습관과 타성에 젖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분이 있다면 다시금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신앙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푯대가 무엇입니까? 나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목표이고, 나를 통해 일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표를 말하는 것이고, 나아가 장차 하나님의 앞에 서게 될 때 잘했다 칭찬받는 종이 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있기에, 그 꿈이 있기에 현실과 습관과 타성에 젖어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한다는 힘찬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안주하는 신앙이 아니라 전진하는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다하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가운데, 나를 위해 준비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는 복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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