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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39: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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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2008. 6. 28.(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시편 139:1-24
. 예전에 성경공부를 하던 중에 교재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두 사람이 죽었는데, 한 사람은 노인이고 한 사람은 젊은이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됐다는 마음을 갖았다고 합니다.
노인에 대해서는 “에그 벌써 가시다니... 더 사셨어야 하는데”라고 하면서 노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였고, 젊은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저놈, 잘 죽었다. 저놈 죽었어도 진작에 죽었어야 돼”라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노인은 사실만큼 사시고 세상을 떠났지만 선하게 살았기 때문이고, 젊은이는 앞길이 구만리같은 20대에 죽었지만 남을 괴롭히고 못된 일만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똑같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도 사람들이 진심으로 슬퍼하며 안타까워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인생은 사람들에게 욕이나 먹고 살다가 세상을 떠날 때도 역시 좋지 못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산다는 것이 결코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틴어로는 “Coram Deo”라고 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139편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첫 번째 모습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사는 삶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펴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과 마음속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신다는 말입니다.
언제가 본 영화인데요, 액션 영화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영화에서 보면 첩보위성이 등장합니다. 이 위성은 지구 밖에서 사진을 찍는데 어느 정도까지 자세히 찍는 고하니 어느 해수욕장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찍을 만큼 아주 자세하게 사진을 찍을 수가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우리를 내려다 보신다면 이렇지 않을까? 위성으로 보아도 이렇게 자세하게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땐 얼마나 자세히 보실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시되 우리들의 삶과 마음속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시하고 계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치 인공위성으로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1절에서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돼있는데, 여기서 ‘안다’라는 단어는 그 원형이 히브리어로 ‘야다’입니다.
여기서 ‘야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피상적으로 아는 것, 혹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주로 부부관계에서 부부가 서로에 대해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안다라고 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바로 이 ‘야다’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고 할 때 이 ‘야다’라고 하는 단어가 쓰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되 그냥 피상적이고 형식적으로 이름 석자만 아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고, 나를 경험적으로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나를 경험적으로 아신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은 내가 삶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고 겪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도 경험하시고 느끼시고 겪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휼’이라는 말은 몸소 체험함으로 긍휼이 여긴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우리의 연약함으로 체험하셨기에,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친히 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나의 길과 눕는 것을 아십니다. 이것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행동을 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십니다. 즉,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내 마음속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환하게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혀의 말을 모두 아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무심코 한 말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 용기를 주는 말도 있겠지만, 반면에 거짓된 말, 상처를 주는 말, 파괴하는 말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나의 모든 말을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짧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밖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번개와 천둥이 치기 시작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왜 천둥이 치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번쩍 하고 우리들의 모습을 사진 찍으시는 거야.”
아빠의 대답을 들은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그래서 하나님이 번개로 사진 찍고 나신 뒤에 천둥을 치시는 거군요. 사진 찍어 두었으니 이제 꼼짝 말고 알아서 잘 살라구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다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을 아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은 후에 내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허물들이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기억하며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신다는 것은 그저 나를 구체적이고 체험적으로 아신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5절을 보면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앞뒤를 둘러싸 막아주시며, 그 손으로 안수하셔서 내 인생을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나를 아시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나를 아시고 내 인생이 어떨꺼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친히 나의 앞뒤를 둘러싸 막아주심으로 나를 보호해 주시고, 안수하심으로 내 삶을 의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필요를 아는 것보다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 즉 나를 아시고 나의 인생을 아시며, 나의 연약함과 나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깨끗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둘러싸 보호하고 계시며, 인도해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두 번째 모습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 어느 때에도 항상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막 잠을 자려고 하는 어린 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얘야,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아니?”
아이는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잖아요?”
“그래 너 잘 알고 있구나. 그리고 또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니?”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의 마음속에도 계시단다.”
그랬더니 아이는 신기한 듯 말했습니다.
“음! 아빠, 이제 알았어요. 예수님은 두 분이시구나!”
그날 밤 목사님은 딸아이에게 예수님은 한 분이시라고 설명해 주느라고 밤을 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어디에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7절부터 12절까지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곳, 어느 때에도 계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7절을 보면 시인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시인은 한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해보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혹은 너무나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영적인 침체로 인해 하나님을 피했을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한다”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참으로 기가 막힌 시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인데, 실제로 그 내용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외롭고 절망적인 상황을 노래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새벽날개’란 무엇입니까? 새벽이 날개가 있습니까? 아니면 새벽에 나는 새의 날개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닷가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다에서 일출을 보신 분들은 쉽게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해가 떠오를 때 그 햇살이 퍼지는 모습이 어떻습니까? 마치 새가 그 날개를 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해가 점점 떠오르면서 아래 위로 흔들리는 듯한 햇살의 모습은 마치 새가 날개를 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햇살이 퍼지면서 뻗어가는 그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시인은 이러한 일출 때에 볼 수 있는 햇살이 빠르게 퍼지는 것을 새벽날개라고 표현하면서 그 새벽날개를 타고 내가 빠르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서 바다 끝에 가서 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얼마나 하나님을 피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때로 우리는 죄로 인해, 세상과 벗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 합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힘든 삶의 무게로 인해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9절에서 ‘바다 끝’이란 더 이상 갈래야 갈 수 없는 곳, 절망의 상황, 한계의 상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실패로 인해, 상처로 인해, 고난으로 인해, 너무나 힘든 삶으로 인해 인생의 바다 끝에 거할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갈래야 갈 수 없고, 설래야 설 수 없는 바다 끝, 극한 절망의 상황, 한계의 상황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연락하여 살 때도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나를 붙드사 다시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내가 너무나 힘든 삶으로 인해 인생의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바다 끝, 거기에도 계셔서 그 오른손으로 나를 어루만지시고 일으켜주시고 붙들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그 어느 곳, 어느 때에도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 인생의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그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심을 믿는 가운데 다시금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세 번째 모습은 그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시인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개역성경에는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묘막측’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너무나 잘 만들어서 신기하고 오묘하고 측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묘막측, 신기하고 오묘하여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있고,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있으며, 하나님의 혼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목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작가는 어떤 작품을 만들 때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용하고자 하는 용도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 그릇도 만들고 자기도 만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생각’은 다른 말로는 ‘주의 계획, 주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계획과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보배롭고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한 특별한 계획과 목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복을 주시길 원하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쓸데없는 열등감, 비교의식, 자신을 탓하는 모든 것들은 다 버리시고, 하나님께 지음받은 자답게 당당하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세 번째 모습입니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19절부터 끝절까지는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거룩하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 추호도 악과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거룩하신 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레위기 19:2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자녀된 우리들도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별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지 말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깨끗하고 정직하고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이 지금 이 모양이 된 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 비웃음을 받고 하나님을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오늘의 모습입니다.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특별히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편 139편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에 대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나를 아시기에 나를 보호하시고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심을 믿는 성도가 되실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 어느 때에도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고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나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인해 다시금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나를 지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가운데, 당당한 삶을 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녀답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본받아 세상과 죄에 구별된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크신 은혜와 복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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