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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0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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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사모함: 하나님과 친해지기 13
2008. 7. 5.(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시편 107:9
.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납니다. 한 사람은 시간이 너무 빨리가서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초초하고 불안합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그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너무 더디 가서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누구일까요? 여러가지 답이 있을 겁니다. 대표적으로는 전자는 수험생입니다. 시험준비를 별로 하지 못한 수험생입니다. 그럼 후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경험적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기다리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아침마다 당신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싶어' 청혼할 때 하는 말이죠? 이 말이 '당신, 나 밥 해줘' 그런 의미 아니잖아요? 날마다 사랑하는 당신을 보고 싶다는 뜻이잖아요.
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결혼 날자를 잡았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안가는지... 사모하는 마음때문에 기다려지게 되는 겁니다.
사모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기다려지기도 하고, 피하고 싶기도 합니다. 사모함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그 대상을 갈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을 경우는 소홀해지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모함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는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을 겁니다. 본문의 경우에는 고난이 그 이유입니다. 시편 107편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어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포로로 끌려간 갇혀 있던 사람들도 있었고, 광야 사막길을 방황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던 사람들도 있었고, 병에 걸려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고 있었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찾았던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겁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환난과 근심 가운데 하나님을 부르짖고, 주리고 목마를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사모하며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주셨고, 사모하는 영혼에 만족함을 주셨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는 말씀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인생의 가뭄과 기근을 만났을 때 다른 데 가지 마시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을 부르짖으십시오. 거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방이 벽일 때 하나님은 하늘에 창을 내신다."
참 은혜로운 말이고 맞는 말입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이는 듯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게서는 하늘에 창을 내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에 창을 내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고개를 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드십시오. 하늘의 창이 보이면 다 된 겁니다. 그럼 다 해결된 겁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모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경우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목요일쯤 되면 기다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예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매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나 사랑의 교제를 통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매주 목요일쯤 되면 토요일이 기다려집니다.
8년전에 중국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 집사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중국에는 지하 교회 혹은 가정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예수 믿고 나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뜨거워서 어디에서 부흥회나 집회를 한다고 하면 만사 제쳐두고 간다고 합니다.
한번은 우리나라 어느 선교단체에서 중국 어느 곳에서 집회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도 갔는데, 열차로만 꼬박 이틀이 걸렸답니다. 중국 기차를 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의자가 큐션 하나 없는 직각입니다. 한 두시간만 타고 참 힘든데 꼬박 이틀을 그러고 갔답니다.
갔더니 엄청나게 많이들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3, 4일 기차 타고 왔고, 오지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일주일만에 집회 장소로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회를 일주일을 했답니다. 한번 예배가 시작되면 5-6 시간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주일 간의 그 집회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없었다는 겁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어떻게 그들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알면 사모하게 되요.
중국은 실제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아닙니다. 삼자 교회라고 있지만 상당한 통제가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많지 않고 성경책을 구하기도 참 어렵습니다. 그때 청년들과 함께 중국 단기선교를 갔었는데,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갔어요.
공항이나 곳곳에 있는 중국 공안들에게 빼앗길까봐, 각자의 가방에 두 세권씩 넣어서 갔어요. 그때 15명이 갔으니 그리 많이 가져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 성경책을 전달해 주었는데 어찌나 좋아하는지 어떤 분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성경을 품에 안으시는 거예요. 오히려 더 많이 가져가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말씀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면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면 기도를 사모하게 됩니다. 은혜를 알면 사모하게 됩니다. 가까이 하게 됩니다. 찾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를 믿고 나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겁니다. 로마서 3:11의 말씀처럼 죄 가운데 있으면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하고 피하고 무관심한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달라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사모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오길 원하십니다.
시편 14:2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이 있나 굽어 살펴보신다고요?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다고요? 이어지는 3절에 보면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는데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이사야 29:13에서는 이것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것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면,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그들이 나를 공경한다 하여도 사람들에게서 배운 관습일 따름이다."
이 말씀이 주어진 곳이 이스라엘 땅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민족입니까? 하나님께 택함받은 자들 아닙니까? 매 샤밧 때마다, 절기 때마다, 날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드려졌던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어라 하십니까?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나 보려 했더니 다 치우쳐 범죄하며 하나님을 마음으로 떠나있다는 겁니다. 날마다, 샤밧 때마다, 절기 때마다 예배는 드려지고 있어요. 입에서는 찬양이 흘러나오고 경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에게서 배운 관습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고 예배한다고 하는 것이 그저 하나의 관습이 되고 습관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없이 껍데기만 남은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하고 경계해야 할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많아지면 입에 많이 나오는 말이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공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충성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이 이런 말을 하며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러나 자칫 하면 그것이 공허한 입술의 말로 끝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저 하나의 습관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말은 더 많이 하게 되는데 정작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비극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모태신앙이거나 부모님이 먼저 신앙을 가지신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에게서부터 받은 신앙의 유산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닐 수 있어요. 부모님 때문에 교회는 다니고 예배는 드리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말은 많이 하는데 그저 부모에게서 들은 말일뿐이고 습관일 뿐이에요.
만일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그런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습니까? 어서 속히 마음을 돌이키라고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심하게 책망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뭐라 하셨나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아'라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회칠을 했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페인트 칠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고 여느 집처럼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무엇입니까? 무덤입니다. 그 안은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일뿐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하면 명색이 나름대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스스로 자랑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말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가까이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마음은 없이 껍데기만 남아버린 겁니다. 그것이 곧 위선이고 거짓 신앙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책망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언제 이렇게 위선적이고 가식적이고 굳어진 박제와 같이 바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애타는 부르심에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굳어지지 않고 위선적인 신앙이 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하나님 보실 때 진실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 보실 때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말씀하십니다.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은혜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시는 은혜가 있는데 그 은혜가 나를 새롭게 하고 내 영혼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인데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7에서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산상수훈에 해당되는 6장에 보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필요한지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7장에서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 의미가 있지만, 7장의 의미만 볼 때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과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무엇이 주어집니까? 응답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단지 응답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깨닫게 되고,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지면서 은혜와 감사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하게 되고, 그 사모함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며 간절히 사모하는 기도를 통해 기도의 응답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전하라 하십니까? 우선은 영혼구원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질 않습니다. 전도해서 한 영혼이 구원받을 때의 주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한 영혼을 전도해서 예수님 영접하기까지는 많은 기도와 눈물과 인내와 사랑의 섬김이 따릅니다. 그냥 되는 것 아닙니다.
천하를 얻기도 힘든데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얻기가 쉽습니까? 그 영혼을 향한 눈물의 기도와 인내와 사랑의 섬김을 통해서 그 영혼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았을 때 주어지는 은혜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작년에도 두 명의 자매가 세례를 받았고, 지난 5월 말에도 한 자매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셋은 모두 초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영접하기까지 우리 교우들의 눈물의 기도와 인내와 사랑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세례줄 때 제 느낌이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온 몸이 떨리는 전율이었습니다. 머리끝까지 차는 기쁨이었습니다. '정말 사람을 낚는 어부의 기쁨이 이런 것이구나. 지금 물에서 나오는 이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눈부신 영혼이다' 그런 감격이었습니다. 이 기쁨과 은혜는 저만 느낀 것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교우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전도는 전도 이상의 은혜와 기쁨과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가까와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성경 수많은 곳에서 거듭 거듭 나에게 가까이 오라, 나를 찾으라, 나를 사모하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가까이 할 때 어떠한 은혜와 복이 주어지는 지 아십니까?
1. 레위기 10:3에서 말씀하시길, "...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놀라운 은혜 아닙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고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맛본 자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날마다, 예배 때마다 경험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과 친구되어 더욱 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2. 시편 22:26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겸손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가운데 나오는 마음이 가난한 자이고 의에 주리로 목마른 자입니다.
겸손한 자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먹이시고 배부르게 하십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 그 마음이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는 자 그 마음이 죽지만, 하나님을 찾고 가까이 하는 자 그 마음이 영원히 살게 됩니다.
마음이 살면 다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마음이 죽으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죽은 겁니다. 그러나 마음이 살면 가난해도 살고요, 병상에서도 살고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살고요,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영원히 살게 되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시편 107:9에서는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만족케 하시는데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요,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르리라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는데,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11:13에서는 그 좋은 것을 성령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 성령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영 혹은 파워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십니다. 즉, 성령 하나님으로 그 영혼이 채워지는 겁니다.
성령님으로 그 영혼이 채워지면 어떨까요? 좋을까요 나쁠까요? 성령님으로 그 영혼이 채워지면 이 땅에서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 닮은 인격과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님으로 그 영혼이 채워지면 놀라운 능력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것이 곧 성령의 은사이고 능력입니다. 성령님으로 그 영혼이 채워지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충만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4. 히브리서 11: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셔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전체와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찾는 자들,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는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번 그렇게 해보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상을 주실까 기대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찾는 자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 반드시 만족케 하시고 상 주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그 거룩하심과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 마음이 살게 하십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시다. 그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사모함 없이 기도하면 그건 중언부언이 되고 맙니다. 사모함 없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 만큼 힘든 것 없습니다.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십시오. 오늘은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말씀하실까? 어떤 길로 인도 하실까? 어떤 은혜를 주실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 보십시오.
어려움과 고난을 만났을 때도 사모하는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그 고난 뒤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사모하십시오. 시편 107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실패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찾았습니다. 인생의 기근과 가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만족함이었고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축복이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만나십시오. 사모하는 마음이란 달리 말하면 기대감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들어질 때가 언제입니까? 이 기대감이 사라질 때입니다. 부부 사이에 언제 권태기가 옵니까? 이 기대감이 사라질 때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에 언제 힘들어집니까? 기대감이 사라질 때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기대감이 사라질 때 관계가 건조해지고 형식적이 되기 쉽고 어려워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말 많이 하지요?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당신이 하는 짓이 그렇지.'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요, 대개의 경우를 보면요, 열번 중에 한 여덟번 쯤은 나름대로 잘 해 보려고 노력을 해요. 그러다가 한 두번 그걸 못했을 때가 생긴단 말이죠. 그럼 대번 무슨 말을 해요? '그럼 그렇지. 니가 뭐...'
이젠 그런 말 하지 맙시다. 그럼 뭐라고 말할까요? '괜찮아요.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그렇게 말합시다.
사람은 믿을 대상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믿을 대상이고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고 돈을 사용할 대상입니다. 이것이 뒤바뀌면 안돼요. 이것이 뒤바뀌면 꼭 문제가 생겨요. 사람은 사랑할 대상입니다. 사랑하면 용납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기대감이 생겨요.
지금은 이렇지만 더 좋아질 것이다. 더 나아질 것이다란 기대감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시고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이 기대감을 가지고 서로 사랑합시다. 그럴 때 우리의 관계도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이제 전교인 여름수련회가 다음주 금요일이면 시작이 됩니다. 어떠십니까? 기대감이 있으신가요? 갈릴리 호수가 한 눈에 보이는 호텔, 골란고원에서 뜨는 일출을 볼 수 있고, 수영장이 있고, 아직 가보지 못한 가이사랴 빌립보와 텔 단, 골란고원과 헬몬산 등등을 볼 수 있다는 그런 기대감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야할 가장 큰 기대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아야 삽니다. 은혜 받아야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은혜 받아야 성장할 수 있고, 은혜 받아야 교회도 섬길 수 있고, 은혜 받아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사모하는 자!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하늘의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만족케 해주십니다.
이런 사모함을 가지고 수련회를 준비합시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수련회를 준비합시다. 그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충만한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일어나고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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