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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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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하프 타임: 하나님과 친해지기 14
2008. 7. 19.(토)
요한계시록 2:1-7
먼저 축구 경기 동영상을 잠시 보겠습니다.
이 경기 기억나십니까? 2002년 월드컵 때 이탈리아와의 16강 경기의 역전승 장면입니다. 전반전에서 1: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 40여분에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넣었고, 연장전으로 가서 연장 25분만에 안정환 선수가 극적인 역전골을 넣어 승리했었습니다.
그때 참 대단했었지요? 설마 이탈리아를 꺽고 8강에 진출할 수 있을까 했는데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이탈리아를 잡았어요.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온 국민이 정신적인 흥분상태가 지속되었는데요, 이것이 교회에서도 나타났었습니다. 여름단기선교와 수련회를 준비 중이었는데, 청년들이 월드컵 때문에 일을 못해요.
예배 때도 다들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아요. 설교를 하려는데 집중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뭘 했는지 아십니까? 두 손을 높이 들고 "대~한민국!"을 외쳤어요. 그리곤 다 같이 "대~한민국!"을 외치고나서 설교를 했었습니다.
아뭏든 참 대단했었는데, 우리는 그 경기에서 단순히 승리의 감격만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 승리가 주어지기까지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압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프 타임이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축구나 농구 등의 경기에는 하프 타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하프 타임은 선수들에게는 내내 경기를 뛰며 지친 몸을 쉬는 황금과 같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과 전략을 세우는 시간입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효과적인 전술 전략을 세우느냐에 따라 이후의 경기가 달라지게 되고, 경기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2002 월드컵 때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경기 전부터 치밀한 전략을 세워놓았지만, 더운 날씨와 전반전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자포 자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하프 타임을 통해 우리 선수들은 다시금 굳은 결의를 하면서 정신력을 가다듬었고, 히딩크 감독 역시 새로운 전술을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 최강 중의 하나인 이탈리아를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겁니다.
하프 타임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보내느냐에 따라 경기가 이처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하프 타임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열심히 살거나 앞만 보고 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씩 자신의 인생과 신앙을 돌아보며 확인하고 재충천하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출발하는 하프 타임이 필요합니다.
인생에 있어 하프 타임은 여러 형태와 시간으로 주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 군대가 그런 시간이 될 수 있고, 직장인들의 경우는 휴가가 그런 시간이 될 수 있고, 청년들의 경우는 지금의 시간이 하프 타임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프타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행을 통해 하프 타임을 갖는 편입니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여행을 통해 그동안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며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여행 중에 꼭 들리는 데가 있었습니다. 기도원이나 수도원이었습니다. 여행 코스 중에 기도원이나 수도원을 넣기도 하고, 어떨 때는 수도원 자체가 목적지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기도원이나 수도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또 지친 마음과 몸을 쉬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프 타임을 가지십시오. 너무 앞만 보고 가지 마십시오. 가끔씩 쉴 줄 알아야 합니다. 잘 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새롭게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지난 주에 갈릴리에서 가졌던 전교인 여름수련회가 우리 모두에게 하프 타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련회를 통해 우리는 예배의 은혜를 통해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결단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새로운 은혜로 다시금 회복되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하프 타임은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평가하고 앞날에 대한 새로운 계획과 전략을 세우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재충전입니다. 선수들도 새로운 정신력과 마음 가짐으로 재충전 되어야만 후반전을 효과적으로 뛸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은혜로 재충전되어야만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믿음의 경주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재충전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재충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사랑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도 그렇고, 성경을 봐도 그렇고, 나 자신을 생각하고 우리 모두를 생각해도 우리가 진정으로 재중천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를 더 진실되고 뜨겁게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부부관계, 고통스러운 관계, 적과의 동침일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인간관계, 상대방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하려는 사악함만이 남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공동체, 온갖 술수와 중상모략, 갈등과 분쟁만이 판을 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교회, 사랑없는 그리스도인들,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을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교인들로 가득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는커녕 그리스도의 몸을 상처내고 찢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막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교인들, 열심히 무언가는 하는데, 그 일은 자신을 위한 일이고, 그래서 교만에 빠지거나, 아니면 침체에 빠져서 불만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패를 가르고 교회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을 잃어버리면 이런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경건생활에 힘쓰고 진리수호에 힘을 써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인데, 에베소 교회는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히 괜찮은 교회입니다. 2-3절에 있는 것처럼 그 수고와 인내와 이단을 척결했던 것들은 주님께서도 인정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참 귀한 것입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것 좋습니다. 이단을 척결하는 것도 참 잘한 일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열심히 봉사하고 진리를 수호한다고 하는 사이에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수고와 열심은 무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처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나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Nothing,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정말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사랑이 있어서 봉사를 하고, 사랑이 있어서 인내하고, 사랑이 있어서 진리 가운데 있는가?”점검해야 합니다.
'어린 왕자'로 유명한 생떽쥐베리가 쓴 책 중에“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 자체가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요? 정말 사랑한다고 하면 왜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을까요? 수고를 하면서 봉사를 하면서 왜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감사가 사라질까요? 왜 마지 못해 할까요? 왜 봉사하는 것이 부담이 될까요? 왜 타성에 젖어서 습관처럼 아무 생각없이 대충대충할까요? 왜 내 마음이 메마르고 지치고 힘들까요?
왜 예배가 습관이 되고 타성이 되었을까요? 왜 형제 자매에 대해서도 미움이 생기고 불평이 생길까요? 왜 마음이 갈라지고 왜 편이 나누어질까요? 왜 용납하지 못하고 왜 서로에게 상처를 줄까요? 형제 자매가 어떻게 되든 무관심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요? 무언가는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요? 사랑해서 하는 일일까요?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와 인내와 열심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은 타성에 젖고, 지치고 탈진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끝나고 맙니다. 피곤하고 비판하고 낙심하고 교만하고 분열하고 그렇게 되고 맙니다. 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대책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이런 위험성이 나타난다면, 이 위험성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사랑을 잃어버린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4절이지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주님께서는 특별히 ‘처음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처음 사랑은 오래가지 못해요. 그냥 놔두면 저절로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의 과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첫 사랑, 다시 말해서 ‘당신없이는 못살아’라고 하는 그 사랑이 정말 있냐라는 질문부터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 없이는 못살아. 정말 저 사람 없이는 못 살 것 같아’하는 사랑이 진짜 있을까요? 아닐걸 하는 사람들은 아직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인데, 정말 있어요. 그런 순간이 정말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얼마나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첫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갈까요? 과학적으로 연구를 해보니까 18개월 간답니다. 18개월이면 오래 간 겁니다. 그리고 최고로 오래간 경우가 3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애인이 ‘자기 없이는 정말 못살아. 영원히 당신만 사랑할꺼야.’라는 말 곧이곧대로 다 믿지 마세요. 그런 감정이 있을 때가 있는데, 그거 오래 못가요. 길면 18개월, 아주 드물게 3년.
그러므로 처음 사랑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예요. 자연적으로 그 첫사랑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언가 대처가 있어야 합니다. 노력이 있어야 해요. 그럼 처음 사랑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가 있어요.
따라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는 말씀은, 처음 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대처와 노력이 없었음을 책망하시는 겁니다. 에베소 교회도 뜨겁고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냥 놔둔겁니다. 그러니까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그것이 주님께서 보실 때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되고 만겁니다. 처음 사랑을 간직하고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 없을 때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자칫 사랑의 배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편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지옥에도 층계가 있습니다. 지옥 밑으로 내려가면 지옥 맨 바닥 제일 깊은 곳에 제일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있답니다. 하나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그 다음에 자기를 사랑한 친구 시이저를 배신한 부르투스와 카시우스가 있답니다. 시이저가 부르투스에게 암살을 당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이 있죠? “부르투스, 너마저... 윽..”
이 세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신입니다. 단테가 생각한 가장 큰 죄는 배신이라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무식함이 가장 큰 죄라고 했지만, 단테는 배신이 가장 큰 죄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단테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배신은 상당히 큰 죄입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배신아닙니까? 큰 죄지요.
우리가 만약에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 없이 그냥 놔두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래서 내 안에 사랑이 메말라버렸다면, 사라졌다면 그것은 배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꼭 배신을 해서 배신이 아니라,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배신인 것입니다. 꼭 가룟유다처럼 배신해야 배신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주님의 뜻대로 살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상태가 오래가면 정말 배신할 수 있어요.
그만큼 중요한 것이 처음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5절에서 그 처방과 노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처방이 무엇입니까? 5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나 하나 봅시다. 첫째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예전에 이런 광고가 있었어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그 말 진리예요. 사랑은 움직이는 것 맞습니다. 물론 그 광고는 움직이는 대상이 다른 남자가 되어서 문제지만, 사랑 자체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은 중심이동입니다. 목적의 이동, 목적의 변화입니다. 나만을 위하고 자기만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목적이 되었던 사람이 주님이 목적이 되고 다른 사람이 목적이 되는 것이 사랑이예요. 즉, 나 중심적인 사람이 주님 중심으로, 이웃 중심으로 사랑의 중심과 대상이 바뀌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이웃에게로 갔던 중심이 어느새 나에게로 돌아온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가질 때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 중심이 나에게로 되돌아와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깝게 느껴지고 별로 달갑게 여겨지지 않아요. 시간도 아깝고 돈도 아깝고 귀찮아요. 그냥 편하게 믿음 생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가질 때는 형제 자매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섬기는 것이 기뻤고, 나의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힘들어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 같이 마음 아파하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도와주었어요.
그런데 어느샌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오히려 오해만 사고 하나도 고마워하지도 않는데. 내 코가 석잔데 무슨 남의 일에 감나라 대추나라하냐. 지만 힘드나 나도 힘든데... 저러다가 나아지겠지... 그냥 모른 척 하자’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집니다. 사랑의 중심이 형제 자매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중심이 나에게로 되돌아 온 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금 상태를 곰곰이 생각하고 다시 주님에게로 그 중심을 되돌리고, 형제 자매에게로 그 중심을 되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처음처럼, 처음 사랑처럼 되돌리라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 때 주님께서 그것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수련회 기간 중에 어느 지체에게서 들었어요. "이번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만져주셨어요. 어떤 사람에게 참 마음이 힘들었었는데 그 마음 만져주셔서 그 사람 보는 것 이제 어렵지 않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은 움직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움직이게 하십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사랑이 다시금 나에게로 돌아와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금 주님 중심으로, 형제 자매 중심으로 우리의 사랑의 중심이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근래에 들어 자기 관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자기 관리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중심이 어디 있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무엇 때문에 하고 있나? 누구를 위해 하고 있나?”를 늘 확인하는 것이 자기 관리입니다. 성경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자기 마음을 지키라고 했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고, 의식을 지키고, 목적을 지키고, 내 중심을 지키는 것이 자기 관리입니다. 자기 관리를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회개를 의미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오”는 Return을 의미합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라, 그래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처음 사랑, 첫사랑의 특징이 뭡니까? 뭔가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랑 아닙니까? 첫사랑은 설레임이예요. 순수함이예요. 뜨거움입니다. 그 자체가 감동이고 기쁨이고 눈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 보고 있는 것만 해도 그 자체가 감동이고 기쁨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좋아서 그냥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것이 첫 사랑입니다. “난 네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것이 첫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다 줄 수 있는 것이 첫 사랑입니다.
난 이 사랑을 경험해 봐서 알아요. 두 번 경험해 봤어요. 21살에 주님 다시 만나서 주님과 첫사랑 나눌 때 황홀한 사랑을 경험했고요, 32살에 아내를 만나 연애할 때 이 사랑을 경험해봤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설레고 뜨거웠는지 몰라요. 그냥 좋았고, 내 입에서는 한마디의 불평이나 원망도 없었어요. 그러한 사랑의 경험들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했던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고, 이웃과 형제 자매들을 순수하고 기쁘게 사랑했던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첫사랑은 주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사랑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였을 때, 그 사랑을 만났을 때 시작된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시작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만났을 때, 그 사랑이 내게 충만하게 거했을 때, 나는 주님을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힘입어 형제 자매들도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이 사랑, 우리 안에 식어버린 이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이번 수련회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금 부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예배를 통해 또한 하나님과의 날마다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받고, 내 마음과 온몸을 그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계속해서 처음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늘 구해야 합니다. 항상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3:18-19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기도 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충만해져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암송하고,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에 으뜸으로 넣으시고 기도하십시오.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되면 우리 안에 다시금 처음 사랑이 회복되어지고 날마다 새로워지고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처음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주의 일을 기쁨과 감사와 겸손으로 감당하게 되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 없이 신앙생활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이번 수련회를 통해 우리에게 귀한 하프 타임을 주신 우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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