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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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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물이 포도주 됨과 같이
2008. 8. 2.(토)
요한복음 2:1-11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크파르 카나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라는 곳인데, 그곳에 가면 가나혼인잔치 교회, Wedding Church가 있습니다. 물론 학자들 사이에는 가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그곳을 가나로 치고 교회 안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흔하게 사용되었던 돌 항아리와 당시의 집터가 있습니다.
교회측에서는 혼인잔치가 있었던 바로 그 집터라고 하지만 그건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터에 보면 그 안에 무수한 돈들이 떨어져있습니다. 각 나라 지페와 동전이 무수히 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이율곡 선생님도 여럿 계시고 가끔 세종대왕께도 계십니다. 왤까요? 그 교회에 방문한 사람들이 돈을 던진겁니다. 가나에서 일어났던 기적이 내게도 일어나게 해달라는 소원으로 던진 것이지요. 그 마음은 알겠지만 여러분들은 그러지 마세요.
사람들은 어떤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적을 봅니다. 기적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기적은 단순히 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그 자체로도 교훈이 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의미가 있다. 그 기적을 통해 주님께서 무엇을 보여주시길 원하시는지, 우리가 무엇을 깨닫길 원하시는 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단순히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싸인(sign)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2:11을 보면 이것을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표적이란 헬라원어로 ‘세메이온’으로 영어로는 ‘sign’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떤 신호, 표시를 뜻합니다. 즉, 표면에 나타난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사건 속에 더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가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세메이온’, 영어로는 sign, 우리 성경에서는 표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도 그런 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남녀가 헤어질 때 쓰는 sign이 있었습니다. 바로 손수건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손수건을 주면 그건 이제 그만 만나자, 헤어지자는 sign입니다. 손수건을 주는 이유는 헤어지면서 슬프니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sign, 표적입니다. 그것 자체보다는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지속적으로 요청하는 사람에게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열렸는데 포도주가 부족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부족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4절,“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조금 어감이 안좋습니다. 아무리 주님이시지만 육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는 것도 좀 어색하고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번역상의 문제인데, 실제로 ‘여자여’라는 표현은 헬라 원어로 '루마이'인데, 이는 매우 높은 존경어에 해당이 됩니다. 당시에는 이 단어가 여성에게 쓰는 가장 높은 존칭어였습니다. 왕후를 부를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썼던 말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어려운 단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한 것은 결코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 아닌, 최대의 존경을 담아 부른 존칭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는 표현도 조금 어색한 번역인데, 공동번역에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조금 이해가 쉽지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아직 메사야로서 그 능력을 나타낼 때가 아니며,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라는 의미입니다. 거절의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고 심각한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첫 기적을 행하기에는 그리 적합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5절에 보면 마리아가 하인들을 시켜 예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던 그대로 하라고 지시합니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거듭해서 요청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요청하는 자에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청하는 자에게 기적이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부가 날마다 재판장을 찾아가 부르짖고 간청하고 매달라니까 그 불의한 재판장이 거절을 하다가 나중에는 귀찮아서 그 요청을 들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구하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하나가 바로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서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한두번 기도했다가 응답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스스로 판단해서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응답이 되어질 때까지 계속적으로 간구하고 매어달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기도에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까지 포함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의 폭이 넓어야 한다고 민족의 복음화, 세계 선교, 세계 평화, 뭐 이런 것들만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기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까지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 선교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일들, 사사로운 일까지도 주님께 간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께 문제 해결을 요청했고, 예수님께서 거절의 뜻을 보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나의 작은 문제라 할지라도 주님께 도우심을 간구하고, 쉽게 응답되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거듭해서 간구하여야 합니다.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은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매일의 삶 가운데 필요한 것들을 주님께 구체적으로 간구했습니다. 고아원을 경영하면서 부족한 것, 필요한 것들을 주님께 간구했고, 응답되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 응답의 역사가 이루워졌고, 그 응답의 횟수가 5만번에 달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 응답의 주권은 분명 하나님께 있습니다. 기도 응답의 타이밍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응답의 속도는 우리의 태도에 좌우될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간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간구할 때 응답의 속도는 빨라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기도하실 때 폭이 넓은 기도도 하시고,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서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마리아처럼, 죠지 뮬러처럼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서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의 기도가 속히 응답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믿음과 순종을 통해 기적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명합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레바논의 작가 칼릴 지브란이 쓴 ‘사람의 아들 예수’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나의 아들이여, 나의 주님이시여”이 글은 마리아가 그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있어 아들이며 동시에 주님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태중에 있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리고 30년간 예수님을 키우고 같이 생활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늘 생각했고 보아왔습니다. 충분히 포도주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30년간의 생활을 통해 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인들에게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믿음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바로 하인들의 순종입니다.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인들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하인들이 볼 때는 그저 평범한 시골 사람에 불과했고, 게다가 지금 하인들은 잔치를 치르니라 매우 바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내린 명령이 무엇입니까?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포도주지 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대로 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물을 떠서 갖다 주라는 것입니다. 아직 포도주가 되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냥 물입니다. 이것을 갖다 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큰 꾸중을 들을 겁니다. 적어도 여기까지 상황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줍니다. 그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기적에는 믿음과 순종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기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예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무덤 앞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을 때 즉시 우르룽 쾅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지진이 일어나서 돌문이 두 조각났습니까? 그러면서 나사로가 뿌연 연기를 헤치면서 멋지게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까? 아니거든요. 우리 생각에 그러면 좀더 멋있고 놀라운 기적으로 보일지도 몰라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은 동굴을 파서 만들었고 입구를 큰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아마도 여러 사람들이 이 돌문을 힘들게 옮겨서 막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걸 열라는 겁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이미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무덤에 가서 그 돌문을 옮겨 놓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로 말하면, 이미 땅에 묻어 나흘이 지났는데, 무덤을 파서 관뚜껑을 열라는 말입니다. 열고 싶습니까? 웬만해서는 다시 파고 싶지 않죠. 뭐가 아쉬워서 관뚜껑을 다시 엽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요구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해가 되든 안되든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돌이 옮겨져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적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순종으로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이 능력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순종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기적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그 기적과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그 그릇이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길 바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믿음과 순종의 움직임, 희생의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믿음과 희생과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믿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해가 먼저가 아니라 순종이 먼저라는 겁니다. 이해되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고 순종할 때 복도 받고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고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종하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시고, 한없는 축복과 은혜와 풍성함을 주십니다.
이해되지 않지만 순종했을 때 물이 포도주가 되고, 이해되지 않지만 순종했을 때 나사로가 살아났고, 이해되지 않지만 자기의 외아들을 드렸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순종의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싸워야 할 싸움은 다른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의 싸움입니다. 왜 전도하고 선교합니까? 주께서 “가서 모든 족속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합니까?“죽도록 충성하라”하셨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이나 나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까?“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니까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기 때문에 용서하고 용납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질 않습니다. 말씀 보다 나의 판단, 나의 경험, 나의 능력이 앞설 때가 많고, 환경이 앞서고, 유혹과 우리의 연약함이 앞서고, 순종 자체보다는 어떤 결과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싸움은 순종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가? 나의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내게 은혜 주시고 나를 믿어주시어 내게 직분을 맡기시고 사명을 주신 주님 앞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순종하는 자만이 주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믿음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고 풍성한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만이 본질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색깔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무늬만 포도주가 된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포도주로 변한 것입니다. 본질적인 변화,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뀐 완전한 변화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본질적인 변화를 가능케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이었고, 죄와 죽음의 저주 아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부패한 본성을 갖고 있었고,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소망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고, 죄와 죽음에서 자유함을 얻고,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씻음을 받았고 이제는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 변화를 누가 가능케 했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초기 목회자 중에 김익두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황해도분인데,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서 어려움을 당하면서 방황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주색잡기에 능하고 사람들을 괴롭히던 깡패가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악행하였는지 사람들이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빌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강제로 돈을 빼앗아서 "김내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어느 날인가 장에 나갔다가 서양 여자가 전도하며 전해준 전도지 사건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는데, 전도지를 받은 김익두는 '뭐 나더러 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며 전도지로 코를 풀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서양 여자는 서툰 한국말로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김익두의 귀에 계속 맴도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모로 보나 우리 조선보다 개화되어 있는 서양 여자가 멀리 이국 땅에 와서 저러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친구의 전도를 받아 교회엘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일년 후에 세례를 받았는데, 회심한 후에는 그가 과거를 뉘우치고 사람을 때린 장소마다 찾아다니며 통곡하며 울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때부터 성경을 읽었는데, 나중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성경을 100번 읽었는데,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식기도를 통해 큰 은혜를 경험하고, 나중에는 신유의 은사를 받아 많은 부흥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지요. 병자들이 고침받고 이적이 일어나자 동아일보에까지 보도가 되었고, 이것이 실제인지를 증명한 적도 있었는데, 실제로 이적과 병고침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약 일만명 가량이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를 통해 병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분은 철저한 회개와 간절한 기도를 강조했는데, 회개와 간절한 기도만이 병고침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는 15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설교횟수 이만팔천번, 새신자 28만명, 치병자 일만여명이였고,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 이성봉, 주기철 목사같은 한국교회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고문을 당했고, 6.25전쟁 때 몇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 당하고 말았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부흥을 일으켜낸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을 한국의 베드로라고 부릅니다.
이분의의 유명한 일화인데요,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고개 너머의 교회로 가는데, 너무 더워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는 그만 웃옷을 다 벗고 나무 그늘에서 평안히 쉬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술이 건아 하게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올라오는 겁니다. 그 사람이 김익두 목사께 오더니, 시비를 거는데, "왜 당신이 여기 먼저 올라 왔느냐?" 말 같지 않은 소리로써 자꾸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말대꾸를 안 하니까 이 술 취한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을 장작 패듯이 그냥 패는 겁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은 한마디 말없이 다 맞았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전직 깡패였거든요. 힘이 없어서 맞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주먹이 있는 사람이 말없이 맞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얼마동안 때리더니, 이 사람이 그 때리던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 때 김목사님이 묻기를 "형님 다 때렸소?" 그랬더니, 이 사람이 "다 때렸다 왜?" 하고, 또 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얼굴 안색이 변하더니 그냥 초죽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이 하는 말이, "내가 예수 믿기 전이라면 당신 오늘이 장례식 날일텐데,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당신이 오늘 산 줄을 아쇼"
그러자 이 사람이 그냥 머리를 땅에다 처박고 "형님, 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 " 그래서 자기 부흥회 하는데 데리고 가서 자리에 앉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예수 믿고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전직 깡패였던 김익두 목사를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을 괴롭히고 온갖 죄를 짓던 사람이 무고한 자신을 때리는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생명을 불어넣은 불의 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으로 가능했을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신사참배의 고문과 위협 가운데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키게 하였고, 교회를 지키다가 죽게 했을까요? 무엇이 한낫 불량배요 쓰레기 같은 인생에서 한국 교회의 베드로라는 칭함을 받게 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김익두 목사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 그를 변화시킨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바꾼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로 바꾼 것도 아니고,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새롭게 하셨고, 변화시켜주셨고, 놀라운 능력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은혜가 나를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으로 영접하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이전엔 인정하지 않았던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용서해주시고,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가 나를 변화시킵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참 평화와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능력도 주십니다.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마음 한 가운데로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이 그 마음 가운데 계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생의 의미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고 방향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고 삶이 바뀝니다. 에수님께서 나를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김익두 목사와 같은 변화가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본질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이미 만난 분들도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만난 예수님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날마다, 그리고 매주 드리는 예배 때마다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채우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날마다의 삶과 평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가운데 주님의 다스림을 받길 바랍니다. 그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변화시키시고 날마다 새롭게 하실 것이고, 새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이고, 새로운 비전과 사명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여러분들을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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