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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3: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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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
2008. 9. 6. 텔아비브 욥바 교회
마가복음 3:13-19
어느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그 날 목사님의 설교가 매우 감동적이고 은혜로왔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회개하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날 예배는 교인 전체가 은혜를 받은 감격적인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한 사람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감동이 없이 멋적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교인 한 분이 물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세요?”
이 사람은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교회 성도가 아닙니다.”
그 교회의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감동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소속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소속감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할 수 있고 함께 더불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고, 선교회나 교회 내의 어떤 모임에서도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소속감입니다.
지난 전교인 여름 수련회 때 강사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성도들에게는 세 가지 My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My Church, My Pastor, My Mission,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소속감과 관련이 있는 것이 바로 My Church입니다. 내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소속감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봉사할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My Church,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도 My Church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이민 사회가 형성된 곳이 아니고 일부 한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짧게는 한 두 주, 혹은 몇달, 길게는 5, 6년 정도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거쳐가신 분들이 이미 2백명 가까이 되는데, 이를 봐도 오랜기간 소속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를 하는 그런 교회는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 대부분은 향후 5-6년 내에 떠나실 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인데,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가 My Church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거쳐간 분들에게 우리 교회가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My Church가 될 수 있을까? 혹은 그저 이스라엘에 머무는 동안 잠시 예배드렸던 교회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년 한해를 보내면서 사실 힘들었던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작년 한해동안 청년들과 출장자들이 많이 다녀가셨습니다. 새로운 분들이 오실 때마다 늘 반가웠고, 함께 교제하며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떠나보낼 때면 정말 가슴이 뻥 뚤리는 것과 같은 서운함이 들었고, 이분들이 좀 더 오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다만 떠나는 이들이 우리 교회를 잊지 않고 기도하고 영적으로나마 계속 교제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제가 종종 했던 말이 "한번 텔아비브 욥바 교회 교인은 영원한 텔아비브 욥바 교회 교인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제 마음 속에는 우리 교회를 거쳐갔던 분들이 우리 교회를 My Church로 기억하며 계속해서 기도하며 교제하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 전 그 바램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거쳐갔던 많은 분들이 계속해서 소식을 주고 받으면서 교제를 하고 있고,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얼굴 한 번 못 본 분들까지 우리 교회 교인으로 함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달 한국 방문 때 우리 교회 교인들을 만났습니다. 작년과 올해 우리 교회를 거쳐간 청년들과 집사님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분들은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 교인이라고 말입니다. 비록 그분들이 각자 섬기는 교회들이 있지만 이들은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의 영원한 교인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스스로 하는 말이 그래요. '우리 교회'라고 말입니다. 전 다른 교회 교인들 만나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 성도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전 행복한 목사입니다. 매주마다 교인들이 늘어나는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8월 제가 한국에 방문 중일 때 말씀을 전해주신 정연호 목사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교회가 부흥했다며, 예배도 뜨겁고 교인들도 열심이고 좋다고 칭찬을 하시더군요.
예배를 드리는 실제적인 숫자로도 성장했지만, 우리 교회를 거쳐간 분들로 인해 더욱 더 성장하고 건강한 교회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와 같은 예배의 자리에는 없지만 매주 토요일이 되면 우리 교회를 기억하며 우리 교회의 예배를 위해 기도하며 교회의 부흥과 이스라엘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영적 파워가 한국과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곳곳에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 교인들이 있어 이들이 우리의 든든한 중보기도팀이 되고 있습니다.
8월 15일 신촌에 모인 18명의 우리 교인들에게 제 꿈을 하나 말했습니다. 작년 많은 분들을 떠나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욥바 선교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다녔다는 것이 단지 이스라엘에 있는 동안 잠시 머물렀던 교회로 끝난다면 그것은 그저 기억에 남는 교회일뿐이지 My Church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를 거쳐갔던 이들이 함께 모여 마음을 모아 교회와 이스라엘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힘을 모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텔아비브 욥바 교회 교인'이고 우리 교회가 My Church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장은 기도 모임부터 시작하겠지만 후에는 그것이 정식 선교회가 되어 조직적으로 우리 교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후원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선교를 감당하고, 유대인 선교와 아랍인 선교 비전을 가진 이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파송하고, 해마다 이스라엘로 아웃리치를 와서 우리 교회 교인들과 함께 수련회도 하고 전도도 하는 그런 선교회를 만드는 것이 제 꿈입니다.
이 꿈 이야기를 했어요. 반응이 어땠을까요? 우리 교회 교인들인지라 모두 찬성하고 9월부터 기도 모임을 갖기로 했어요. 최은정 집사님이 본인 집을 기도 모임 장소로 제공하기로 하셨고, 김병채, 이종렬, 조현준 전임 청년 회장들이 연락책을 맞기로 했습니다.
전 상상해 봅니다. 후에 '욥바 선교회'를 통해 한국에 세워질 또 하나의 텔아비브 욥바 교회를 상상해 봅니다. 그래서 한국과 이스라엘 땅이 하나로 연결되고, 주님께서 주신 동일한 비전과 사명을 가지고 함께 사역하고, 이스라엘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워나갈 그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텔아비브 욥바 교회 성도입니다. 텔아비브 욥바 교회는 우리 모두의 My Church입니다. 이 분명한 소속감이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를 더욱 하나되고 더욱 더 건강하고 능력있는 교회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소속감, 다른 말로는 하나됨인데, 사실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된 곳이 교회인데, 그러한 이질적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가 된다는 것은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된 공동체의 모델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공동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공동체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열두 제자공동체는 성격과 개성이 다른 사람들의 연합이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우직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성격이 단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급한 성격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성격이 급하고 과격한 면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꼼꼼하고 치밀하기도 했지만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면이 있었고, 빌립에게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엿보이며, 안드레는 소극적이고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이들 열두 제자들은 그 개인의 성격이 서로 다른 모임이었습니다. 12명이 다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봉숭아 학당이었습니다. 보통 성격이 다르면 충돌이 일어나기 쉽고 갈등이 일어나기가 쉽습니다. 부부간에 왜 갈등이 일어납니까? 성격 차이 때문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성격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신앙의 칼라가 다릅니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역시 서로 다른 성격, 다른 개성,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로 갈등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12명이 12가지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차이를 극복했다는 겁니다. 갈등의 소지는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들은 경제적인 수준이 다른 사람들간의 연합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상당수는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형제는 벳세다의 유명한 어부인 세베대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20에 보면 이들 두 형제의 아버지에게는 배가 있었고 삯꾼들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왕십리중앙교회를 섬겼을 때 전라남도 고흥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안수집사가 된 청년 중에 고흥의 어촌이 집인 청년이 있었는데, 일정을 맞춰서 같이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고흥으로 내려가는 중에 그 형제가 자기 집에 배를 새로 샀다고 자랑을 해요. 그것도 침을 튀기면서 아주 대단한 것인처럼 자랑을 하는 겁니다.
저는 배 산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길래 저렇게 침을 튀겨가며 자랑을 할 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촌에 가보니 생각보다 자기 배가 없는 집이 더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배에서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촌에서 배가 있는 건 그래도 꽤 여유가 있고 부자인 경우라는 것이지요.
지금의 사정이 이러니까 예수님 당시라면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당수가 어부였고, 그들 대다수가 자기 배를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데, 이러한 것만으로 보아도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가 배가 있었고 삯꾼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 형제의 집이 상당히 여유가 있고 부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세리 출신인 마태도 비록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재산의 많은 부분을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었지만 그래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는 경제적인 차이, 빈부의 격차가 있는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빈부 격차가 있을 경우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은근한 부의 자랑 등으로 인해 하나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요. 빈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차이로 인해 갈등이나 소외감 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강남의 몇 교회들은 아예 부자나 지식층들만 모이는 교회로 알려져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교회에 등록하기가 매우 껄끄럽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공동체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전이나 종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구별없이 하나되는 것이 참된 교회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역시 그러한 차이, 특별히 경제적인 차이, 빈부의 차이가 있었던 공동체였습니다. 갈등의 소지, 패가름의 소지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세 번째로 이들은 서로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간의 연합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끼리의 연합은 쉽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들간의 연합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이 전혀 다른 사람들 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나안인 시몬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마태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누가복음 6:15에 보면 시몬을 가리켜‘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셀롯은 당시 유대독립운동단체인‘열심당’을 말합니다. 사해변에 있는 마사다(로마에 대한 열심당의 최후항전)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들은 무력폭동을 일으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과격한 단체였습니다. 이들은 때때로 로마 군대나 매국노들을 암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칼을 가슴에 품고 다녔는데, 이들을‘셀롯’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셀롯이라는 뜻이‘칼을 품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시몬이 바로 과격한 독립운동단체인‘셀롯당’, ‘열심당’의 당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인 마태가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을 포탈하고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매국노로 취급받았고, 따라서 암살대상이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기회만 있으면 세리들을 암살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열심당원과 세리, 이 둘은 결코 같은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어디에도 열심당원인 시몬이 세리 마태를 죽였거나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들은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정치적인 입장, 차이 조차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이 때로는 쉽지가 않고 그것으로 인해 문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러한 차이들이 있었지만 그 차이들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차이점들을 극복했습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그들은 어떻게 이러한 차이점들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그 첫째는 동일한 부르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다른 말로는 소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르심에 대한 확신,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태도가 다르고, 공동체에 속해 있을 경우에도 임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소명의식은 소속감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은 소속감도 강하고 의욕도 강합니다. 동일한 소명의식이 있는 공동체는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여러 교회 중에 하나 다닌다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이 있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는 자연히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동일한 사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4-15절을 보면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나옵니다. 첫째는 ‘자기, 곧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주님을 섬기며 봉사하며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전도를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정한 훈련이 끝난 후 그들을 내어 보내사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쉽게 말하면 능력을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중심적인 사명은 전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는 전도를 위해 열두 제자를 세우시고 이들을 훈련시키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가장 핵심적인 사명은 전도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교회에도 마찬가지고,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도 바로 전도에 있습니다. 작년 교회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1년 반 동안 우리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 청년들과 장년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교회의 존재 이유는 영혼구원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를 통해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만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데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미 우리 교회에서는 메시아닉 유대인 사역자를 후원하며 동역하고 있는데, 이외에도 많은 유대인 사역자와 연약한 메시아닉 교회들을 후원하길 원하고, 또한 우리가 직접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힘을 쓰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땅에 복음을 심고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우리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이 우리 모두의 사명이 되고 비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울러 이것이 우리가 더욱 더 하나되는 원동력이 되길 바랍니다.
사실 이들이 여러 가지 차이점을 극복했다고 하지만 이들에게도 많은 문제와 위기가 있었습니다. 갈등, 경쟁, 의심, 편가름 등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합니다. 주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날에 내 아들 중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어떤 분은 이를 가르쳐 치마 바람이다라고 하더군요. 어찌됐건 그러한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어찌 합니까? 듣고 분히 여겼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제자공동체는 동료라는 의식보다는 서로가 경쟁상대가 되어버렸고, 지체라는 의식보다는 갈등하게 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는 그 공동체 자체가 해체될 위기까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 상에서 죽게되는 일련의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각기 자기 집으로, 고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해체된거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이들이 이러한 문제들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사건은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었고, 그들의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 동일한 믿음의 경험이 있었기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제자공동체는 신앙공동체였고, 예배공동체였다는 말입니다. 친목 중심의 공동체, 일 중심의 공동체는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어려움이 닥칠 때 쉽게 휘말리고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 중심의 공동체, 예배 중심의 공동체는 똑같은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휘말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칫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들이나 선교회 등이 일 중심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먼저 신앙공동체,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되게 하는 힘과 든든한 기초를 제공하는 힘인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들 제자 공동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사역의 힘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다시 한마음, 한 뜻으로 뭉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얼마 후 그들은 세상을 뒤집는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을 통해 세계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가능했을까요? 단순히 신앙공동체라는 것으로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놀라운 일을 하게 된 데에는 한가지 중요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상령강림사건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들이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 그들은 달라진 것입니다. 이전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모습이 아니라 열정있고 능력있고 비전있는 사람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뒤집어 엎은 사람들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왜 성령받아야 합니까? 왜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까? 능력 받기 위해서입니다. 주신 사명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성령 충만할 때 그 하는 일과 사역에 큰 역사가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의 능력으로 일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더불어 우리 모두가 성령충만한 성도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섬기고 행하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공동체를 통해 본 것처럼 비록 많은 차이점들이 있지만, 이러한 차이점들을 동일한 소명의식, 동일한 사명과 목적으로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동일한 믿음의 경험이 있는 신앙공동체, 예배 공동체, 성령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성령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께서 세우신 뜻을 받들어 전도의 사업과 열매들을 맺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곳에 세워나가는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 기 도 *
1.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동일한 소명의식, 동일한 사명과 목적으로 이러한 차이들을 극복하게 하시고, 동일한 믿음과 예배로 하나되게 하시고, 동일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하나되는 교회, 능력있는 교회, 사명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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