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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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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2009년 8월 15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갈라디아서 6:6-9
<설교 원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사람은 미국의 닐 암스트롱이다. 그가 우주 여행을 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보라! 우주에 가보니 하나님의 솜씨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 어느 곳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원더풀을 연발했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우주공간에 나가보니 그 장대함과 광활함에 놀라고 그 엄청난 우주가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더라는 것이다. 이건 분명 창조주가 있어서 질서를 부여해주고 그 질서대로 다스리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주가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리면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질서로 움직이는 무한대의 공간’그 무한대의 공간, 그 안의 무수한 행성체들,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작용하는 질서, 이러한 질서를 누가 부여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누구인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천체물리학을 연구하면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단다.
우주뿐이겠는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라. 어느 하나 질서 없이 움직이는 것이 없다. 씨가 뿌려지면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그 열매가 다시 씨가 되어 뿌려진다. 정해진 때에 뿌려지고 자라나고 열매 맺는다. 이 질서를 깨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광우병이 그 예다. 소는 풀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빨리 자라게 하고 보다 많은 우유와 고기를 얻기 위해 소뼈를 갈아 건초에 섞여 먹인 바람에 생긴 병이 광우병 아닌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고 인간의 욕심을 위해 질서를 깨뜨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가 있다. 모든 것이 이 질서대로 움직인다. 물리적인 세계에도 질서가 있고, 영적인 세계에도 질서가 있다. 영적인 질서에도 뿌린 대로 거두는 질서가 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이 그걸 말하고 있다. 7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이건 영적인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8절을 보자. 부연적인 설명인데,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걸 밭으로 표현한다면 영적인 세계에 육체의 밭과 성령의 밭이 있다는 말이다. 어디에 심느냐에 따라 그에 맞는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말이다. 심는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나의 관심사가 무엇이냐, 내가 정말 중요하게 여기며 힘을 쏟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즉 내가 육체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고 그저 그것에만 집중한다면 그것은 육체의 밭에 심는 것이다. 반대로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행할 때 그것은 성령의 밭에 심는 것이다.
육체의 밭에 심는 육체의 일이 무엇인가? 앞장인 5:19-21을 보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과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자.
“육정이 빚어내는 일은 명백합니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경고한 바 있지만 지금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것들 이런 것들이 바로 육체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고 이렇게 했다. 그럼 무엇을 거두게 되는가? 썩어질 것을 거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멸망’이다. 육체의 밭에 심는 자가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 멸망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멸망이다.
얼마 전에 우리 집사님 한분을 통해 들은 것인데,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집단이 베들레헴에 건물을 짓는단다. 이단 아닌가? 교회라고하면 교회라는 말을 더럽히는 것이니 난 건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제 들어보니까 상당히 심각하다. 돈으로 아랍교회뿐만 아니라 가난한 메시아닉 교회들까지 포섭하고 있단다. 그렇게 돈으로 아랍 교회와 메시아닉 교회 지도자들을 매수하고 지금 베들레헴에 그들의 건물을 짓고 있단다.
이스라엘에 그들뿐인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지방교회, 통일교 등등 온갖 이단들이 들어와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심는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말하는 것처럼 육체의 밭에 심는 것이고 그들이 거둘 열매는 멸망일 뿐이다.
문제는 그들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더불어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성지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정말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마지막 때에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다. 이스라엘이라고 예외겠는가? 오히려 성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깨어서 기도하자. 그리고 육체의 밭에 심는 자들의 가르침이나 유혹에 조금이라고 미혹되지 말라. 흔들리지 말라.
이단의 특징은 처음에는 모른다. 똑같아 보이고, 어떤 면에서는 더 좋아도 보인다. 그러나 이단이 뭔가? 그 한자어처럼 끝이 다른 것이 이단이다. 그 끝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고, 자신이 그리스도, 메시아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고, 성경을 부인하거나 또 다른 경전이 있다며 그것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이다. 처음은 똑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끝은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그 끝의 열매는 멸망이다. 미혹되지 말라.
육체의 밭에 심는 자는 결국 멸망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된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데,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때때로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나는 어디에 심는 자인지 말이다. 성령의 밭에 심는 자여야 하는데 행여라도 육체의 밭에 심는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육체의 일들을 잘 봐라.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되는 것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들과 정반대의 것들이다. 하나님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거룩함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데 그와 반대되는 것들이다.
행여라도 자신이 육체의 밭에 심는 일을 하고 있다면 당장 끊어버리라. 회개하고 돌아서라. 그리고 성령의 밭에 심는 자가 되라. 성령의 밭에 심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거룩한 삶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 헌신, 기도하는 삶, 봉사와 섬김, 성도의 교제, 복음 전도, 이런 것들은 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이다. 이러한 것에 관심을 두고 힘을 쓰면 내게 맺어지는 열매가 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른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는 이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이다. 내가 성령의 밭에 심는 자가 될 때 말이다. 그랬을 때 최종적으로 거두는 열매가 무엇인가? 영생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영원한 삶, 완전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다.
신앙생활에는 단계가 있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 이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구원 혹은 중생이라 한다. 그 다음이 무엇인가? 성화의 단계이다. 거룩할 성(聖), 될 화(化), 거룩하여져 가는 단계이다.
그 다음이 무엇인가? 영화의 단계이다. 영화로울 영(榮)을 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처럼 영화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최종 완성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이다.
성화의 단계를 오늘 본문에서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 즉 성령의 밭에 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성령의 밭에 심는 것을 잘 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영화의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평생 성령의 밭에 심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그저 자기 마음 가는대로 그저 육체의 밭에만 심는 일을 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행여라도 영화의 단계를 기대하지 마라. 이건 7절 말씀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이다.
개역한글성경에는‘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말을 본래 의미는 “코를 치켜 올린다”는 뜻이다. 무슨 뜻인지 아는가? 상대방에게 수치를 준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수치스럽게 다룬다는 것이다. 조롱한다는 뜻이다.
즉, 육욕을 심고 신령한 축복을 거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다. 심는 대로 거둔다. 어디에 심느냐에 따라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또한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은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질서요 동시에 영적인 질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관심을 기울이고 힘써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그리해야 한다. 성령의 밭에 심는 자들이 되길 축복한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의 밭에 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과거에는 그랬을지라도 이제는 그러한 일과는 결별하고 성령의 밭에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화의 단계를 사는 성도의 삶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이다. 다시 한 번 권하며 축복한다. 성령의 밭에 심는 자가 되어 이 땅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후에는 영생을 거두길 축복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살아가려고 할 때 함정이 하나 있다. 이건 신앙생활의 함정이다. 이 함정을 모르면 우리의 이러한 목표나 결심은 공허한 구호나 작심삼일이 될 수 있다. 본문 9절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은 앞서 말한 성령의 밭에 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의 밭에 심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이다. 믿는가? 내가 성령의 밭에 심는 자가 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자, 선한 자가 되길 축복한다.
그런 이런 선한 일을 행하다 보면 우리가 당면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쉽게 낙심하게 되고 피곤해 진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내 욕심을 따라 살고, 육체의 밭에 심는 일을 할 때는 피곤도 모르는데 선을 행할 때는 쉽게 피곤해지고 지친다. 술 마시고 흥청망청 놀 때는 밤새도 놀아도 괜찮은데, 기도할 때는 10시만 되어도 피곤하고 졸리다. 드라마보고 영화보고 그럴 때는 2시간도 3시간도 좋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 때는 1시간도 길게 느껴진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할 때는 좋은데 다른 사람을 위해 할 때는 괜히 마음이 힘들어질 때가 있다.
이제는 정말 예수 제대로 믿어보겠다고 결심을 하고 예배도 잘 드리고 성경도 일독하고 큐티도 하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순종도 하고 하려는데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쉽게 낙심이 되고 피곤해지고 귀찮아진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가는데 꼭 어렵게 하는 일이 생기고 그로인해 낙심하게 되고 피곤하게 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이 말의 문자적인 해석은‘우리가 선을 행하는 동안에 악에게 굴복하기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상하게도 선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많은 악의 유혹을 받는다. 선은 성령의 밭에 심는 것이라고 했는데, 모처럼 마음먹고 선한 일을 하고 선을 행하려고 하면 꼭 악의 유혹이 있다. 사단의 유혹이 있단 말이다. 굳이 악의 유혹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유혹이 있다.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사단은 그 유혹과 어려움을 통해 우리를 굴복시키려 한다. 그래서 낙심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든다.
그런 유혹과 어려움을 당하거나 하면 우리는 이런 말을 하기 쉽다.‘에이 뭐, 나 같은 것이……’,‘에라 내가 언제부터 그랬냐. 그냥 생긴 대로 살자’ 혹은 상대방에게 ‘니가 그럼 그렇지. 좀 달라지나 했어.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이러면서 마음을 접게 된다. 그러면서 예전으로 돌아간다. 더 이상 노력을 안한다. 이건 악에게 굴복당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낙심하는 것이다.
제가 두란노 아버지 학교 이스라엘 1기 수료생이다. 보통 수료생이 아니다. 성지 1기 수료생이다. 아버지학교를 통해 참 많은 깨달음과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정말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리고 그 실습이 시작되는 일요일이 되었다.
그런데 그날부터 나의 관심은 노트북에 집중이 되었다. 우리 집 데스크탑 컴퓨터의 나이가 우리 장남 하림이의 나이보다 많다. 그러니 부팅장애, 작동장애 등등 수많은 노후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내 노트북도 문제가 많아 서브 노트북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감사하게도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히브리어 OS라는 것이다. 언어 설정을 한글로 해도 전부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충돌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한글 xp를 깔려고 해도 씨디롬이 없어 알아보다가 usb로 설치하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그걸 시도해보았다. 내공이 부족해서인지 아무리 해도 안되더라. 그리고 내 예전 노트북은 가족들이 써야 하니까 새로 깔았다. 암튼 그러느라고 며칠을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문제는 그 와중에 아이들과 아내가 아팠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병원에 데려갔고 집안일도 도와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예전만큼 못해주었다. 아내가 아프면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많이 도와주는데 내 관심이 노트북에 가 있으니 그리 못했다. 남자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잘 못 본다. 며칠 후에 포기하니까 보이더라.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갔다. 그랬더니 내게 아내가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아버지 학교는 왜 갔다 왔는데?’
순간, 뜨끔해서 나 자신에게도 물었다. ‘아버지 학교 왜 갔다 왔는데?’ 더 좋아질 것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했고 오히려 이전보다 못했단 말이다. 그 말을 한 이유가 뭘까? 기대했는데 실망했다는 것이다. 만일 여기서 더 나아가 ‘그래, 내가 무슨…… 그냥 생긴 대로 살자’ 혹은 ‘당신이 무슨…… 기대한 내가 바보지’하면 오늘 본문처럼 악에게 굴복당하는 것이다. 정말 낙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피곤해지는 것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지고 그런 삶 자체가 피곤해진다. 그럼 더 이상 못하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 부부는 그렇지 않았다. 악에 굴복당하지 않고 다시 돌이켰다. 그러니 피곤하지 않다. 좋은 아버지 되는 것이 여전히 기대가 되고 소망이 된다.
기억하자. 선을 행할 때, 즉 성령의 밭에 심는 일을 할 때 우리를 넘어뜨리고 낙심하게 하고 그래서 단념하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들려는 악의 유혹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변 환경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마귀의 직접적인 유혹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단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를 굴복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낙심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어 포기하고 단념하게 만들어 다시 예전처럼 육체의 밭에 심는 자가 되게 하려고 한다.
분명히 기억하자. 그리고 바로 그때 다시 일어서자. 굴복당하지 말자. 그럴 때일수록 더욱 기도하고 마음을 다잡고 성령의 밭에 심는 자가 되자.
나 자신에게도 그리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하자.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늘 낙심의 유혹이 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나름대로 그 사람을 섬기고 기도하고 그랬는데 그 사람에게서 변화가 없더라는 것이다. 예전 그대로고, 어쩔 때는 더 나빠진 것 같다. 그리고 내게 돌아오는 것은 고마움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정반대의 반응인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칫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단념하고 포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악에 굴복당하여 낙심하는 것이다.
전에 부목사 때 담임목사님께 그런 푸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정말 이 교인을 위해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고 심방도 자주 가고 늘 마음에 쓰고 말씀으로 권면을 하고 했는데 도무지 바뀌질 않습니다. 예전 그대로고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내게 그러시더라.
“류목사, 자네 콩나물시루 알지? 매일 물을 쏟아 붓지만 똑같아 보이지 않던가? 잘 크라고 주는데 아래도 그대로 물은 다 빠지고 공연히 물만 낭비하는 것 같지 않던가? 그런데 나중에 보니 어떻던가? 어느새 자라있지 않던가? 그런 거야. 지금은 콩나물시루에 물만 붓는 것 같고 하나도 자라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나중에는 자라게 되어 있어. 왠지 아나? 자네는 심었지만 그걸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야. 자네는 그냥 심는 일에만 집중해. 심는 자는 심을 뿐이지 자라게 하는 사람이 아니야. 심고 기도해.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고 그 마음을 붙들어주셔서 자라게 해달라고 말이야. 그럼 되는 거야.”
맞는 말 아닌가? 그 말을 듣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콩나물시루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닌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그 때 이후 얼마나 많은 분들이 나에게 영적인 물을 주었겠는가? 목사님들, 전도사님들, 선생님들, 선배들, 부모님... 많은 분들이 나에게 영적인 물을 주었다. 아마도 그분들 역시 나를 보면서 콩나물시루가 생각났을 거다. 계속 물은 붓는 데 자라는 것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자랐고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도 성장했다. 콩나물시루를 벗어났다.
그 때 이 말을 난 정말 내 마음으로 받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런 경우를 만나면 난 콩나물시루를 생각한다. ‘하나님, 여기 콩나물시루가 있습니다. 저는 다만 물을 붓습니다. 자라게 하여 주옵소서’ 영적인 물을 주고 기도할 뿐이지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반응이나 결과가 어떨지라도 낙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피곤하지 않다.
피곤하다는 말의 본 뜻은 ‘힘을 잃는다’는 뜻이다. 낙심하니 힘이 없어진다. 더 이상 그럴 힘도 없어지고 의욕도 없어진다. 그것이 피곤한 것이다. 내 몸은 피곤할 수 있지만 마음도 조금은 피곤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내 심령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힘이 있다. 그를 사랑할 수 있는 힘,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힘, 그를 섬길 수 있는 힘이 있다. 악에 굴복하지 않으면, 낙심하지 않으면 이걸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그럼 다시 마음 마음도 힘을 되찾게 되고 그럼 몸도 다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내 영이 낙심하여 힘을 잃으면 내 마음도 내 몸도 힘을 잃게 된다. 그럼 피곤하게 여겨지고 귀찮게 여겨지고 단념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선을 행하다가, 성령의 밭에 심는 일을 하다가 악에 굴복하지 말자. 나 자신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도 그리 하자. 그래서 낙심하여 힘을 잃는, 피곤해지고 단념하고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모를 때는 그럴 수 있지만 이제는 알지 않는가? 알기에 그런 신호가 감지되면 ‘아, 지금 악이 나를 굴복시키려 하는구나.’하면서 정신 차리고 무릎을 꿇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의 밭에 심는 일에 keep going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사도 바울이 염려한 것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처음에는 정말 잘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령을 쫓아 살아가려는 그들의 처음 열정을 상실하여 육체의 일들을 허용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주와 같다. 긴 경주다. 출발과 과정과 결승점이 있고 분명한 상급이 있다. 그 과정에는 평탄한 길도 있고 내리막길로 있고 포기하고 싶은 오르막길이나 난코스도 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많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어려움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자. 결승점이 있고 상급이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2:1-3이 우리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을 기억하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똑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그 믿음의 경주를 하다보면 낙심하게 되고 피곤해져서 단념하거나 무관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하라는 것인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2절에서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선한 일을 행하시다가 낙심하기 않으셨다. 그래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인류구원의 위업을 이루셨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 곧 성령의 밭에 심는 이 일을 함에 있어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봐야 하고, 그분의 도우심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 그렇게 우리의 경주를 다할 때 우리 역시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잘 했다 칭찬받고 의의 면류관을 쓰고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를 위해 허다한 증인들이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여러분 앞에 주어진 경주, 성령의 밭에 심는 이 경주를 끝까지 해나갈 수 있기를 축복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때이다. 9절을 다시 보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때가 있다. 만물은 다 때가 있다. 자연세계에도 그렇고 영적 세계에도 그렇다. 분명히 거둘 때가 온다. 우리가 거둘 때는 바로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이다. 그 때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썩어질 것, 멸망과 영원한 생명 영생,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거두게 된다.
무엇을 거두길 기대하는가? 다시금 일어서실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다시금 우리에게 주어진 경주, 성령의 밭에 심는 이 경주를 해나갈 수 있기를 축복한다.
어떤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연이 보이지 않았다. 그럴 본 남자가 물었다.
“애야, 너 지금 뭐하고 있니?”
“연 날리고 있잖아요.”
“어디에 연이 있는데? 안보이잖아. 연 끊어져서 날아갔는데 니가 모르는 것 아니니?”
그러자 이 아이가 무어라 했는지 아는가?
“자, 보세요. 연줄이 팽팽하지요? 지금 멀리 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연은 지금 이 줄에 달려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말씀대로 살아가고 정말 성령의 밭에 심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고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보이는 것도 없고 달라지는 것도 없어 그냥 단념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기억하자. 내 연줄은 연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성령의 밭에 심는 일을 하고 있는 한 나의 신앙의 연줄은 하나님에게 닿아있음을 기억하자. 비록 보이지 않아도 달라진 것이 없어보여도,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때도 힘들고 고되어도 기억하자.
내 영의 줄이 하나님에게 닿아있다. 내가 움직일 때 하나님께서도 움직이신다. 내가 줄을 당길 때 하나님도 당겨주시고, 내가 줄을 늘일 때 하나님도 늘려주신다. 그 줄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그 줄이 나를 영생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 줄을 놓지 말자. 성령의 밭에 심는 일을 하다가 악에게 굴복하여 낙심하고 힘을 잃어 단념하고 포기하지 말자. 그건 줄을 놓는 일이다. 끝까지 이 줄을 잡자. 연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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