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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진리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225 추천 수 0 2013.06.22 18: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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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3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역설의 진리

2009년 9월 12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5:3

 우리 교회에서 힘쓰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골방의 시간 갖기’입니다. 날마다 큐티하기, 1시간 기도하기, 성경일독하기 등등이 그 내용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것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많은 교우들이 실제로 골방의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발견하는 역설들이 있습니다. 역설, 혹은 역설적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 많은 것들이 세상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가치와 사고 등과 상반되는 것이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설에 참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논리와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고 모순되는 역설로 가득한 것이 성경이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역설에 해당되는 말씀들의 예는 이런 것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네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하라.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는 자는 높아진다."

  그 말씀들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세상의 가치와 우리 인간의 사고와 생각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안에 참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역설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상복음, 산상설교라고 하는 부분의 첫 대목인데, 특별히 이 부분을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여덟 가지의 복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복인데,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데 복이 있다? 모순 아닙니까? 우리야 이미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이 말씀을 가지고 모순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6:20을 보면 더 그러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가난이 어떻게 복입니까? 가난은 화죠. 저주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고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가난한 것을 복으로 여깁니까?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복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이 모순되는 말에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흐름에서 봐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과 경건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도 가난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의 경우는 많은 경우 경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유함이 자칫하면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으로 빠질 수 있고,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죄를 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라 해도 그 안에 겸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과 증오심이 되어서 가진 이들을 증오하고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살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교만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이 나중에 부자가 되면 아주 악독하고 탐욕스러운 부자, 우리가 보통 말하는 졸부가 되어 버립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화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겸손입니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부와 재물, 권력이 원래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마음이 있을 때 부자 역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이 있는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거만하거나 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더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없는 이들을 돌아보고 자신이 가진 물질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부자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그 중심에 겸손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누가와 달라 그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이런 것입니다.

  겸손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고 늘 은혜를 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 겸손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겸손한 사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겸손을 히브리어로 'ענו'(아나브)라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이 곧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을 때는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령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물질적으로 부자든 가난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이 겸손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 자체부터 복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사야 57:1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겠다고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 통회한다는 말과 겸손하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누가 통회하겠습니까?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깨닫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통회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런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어떻게 될까요? "겸손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생명의 근원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어찌 그 영이 소생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영을 소생시킨다'는 말은 다시금 힘을 주어서 일어서게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통회하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셔서 아물게 해주십니다. 그 마음 가운데 깊은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시편 10:17을 보면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소리에는 귀를 막으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소원을 들으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 돈벼락 맞게 해주세요. 저 출세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런 것일까요?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오늘도 죄에 대해 졌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또 악한 생각을 품었고 상처주는 말을 했고 사랑의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노력은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순종할 수 있도록,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옷 입혀 주옵소서. 당신을 더 알기 원합니다. 믿음 주옵소서. 능력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겁니다. 삶에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겠지요.
  "하나님 저의 삶에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고, 자녀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고, 나의 장래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의 무능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다스려주옵소서. 주님께 의탁합니다. 인도해주시고 열어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하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갈 때도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 이 부족한 자를 불쌍히 여겨 은혜주심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 마음이 높아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으로 인해 죄짓거나 어려운 이들을 멸시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게 하옵소서."

  저는 이런 기도가 겸손한 자들이 드리는 기도이고 하나님께 아뢰는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심령에 겸손이 없으면 성황당 앞에서 정한수 떠놓고 비나이다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기도를 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응답입니다.

  우리는 눈에 무언가가 보여지는 것만을 응답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 자체가 응답입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달려있어요. 하나님께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그 때에 구체적으로 나타내주십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자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 이것을 다른 말로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내가 그런 상한 심령, 가난한 심령,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구했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약속입니다. 상한 심령을 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응답받은 것입니다. 내 눈에 보여지고 내 손에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주십니다.

  행여 주어지지 않아도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나는 상한 심령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겸손한 심령으로 구했지만 하나님 보실 때 그것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내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백배 천배 옳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 가장 옳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내가 구했는데 응답해주시지 않았다?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자신의 육체의 가시, 곧 질병인데, 그것을 고쳐달라고 얼마나 구했습니까?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구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는 겁니다."

  때로는 응답이 주어지는 않는 것이 내게 은혜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응답되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그를 바르게 세워주고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겸손히 사역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얼마나 존경을 받았겠습니까? 자칫하면 교만해질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오히려 은혜가 되어 끝까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겸손히 충성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은 그것이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제 경우도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어 겸손하게 구했을 때 주어지는 것은 마음 가득한 평안과 기쁨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가보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생깁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무엇인가를 가졌다라고 했을 때 복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하면 다 그런 복입니다. 오복이니 칠복이 하는 것도 보면 대부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물질의 복, 현세적인 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복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옵니다.

  시편 33: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누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경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곧 자신의 분깃이 됩니다. 기업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면 그 영혼이 잘됩니다. 그러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는 복도 덤으로 오는 겁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영혼이 잘 되어 있으면 그건 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그 사람의 영혼이 잘되는데 그건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다스려주시고 인도해주시게 됩니다.

  그럼 내 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아십니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천국을 미리 맛보면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적인 극락이나 무속신앙적인 저승개념으로 천국을 이해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말하면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죄악이 없고 사탄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만이 충만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젖어 온전히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하나님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거룩과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충만한 기쁨과 행복과 평안으로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건 단순히 죽어서 가는 저승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의 영혼이 가는 곳이고,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세워질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세워나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충만한 나라, 그래서 죄악이 없고 사랑으로 충만하고 평화로 충만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을 때, 현재형을 쓰신 겁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 쓰인 동사형이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복 아닙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 예수는 믿는데, 교회는 다니는데 아직도 세속적인 복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되어 이 땅에서 미리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복을 발견한 사람, 이 복을 맛 본 사람은 신앙이 차원이 달라집니다. 신앙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정말 예수 믿는 복이 이거구나, 정말 천국을 맛보며 산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신앙의 차원과 깊이가 달라질 수밖에요.

  또한 이런 분들은 세상적인 복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불편하죠.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마음이 죽으면 죽는 겁니다. 물질 때문에 염려하면 마음이 죽어요. 마음이 죽으면 하루하루가 고달파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사람은 세상적인 복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염러하지 않게 됩니다. 집착할 때, 염려할 때 위험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맛본 사람은 세상에서 열심히 삽니다. 단순히 자기의 성공과 안위를 위해 열심히 사는 것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고 싸우며 나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lifestyle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복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사시렵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지금처럼 적당히 믿고 적당히 주님과 거리를 두고 믿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주님께서 말하신 복이라면 진짜 복입니다.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는 복을 받으십시오. 이 복에 욕심을 내십시오. 이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입니다. 거룩한 욕심을 내십시오.

  여러분, 잘 기억하시고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해질 때 가능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시고 무능함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구하십시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무능함을 모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하세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세요. 그래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시편 107: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분명한 약속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확인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하는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구하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구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구하십시오. 반드시 만족케 해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박 4일간 코스타가 열립니다. 우리 교회가 가장 참여율이 높습니다. 농담반 진담반, 나를 계속 보려면 코스타 신청하라고 했는데 정말 거의 대부분의 교우들이 신청을 하셨습니다. 참 감사하더군요. 많은 인원이 참석해서 감사한 것도 있지만, 여러분들에게서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중에는 자의반 타의반 신청하신 분들도 있고, 부모님 때문에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구하세요. 오늘 말씀 기억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고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이번 코스타 때 누구보다도 은혜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데 욕심을 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더 올바르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맛보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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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0 마태복음 신자의 능력 마27:57-66  신윤식 목사  2013-06-25 2033
9349 마태복음 주님의 죽으심 마27:45-56  신윤식 목사  2013-06-25 2113
9348 마태복음 조롱받는 메시야 마27:32-44  신윤식 목사  2013-06-25 1883
9347 마태복음 바라바냐 예수냐 마27:11-26  신윤식 목사  2013-06-25 2322
9346 마태복음 힘없는 메시야 마27:1-10  신윤식 목사  2013-06-25 1884
9345 마태복음 베드로의 부인 마26:69-75  신윤식 목사  2013-06-25 2980
9344 마태복음 검으로 망함 마26:47-56  신윤식 목사  2013-06-25 1673
9343 마태복음 기도하라 마26:36-40  신윤식 목사  2013-06-25 2080
9342 마태복음 예수님의 분부 마28:16-20  신윤식 목사  2013-06-25 2202
9341 마태복음 불쾌한 부활 마28:1-10  신윤식 목사  2013-06-25 1972
9340 에배소서 아버지의 사랑과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 엡6:4  한태완 목사  2013-06-23 2492
9339 에배소서 지혜와 계시의 영 엡1:17-23  강종수 목사  2013-06-23 3035
9338 마태복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요? 마5:4  류공석 목사  2013-06-22 2473
9337 하박국 감사의 비밀 합3:17-19  류공석 목사  2013-06-22 3100
9336 마태복음 온유한 자! 마5:5  류공석 목사  2013-06-22 2398
» 마태복음 역설의 진리 마5:3  류공석 목사  2013-06-22 2225
9334 고린도전 나를 기념하라! 고전11:23-29  류공석 목사  2013-06-22 2273
9333 마가복음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라! 막1:9-11  류공석 목사  2013-06-22 2053
9332 갈라디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갈6:6-9  류공석 목사  2013-06-22 2198
9331 데살로전 울타리를 치세요 <4> 기도 [2] 살전5:16-18  류공석 목사  2013-06-22 2240
9330 에배소서 울타리를 치세요 <3> 말씀 엡6:4  류공석 목사  2013-06-22 2361
9329 창세기 아, 아담이여! 창3:8-12  류공석 목사  2013-06-22 1711
9328 마가복음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 막3:13-19  류공석 목사  2013-06-22 2073
9327 요한복음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 요6:1-15  류공석 목사  2013-06-22 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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