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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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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온유한 자!
2009년 9월 2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5:5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역설의 진리를 접하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세상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좀 착하고 온순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쪽박 차’내 기억에도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러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착한 것은 좋은데 그렇게 착하게 살다가는 부자 되고 출세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모순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말씀드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이 말씀도 그 안에 참된 진리가 있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함에 대한 조금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온유하다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착한 것? 화내지 않고 순한 양 같은 사람? 그것입니까? 이것이 온유함의 의미 맞습니까?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성격이 온순하고 화를 잘 내지 않으면 온유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은 단순히 착하고 화를 내지 않는 온순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쓰인 ‘온유한 자들’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ענוים’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가난한 자들’을 뜻합니다. 지난주에 ‘가난하다’라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히브리어 단어를 소개했는데 기억나십니까? ‘ענו’였습니다. 비슷하게 들리죠?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가난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하다는 말의 뜻은 어떤 말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가난하다, 겸손하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사람이 마음이 가난합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과 무능함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자비를 겸손하게 구하는 겸손한 사람, 이 겸손한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은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의 마음 상태는 어떨까요? 부들부들해집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에게는 부들부들해지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딱딱해지지 않습니다. 부들부들해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어떻게? 부들부들하게.
자신을 주장하거나 높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부드럽게 대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높이고 무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친절하고 용납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부들부들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성품이 무엇이냐? 온유함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나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고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온유하길 원하는데 그렇지 못합니까? 나를 주장하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살아있거든요. 내 자아가 살아있고 나의 자존심이 살아있고 나의 의로움이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을 대할 때 자꾸 딱딱해집니다. 마음이 닫히고 굳어져요. 잘 용납하지 못합니다. 작은 일에 화를 내고 불만을 토하고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한 심령, 가난한 심령,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온유한 성품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령이 될 때 하나님께 그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하나님이 터치하시면 부들부들해집니다. 심령이 부들부들해져야 온유해질 수 있는 겁니다.
온유함이 겸손과 같은 의미이고 심령이 가난한 것과 같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 더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두 분의 모델을 봐야합니다. 누가일까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예수님과 모세입니다.
여기서 모세를 예로 드는 이유는 그가 우리와 같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었고, 그 역시 처음에는 온유함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이 말은 겸손해지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나중에 자신이 히브리 노예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애굽 사람이 히브리 노예를 때리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온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가리켜 민수기 12:3에서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있는 민수기 12장을 보면 무엇이 온유함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3절 바로 앞에 보면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비방하는 이유는 모세가 이방 여자인 구스 여자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 구스 여자, 즉 에티오피아 여자가 누구냐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가장 유력한 해석은 모세의 아내 십보라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십보라는 미디안 족속 여자인데, 미디안 역시 함 족에 속해서 피부색이 검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보통 흑인을 말할 때 쓰는 구스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피부색도 혈통도 다른 이방 여자와 결혼한 것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 있는 이유는 모세에 대한 시기와 질투입니다. 구스 여자를 취했다는 것을 비방하면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의 리더십에 대한 시기와 질투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너하고만 말씀하셨냐? 아론과 미리암,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 그러니 우리도 백성을 이끌 자격이 있다. 왜 너만 지도자냐. 왜 너만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냐? 우리도 할 수 있다.’이런 뜻입니다.
이런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이었고, 미리암은 선지자로서 둘 다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모세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겁니다. 내부적인 반역이 생긴 것이지요.
대개의 경우 자신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합니까? 힘으로 응징을 합니다. 권력 앞에는 부모도 형제도 없습니다. 강하게 응징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경우를 봅시다. 이러한 내부적인 반역이 일어났는데 이어지는 3절에서 뜬금없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구체적으로 어떤 반응을 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모세는 이들의 시기와 질투, 정확하게는 반역에 대해 힘으로 대응하거나 분노로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힘이 있었고,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함은 힘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분명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대항하고 시기와 질투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런 상대방을 제어하거나 처벌하거나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조절하는 것, 이것이 온유함이고, 그 힘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보다 나은 선을 얻어내는 것,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은 무능함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힘을 조절할 줄 아는 성숙한 인격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런 경우입니다. 살아계실 때도 그랬고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로 꼽히는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 목회 당시 영락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나중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앞섰지만 한목사님 목회 당시에는 가장 큰 교회였고, 한국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가장 컸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그래서 교인 수가 몇 만 명이 되면 담임목사의 위치는 상당히 커집니다. 그것을 힘이라고 하면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기의 왕국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겸손하게 끝까지 자신을 낮추면서 충실하게 목회를 하셨습니다.
한목사님은 이북 출신인데 6.25전쟁으로 남으로 피난온 피난민들을 보살피면서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전쟁으로 고아와 과부가 된 이들을 위해 선명회, 지금의 월드 비전을 세웠고, 많은 고아원과 양로원, 보육원 등을 세웠고, 교육을 위해 많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세웠습니다. 군복음화와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주도하셨고, 복음전도와 한국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을 하셨습니다. 한목사님을 통해 세워진 교회가 국내외에 500여개에 이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그 공을 크게 여겨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은퇴 이후에도 계속하셨는데, 그래서 이분의 목회와 사회에의 공헌을 기념하기 위해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상이 독일 베를린에서 수여 되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 빌리 그래함 목사 등이 받은 상입니다.
92년 6월 18일에 템플턴상 수상 기념 축하예배 때 인사말을 하셨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복 주셔서 한국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때 국내외에서 천오백명의 인사가 참석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사로서 노벨 종교상이라고 하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사람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자리에서는 쏟아지는 찬사를 받고 자신을 높입니다. 적어도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체면이 있지.
그런데 한목사님은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쉬워 보입니까? 개인적인 회개기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 고백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온 국민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자리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회개의 고백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안에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함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사실 한목사님은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담임하던 교회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런 강압에 못 이겨 머리를 숙인 것이 한목사님에게는 평생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죄짐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물론 이미 하나님 앞에는 철저하게 회개를 했지요. 그러나 교회와 민족 앞에 부끄러움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을 텝플턴상을 수상한 자리에게 공개적으로 회개한 것이지요.
한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한 후에 한국 교회 내에 신사참배 회개운동이 일어났던 것 아십니까? 사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회개였습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자신의 과오를 숨길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공개적으로 회개의 고백을 함으로써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민족 앞에 신사참배에 대해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겁니다.
한목사님이 은퇴한 후에 영락교회에서는 최대한의 예우를 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6.25 전쟁으로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 교회로 시작해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고,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목사님에게 은퇴 후의 예우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누구도 손가락질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목사님은 다 거절하고 조그마한 집 한 채만을 요청했습니다. 충분히 좋은 자동차 타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음에도 거절했습니다. 목회 당시에도 청빈하게 사셨던 분이기에 다 거절하고 20평짜리 국민주택에서 여생을 보내시길 원하셨습니다.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거절했습니다.
너무 완고해서 교회가 결국 한목사님의 요청을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 9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남한산성 기슭의 조그마한 집에서 평소처럼 청렴하고 깨끗하게 여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유산은 휠체어와 지팡이, 그리고 서너 벌의 오래된 양복이 전부였습니다.
한목사님이 96년인가에 장로회신학대학교 채플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지만 신학생들이 웬만해서는 누가 왔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교하기 제일 힘든 상대가 신학생이라고 하지요. 이제 좀 신학을 했다는 것이지요. 좀 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분석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다가 목회 현장에 가서 회개하고 다시 겸손해지지요.
이런 신학생들이 한경직 목사님께서 오늘 예배에 오셨다는 소개를 하니까 일어서라는 말을 안했는데도 전부가 다 기립을 했습니다. 노년이라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셨는데 모든 신학생들이 전부 기립 박수를 치면서 아낌없는 존경을 한목사님께 드렸습니다.
왤까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의 목사이고 템플턴상을 받았고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해서일까요? 아닙니다. 큰 교회,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고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고 늘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했고 검소하고 깨끗하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힘이 있으나 보다 나은 선을 위해 조절할 수 있고, 높임 받을 수 있고 충분히 누릴 수 있으나 스스로를 낮추는 것,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그 온유함이 결국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영향력을 끼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리더십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던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는 사람인데, 너희가 감히 나에게 반역을 해! 이런!”그렇게 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 대신 행하시게 됩니다. 이어지는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셨습니다. 갑자기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대신 행하시게 됩니다.
계속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론과 미리암를 꾸짖으시며 진노하시고 떠나십니다. 그러자 아론과 미리암에게 피부병, 나병이 걸리게 됩니다. 본문에는 미리암만 걸린 것으로 보이는데 잘 보면 아론도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론은 그 즉시 회개를 하고 온 몸이 썩어들어 가는 미리암을 위해 모세에게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이들을 고쳐달라고 구합니다. 그냥 구한 것이 아니라 부르짖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을 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온유함의 특징입니다. 온유가 무엇이냐? 사람을 품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품지 못하면 내치게 됩니다. 똑같이 미워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자기의 힘을 가지고 응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품으면 비록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을 해도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하거나 미워하거나 보복하거나 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그 사람을 위해 부르짖게 됩니다. 복수해달라고 구하는 것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중보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을 품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겁니다.
모세는 자기의 힘을 조절할 줄 알았고,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을 위해 부르짖는 중보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모세를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 코스타에서 저는 모세처럼 사람을 마음에 품는 온유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전 중국대사이자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 장로님이십니다. 이분의 얼굴을 보면 좀 강직해보입니다. 잘 웃는 스타일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완고해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분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온유함이 무엇이라고요? 겸손함, 자기의 힘을 조절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사람을 마음에 품는 것, 이것이 온유함인데, 김하중 장로님을 보면 이 세 가지가 다 보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과 무능함을 고백하는 겸손이 있습니다.
날마다 3-4시간을 기도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죠.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봤습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다 하면서 실제는 교만한 사람들 있죠? 그건 가짜입니다. 이단들이 다 그래요. 속지 마세요.
그리고 김하중 장로님은 자기의 힘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다 들으셨죠? 대사이고 장관이라고 해서 그 힘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날마다 3-4시간씩 기도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관직을 지내고 대사와 장관까지 지낸 분이고, 장로이고, 코스타 강사로까지 온 것을 보면 굉장히 바쁘실 텐데 날마다 3-4 시간씩 많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중보기도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마음에 품는 겁니다. 내 일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내 일처럼 여기고 그 사람들을 내 마음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겁니다.
모세가 그랬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여호와다 하면서 우상숭배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멸절 시키려고 하셨을 때 두 팔을 벌려 하나님의 진노를 막지 않았습니까?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이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던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모한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중보기도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영혼들과 열방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중보기도자들을 찾으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모세에게 보이는 그 온유함을 저는 김하중 장로님을 통해 다시금 봤습니다. 이런 온유함의 능력이 있는 크리스천, 특별히 평신도 리더십들이 많이 나오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는데 그 복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복부인들이 좋아하는 그 땅이냐 하는 것이지요. 아닌 것 아시죠?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이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땅은 단순히 집을 짓고 살아가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땅입니다. 그래서 땅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고 축복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그 땅에서 복되게 살 것이고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면 그 땅에서 기근과 전쟁과 질병의 고통을 맛보거나 그 땅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누누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배경에서 보면, 이 말씀을 들었던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의 맥락처럼 온유한 자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땅을 차지하고 복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터전과 관련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켜주시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 가운데 유지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켜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둘째 의미는 팔복의 첫 번째 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는데,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 자체가 온유하다는 말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기도 하고, 결국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을 궁극적인 땅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한 자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이 사람은 이미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의미는 지경이 넓어진다는 뜻으로 저는 봅니다. 역대상 4:10에 보면 그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가 나옵니다. 야베스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야베스가 넓혀달라고 한 지경이 무엇입니까? 땅입니까? 집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구하는 더 넓은 집, 더 많은 땅입니까? 그래서 부동산 갑부로 만들어달라는 겁니까? 이걸 그렇게 이해한다면 문제가 있지요.
이 기도에서 지경은 다른 말로 하면 영향력입니다. 야베스의 이름에 담겨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고통 아닙니까? 어떤 이유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태어나서는 안될 목숨이 태어난 겁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이었고 존재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어요.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나서 구한 기도가 바로 내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인생을 저주하고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욕하고 불평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주고 위로를 주고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그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힘이 있는 겁니다.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을 땅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향력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어떤 사람이 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요? 똑똑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권력 있는 사람? 물론 영향력은 있지요. 문제는 어떤 영향력이냐 하는 겁니다. 파괴적이고 부정적이고 불행하게 만드는 영향력을 우리가 구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어떤 사람이 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까? 온유한 사람. 바로 온유한 사람이 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온유한 사람, 자신에게 힘이 있고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절하고 포기할 수 있는 온유한 사람, 다른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기도할 수 있는 온유한 사람, 이런 온유한 사람이 진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영향력,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살 맛 나는 힘을 줄 수 있는 영향력, 부정과 불의와 타락을 몰아내고 사람들과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영향력, 그리고 무엇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도할 수 있는 영적 영향력이 이런 온유한 사람들을 통해 나타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을 땅입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구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온유한 사람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맡기셨습니다. 온유한 사람 한경직 목사에게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을 섬길 수 있는 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온유한 사람 김하중 장로를 통해 신앙의 정도를 걸으면서도 관직을 수행할 수 있고, 그럼으로 인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그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입니다. 단순히 자리가 아닙니다. 권력이 아니고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향력입니다. 선한 영향력, 사람을 살리는 영향력,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향력, 이 영향력이 바로 리더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이런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그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지난 코스타 셋째날 밤 집회 때 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감격을 느꼈습니다. 선교사로 헌신할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일생의 최소한 3년 이상은 선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시간에 우리 자녀들이 나가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을 선교사로 드리겠다고 헌신하는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는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겁니다.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러니 제가 가만 있을 수가 없지요. 선교사님들이 나와서 안수기도 해주라는데, 저는 선교사로 파송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나가 이들을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냥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부모님들, 큰 일 났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축복되고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까 나만을 위해 살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그들에게 영적 영향력을 끼치겠다고 헌신하는 이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고 축복됩니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모든 자녀들, 모든 청년들이 그렇게 헌신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하라는 것 아닙니다. 비록 선교사로 파송되지 않아도 자기의 전문 직업을 가지고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가서 선한 영향력, 복음의 영향력, 사람을 살리고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길 축복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지경이 넓어지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출발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온유함은 선천적인 성격이나 기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얻어지는 후천적인 기질이고 성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면,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가면 우리 모두가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코스타에서 은혜 받으니까 대번 헌신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은혜 받아야 지경이 넓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29-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께서 온유하시고 겸손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후천적인 기질이 온유함이라고 했는데, 보다 구체적인 비결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멍에는 율법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소가 메는 멍에를 말합니다. 특별히 큰 연자 맷돌을 돌릴 때는 소 두 마리를 연결해서 같이 밀게 합니다. 힘이 세고 경험이 많은 소를 바깥쪽에 세우고 안쪽에 보다 약하고 경험이 적은 소를 놓습니다. 그래서 바깥쪽에 있는 소가 리드를 하고 안쪽에 있는 소는 바깥쪽에서 리드 하는 소의 속도에 맞추어 가게 됩니다.
이런 멍에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걸 이해하시려면 머리속으로 제가 설명한 연자 맷돌을 돌리는 두 마리 소를 상상해 보면 쉬울 겁니다. 연자 맷돌이 있고, 긴 멍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깥쪽에서 그 멍에를 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안쪽에 내가 들어갑니다.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 바로 안쪽에 서서 멍에를 맵니다. 그리고 연자 맷돌을 돌립니다. 누가 리드한다고요? 바깥쪽에서. 바깥쪽에 있는 예수님께서 리드를 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같이 따라가면서 예수님의 속도에 맞추면 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멍에를 힘 있게 메고 가시기 때문에 그 멍에는 쉬운 겁니다. 내 멍에는 쉽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하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 연약하고 근본적으로 깊은 죄성을 갖고 있고 무척이나 이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은혜 받았을 때는 그럴 수 있는데, 항상 그렇지 못합니다. 은혜가 빠지면 이기적이고 못되고 죄성을 가진 내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럼 순식간에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 우레의 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온유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멍에 아래 들어가는 겁니다. 그분 안쪽에 들어가 예수님께서 메신 멍에를 매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진정한 온유함이 무엇인지,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섬김이 무엇인지,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배워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멍에를 메고 앞으로 가시는 것처럼 나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 그 멍에를 메고 하신 것처럼 나도 따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주님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날마다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 옆에 붙으세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미 메고 계시는 그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우세요. 그래서 예수님과 스텝을 맞춰 가보세요.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의 멍에 안에 들어가면 쉬워집니다. 안 들어가니까 어렵고, 안 들어가려고 하니까 더 딱딱해 지는 겁니다. 예수님 옆에 바짝 붙어서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 매고 같이 가보십시오. 놀라운 평안과 능력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럼 어렵지 않아요. 누가 밀어주니까? 예수님께서 밀어주시는 것이거든요. 나는 그저 예수님 옆에 붙어서 순종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멈추시면 나도 멈추고 가시면 나도 가면 되는 겁니다. 내가 연자 멧돌 돌리는 것 아니거든요. 힘은 누가 씁니까? 예수님께서 쓰시는 겁니다. 그분께서 연자 멧돌을 돌리십니다. 나는 그 옆에 붙어 예수님의 멍에 메고 예수님을 배우면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나 역시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고 확장해나갈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온유한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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