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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8: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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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불쾌한 부활(마 28:1-10) - 58강
지난 시간에는 주님이 죽으신 후의 일을 통해서 신자의 능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정말 열렬히 주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자기 착각 속에 빠져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신자들은 대부분이 신앙생활을 자기가 해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참된 신앙은 우리 힘으로 소유할 수 없고, 신앙의 삶 또한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 일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뭔가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력과 열심으로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함으로써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이만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괜찮은 신자가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착각 속에 빠져서 살아가는 스스로 신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분량을 가지고 신앙의 척도를 삼기 때문에 뭔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신앙은 자라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이러한 착각이 커갈수록 '나는 죄인이다'는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나는 죄인이다'는 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나보다 일을 적게 한 사람보다는 덜 죄인이다'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원하게 됩니다. 좀더 많은 일을, 좀더 성과 있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주셔서 많은 일을 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내세울만한 자랑스런 일을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능력을 구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부활은 천국은 우리의 능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단지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모든 소망과 힘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평소에 주님이 하셨던 부활에 대한 얘기를 기억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당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셨겠습니까? 장사를 멋있게 지내주는 것을 원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입니다. 3일 후에 부활하실 예수님을 장사지낸다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활을 기다리는 것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도망을 친 상태이고,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의 새무덤으로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만 있었습니다. 부활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불신앙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신앙의 능력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까? 그것은 나도 남들같이 많은 일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돋보이는 인물이 되어보겠다는 욕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력을 구해서 그 능력으로 전도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능력을 구해서 내가 희생하고,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것에는 희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능력은 희생할 줄 모르는 나를 희생하는 자 되게 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나를 사랑하는 자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들의 종교적인 열심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종교적인 열심에 빠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에 빠진 자들은 자기에게 능력이 있기를 구합니다. 능력있는 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는 신앙인인체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열심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이것과 다르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지금 교회는 종교 열심에 빠져있고, 교인들에게도 종교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부활이 아주 불쾌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자신이 예수님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세상에 의해서 죽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기를 싫어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음을 요구하는 부활도 싫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요구하는 부활이 불쾌할 수밖에 없고, 단지 몸이 죽어서 다시 산다는 그 부활만이 마음에 들뿐입니다.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불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여러분에게 힘이요 소망입니까? 이것을 오늘 이시간에 확실히 하여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지 인간의 종교성을 가지고 이해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이 이해하는 부활이란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우리도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으면 죽었다가 나중에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전혀 부담감이 없는 부활입니다. 전혀 거부감이 없는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나중에 진짜 부활이 있든 없든 일단 죽었다가 산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봐야 손해될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기독교의 부활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을 말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부활을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의 한 일부분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교회도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이 주님의 부활인지는 전혀 관심도 없이 단지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년에 한 차례, 교회가 정해놓은 부활절에만 전해질뿐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활이라는 요행을 생각할 뿐입니다.
부활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부활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개입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인간들의 모든 신앙, 모든 힘, 모든 열심들을 다 부정해 버린 일입니다. 세상 인간의 종교성이나, 열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즉 자기에게 뭔가 불리해질 때 자기의 이익을 따라 가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그저 실망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우리들의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뭔가 해보겠다고 나선다면 그 역시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신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을 모르고 자기들의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버립니다. 또는 자기들이 어려울 때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주님에 대해서는 실망하고 낙심해 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뭔가 믿음의 열심이 있는 것 같고 뜨거움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직까지 예수님과 함께 죽는 십자가를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신앙의 갈등도 없이 자기 열심을 가지고 뭐가 해보려고 이리저리 설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자기 믿음과, 자기 열심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말한다면 과연 그들이 그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쾌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자기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번 멋있게 해보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나선 사람들에게 부활은 자기 신앙, 자기 열심을 버리는 자기 포기가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들에게 부활은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과연 내가 주님의 부활을 믿어온 신자였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이들이 무덤을 찾아온 것은 부활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한때 자신들이 의지했던 예수님에 대한 정성으로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부활을 알려준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소망하고 살기 싫습니다'는 고백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사는 그 세계를 사모하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일컬어서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는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러분들의 희망이 되어야 하고 힘이 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된다면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세계를 믿지 않는 증거가 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산다면, 그리고 그 믿음으로 모인 자들이 바로 우리 교회라면 우리가 교회에서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기 전에 하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신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지금 당장 이 모임에서 떠나셔야 합니다. '세상이 힘이다'는 사고방식은 십자가의 원수된 것이고, 곧 우리의 원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힘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에 동의하신다면 일단은 십자가를 아는 우리의 형제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고 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우리의 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고 해도 과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의 삶은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고 갈등하는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힘으로 삼지 않고 주님만을 힘으로 삼고 산다는 것이 왠지 석연치 않고 뭔가 불안한 그런 마음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힘으로 삼는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고, 부활의 세계는 세상이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힘으로 삼는 세계인데 나는 여전히 세상을 힘으로 삼는 옛사람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과연 무엇을 우선으로 삼겠습니까? 뭔가 주님을 위해서 일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죄속에 파묻혀 있는 죄인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세상이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이 내 힘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나는 여전히 세상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악한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그 보혈을 의지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힘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힘은 너무나 하찮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죄인임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이 다른 지체를 사랑하도록 합니다. 그 사랑이 때로는 봉사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어려운 자와 나누는 구제로도 나타나고,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말씀이 있는 자리를 사모하고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심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때문에 이미 지금 부활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돈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힘이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인 수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주님을 아는 자가 모인다면 단 두명의 모임이라 할지라도 기쁨이 있는 모임이 됩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힘이 나고, 적다고 힘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에 불과하지 결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돈을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솔직한 심정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을 사는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장 교회가 운영되는데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있는 것만큼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큼만 쓰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의 계획을 줄줄이 세워놓고는 이 계획은 선한 계획이니까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계획을 위한 기도이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말합니다. 여자들의 생각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지 부활하신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식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찾은 곳은 무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상식 속에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코 예수님을 우리의 상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상식을 가지고 다가가면 그곳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발견한다면 부활의 주가 아니라 다른 예수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들이 이해가 안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종교 상식 안에 갇혀서 주님을 찾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 상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 찾아간 여인들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차역에서 나무 막대기를 두드리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때로는 아이를 업고서 우산을 쓰고 나무막대기를 두드리는 여인을 본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천리교입니다. 천리교만이 아니라 여호와증인은 어떻습니까? 대합실에서 누구에게나 접근해서 자기들의 교리를 전합니다. 여러분, 그들의 열정을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또 바리새인들의 열정은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하지만 그 열정이 주님을 죽였다는 것만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종교상식은 자신의 정성이고 자신의 열정입니다. 여인들이 죽어서 무덤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열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도 주님의 부활을 돕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열정으로 찾아간 무덤에는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세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종교열정으로 일하는 그것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실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7절에 보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시작합니다. 갈릴리는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으로 취급되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중심이 되는 것은 부활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웅장한 예배당이 아니고, 인간들의 열정도 아니고, 자신을 낮고 천한 자로 인식하는 그 정신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죽음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나라안에 영원한 부활의 세계가 스며들었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에 매이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된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일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것을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믿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 믿음은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세상 것이 힘이 아니고, 오직 주님을 힘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활이 혹 불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밀려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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