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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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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2장 1절-10절.(참고: 히 11장 23절-26절)
출 2장 1절-10절: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히 11장 23절-31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본문만으로 설교함)
겉으로 보면 일반종교와 우리 기독교가 유사하고 비슷한 점이 많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와 일반종교와 같다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일반종교와 같습니까? 다시 말씀드린다면 예수님과 다른 종교의 교주와 같습니까? 어떻게 다르지요? 예수님도 사람이고 석가나 공자나 또 다른 종교의 교주도 사람이고. 그러나 본질적으로 다르지요. 기독교를 절대로 일반종교처럼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종교는 다 똑같다? 그건 안 믿는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아무 데나 그저 마음으로 공을 드리면 되지’ 하는 건 안 믿는 사람들은 모르니까, 알만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는 소리고, 기독교인이 그런 말을 한다면 이건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다.
목사님에게 배웠기 때문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하는데,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지요? 맞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면 이건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겁니다. 이 특수라는 것은 일반 속에서 특수한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일반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특수하다는 말입니다. 다르단 말이요.
그럼에도 어째서 기독교회 목사님들이 일반종교인들과 같이 앉아가지고 도덕성운동 운운 하지요? 어째서 그럴까요? 그 분이 기독교를 아는 사람일까요, 모르는 사람일까요?
교훈적인 측면에서 얘기입니다. 사회적으로 생활 장소가 같고, 같이 회사 나가고, 장사하고 그런 면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고 교육 교훈적인 측면에서 보면 시편 1편에 뭐라고 그랬지요? 복 있는 사람은 어디 어디 앉으라 그랬어요? 그게 다 뭐요? 그거는 성경구절만 그런 거고 ‘기독자들은 그런 사상과 정신으로 살아라’ 하는 그 면은 쏙 빼버린다면 그 성경 찢어서 휴지를 하던지 하지 뭐 하러 무겁게스리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런 짓을 하는 목사는 기독교를 모르는 목사다. 성경을 모르는 목사다. 그런데 보면 그런 사람을 ‘유명하다. 유명하다’ 그러거든. 사망계에서나 유명하지 하나님 앞에 뭐가 유명해.
기독교의 도덕성은 일반 인정성으로 흐르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른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된, 하늘로부터 내려온 전혀 새로운 겁니다. 신적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은 신의적 믿음에서 신앙적 믿음으로 나가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면 옳은 믿음이 안 나온다 그 말이요.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이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신앙이 깊게 들어가고 옳게 바르게 잘 성장을 하려면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알수록 그 신앙은 깊이 들어가고 성장이 되는 법이지요. 그 면을 제외해 놓고는 아무리 ‘믿사오니, 믿습니다’ 하며 찬송 부르고 별별 짓을 다 한다고 해도 그거는 타락된 제 믿음이지 하나님이 알아주는 믿음은 아닙니다. 알겠어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신앙 같으나 신앙이 아닌, 성령 같으나 성령이 아닌 잡신이 들린 게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성령은 그러지를 않아요. 사람을 미쳐 돌아가게 하는 그게 무슨 성령이야. 귀신이 사람을 미치게 하지 성령이, 하나님의 신이 사람을 미치게 합니까? 성령님은 사람을 바로 세우는 신이십니다.
종교라고 하는 종교는 기독교를 빼놓고는 대부분 거의가 비슷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종교는 다 같다.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이니 우리들의 종교와 같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말을 하면서, 그런 이종교인들이 기독교에 접근해서 ‘우리와 화해하자. 뭐 그렇게 원수시하고 아옹다옹 싸울 거 있느냐? 너 나쁘다, 나 옳다 그렇게 할 필요가 뭐 있느냐?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고 사랑의 종교니 우리들도 그런 마음을 가졌다. 그러니 서로 손을 잡자’ 하지요. 그러니까 기독교회에서는 그것이 달콤하게 들리거든요. ‘참 그 말은 당연하다’ 그러면서 이종교인들이 말하는 것을 당연한 평화로 받아들인다 그 말이요. 이게 기독교를 아는 사람들이요, 모르는 사람들이요?
성경이 말하는 평강이라든지 평화라든지 화해라든지, ‘용서해 주어라. 화해하라. 화목하라’ 하는 이 모두가 ‘하나님을 똑 떼놓고 인간 너희들끼리 화해하라’ 그 말인지, ‘하나님을 가운데 두고 하나님의 기준대로의 화해하라’ 그 말인지? 어떤 말이지요? 처음 말이요, 나중 말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뭐요?
인간들끼리는 술 한 잔 부어놓고 악수하면 화해가 돼버려요. 성질이 나서 붉으락푸르락 올라올 때에 담배 한 대 입에 물려주면서 ‘아이, 뭐 그럴 거 있습니까?’ 하며 라이터로 불 한번 탁 당겨주면 화해가 잘 되지. 아니, 하나님이 그런 인간 화해를 몰라서 ‘너희들 화목하라, 사랑하라’ 그럽니까?
기독교의 화목 화해 평화는 일반 세상 사람들의 그런 개념하고는 다른 거요. 성경에서 말하는 거는 하나님의 기준 하에서 되는 거고, 일반세상은 하나님 없이 하는 거고.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그 사람들이 기독교에 접근해 오면서 ‘우리랑 화해합시다’ 그러니까 덜컥 ‘그럽시다’ 하고 손을 잡는단 말이요. 그런 사상을 오늘날 많이 볼 수 있지요? 많이 볼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기독교회가 밑으로 떨어진 거요, 일반종교화 돼버린 겁니다. 일반종교화 돼버렸어. 기독교는 질적 본질적으로 차원 높은 기독교이니 세상 사람들을 성경의 차원으로 끌고 올라와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도록 해줘야 하는 건데 이건 내려가고 있어요. 하락이야 하락. 그래서 이방종교인들이 ‘기독교도 우리와 흠사한 점이 많다. 같은 점이 많다’ 그런단 말이요.
우리 기독교는 본질적 질적으로 이방종교와는 다른 겁니다. 이 점을 우리가 하나의 말로써만이 아니라 지식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렇게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 기독교는 원리 원칙적 본질적인 면으로 적극적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지 말라는 말도 많이 있어요. ‘하지 말라.’ ‘아이고, 안 해야지’ 하는 것보다도 적극적인 면으로 가면 ‘하지 말라’ 하는 이것은 전부 다 초월이 돼버려요.
‘미워하지 말라’ 하는 이것을 초월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적극적으로 어떻게 나가면 되는 거요? 사랑하는 면으로 적극적으로 나가면 미워하는 그것이 언제 지나가 버리는 건지 지나가 버리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우리 신앙생활은 적극적입니다.
사람이 옳은 면에 적극적이 되고, 옳은 면에 적극적인 정신 사상을 갖게 되면 사람 사는 것이 활기가 있고 그 정신이 살아있고, 사는 게 재미가 있고.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들, 빨리 죽고 싶어요, 오래 살고 싶어요? 오래 살아야지. 어떤 면으로? 벽에 똥칠하도록 말고 적극적으로. 주는 면에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면에서 적극적으로. 여러분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고 자기에게 유익되고 남에게 유익을 주고. 적극적으로 사는 그 면에는 잡병이 다 물러가요. ‘걱정 안 해야지. 안 해야지’ 하면 안 해 집니까? 좋은 것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면으로 생각을 하고 그래야지.
우리 기독교를 잘못 알면 자기를 속박하고 자기를 구속하고 자기를 제재하는 극기주의로 나가기 쉽고 극복주의로 나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극복이 아니란 말이요. 극복주의가 극기주의가 아니라 그 말이요.
그리고 ‘뭘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하는 그런 식으로만 된다면 거기에는 진취성이 없습니다. 행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그 속에서 하고자 하는 그런 성분이 문제다 그 말이요.
우리 인간은 인격자인고로 자기 속의 지식의 여하에 따라 변화가 옵니다. 신체는 제재를 받는 것이지만 생각하는 이 이성은 제재를 받지를 않습니다. 이종교는 자제주의 극복주의 극기주의이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자유주의 자원주의. 옳은 자유 옳은 자원. 그런 면으로 적극적으로 살라고 하고 있어요.
세상에서는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 행동이 법에 걸렸으면 법이 와서 법에 걸린 그 죄목으로 잡아가고, 안 걸렸으면 안 잡아가지요. 세상 법은 그렇지만 하나님은 보이는 기준이 아니고 안 보이는 기준이 있는데, 이것은 객관적인 그런 기준이 아니고 본질적인 면에서 질적 성분적인 그런 정죄를 하는 겁니다. 단순히 행동 활동 그 자체를 놓고 하는 건 아니지요.
세상 법을 가만 보면 같은 활동인데도 판단이 다르고 기준이 절대 정확한 기준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판단을 내리면 이렇게 떨어지고, 저렇게 판단을 내리면 저렇게 떨어지고 그래요. 그게 세상이니까.
사람을 해코자 하는 마음, 살인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데 여건상 죽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어찌 어찌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람이 죽이는 경우가 있을 때 어느 경우가 벌이 더 크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한 번 판단을 내려 봐요.
세상은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였다’ 하는 그 면으로 중벌을 내립니까?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도 여건이 되지 않아서 죽이지 못했다 했을 경우를 중벌을 내립니까? 본의는 아니더라도 사람을 죽이면 중벌을 내리지요. 그게 세상 법이란 말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나타난 행동을 가지고 따지는 게 아니지요.
우리 기독자들은 큰 죄이던 작은 죄이던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주님의 공심판으로 지불이 돼버렸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물론 하나님의 영원에서부터 나오는 예정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예정적인 택자라서 지옥은 안 가겠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에 지옥 갈 그 죄까지 누가 다 받았어요? 예수님이 다 받았다 그 말이요. 그런 면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공심판으로 그 죄를 다 도말했다 그 말이요.
그런데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은 기본구원을 받은 즉, 예수님을 믿는 자가 다시 죄를 지을 때에 받게 되는 성분적인 면에서의 사심판, 영원한 심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죄를 짓지 말라고 그런단 말이요.
그 죄는 일반 도덕성적인 죄가 아니라,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기준해서가 아니라 자체적 심판 즉, 하나님 앞에 이질성적으로 나가는 그 죄를 짓지 말라는 그 말이요. 이해갑니까?
우리 속에 들어있는 이 잠재적 죄는 평소에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을 모릅니다. 어떤 환경이 와봐야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나온다 그 말지이요. 그러니까 환경이 와봐야 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 잠재적인 죄악성은 내 속에 없었는데 딴 사람이 와서 내 속에 푹 집어넣어준 것이 아니고 내 속에 들어있었던 기존성입니다.
‘참자. 견디자. 인내하자’ 하고 말로써 마음으로써 다져나가는 소극적 신앙에서는 자기 속에 그런 잠재적인 죄악성이 들어있는 걸 모르기 때문에 헤메이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러나 옳은 지식이 들어가면 알게 되는 겁니다. 옳은 지식이 들어가면 알게 된다.
히브리서 11장 25절 한 번 읽어보세요. 애굽백성과 함께 뭐하는 것보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어느 쪽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능욕 받는 거. 이걸 애굽의 재물보다 더 크게 여겼다고 하는 겁니다. 모세가 애굽의 낙을 누리고 있는데 모세부모가 와가지고 억지로 끄집어 당긴 게 아니라 그 말이요. 자원적이었다 그 말이요. 아주 자유적이고 자원적이었어요.
세상의 소원성을 둔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을 보고 뭐라고 그러지요? ‘세상에서 돋보이는 사람이 되라’ 그렇게 가르친단 말이요. 모세의 어머니도 모세를 그렇게 가르쳤을까요?
이 성경 속에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아주 무시무시한 사상이 들어있어요. 이 성경의 사상이 참 무섭습니다. 어린 모세에게 모세의 어머니가 넣어준 이 성경의 사상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아주 힘 있고 강하고 애굽족화 되지 않는 그런 사상이 모세 속에 들어있다.
일반 이종교에는 그런 사상이 들어있습니까? 없습니다. 대게 보면 ‘자기 종교건설을 어떻게 하자’ 그런 피알 식입니다. 이방 이종교에는 사람을 바꾸는 그런 게 없어요. 사람을 성분적으로 분리시켜 주고 바꿔라 하는 그런 게 없어요. 고작 해봐야 ‘참아라. 참아라’ 그런 정도지. 그러나 기독교는 근복적으로 바꾸는 거.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이종교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데 오늘날 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느냐 하면 공명심 허영심 허욕심 영웅심을 가진 사람들은 다 모여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세상이라고 하는 세상이 타락된 교회 속에 들어있는 겁니다.
사망적인 것을 생명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바꾸는 거는 진리지식이 원 지식이 되고 일반지식이 보조지식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원적으로 진리적인 사람이 돼버리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지식을 주격적 지식으로 삼고 세상의 것은 구원에 이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25절 읽었습니다마는 그것이 모세의 사상이지요. 24절 끝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자는 세상의 빈부를 초월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기독교회가 황금에 노예가 되어 있지 않은지?
이 모세는 말로만이 아닌 자원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상과 인격의 교육을 아주 철두철미하게 받은 겁니다. 이게 모세에게 박혔어요. 아침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태아교육 유아교육의 그 책임은 부모에게 100% 있다고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아침에 말씀드렸는데 일반사람들의 교육은 순서가 어떠했지요? 첫째가 뭐지요? 육체적인 거, 육모적인 거. 두 번째는? 일반지식. 세 번째는? 있어요, 없어요? 없고. 모세의 어머니의 교육은? 첫째는 뭐지요? 영의 인격, 영 성장. 두 번째는 무슨 지식? 일반지식. 세 번째는? 육모.
실모인 요게벳의 교육을 받은 모세는 궁 안으로 들어가서 애굽의 왕을 돋보았을까요? 문무백관들이 늘어진 옷을 입은 걸 돋보았을까요? 그거 돋보지 않았어요.
여러분들, 지금 현재적으로 세상을 돋보고 있습니까? 돋보지 않지요? 돋보지 않는 그 정신은 좋지만 돋보지 않을 정도로의 신앙인격을 소유했다면 얼마나 좋겠어. 신앙 인격적인 면도 자라지 못했고, 게을러서 물질적으로도 가난하고 이래놓으면 제 아무리 세상을 돋보지 않는다고 그래도 그건 제 못나서 그런 거요. 안 그래요?
세상을 왜 돋보지 않느냐? 천국이 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의 긍지가 있다 그 말이요. 자기에게 믿음이 없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그런 정신이 있다면 세상을 돋보지 않는다. ‘조만간에 나는 여기서 떠나간다’ 특히 우리교회 교인들은 이런 긍지가 있어야지요.
우리 성도들은 돈보다도 재물보다도 세상보다도 인격. 사람의 인격. 인격보다도 더 좋은 거는 진리. 더 좋은 것은 진리로 만들어진 그 신앙인격. 그렇게 올라가야지요.
가정적으로 보면 첫째는 부모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져야지요. 안 만들어진 채 백 날 그런 말을 해봐야 효력이 없어요. 그리고 그 진리지식을 자식에게 가르치고. 이렇게 해서 신앙사상이 그렇게 바로 박혀지고 확립이 되면 이제 잔소리 할 필요가 없어요. 모세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그렇게 가르치고 기른 겁니다.
이제 모세의 정신적인 면에서의 신앙을 한 번 볼 것 같으면 모세를 기른 사람은 유모 같은 실모인 요게벳의 교육에 의해서 모세가 모세로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교육을 하는데 있어서 유모의 교육과 실모의 교육에는 차이가 있는데, 실모의 교육은 사랑과 정성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앞에서의 사명적이고 책임적인 그런 정성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유모의 교육에는 그런 게 안 들어있고 대가에 의해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유모의 교육입니다.
또한 유모적 목회는 어떤 목회냐? 충성봉사를 요구하는 것이 유모적 목회입니다. 그러면 실모적 목회는 무엇이냐? 금생내세에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서 영원히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것이 실모적 목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깨달아 보면 이걸 알 수 있겠지요?
원리는 같아요. 교회의 교역자의 원리나,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을 교육하는 그런 원리나, 주님이 교회를 향해서 하는 교육의 원리나 똑같아요. 다를 수가 없어요. 다르지 않아요.
실모적 목회는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 아주 빈약해 보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힘이 있는 겁니다. 다른 가짜 한 트럭보다도 옳은 것 하나, 작은 것이라도 옳은 것 하나 이게 힘이 있고 가치가 있어요.
마태복음 27장인가? 천국에서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지요. 그러니까 실모적 목회자는 궁극적 그 세계에서 큰 사람이 되게 하려고 온 정성을 다 기울이는 거지요. 세상바람 잘 타는 그런 자로 기르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나 저나 지금 우리의 이 교육이 얼마나 길겠어요? 저는 길다고 보지를 않아요. 내 일생도 짧을 것이고, 나보다 먼저 뜰 사람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고. 그러니 교육기간이 극히 짧아요.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그 어린 모세에게 요셉의 사상과 정신, 그 요셉의 혼을 모세에게 어머니가 교훈적으로 넣어준 겁니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종살이하던 요셉의 그 신앙정신을 한 번 보란 말이요. 얼마나 고상한지? 그 신앙정신을 모세가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가졌던 것입니다.
기도 올립시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천국, 신령한 행복과 누림이 충만한 그 곳, 사랑과 희락과 기쁨이 충만한 그 곳을 저희들에게 주시고 효율적으로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잠깐 있는 저희들에게 여러 사건 환경을 주어서 영적인 실력으로 부지런히 커지고 성장되기를 원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원하옵기는 저희들은 암만 들어도 잊어버리기 쉽고, 보는 것이 세상이요 만지는 것이 세상이요 듣는 것이 세상이라서 역시 저희들이 생각하고 마음먹는 것이 세상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 때마다 오늘 저희들에게 주신 말씀이 저희들 속에서 생각나게 도와주시고, 영감으로 기록된 이 말씀이 저희들의 심비 속에 잘 새겨져서 어떤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의 긍지를 잃지 아니하도록 그 때마다 주 성령님께서 함께 역사해 주셔서 옛날에 그 어려운 핍박과 환난 고통 속에서 신앙으로 신앙 인격적으로 걸어간 선지 사도들처럼 저희들도 걸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 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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