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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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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2장 1절-10절.(참고: 히 11장 23절-26절)
출 2장 1절-10절: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히 11장 23절-31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본문만으로 설교함)
모세와 그의 생모 요게벳 이 두 사람이 애굽과 그리고 애굽의 교훈과의 투쟁이 있습니다. 어느 교육을 주체 교육으로 삼느냐? 최고의 유명하다고 하는 애굽의 모든 박사들이 모세에게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상교육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사상의 교육이 없는 교육은 전부는 실모적 목회가 아닌 유모적 목회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명한 학박사들 철학자들 이런 사람들이 라디오나 테레비에 나와서 사람들의 도덕적인 면에 대해 좌담 또는 변론을 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뭐가 없습니까?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방편을 이랬으면 좋겠다. 이 시대 청년들이 이렇게 이렇게 나가니 요렇게 요렇게 했으면 좋겠다. 방법론적으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이것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한 방법을 쓰면 잘 되느냐? 천만에요. 인간 속에 죄악성이 들어있는 이상 환경이 나쁘면 나쁘다고 범죄성이 드러나고, 환경이 좋으면 좋다고 또 범죄성이 드러나게 되는 법이지 이 세상은 절대로 누구나 다 좋아하는 그런 방향으로 도덕성이 잡히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학박사들이 교육에 대해 말을 해도 사상교육은 없습니다. 사람 되는 그 기준적 교육이 없어요. 기껏 얘기한다고 해봤자 그저 ‘관계성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 보기가 좋다’ 뭐 이런 식뿐이지 사상기준적 그런 교육이 없습니다. 그건 아예 없다고 목을 박아놓으세요. 없어요.
그러면 오늘날 애굽성적 사상을 지닌 기독교 종교적 교육은 어떠냐? 거기도 사상이 없어요. 하나의 종교생활을 강조하는 거, ‘성수주일 잘하라, 전도 많이 하라. 새벽기도 잘 나오너라. 철야기도 잘 해라. 전도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십일조 떼먹지 말고’ 뭐 등등의 그런 것 빼놓으면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착하게 살아라. 선하게 살아라’ 하고 가르치지만 착하게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걸 누가 모릅니까? 누구든지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거지. 그럼에도 착하게 선하게 사는 방법을 단순한 활동 행동 강조일 바에야 그거 뭐 배우나 마나. 그렇지 않아요?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에게 맨날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공부 잘해라. 공부 잘 해라’ 하고 듣는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런 학교 다니나 마나지. 공부 잘 할 수 있는 원리를 터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굽성적 기독교 종교적인 그런 교육에는 사상교육이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녀도 ‘이 교회가 사상이 있는 교회냐, 없는 교회냐’ 하고 여러분들은 눈여겨봐야 합니다. 사상이 없는 그런 교육은 하나의 종교생활에 불과한 겁니다. 이방종교 생활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자꾸 강조하고 나가면 자동적으로 거기에는 외식운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건 자동적이요. 사람의 외모 모양 옷 입는 거, 예배드리는 어떤 행동방식 그런 걸 강조하고, 축복도 가견적인 축복으로 말하는 이건 이방적인 종교교육과 똑같은 겁니다.
교훈적인 투쟁에 있어서 실모인 모세의 친 어머니는 학벌도 없지요. 사회에서 알아주는 학벌이 전혀 없습니다. 공노인데 유명한 무슨 국민학교나 나왔을까요? 무슨 국민하고 다닐 수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모세 속에서 주체적인 교훈의 투쟁을 하게 되는데, 이 모세가 여기서 어느 선생을 자기 스승으로 모시느냐 하는 이게 문젭니다. 경제는 바로의 경제를 쓰고, 보호도 바로의 보호를 받고, 사는 것도 바로의 궁중에서 살고, 애굽 궁궐에서 애굽족들의 그 틈바구니에서 그 보호를 입고, 애굽의 그 영광 속에서 살 때에 모세가 어느 교훈을 하는 스승을 모시려고 그 마음이 기울어지느냐 그 말이요. 그게 큰 문제입니다.
오늘날 어떻습니까? 모르긴 해도 100사람 중에 아마 90명 이상이 애굽의 보호를 입고 그 낙을 누리고 그 혜택을 받는 그 면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지요? 설령 실모인 요게벳 쪽으로 마음이 간다고 해도 애굽 쪽을 무시하게 되면 애굽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니까 차마 애굽을 떠날 수가 있느냐? 인정상 그렇다 그 말이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자기 속는 거지요. 이거는 벌써 그 쪽으로 기울어진 겁니다. 토를 달 필요가 없어. 모세는 그랬습니까?
우리가 대국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하는 신앙은 갖고 있지만 그러나 현재적으로 볼 때에 애굽이 주는 물질, 애굽의 환경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주는 물질, 세상의 환경, 세상의 일터, 세상의 친구 전부 그렇게 돼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거 볼 수 있지요? 믿는 사람이고 학습세례 다 받았고 집사인데도 부분부분마다에서, 순간순간마다에서 인정으로 기울어지는 이걸 우리가 봅니다. 그러한 가운데 살면서도 애굽족화 되지 않는 신앙이 모세의 신앙이요.
모세는 아이이지만 호적상 공주의 아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로서는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다 더, 보다 더’ 하며 최고봉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기독자들은 ‘믿사오니, 주시옵소서’ 하면서 세상의 최고봉을 가지려고 그러지요? 방편만 다르다 뿐이지 그 때나 이때나 구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다른 사람이 잡으려고 하는 이걸 잡으려고 해서 잡은 게 아니고 자동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잡았단 말이요. 그런데 모세는 그거를 버렸어요. 만 사람들이 잡으려고 하는 그거를 버렸습니다. 만 사람들이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걸 모세가 턱 버릴 때에 그걸 잡으려고 하는 애굽의 사람들은 그 모세를 보고 뭐라고 그랬겠어요? ‘아, 저 바보’ 그럴 거 아니냐 그 말이요.
그러면 모세가 왜 그랬느냐? 모세가 왜 그랬다고 그랬지요?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니까 애굽의 그 모든 보화 누림성 영광성 명예성 영웅성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지 않아요? 그런데 모세는 그걸 버렸어요. 왜 버렸다고 그랬지요?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습니까? 이것도 잡고 저것도 잡을까요? 지옥도 가기 싫고 천국도 가고 싶고.
모세는 애굽의 보화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말이요. 더 좋은 게 있다. 그러니까 더 좋은 것을 취할 줄 아는 것을 보니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는 평가력이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들, 평가력 있어요? 어린애들을 밥상머리에 턱 앉혀놓으면 밥그릇에 밥을 더 많이 담아놓은 것을 ‘내 거다’ 하고 앉듯이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쓱 보고 제일 많은 게 있으면 ‘이거 내 거다’ 하는 그런 평가력을 가졌습니까? 그 때에 모세가 평가력을 가진 것과 같은 평가력을 여러분들도 가져야지요.
여러분들, 그 어떤 사람이던 인격적인 측면으로 사상적으로 가만히 따져가면서 분해를 해봐요. 평가력이 없는 사람이 무슨 맛대가리가 있는가? 그러니까 골각은 사람이고 피부는 사람이고 모양 생김새는 사람인데 속의 그 사상성은 짐승하고 똑같다 그 말이요. 사람짐승이야.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 666은 무슨 수라? ‘짐승의 수요 사람의 수라’ 그랬단 말이요.
밥 먹고 배부르면 ‘어이 좋다’ 하고 노는 그거는 짐승하고 똑같아요. 그 짐승이에요. 그건 짐승으로 보는 거요. 성경이 그렇게 본단 말이요. 하나님이 그렇게 본단 말이요. 우리는 인격적인 면에 교훈적인 면에 평가력이 있어야 된다.
애굽은 공주국이요 이스라엘은 공노족이라도 모세는 애굽을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자기 집은 한 칸이 없고 사글세 전세를 살지라도 빌딩을 보더라도 아예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하는 그걸 가져야 돼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빌딩을 갖고 있어도 나보다 더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데 살면 사람이 덜 늙습니까? 시간이 덜 갑니까? 그거 갖고 있으면 밥 한 그릇 먹을 걸 두 그릇을 먹습니까?
지금 우리 전도사님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 도시의 뾰족뾰족한 십자가가 하늘을 찌를 듯한 그런 예배당 건물을 볼 때 정말 부러워하는지, 아니면 발로 밟아버리는지? 어떤 때 나도 그런 시험이 있었어. 없는 게 아니지. 개척교회 하려고 돌아다닐 때 그거 쳐다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하지만 그거 소용없어. 교훈의 가치력을 따져볼 때에 그건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하나도 부러워하지 말아요.
모세는 자신이 자기 민족과 함께 고생을 하더라도 그걸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민족이 고생을 하는데 어느 고생일까요?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으니 사는 데에 여러 가지 제약성이 있을 수 있지요. 현재적으로 말한다면 지위 없고 가난하지요. 그러나 지위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신앙까지 없으라는 법이 있어요? 그런 게 있어요?
자기 민족과 함께 고생을 하더라도 자기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 소망이 있는 쪽으로 모세는 선택을 했습니다.
사상과 정신적으로 그런 면을 보는 눈이 있다면 정말 이 사람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알아주는 고상한 사람이요, 외부의 어떤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애굽성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쪽으로 선택을 하는 사람은 참 고상한 사람이요.
이 모세는 문서적으로 또는 애굽의 법적으로는 애굽족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족들처럼 애굽의 최고의 수학을 배울 수 있고 애굽의 모든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바탕이 얼마든지 되어 있지요. 물론 이것도 자기가 소원이 돼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애굽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세에게 있어서 애굽족화가 안 된 것은 뭐지요? 모세의 그 정신만큼은, 모세의 그 신앙만큼은 애굽족화가 돼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아요? 육신적으로 본다면 전부 다 세상에 호적이 올려져 있고, ‘누구의 아들이다. 누구의 자손이다’ 다 돼 있지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들의 신앙정신만큼은 세상화 되어 있습니까? 모세는 왕이 될 수 있는 조건인데도 그 정신만큼은 애굽의 왕을 돋보지 않고 그 자리를 탐내지 않았어요. 다 버렸어요.
애굽은 강국이요 이스라엘은 약국이요, 애굽은 부국이요 이스라엘은 빈국이요, 애굽은 공주국이요 이스라엘은 공노국이요, 이렇게 되니까 이 이스라엘은 노예로서 피라미드 건설을 하게 되는 겁니다.
모세가 평가를 한 것을 보니 모세는 간사한 자가 아니지요. 우리도 보면 일반적으로는 도덕성적으로 다 건전해요. 그러나 ‘그가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다. 신령계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이것을 전제해놓고 볼 때에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남들이 알아주고 해도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것이 세상성이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간사한 사람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들은 간사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간사하다고 하는 게 뭐지요? 이쪽에서 알랑알랑하고 저쪽에서 알랑알랑하는 그게 일반적으로 간사한 거지요. 그러나 우리는 신앙적으로 이걸 봐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자기 모습이 정직하지를 못하고 세상을 더 얻고 싶어서 세상을 향해 인심을 사려고 하고 동정을 얻으려고 하는 등등의 마음 사상 행동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간사한 겁니다. 간사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간사한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요. 알겠어요? 사상적으로 그렇다 그 말이요.
우리는 모든 면에서 판단을 하고 구별을 하고 냉철히 심사해야 됩니다. 위치적 평가를 하고, 자기 위치를 정확히 평가를 하고, 시간적으로 평가를 해야 합니다. 임시적인 것을 소원 목적을 하는지 영원적인 것을 소원 목적을 하는지 성질적으로도 평가를 하고, 성분이 질적으로 어느 것을 선택을 하는지, 또 공간적으로 평가를 하고, 본질적으로 평가를 하고, 분량적으로 평가를 하고.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모두 평가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평가성을 가져야 돼요. 모세는 그걸 따졌단 말이요. 그런 평가를 했단 말이요.
그 다음에 모세의 교육형편을 우리가 또 봅시다. 모세는 시간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가장 악한 왕이 다스리는 그 때에 출생을 했습니다. 왕이 뭐라고 그랬지요?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 이처럼 일반적인 교육은 세상이 악해놓으면 잘 못 받지요. 그러나 사상교육은 제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모세가 모든 악조건 가운데, 모세의 어머니도 모든 악조건 가운데, 그리고 극히 단축된 그 시일 내에, 또 비공개적 교훈으로 이 모세가 어머니에게서 배웠으면 히브리인의 그 사상을 양적으로 얼마나 풍족하게 배웠겠느냐 그 말이요. 또 시간적으로 본다고 해도 참으로 빈약한 교훈이 아니었겠느냐? 그러나 여기서 모세가 된 겁니다. 모세가 모세만큼 된 거라 그 말이요.
그리고 어머니와 모세가 교육을 주고받는 그 교육기간 동안에 모세가 어머니에게 충돌적으로 항의를 한 것이 있을까요? ‘에이 어머니, 어머니 시대와 우리 시대와는 세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애굽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앞으로 왕이 될 것이니까 어머니, 그건 옛날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충돌이 있었을까요? 그런 충돌이 있었더라면 모세가 모세만큼 되지를 않았다고 저는 보아집니다.
사람 되는 교육은 아담 하와 때나 노아 때나 아브라함 때나 지금 때나 똑같을까요, 다를까요? 똑같지요. 틀림없이 똑같습니까? 예, 그렇지요. 문화가 발달이 되니까 지역을 다스린다든지 하는 그런 면은 다르지요. 생활하고 사는 방편은 다를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 되는 인격적인 교육은 절대로 변하지를 않습니다.
5, 6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벌써 5, 6천 년이 지났으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그 때의 상황과 그 때 사람의 인격과 마음과, 문화 문물이 발달이 된 5천 년 후의 지금의 사람을 하나님이 가만 쳐다보고 어떻게 생각을 하실까? 하나님도 깜짝 놀라겠지. 안 그럴까요? 5천 년 전의 그 하나님이 5천년 후에 현재적 인간을 만나보니까 하나님이 깜짝 놀라겠지. 안 그럴까요?
그 때에 가지셨던 하나님의 목적이나, 지금 가견적인 인간세상이 별 희한하게 발전되고 발달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 만들어지고 사람 되는 교육면에는, 인간이 되는 교육면에는 시대 차 세대 차도 없는 거요. 방편적으로는 있지만.
오늘날 부모님들과 자녀들이 충돌이 많지요. 돈이 너무 많아서 너무 부자라서 너무 풍족해서 잘못되는 자식도 있고, 너무 없으니 없다고 도둑질하고 잘못될 수도 있고. 부자면 부자라서 돈을 허비하고, 가난하면 가난하다고 돈을 다 허비 하고, 그 뭐요? 그러면 그 중간쯤 부자는 아무 것도 안 하겠네? 중간은 이쪽저쪽 다 하기 좋다고 또 그러고. 그러면 기준이 어디요? 어디다 대고 인격이 되는 교육, 사람이 되는 교육을 하겠습니까?
애굽의 박사들은 날만 새면 모세에게 ‘누가 최고다’ 하는 교육을 하지요? 애굽의 박사들은 날만 새면 모세에게 ‘모세 네가 최고다’ 그럴까요? 교육의 사상이 뭐라고 그러겠느냐 그 말이요. ‘바로가 최고다. 그러니 너도 바로가 되라’ 그 말을 하지요.
애굽의 과학 선생이 모세에게 와서 ‘애굽이 최고다. 세상이 최고다’ 그렇게 자랑하고 가르치고, 또 물리학 선생이 나타나서 그렇게 가르치고, 국문학 선생이 또 나타나서 그렇게 가르치고.
오늘날 세상의 교육이 전부 그거 아니요? 교육하는 그 속에 누구를 자랑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못 알아듣습니까? 꼭 말을 해야 그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거요?
그러나 실모인 어머니의 교훈은 무엇이 최고라고 그러지요? 뭐가 최고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언약한 것이 있다. 계약한 것이 있다.’
그러면 이 모세가 애굽의 지도자들의 그 목적대로 되기 위해서 애굽의 소리를 듣겠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소리를 듣겠는지? 요게벳은 애굽이 알아주는 교사자격증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어머니는 하나님의 종 아니요? 그러면 모세가 이 종의 소리를 듣겠는지?
모르긴 해도 실모가 유모로서 유모처럼 모세를 가르쳤다면 모세가 모세만큼 되지를 않습니다. 유모는 뭘 바라고 가르쳐요? 유모는 돈 받고 키우는 거 아니요?
모세에게 그런 교육형편이 주어질 때에 모세입장에서 ‘내가 어느 편에 서야 나에게 유리할까? 공주 편에 서면 행복이 있고 안락이 있고 왕이 있고, 실모 편에 서면 종의 편에 서면 나는 죽는다’ 할 때 여러분들은 어느 쪽으로 서겠습니까? 어느 편으로 서요? 절충해서 서요?
이게 다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사상적으로 평가를 내리게 하는 건데, 이럴 때 합리적으로 어떻게 처신을 하는가 하니 자기가 좋아서 애굽으로 들어가 놓고는 ‘모세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그런 정신을 지키고 살았다. 그러니 나도 그런 환경 속에 들어가서 그런 정신 사상을 가지고 살면 되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 참 똑똑한 사람이지? 이때에 정평 정가 정리 정돈 정립을 잘 해야 하는 겁니다. 왕의 편이냐, 아니면 하나님 쪽에 있는 노예 편이냐?
참 이 모세가 부럽지요? 모세 안 부럽습니까? 참 모세가 부러워요. 그러면 이 모세는 인간이 아니지? 우리와 똑같습니까? 여러분들은 모세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애굽과 이스라엘이 싸울 때에 모세는 탄압자 편이 아니고 피 탄압자인 노예 편에 섰지요. 그렇지요? 그리고 또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싸울 때에 말린다고 하는 건 사화를 시킨다 그 말이지요. 물론 여기서 간사성적으로 하면 안 되겠지요.
또 이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시비를 거니까 모세는 어떻게 됐지요? 도망을 가버렸어. 그러니까 모세는 현화치 않고 살았다. 환경에 동화되지 않고 애굽족으로 족화되지 아니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 애굽성으로 속화되지 않았고, 그리고 현실에서 즉흥적으로 사는 자로 현화치 않았습니다. 미래가 있는 자로 살았단 말이요.
또 모세는 죄하고 먼 고로 죄화치 않았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죄와 멉니다. 소극적 극기적으로 나가는 게 아니고 적극적입니다.
이 모세는 애굽의 보화를 내어버리고 나올 수 있을 정도의 신앙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교육을 시켰지요? 어머니 요게벳. 그렇다면 오늘날도 누가 모세에게 이런 교육을 시킬까요? 요게벳이 시켜야지. 오늘날 요게벳이 그 교육을 시킬 수 있어요.
사무엘이 사무엘로 나오려면 누구의 교육이 필요하지요? 한나의 교육. 한나가 없으면 사무엘이 안 나오지요. 안 나와요.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기뻐했다. 모세는 어머니의 교육으로 인해서 신의 성품이 입혀져서 자원적 소원적 자체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공주의 아들의 위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민의를 취하고, 애굽의 오락에서 이스라엘의 전체를 팔 수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받는 고난을 애굽의 명예 영광 그 전부보다도 더 좋게 여겼습니다.
여러분들,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자기가 기독자로서의 신앙적으로 양심을 판다든지 하는 자기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뜨끔한 어떤 그런 거 없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있단 말이요.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 앞에 그런 것까지도 애굽 쪽으로 팔지를 않았단 말이요. 이런 마음은 양심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마음이니 정말 편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을까요?
세상사람들은 다 원해도, 다 좋다고 해도 우리 믿는 자로서는 갈 데가 있고 안 갈 데가 있고,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걸 평가를 해야 되는 거지요. 그것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무슨 하나님의 백성의 사상이 들어 있겠느냐?
모세는 애굽의 모든 재물에도 이스라엘인 자기의 신분 자체를 팔지를 아니했어요. 자신이 이스라엘의 노예임을 어떤 장소에서도 숨기지도 않았고 떳떳하게 살았다 그 말이요.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하면서.
여러분들, 그런 거 있지요? 살다보면. 얼굴이 뜻뜻하고 부끄러운 경우가 있지요. 하나 물어봅시다. 다른 사람이 우리 교인들보고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뭐라고 그러지? 손가락질도 아니고 입으로 그냥 ‘저기 저기.’ ‘저기 어디?’ 하면 ‘아, 전철 타고 대야미역에서 내리면 있다.’ ‘교인이 몇 명이요’ 그러면 뭐 몇 명도 아니고 조그맣다고. 교인이 몇 명 안 되니 부끄럽거든. 뭐가 부끄러워요?
난 그래요. ‘교인 몇 명 되느냐’ 그러면 ‘오붓하게 몇 집밖에 안 된다. 한 스무 명 될까? 하지만 우리교회 교인들은 아주 돌처럼 큰다’ 그러지. 돌이 커요, 안 커요? 돌이 크지요. 돌도 커요. 그러나 어떻게 크지요? 나무처럼 비 맞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저렇게 커요? 아주 깡깡한 거지. 저는 깡깡한 사상을 얘기하는 거지요. 그래서 돌처럼 큰다고 하는 거지요. 우리 교인들이 정말로 그런지는 몰라도 속으로 ‘우리 교회 교인은 너희 교회 목사들하고도 안 바꾼다’ 그러지요.
우리는 ‘나는 믿는 사람이다’ 하는 사상의 긍지가 있어야 돼요. 저는 누가 묻더라도 이걸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 신앙을 가지고 말한 것처럼 저는 거리낌이 없어요. 하나도 무섭지 않고, 세상 학박사들 TV에 나와서 자랑하는 것 보면 저는 속으로 ‘우리의 이 진리가 최고다’ 하는 것을 외치고 있어요. 우리교회 교인들이 전부 학박사지 뭘.
그 다음에 고독하지 않는 신앙. 고독 고(孤). 고하지 않는 신앙. 여러분들, 외롭습니까?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데 외로워요? 전 외롭지 않아요. 저의 동역자들은 다 어디 붙고 어디 붙고, 어디서 모이고 하는 모양인데 저는 하나도 고독하지를 않아요.
모세는 단독적으로 단신적으로 도주를 하면서도 절대로 고독하지를 않았어요. 미디안에 있으면서도 빈천화 하지를 않았어요. 자기를 그렇게 여기지를 않았단 말이요.
그 다음에 보화치 않는 신앙이 아니다. 물질을 축적하는 신앙이 아니란 말이요. 또 위로치 않는 신앙이다. 자기를 갖다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그리고 자기는 편해보자고 하는 그런 신앙을 가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영항치 않는 신앙이다. 영이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텐데 그 면에 대해 이루지 않고 신앙적으로 ‘편하게 살아보자’ 하는 그런 것을 원하는 신앙도 아니었다 그 말이요. 모세가 그런 신앙사상들을 가졌습니다.
여러분들, 애굽 같은 세상에서 이렇게 살려면 골치가 좀 아프지? ‘아따, 예수 믿는 것이 저렇게 복잡하구나.’ 복잡해서 어디 살겠어요? 그럼 편하게 한 번 살아보지?
주먹구구식으로 판단 평가를 하며 신앙을 하려고 하면 그건 신앙하기가 더 어려워요. 아예 신앙을 안 한다면 모르지. 안하고 산다면 그건 속은 편하겠지. 이러면 하나님의 심판은 염두에 둘 필요도 없는 거고. 그러나 자기가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세상에 이런 것들이 다 전개가 돼 있느니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 위치적으로 다 평가 판단을 하고 살아야 할 인간이라 그 말이요. 이게 신앙이란 말이요.
신앙이라고 그러니까 어떤 인간기준을 넘어서 짐스럽게 하는 게 아니란 말이요. 신앙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을 찾아서 사는 거란 말이요. 이렇게 살면 자유가 있고 편한 겁니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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