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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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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2장 1절-10절.(참고: 히 11장 23절-28절)
출 2장 1절-10절: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히 11장 23절-29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히브리서 본문만으로 설교함)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수적인 목적으로 지었고 또 특수적인 존재로 지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란 인간은 죽음의 선에서 절대로 무(無)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또 죽음의 선에서 목석으로 변한다거나 금수로 변한다거나 그런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방종교는 그들의 교리가 혹 그런 게 있지요.
우리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지음을 받았으며, 아울러서 불멸의 존재입니다. 궁극적으로 본다면 우리의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멸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영과 육이 분리 되는 것이 인간의 죽음인데, 영과 육이 좀 더 일찍 분리된 사람은 분리된 그 상태로서 육은 부활 때까지 흙속에 있는 것입니다.
‘육은 죽어서 없어지고 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영육이 불별의 존재라고 하는 말과는 대치가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영육이 불멸의 존재라고 하는 그 말이 맞지를 않게 되지요. ‘육은 죽어서 없어져 버리고 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영육이 불멸의 존재라는 이 말이 안 맞는다 그 말이요. 틀려버린다 그 말이요.
해는 남쪽에서 떠서 북쪽으로 기울어집니까,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기울어집니까,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기울어집니까, 아니면 지구가 도는 겁니까? 우리 인간의 시각성이 혹은 시감성이 절대 정확하다? 아니요. 절대는 하나님에게만 붙이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절대를 붙여서 정확하다고 보지 말라 그 말이지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만이 절대로 정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영육이 다 무로 돌아가도록 짓지를 아니했습니다. 만일에 이 사실이 의심이 간다면 재림의 날이 오면 알 수 있을 테지요. 그 날에는 육은 신령체로 변해서 영과 함께 결합이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영육이 다 귀중합니다. 참 귀합니다.
또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인간구원의 궁극적 목적 면을 우리가 전제를 하고 염두에 두면서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이 잘 생겼던 못 생겼던 뭐 어떻게 생겼던 간에 인간의 육체도 참 고상하고 신비스럽고, 영은 더 말할 것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영육 결합체다. 영과 육이 다 귀하다. 참 신비스럽고 귀하다.
전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작품이 좋네. 귀하네. 비싸네’ 해도요 인간 이상 좋은 게 없어요. 인간 이상 고상한 게 없어요. 인격성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러나 인격성이 아닌 육체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말이요. 이 면에 있어서 하나님은 정말 최고의 예술가입니다.
이성이라든지 영이라든지, 생각하는 거 감상하는 거 감각하는 거 이런 게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요. 하나님의 작품 중에 인간이 최고로 고상하고 귀중하고, 평가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고 그래요. 인간 이상 좋은 게 없어요. 참 인간이 귀합니다. 참 귀중합니다. 보배롭고 사랑스럽고.
육은 물질인데 마지막 부활의 그 날에 홀연히 변화합니다. 그 변화하는 과정을 한 번 보고 싶어. 그 왜 테레비를 가지고 기술적으로 전자파를 어떻게 조작해서 인간의 형상을 변모시키는 그런 거 있잖아요? 그건 뭐 그림이라서 그런 거지만 실질적으로 육체가 신령체로 변하는 그 과정이 굉장히 신비로울 것 같아요. 인간의 이론을 가지고는 말이 안 될 것 같아요. 보는 그 즉시 그 느낌의 감각성이 제일 진실인 것 같아. 말을 하면 실감이 안 날 것 같아. 영육이 이렇게 홀연히 변화되는 그것이 너무 너무 신비스럽기 때문에 주님이 첫 열매로 보여줬단 말이요. 얼마나 신비로운지!
그래서 죽어서 무덤에 계시던 주님이 신령체로 살아나서 문을 닫아놨는데도 들어오고 하는 그 분을 만져도 보고, 또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는 그 주님을 직접 본 제자들이 불이 붙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이 2천 년이 지났기 때문에 별로 그게 실감이 안 나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것이 믿어져. 믿어지는데 손으로 만지듯이 실감은 안 나. 그러나 신앙이 깊은 사람은 그 면의 느낌성을 상당히 진하게 가질 것 같아요.
부활의 목적은 물론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 쉬운 면으로 생각을 해 볼 때에 ‘악한 원수들이 죽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했다’ 그렇게들 생각할 것이고, 또 ‘죽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건 죽은 상태로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했다’ 그렇게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부활을 하신 이유가 어떻게 되지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면으로 기울어져 버리지요.
죽었기 때문에 부활인가, 죽였기 때문에 부활인가, 아니면 부활 자체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부활인가? 다르지요? 같은 말이 될 수가 없지요.
부활 자체가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전제를 해 놓고 우리가 생각을 할 때에, 부활이 필연적이라고 하는 이걸 못을 박아놓고 가상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렇다면 예수님은 육신이 안 죽었어도 부활이 필요한가? 어떻습니까? 악한 자들이 예수님을 안 죽여도 부활이 필요한가? 필요하다. 확실합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은 자동적으로 매겨지게 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안 죽었어도 우리를 위해서 부활은 꼭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죽었기 때문에 부활, 죽였기 때문에 부활’이라고 하는 그 면으로 생각하기 쉽지요. 그렇지 않아요? 정답은 그게 아니지요.
가령 죽었기 때문에, 죽였기 때문에 부활을 하신 것이라고 말을 하게 되면 우리들도 부활하려면 전부 다 죽어야 된다는 말이 나오게 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산 자로서도 죽음을 보지 않고 부활을 하는 것도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도 목적이 있고 부활도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그 죽음은 우리의 사죄 칭의를 위해서 즉, 대형을 위한 죽음, 대행을 위한 죽음, 중보를 위한 죽음입니다. 또한 이 죽음은 사망권을 정복한 죽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사망에게 정복당한 죽음이고 사망계에 삼켜져버린 그런 죽음이지요. 예수님의 죽음은 정복입니다. 사망권을 정복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부활은 택자들에게 부활의 권능을 입히기 위한 부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육체도 장차 부활할 몸이니 더럽히지 말라. 육체도 변화 부활할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신체는 우리와 똑같은 신체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우리는 죄에 감염이 되었지만 주님의 신체는 죄에 감염이 안 된 신체다 그 말이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부활시키기 전에 1차적으로 우리의 영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히고, 1차적인 구속이지요. 이 1차적 구속을 입은 후에 우리가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이성과 몸을 움직여서 성화구원을 입고 나면 그 후에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 아닌 이질상태는 우리에게서 제거가 됩니다. 부활 속에는 그런 게 들어있다 그 말이지요. 우리 몸은 앞으로 이렇게 부활할 몸입니다.
현재 세상에서 우리의 영은 단회적으로 구속을 입었지만 성화구원을 부절히 중복적으로 입어나가고 이루어 나가야 되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나를 진리지식으로 인격화 시켜나가야 합니다. 인격화 되면 이제 이것이 생활화가 되는 거지요. 믿는 우리에게는 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사는 방편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생활하는 속에는 진리지식으로 자기 자체화 된 인격이 있는 겁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또 한 문제는 ‘내가 누구에게 등용이 되느냐’ 하는 이게 중요하단 말이요. 그럼에도 오늘날기독자들이 이런 면의 귀중성에 대해 별로 생각을 안 해요. 우리가 볼 때는 이게 굉장히 귀중하고 알짜배기인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알짜배기를 완전히 내버리고 인간 제 생각대로 믿고 있으니 그런 사람에게 무슨 성화구원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요, 그리고 특수적인 기독교를 다른 이종교와 같은 일반화된 종교 중의 하나로 아는 것입니다.
부활체는 일인격 단일체고 단순체고 단일생명이고 단일의사이고 단일주권이고, 천국도 단일천국입니다. 성분적인 면에서 그렇다 그 말이지요.
이제 우리는 이렇게 세상보다도 더 좋은 천국을 받았는데, 이 기독교회가 이 천국을 사용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실력배양을 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천국백성들을 우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허허벌판이 아니지요? 천국은 이 세상보다도 더 다양하고 무한하다는 것이 성경에 있지요? ‘날마다 새 것이라.’ 날마다? 언제까지? 영원히. 영원히 새 것이다. 그만큼 무한하다는 거지요. 그 종별이 아주 다양하고 각이하고 무한하다. 하여튼 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줄 거, 우리가 가지고 쓸 게 무한하다. 천국은 무한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다. 무한한 천국인데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같은 무한이냐? 그건 절대로 아니란 말이요.
이 천국을 누구든지 들어가면 다 누릴 수 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지요. 누릴 수 있는 실력대로 누리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의 그림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맛을 보여줍니다.
믿는 우리들이 나의 영과 육에다 무엇을 저장하고 가느냐? 우리의 몸 밖에는 수수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지식은 두 가지지요? 하나는 진리지식이고, 하나는 일반지식이고. 성경은 원 계시이고, 세상은 자연계시 보조계시이고.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많이 경험하고 보지요? 실력이 없으면 사용을 못하더라. 그러나 실력이 있으면 사용을 하지요. 그리고 실력이 있으면 의욕이 생깁니다. 의욕이 있어요. 실력과 의욕은 병행을 하게 됩니다. 실력이 없으면 의욕이 없고.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또 보지요? 하고 싶은 의욕은 있지만 실력이 없으니까 그 때는 답답하지요. 그렇지요? 답답한 자가 돼버립니다. 아주 마음이 답답해요. 우리는 그런 자로 살면 안 되겠지요.
우리가 진리지식 깨닫는 면에, 아는 면에 실력이 있고, 또 모든 활동 면에서도 실력이 있으면 의욕이 있고, 이렇게 되면 누굴 만나더라도 하나도 막히지 않고 두렵지 않고 그렇지요? 실력이 있으면 활동범위가 넓어집니다.
내 욕심 같아서는 여러분들이 다 실력화 됐으면 좋겠어. 참 멋있는 그 실력을 잘 갖추면 그 사람이 얼마나 멋있을까? 세상 사람들이야 옷 잘 입고 돈 많으면 멋있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실력 있는 거 참 멋있어요. 거칠 것이 없고.
나에게 한 번밖에 없는 이 한 세상을 사는 동안에 나에게 뭘 저장하고 가느냐? 뭘 저장하고 가야 됩니까? 똥만 저장하고 가요? 우리 기독자는 먼저 진리지식을 자기의 본 지식 원 지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지식에 대한 욕심 이거는 사욕이 아니고 공욕입니다. 하나님의 욕심이란 말이요. 하나님이 주고자 하는 욕심, 또 내가 그걸 받고자 하는 욕심. 이건 공욕이란 말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걸 주고 싶어 하는 그 욕심이 있단 말이요. 소원 목적이 있고.
참 그 이상하지요? 주고 싶어 하는 이걸 욕심이라고 하는 게 이상한데?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욕심, 이건 흔히 하는 말이니까 이해가 가는데 주고 싶어 하는 욕심? 그게 있을까요? 주고 싶어서 못 견디는 것.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어머니가 오래간만에 내려온 자식에게 맛있는 거 잔뜩 해놓고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하는 그 욕심이 있지요. 자식이 그것을 맛있게 다 먹으면 어머니는 기뻐하지요? 그런데 ‘아이고, 배가 아파서 못 먹는다. 위장에 탈이 났다’ 그래놓으면 그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한 욕심 이걸 강하게 가져야 되겠습니다. 세상 것은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큼은 우리가 실패를 하지 말자. 왜? 천국 가서 써먹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게 참 실감이 안 난단 말이요.
천국에 가서는 ‘내가 천국을 얼마나 받느냐’ 하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천국의 것을 얼마나 사용을 하느냐’ 그게 문제란 말이지요.
천국에 가서 뭘 먹느냐? 성경구절대로 본다면 생명강가에 생명과가 있는데 열매도 생명과다. 그리고 한 나무에서 열두 과일을 맺는다. 그러니까 모양이 열두 가지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열두 가지 맛이 나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한 과일이 열두 가지 맛이 나오는 건지, 아니면 열매 한 개 한 개마다 맛이 다른 건지? 어쨌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있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생명과는 고정적인 맛이라도 먹는 사람의 입에 따라서 맛이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온다는 것.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다 그 말이요.
우리가 세상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신 걸 잘 먹는 사람이 있고 또 신 것을 못 먹는 사람도 있고, 또 담배를 잘 피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담배를 못 피우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뭐냐? 같은 건데 입맛에 따라서 변한 것처럼 그렇게 돼 있단 말이요. 입맛이 그렇게 다르단 말이요.
우리가 알기로 천국에서는 오각과 오감의 격차가 다 있습니다. 미감성 시감성 청감성 후감성 촉감성이 사람에 따라서 다 차이가 있어요. 물론 100%에 있어서 예수님이 첫째가 될 거고, 그 둘째는 예수님을 그만큼 닮은 사람일 거고. 그러니까 천국은 무한성 완전성인데 하나님의 감성을 가지는 것만큼 그 천국을 누리는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감성이 둔감한 자들은 따먹을 수도 없고, 안 따먹는다 그 말이요. 그러면 그만큼 자기의 천국이 축소가 된 거다 그 말이요. 누리는 면에, 기쁨 면에, 느낌 면에 그만큼 둔감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그걸 이론적으로 말할 수 있고, 또 실질적으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교를 듣는 느낌성이 사람마다 다 차등이 있지요. 그것이 이제 천국의 차등과 직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만큼 자기의 천국이 축소가 된다 그 말이요.
믿음이 뭐냐? 이건 순종인데, 순종이 뭐냐? 다른 말로 하면 바꿔 치우는 거.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 치우는 거. 이게 믿음이다.
요게벳은 모세에게 진리지식만 넣어줍니다. 일반지식은 없습니다. 진리지식밖에 없어요. 히브리 사상과 히브리 정신뿐입니다. 이것을 말로써 전달만이 아니고 철두철미하게 인격전달로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 여성들에게 아들을 다 주었는데 그러나 그들은 아들을 다 죽였다 그 말이요. 그러나 요게벳만은 그 생명을 자기 생명을 내대고 살려낸 것이지요. 오늘날도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면 이런 일들이 많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에게 진리생명을 다 주었는데 자기는 잉태시키지 못하고 그걸 다 죽인다.
아들은 뭐요? 상속받는 거. 자기의 후사. 자기의 상속자. 신앙적으로 말하면 상속받는 자로서의 자기가 되는 거지요.
우리가 일반지식은 진리지식을 위해 이용하고 보조로도 쓸 수 있고, 그리고 진리지식이 주격이 돼 있다면 이런 것들은 다 삼키고 소화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속화 애굽족화 애굽현화 애굽동화 애굽부화 애굽빈화 애굽고화, 이렇게 애굽으로 화되지 않았다 그 말이요.
우리가 ‘안 그러지’ 싶어도 자칫 잘못해서 애굽에 동화되기 시작하면 언젠지도 모르게 그냥 화동돼 버립니다. 스스로 화동돼 버려요. 처음에는 슬슬 따라가다가 즉, 피동적이 되다가 나중에 숙달이 되면 자기가 능동적으로 나가버려요. 동화에서 화동이 돼버려.
만일 이스라엘에게 애굽이 박해당한다고 할 것 같으면 모세로서는 당연하다고 할 테지요? 그러나 박해당하는 자기 민족을 바라볼 때에 이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답답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역에 죽어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모세가 40세까지 그런 꼴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를 안 했을까요? 기도 했단 말이요. 기도를 했을 것 같으면 그 꼴을 보고 모세가 무슨 기도를 했겠느냐? 보나마나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했을 거란 말이요.
그래, 자기 민족을 해방시켜 달라는 그 기도가 나쁩니까? 누구든지 들으면 ‘옳다. 좋다’ 할 수밖에 없을 거란 말이요.
그러면 과연 그 기도가 옳은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그렇게 고역에 죽어가는 걸 모르고 계시는 건가? 알고 계신단 말이지요. 그래, 그걸 보시는 하나님께서 왈 ‘모세야, 죽어가는 너희 백성을 보니 마음이 아프지?’ ‘예, 그렇습니다.’ ‘너만 그러냐? 나도 아프다’ 하실 거란 말이요. 그러면 여기서 무엇을 계시하고 있느냐?
모세가 자기 백성이 고난당하는 게 마음이 아파. 하나님도 역시 마음이 아파. 그런데 왜 하나님이 가만있느냐 그 말이요. 여기서 견해차가 뭐냐? 뭘 계시하고 있느냐?
모세가 볼 때는 자기완성이 급합니까, 사건이 급합니까? 사건이 급하지요. 그래서 ‘왜 하나님은 나의 간구를 안 들어주시나?’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러나 사건완성이냐, 자기완성이냐?,
‘왜 하나님은 나의 간구를 안 들어주시느냐? 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을 안 시켜주시느냐?’ 이렇게 될 때에 누가 주격이 되지요? ‘왜 나의 간구를 안 들어주십니까?’ 모세가 볼 때는 사건완성이 급하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자기완성이 급해.
그런데 모세의 그 기도를 가만 보면 누가 주격이지요? 누가 주격으로 나와요? 사건완성의 기도는 주격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되려야 될 수가 없어요.
누가 주격이냐? 주격이 누구냐? 누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고, 누가 누구의 말에 순종을 해야 하느냐? 모세가 볼 때는 하루가 급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과 모세가 사건을 놓고 보는 견해차입니다. 계시하고 있는 성경을 볼 때에 모세가 처음에는 ‘하나님이 나의 백성을 왜 안 돌아보고 왜 해방시켜 주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 있었지요? 그래서 애굽인을 쳐 죽이지요? 그게 뭘 계시하느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사건완성이냐, 자기완성이냐? 이렇게 달라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크고 작은 사건을 타락된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사건완성이 시급하게 보입니다. 불신자도 그렇고 현재적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건완성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 방편에서 사람이 만들어지는 인간 자기완성이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뚫어보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어떤 사건 환경에서도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성화구원이 입어지는 지식이 있고 지혜롭고 영적인 실력이 있는 자로, 하나님의 능력을 닮은 자로 최고의 고상한 인격자로 어찌하든지 자기를 하나님 인격처럼 성분처럼 자기를 그렇게 완성시켜 나가는 복된 자가 될 수 있도록 저희들을 강력하게 영감의 감화해 주시고 깨닫도록 해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일반 불신자들이 볼 때는 믿는 자들이 멍청한 것 같고 속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지식을 깨달으며 부지런히 실력을 쌓아가는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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