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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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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6.23 성암교회 |
교회가 설치한 여러 교리적 장치의 필요성
마 5:3-6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복의 기준은 세월을 따라 상황을 따라 바뀝니다. 예전에는 처녀를 보고 ‘복스럽다’ ‘부잣집 맏며느리 감 같다’고 하면 칭찬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듣고 행복할 아가씨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장수 하시라’고 하면 어른들에게 최고의 헌사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도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우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처럼 말씀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을 숨기려하거나, 삶의 부분인데도 부정하려고 합니다.
눅6:20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는데, 마태는 “마음이”를 넣어서 가난의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헬라어 ‘프토코스’는 히브리어 ‘아나브’의 역어입니다. ‘아나브’는 원래 사회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1:1 이하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포로 된 사람, 묶인 사람, 슬퍼하는 사람, 절망한 사람 등등을 다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또 ‘마음이’(to pneumai)에 나오는 ‘프뉴마’는‘인간 전체’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정신과 물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그리스적 관점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정신과 몸이 엄밀히 나누어지지 않는 전체로서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나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 삶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이라는 뜻이죠. 즉 경제적 부정의에 의해서 또는 온갖 사회적 불의와 곤경에 의해서 그의 영혼이 “짓밟힌” 사람들입니다(시 34:18; 51:17).
그 당시 팔레스틴을 광범위하게 뒤덮고 있던 가난은, 개인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사회 구조적으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유대사회나 로마 사회의 기득권층들은 은근히 그들이 불운하거나 복이 없는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 사는 것은 자기들이 율법대로 잘 살고 복을 받아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하여 영혼이 짓밟힌 사람들을 “복이 있다”고 파격적으로 선포하시는 예수에 의해서 이제 이 세상의 복의 기준은 뒤집힙니다.
예수님도 가난 자체를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그의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 자체”는 나쁘다고 보지만 가난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봅니다.
마태 공동체는 아마도 시리아 안디옥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전체적으로 잘 살게 되었습니다. 로마 사회는 철저히 신분제 사회이고 부익부빈익빈의 사회였습니다. 마태 공동체 내에도 빈부격차가 생기면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사이에 갈등도 생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선포는, 한편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불운한 사람들일지 몰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다른 한편,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라는 뜻이 되었을 것입니다(이외수 이야기). 그들이 기죽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룩하라는 의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을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선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항상 복이 있다는 선언 다음에, 우리말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왜냐하면”(hoti)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절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은, 그냥 가난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말은 은유적 표현이죠. 그것은 온 존재가 짓밟히게 된 사람이 이제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현실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는 그런 경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특히 잘난 사람들은 그 잘남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에 자기를 내맡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온 존재가 부서진 사람은 자기의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에 자기를 온전히 내맡길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경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영혼이 짓밟힌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시 34:18).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깨어지고 짓밟힌 심령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시 51:17)
이렇게 주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되고, 깨어진 마음이 되고, 짓밟힌 영혼이 되는 사람, 그리하여 주님 말고는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 하늘나라 말고는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성서는 온통 이런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지 못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옆에서 보기에 꼭 술에 취해서 주정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삼상 1:15-16)
욥은 그 어느 변론가보다도 더 훌륭한 언변으로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웁니다. 맨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욥 40:2, 7, 8)
이렇게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온갖 세상을 지으신 일과 그 위의 살아 있는 것들을 기르시고 천지를 운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말씀하셨을 때, 욥은 자기 의와 주장과 변론을 거두어들이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은 온통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야곱은 가장 낮아진 가운데 돌베개를 베고 잘 때에, 허허벌판에서도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깨닫고 그곳을 베델(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가장 위대하게 여기던 자기 가문과 바리새파의 영광을 오물처럼 비우고 버렸을 때, 그리스도를 만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고 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은 온갖 부와 화려함을 갖추거나 행운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짓밟힌 사람, 몸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온전히 주님께만 희망을 걸고 하늘나라가 내게 오실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을 억지로 할 수 있습니까? 억지로 곤경에 처하고, 억지로 궁핍하게 살고, 억지로 못난 척하고 그럴 순 없지요. 그러면 도대체 우리더러 어떻게 ‘가난해지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발적인 가난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내려놓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욕망과 물질의 복을 구해서 내 창고에 채우는 게 아니라, 내게 있는 것들을(가난을 거부하는 여러 장치들)하나씩 둘씩 내려놓는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텅비어가는 존재로 자신을 가꿔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십자가가, 그리스도가, 하늘이 내게 가득 차오르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교리적으로 설치한 여러 종교적인 장치들은 세상과 구별하여 십자가 안으로 들어온 이들로 하여금 ‘가난해지게 하는 장치’와 같은 것입니다.
헌금이나, 봉사나, 기도나, 찬송을 바치고 더 많은 것을 타 내려는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진짜 복이 아닙니다. 진짜복은 ‘가난’을 통해서 확보하게 되는 ‘하늘나라’입니다.
마 5:3-6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복의 기준은 세월을 따라 상황을 따라 바뀝니다. 예전에는 처녀를 보고 ‘복스럽다’ ‘부잣집 맏며느리 감 같다’고 하면 칭찬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듣고 행복할 아가씨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장수 하시라’고 하면 어른들에게 최고의 헌사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도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우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처럼 말씀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을 숨기려하거나, 삶의 부분인데도 부정하려고 합니다.
눅6:20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는데, 마태는 “마음이”를 넣어서 가난의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헬라어 ‘프토코스’는 히브리어 ‘아나브’의 역어입니다. ‘아나브’는 원래 사회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1:1 이하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포로 된 사람, 묶인 사람, 슬퍼하는 사람, 절망한 사람 등등을 다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또 ‘마음이’(to pneumai)에 나오는 ‘프뉴마’는‘인간 전체’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정신과 물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그리스적 관점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정신과 몸이 엄밀히 나누어지지 않는 전체로서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나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 삶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이라는 뜻이죠. 즉 경제적 부정의에 의해서 또는 온갖 사회적 불의와 곤경에 의해서 그의 영혼이 “짓밟힌” 사람들입니다(시 34:18; 51:17).
그 당시 팔레스틴을 광범위하게 뒤덮고 있던 가난은, 개인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사회 구조적으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유대사회나 로마 사회의 기득권층들은 은근히 그들이 불운하거나 복이 없는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 사는 것은 자기들이 율법대로 잘 살고 복을 받아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하여 영혼이 짓밟힌 사람들을 “복이 있다”고 파격적으로 선포하시는 예수에 의해서 이제 이 세상의 복의 기준은 뒤집힙니다.
예수님도 가난 자체를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그의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 자체”는 나쁘다고 보지만 가난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봅니다.
마태 공동체는 아마도 시리아 안디옥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전체적으로 잘 살게 되었습니다. 로마 사회는 철저히 신분제 사회이고 부익부빈익빈의 사회였습니다. 마태 공동체 내에도 빈부격차가 생기면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사이에 갈등도 생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선포는, 한편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불운한 사람들일지 몰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다른 한편,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라는 뜻이 되었을 것입니다(이외수 이야기). 그들이 기죽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룩하라는 의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을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선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항상 복이 있다는 선언 다음에, 우리말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왜냐하면”(hoti)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절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은, 그냥 가난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말은 은유적 표현이죠. 그것은 온 존재가 짓밟히게 된 사람이 이제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현실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는 그런 경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특히 잘난 사람들은 그 잘남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에 자기를 내맡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온 존재가 부서진 사람은 자기의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에 자기를 온전히 내맡길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경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영혼이 짓밟힌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시 34:18).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깨어지고 짓밟힌 심령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시 51:17)
이렇게 주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되고, 깨어진 마음이 되고, 짓밟힌 영혼이 되는 사람, 그리하여 주님 말고는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 하늘나라 말고는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성서는 온통 이런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지 못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옆에서 보기에 꼭 술에 취해서 주정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삼상 1:15-16)
욥은 그 어느 변론가보다도 더 훌륭한 언변으로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웁니다. 맨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욥 40:2, 7, 8)
이렇게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온갖 세상을 지으신 일과 그 위의 살아 있는 것들을 기르시고 천지를 운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말씀하셨을 때, 욥은 자기 의와 주장과 변론을 거두어들이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은 온통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야곱은 가장 낮아진 가운데 돌베개를 베고 잘 때에, 허허벌판에서도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깨닫고 그곳을 베델(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가장 위대하게 여기던 자기 가문과 바리새파의 영광을 오물처럼 비우고 버렸을 때, 그리스도를 만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고 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은 온갖 부와 화려함을 갖추거나 행운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짓밟힌 사람, 몸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온전히 주님께만 희망을 걸고 하늘나라가 내게 오실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을 억지로 할 수 있습니까? 억지로 곤경에 처하고, 억지로 궁핍하게 살고, 억지로 못난 척하고 그럴 순 없지요. 그러면 도대체 우리더러 어떻게 ‘가난해지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발적인 가난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내려놓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욕망과 물질의 복을 구해서 내 창고에 채우는 게 아니라, 내게 있는 것들을(가난을 거부하는 여러 장치들)하나씩 둘씩 내려놓는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텅비어가는 존재로 자신을 가꿔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십자가가, 그리스도가, 하늘이 내게 가득 차오르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교리적으로 설치한 여러 종교적인 장치들은 세상과 구별하여 십자가 안으로 들어온 이들로 하여금 ‘가난해지게 하는 장치’와 같은 것입니다.
헌금이나, 봉사나, 기도나, 찬송을 바치고 더 많은 것을 타 내려는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진짜 복이 아닙니다. 진짜복은 ‘가난’을 통해서 확보하게 되는 ‘하늘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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