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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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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2장 1절-10절.(참고: 히 11장 23절-28절)
출 2장 1절-10절: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히 11장 23절-29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히브리서 본문만으로 설교함)
우리가 구원도리를 깨달아 나갈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때가 많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인정을 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때가 너무나도 많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말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을 하면서도 사건이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생각하는 그게 별로 없다 그 말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만을 주장을 하다 보면 인간이 노력하고 힘써야 할 그 면이 약화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예정론을 자꾸 얘기하다 보면 어떻게 되지요? 인간의 노력이라든지 그 면이 아주 약해져 버리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노력이 자꾸 강조가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성경역사를 보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간 이걸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보느냐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전제하면서 더 들어가서 신앙인들이 활동하고 노력하는 이것을 보는 것과,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전제하고 인간의 노력을 보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인정치 않고 인간의 노력을 보는 거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큰 차이가 생겨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보는 것이 현재적으로 자기에게 신앙이 더 깊이 들어가느냐? 특히 가르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신앙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걸 성경에서 보고 얘기가 돼야 만이 신앙이 그렇게 들어가는 거거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안 보고 인간의 노력만 강조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뜻은 없어지지. 그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성,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마음의 그 은밀의지 이거는 못 보지. 그러면 신앙이 안 돼 버리지요.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열심을 부리라고 하는 사역적 신앙으로 몰리기 마련이에요. 반드시 그렇단 말이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인정치 않고 인간 편에서 볼 때 요셉이 애굽에 간 것은?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런데 나중에 형들이 요셉 앞에 꿇어 엎드리면서 용서를 빌 때에 요셉의 입에서 어떻게 나왔지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형들이 나를 팔아먹어서 내가 여기 왔지만 내가 신앙을 잘 지키니까 애굽의 총리가 됐다’ 뭐 이렇게 될 거란 말이요. 그런데 요셉의 입에서 뭐라고 나왔지요? 누가 보내서? 그렇지요. ‘하나님이 보내서. 굶어죽지 않게 미리 보내서.’ 그 참 요셉이 보는 눈이 얼마나 깊으냔 말이요.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을 때에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밑에 깔고 보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어디 보자. 내가 지금 힘은 없지’ 하며 인간의 감정으로 말할 거란 말이요.
만일 요셉이 “‘어디 보자’ 하며 애굽에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국무총리를 나에게 줬다?” 이렇게 되면 이게 뭐요? 믿음의 대가지불로 돼버린단 말이요. 그게 아니거든. 그런데 그렇게 되기 쉬워. 강조하기 쉽고.
‘내가 믿음으로 바로 사니까, 뭐 어쩌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저런 축복을 줬다. 뭘 줬다’ 하며 자신의 현실을 믿음의 대가, 신앙의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 말을 해버리면 잘못된 거지요.
그건 대가가 아니에요. 그게 대가일 것 같으면 신령적인 것은 받을 필요가 없는 거지. 우리가 그런 점을 잘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을 할 때나 생각을 할 때에 ‘이렇게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주권섭리가 없어지는구나. 하나님의 예정 면을 강조하다 보면 인간의 노력 활동이 없어지는구나’ 하는 면을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께서 미리 보내가지고 흉년을 면하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70인이 애굽에 입국을 하게 한 것도 하나님이 하셨다. 역시 출애굽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셨다’ 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늘 앞세우고 살았습니다.
여러분들, 어떤 사건이던 그 사건 속에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하시는 주권섭리가 따라가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까? 마음으로 그게 밑에서 따라가고 있어요? 말은 안 해도 눈에는 안 보여도 자기의 신앙심이 그렇게 시인이 되면서 가지느냐 그 말이요.
그렇다면 바로의 마음도 누가? 하나님이 하셨다. 이렇게 되면 바로가 어떻게 되지? 바로의 자유가 삭감이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바로가 제 좋아서 제 마음대로 한 거지요. 이걸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바로의 좋아하는 그 마음을 잡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바로를 이용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섭리 면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때문에 바로의 마음을 이리 저리 움직이시는 거니까 이스라엘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거지요. 하지만 애굽의 백성들이 볼 때는 그 역사 속에 바로가 최고로 돼 있잖아요. 권력 재력 등이 가장 큰 바로 왕을 최고로 보고 있거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바로 앞에서 힘없고 나약하고, 역사의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는 것 같단 말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역사의 주체성으로 놓고 일을 하고 있거든요. 하나님이 주권 면을 놓고 보면 이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보면 바로의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을 인간 모세가 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거든. 어느 성경에 보니까 바로가 그렇게 한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그랬지요.
그러면 우리가 또 이렇게 한 번 봅시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안 내어보내려고 하는 것보다 만일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핍박치 아니했더라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가려고 할까요, 주저앉아 있을까요? 주저앉아 있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안 내어보내려고 하는 그 면도 우리가 한 번 보고, 또 핍박을 하는 그 면도 한 번 보고.
요셉이 당시 나이가 20안쪽 됐을 텐데 그 나이에 출세를 한다는 게 어렵단 말이요. 종살이 10년, 감옥살이 한 3년 했나? 그러니 바로가 아니었더라면 출세하고 부귀공명을 얻기가 참 어렵지요.
이스라엘을 핍박할 당시의 바로와 요셉을 국무총리를 시킨 바로와는 다른 왕입니다. 시대적으로 벌써 그렇게 흐른 거지요. 그러니까 바로 1세, 2세 그러지요. 헤롯 1세, 2세 하듯이. 헤롯 안디바, 대 헤롯 하듯이.
그리고 가나안이란 이 가나안은 요셉을 축출했고, 또 가나안 본족이 아닌 요셉의 형들의 요셉을 냉대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요셉이 이걸 가만 생각하면 형들에게 정이 뚝 떨어질 거란 말이요. 그리고 애굽은 소국이 아니라 대국이고, 또 약한 약국이 아니고 강국이고, 빈국이 아니고 부국이고, 더 나가서 요셉 자기를 국무총리까지 만들었으니까 이 요셉이 애굽에 정이 붙어가지고 애굽을 잊을 수가 없을 거라 그 말이요. 그러니 요셉이 애굽 쪽으로 착 달라붙을 게 아니냐 그 말이요.
그런데 요셉이 죽을 때에 뭐라고 유언을 했지요? ‘애굽은 나를 성공시켜 주었고 대우해 주었으니 나를 이곳에 묻어다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란 말이요. 그런데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학대를 했던, 애굽이 나에게 성공 출세를 주었던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요. 요셉의 생각 속에는 그건 아예 안중에도 없어. 오직 하나님의 약속성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 요셉 속에는 철두철미한 히브리 사상을 가진 거지요.
여러분들, 아닌 말로 이 세상에서 환난 핍박당하고 자기 것이 다 날아가고 고생 고생 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자기 속의 하나님과 자기와의 약속성이라고 하는 그 신앙 그거 붙들 수 있습니까? 그게 믿어집니까? 대부분은 나를 좋게 해주고 대우해주는 쪽으로, 자기를 성공시켜 주는 쪽으로 휩쓸리지 않아요? 불신세상만 그렇습니까?
신약의 동방박사들이 별을 바라보고 오는 그 걸음에 있어서 그 과정은 축소시켜 놨지요. 글씨로는 안 나타났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그 과정이 있단 말이요, 아닌 말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순산해서 핏덩이 아기를 앉고 그 날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걸 그냥 말로 ‘내려갔다’ 하게 되면 실감이 안 나잖아요. 그런데 내려가는 과정에서의 마리아의 고통을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엄청난 거 아닙니까?
마리아가 애굽에 가봐야 일가친척이 있습니까? 애굽에서 누가 오라고 그럽니까? 전혀 없단 말이요. 그렇다고 해서 무슨 재산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아기를 앉고 가는 그 걸음걸이. 말하자면 이게 지금의 내가 믿는 예수님을 그날부터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신앙성으로 느껴져요? 현재적으로 자기 속에서 마리아의 그 사상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느냐? 그게 아니고 크리스마스 때 있었던 어떤 그런 식으로만 생각이 됩니까?
애굽에 아무리 부귀공명이 있고 또는 환난 핍박이 있을지라도 요셉은 거기에 대해 신경을 쓸 여지가 없다 그 말이요. 그것 붙잡고 시간 보내고 마음 쓸 여지가 없다 그 말이요. 우리도 이런 신앙이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애를 먹여도, 누가 날 대우해줘도 거기에 마음이 안 빠지고 신경 쓸 여지가 없다.
요셉이 자기가 죽으면 애굽에서 장례하지 말고 자기의 해골을 취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져가라고 한 것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어요. 만일에 애굽에서 장례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마음이 없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시체를 여기 묻지 말고 시체라도 메어가라’ 라고 말하는 요셉의 그 신앙 그 참.
요셉은 선지자입니다. 이 요셉이 ‘출애굽을 할 때는 나의 시신을 가지고 가라’ 그렇게 유언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갈 의욕도 마음도 욕심도 없는 모양이요.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계약적으로 줬지요.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권적으로 주신 겁니다.
그 때 당시 가나안 족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되지요? 이런 시비가 안 나오겠어? ‘이 가나안 땅이 어째서 너희들 땅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줬다’ 한다면 거기에 사는 족속들이 기가 막힐 거 아니요? ‘하나님이 누군데 이 땅을 너희들에게 주느냐’ 그럴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가나안을 약속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줬지요. 가나안의 본족인 일곱 족을 몰아내고, 유브라데강과 그발강이 있는데 이 경계에서부터 애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줬습니다. 주면서 ‘이것은 너희들의 영존처다. 그리고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을 하라. 자유와 평화로 누리게 하겠다’고 헸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약속을 다 잊어버리고 애굽에 눌어붙어가지고 십부장 백부장 해먹는 게 좋고, 애굽의 수박 맛이 좋고 마늘 맛이 더 좋고 하니 가나안에 들어갈 욕심이 없단 말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환난 핍박을 주는 건 뭐지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우리가 염두에 두면서,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환난 핍박을 주는 것은 어떻게 하라고? 애굽을 사랑하라고 그러는 거요, 애굽에서 정을 떼라고 그러는 거요? 정을 떼게 하느라고 그러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정을 떼게 하느라고 바로를 들어서 핍박을 하는 거고, 애굽은 이스라엘을 붙잡고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서 강압정책을 쓰는 거지요.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보는 뜻과, 인간 편에서 하는 것을 보면 이게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같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든지 그 사람 배후의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생각을 해야 돼요. 그러면서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때 그 때마다 지혜롭게 말할 때는 말을 하고, 안 할 때는 안 하고. 그러나 상대는 ‘저 자가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인정하고 이 말을 한다’ 하는 그건 모르지. 오직 하나님만 아시지.
만일 애굽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의 아이를 죽이지 아니했을 것 같으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출애굽을 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해 가지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주권 섭리 면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애굽이 이스라엘을 핍박을 더 하는 거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완전히 정을 떼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가나안 땅의 주인공으로 삼아주겠다. 거기 가서 누려라’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 그립고 사랑스럽고 해서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택한 선민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그 때 백성들은 애굽이나 탈출을 했지만 지금은 탈출조차도 하지 않고 있어.
자, 그렇다면 그 때 애굽 속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박해를 받음으로 해서 애굽을 탈출한 것을 생각하면서 현재 오늘날 하나님의 택한 선민들이 그 때 당시의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한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게 좋겠습니까, 대우받고 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세상이 과학문물이 발달이 되고 살기가 편해지니까 기독자들이 세상에 완전히 눌어붙어 있는데도 그 때 애굽에서처럼 세상의 정을 떼는 그런 핍박이 없다고 한다면 이건 아마 세상 마지막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전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지요. 그런데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전히 짓밟히고 있는 겁니다. 밟힌단 말이요. 무시당하고 밟히고 있다 그 말이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석이 돼요? 예를 들어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다. 술 먹을 줄 모른다. 그런데 저 자는 예수 안 믿는다. 그러면서 술은 잘 먹는다. 그 자가 나를 보고 ‘아, 저기 가서 술 한 잔 먹자’ 그러면 그 자는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지요. 그런데 이걸 신앙적으로 영적인 면에서 들어가 보면? 그 자는 물론 사람이지요. 사람이지만 영적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이거 네가 나를 도대체 뭘로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지요.
여러분들, 생활을 하다 보면 혹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지요? ‘네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어? 건방진 놈’ 뭐 이런 게 있을 수 있단 말이요. 그런데 상대는 고의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러나 그렇게 들린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나에게 ‘술 한 잔 먹자’ 하는 그 사람이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감동으로 그러느냐 말이요. 아니란 말이요. 그러니까 저 자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서는 나의 신앙을 넘어뜨리려고 마귀가 도전을 해 오는 거지요. 그게 하나의 유혹성의 소리지요.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을 보면 애굽을 탈출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독자들이 신앙 정신적으로 애굽 같은 세상에 눌어붙어 있어. 그러니까 교인들 속에 직분을 줘서 십장 해먹고 대우 받고 이렇게 돼 있단 말이요. 보면 맨 세상에 포로야. 그러니 이걸 실감이 날 정도로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려면 육적으로 보여줄 거란 말이요.
만일 기독자들 속에 요셉의 그 사상과 정신이랄까? 또는 혼이랄까? 요셉의 사상과 혼이 살아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볼 것이다. 요셉은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됐어도 애굽을 영존처로 생각을 아니했어요. ‘잠시 잠깐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내 실력배양을 하고 갈 것뿐이다’ 하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누릴 곳에 있으면서도 누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한 가나안 땅에다 그 마음을 정신을 정착을 시켜놨단 말이요.
그런데 오늘날 현재 우리 기독자들은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무시하고 애굽 같은 이 세상에 정착을 하고 있는 기독자들이 아닌가? 그러니 세상에서 정 떼는 작업이 개인적으로 있을 수도 있고, 기독교 전체적으로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늘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생각하면서 선지사도들이 걸어간 그 신앙정신 신앙절개를 팔지를 말아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심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원하옵기는 저희들이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이 세상에 잠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의미, 계시적인 사상, 역사 속에 흘러나오는 아버지 하나님의 의지계시 이런 것을 저희들이 다 터득을 하고 바로 깨닫고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총애를 받다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르는 그 날에 아버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는 그런 자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미련하고 둔탁합니다. 날마다 저희들에게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지식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옵소서.
생활하는 일터에서 늘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인정을 하고 의식을 하는 그 신앙의 마음속에 그 때 그 때마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지혜까지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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