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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3: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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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민병석 목사 |
참고 : | http://www.bamjoongsori.org 밤중소리 |
로마서 강해95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
로마서 13 : 8 - 10
서 론 :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빚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빚이란 무서운 존재입니다. 성경에는 빚에 대한 교훈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잠22:1). 갚아야 할 것은 하나의 빚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갚지 않을 때에는 어려운 곤혹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 어느 선지자의 아내의 경우를 보면 남편이 진 빚 때문에 어린 두 아들이 그 집 종으로 팔려 가는 딱한 사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왕하4:1-7). 빚은 대로 물려가도 갚지 않으면 안돼는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빚에 대하여 저야 할 것이 있고 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1. 우리가 져야 할 사랑의 빚
여기서 바울이 사랑의 빚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내가 빚을 진 입장에서,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갚아야 할 빚진 자, 곧 사랑의 채무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1)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도 남에게 반드시 갚아야할 사랑의 빚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의 빚은 하나님께 진 복음의 빚입니다. 이 빚이 일만 달란트로 나와 있는데 이 빚은 사람이 한 평생 노력해도 벌 수 없는 거액입니다. 이 빚을 탕감 받은 한 종이 자신에게 빚진 동관의 지극히 적은 빚 때문에 옥에 가두게 한 일에 대하여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여 준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에게 불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18:24-35). 바울은 이 빚을 복음의 빚이라고 말하면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롬1:14).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일만 달란트의 빚이란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자리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사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이 사랑을 “네 이웃에게 베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랑의 빚은 먼저 복음으로 이웃에게 갚아야 할 빚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이 이 빚을 갚는 길입니다. 바울은 이 빚을 갚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진 자의 사명을 다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고, 빚진 자가 빚을 갚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부득불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응당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차렴 복음의 빚을 갚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사랑의 빚은 용서로 갚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는 자신이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으면서도 형제의 적은 죄를 용서치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종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탕감 받은 죄는 반사적으로 우리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므로 갚아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죄의 용서는 어느 한계가 없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마18:21,22).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사랑을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4) 다음에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는 일이 이 빚을 갚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잠19:11). 사랑에는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요일3:17). 마태복음 25장에는 양과 염소를 가르는 최종적인 심판의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은 천국을 소유할 양떼들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너희가 마시게 하였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내가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아보았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이 같은 말씀에 그들은 놀라면서 우리가 언제 주님께 대하여 그같은 일을 베풀었나이까? 고 물었을 때에 주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어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질문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우리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진실함을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율법을 다 이룬다.
성경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말씀은 참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려는 율법사의 물음에 대하여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처럼 말씀해 주신 일이 있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1) 율법은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입니다. 그 내용인즉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하지 말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계명은 모두 인간이 갖추어야 할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런 율법적인 계명을 능히 이기고 오히려 이웃에게 보다 차원이 높은 선을 공급해 줍니다. 이 모든 율법적인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통하여 얻고자 한 의는 외식적인 것으로 주님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2) 사람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하여 적절하게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12:4-6). 이런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 같은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예수님은 그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신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분이시며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우리를 귀히 보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뜨거운 사랑으로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사랑의 빚을 갚는 아름다운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같은 생활은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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