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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출13:17-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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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3장 17절-14장 9절.
참조: 신 6장 4절-9절. 신 28장 1절-2절.
출13장 17절-14장 9절: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찌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 새 특별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신 6장 4절-9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신 28장 1절-2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명기만 설교함)
(앞부분 일부 녹음 안 됨)
확실합니다. 틀림이 없어요.
.....현재에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러면 그것이 거짓이냐?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을 위해서, 영적인 면에서 준 것이지 육을 위해서 준 것은 아니지요. 영을 위해서도 주고 육을 위해서도 준 겁니까? 영을 위해서 준 겁니다. 틀림없어요?
우리 성도들이 최종적 궁극적으로 소원하고 바라는 것은, 궁극적 최종적 결과적인 것은 죽음의 선 저 넘어 천국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사는 것은 그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이 살아있을 그 때를 목적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겁니까?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도 궁극적 그 세계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되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죽음의 선 이쪽을 생각하며 말씀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의중에 적중한 신앙사상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뭔가가 이 세상의 것이 눈에 확 띠게 펴지는 것을 은근히 바라는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것이 속에 들어있으면 그게 내 영을 대적해서 깔금작 깔금작 하는 그게 나옵니까? 그게 자기 속에 들어 있을수록 사는 게 기쁨일까요? 고통이에요. 고통.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게 세상적인 요소가 아니고 자기 속에서 마음이 기울어지는 그게 있잖아요. 자기 속에 그런 요소가 들어 있을수록 자기에게는 궁극적으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뿐이에요.
건강한 사람에게 병균이 들어오면 고통이 생기지요? 그래서 그런 것을 알라고 우리에게 병을 주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건강한 사람은 고통이 오는 병균이 들어와도 이기잖아요. 그러나 병균이 들어오면 열나고 자기에게 진통이 오지요. 자기에게 그만큼 세상적인 요소가 들어 있을수록 신앙 면에, 진리를 따라가는 그 면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그 면에 자기는 그만큼 고통이 와요. 그런 점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지름길로 가라고 그러지 않고 비하히롯으로 내려가라고 그랬단 말이요. 그러나 그리로 가면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을 놀러갔던 캠핑을 갔던 장사로 갔던 경험적으로 다 알지요. ‘이리 가면 빨리 갈까’ 하고 간 사람도 많이 있잖아요.
지리공부를 한 사람들은, 또 그리로 가면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지만 모세가 인도하는 그 면에 반기를 들까요, 안 들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성도에게 복을 주고 잘 되게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하나님이시지만 홍해가 가로 놓여 있는 그리로 인도할 때에 그런 하나님, 그런 지도자가 믿어질까요? 그리로 가다가 내가 죽으면 소용이 없잖아요.
비하히롯에서 홍해를 앞에 두고 ‘투표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립시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그런 투표가 많이 나올까요, ‘블레셋 길로 돌아갑시다’ 하는 그 투표가 많이 나올까요? 여러분들 생각 같아서는 어때요? 여러분들의 신앙의 현재의 신앙만큼 돼 있는 그 상태에서의 대답이 분명히 ‘블레셋 길로 갑시다’ 그러지 않겠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왔다 갔다 해요?
이때에 다른 사람보다도 모세가 어떻게 하겠느냐? 모세 자기가 그곳의 길을 모르면 모르겠지만 빤히 알지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인들이요 성도들 아닙니까? 속에는 애굽의 이질성이 들어있지만 성도들이란 말이요. 교인들이란 말이요.
이들이 다 ‘블레셋 길로 되돌아 갑시다’ 그렇게 반기를 들고, 말하자면 데모를 한단 말이요. 그렇게 들고 일어날 때에 모세가 지도자로서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겠어요? 민주주의 방법을 안 찾겠어요? 그 때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하지 않겠느냐 그 말이요. 모세는 혹 민주주의로 할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 그런 민주주의가 통할까요? 하나님 명령은 절대적입니까?
인간 제 생각에는 ‘그리로 가면 영락없이 물에 빠져 죽는다. 물귀신이 된다. 앞길이 막막하고 희망은 없다. 나도 죽고 우리 식구들도 다 죽는다’ 하는 거지요. 만일 그 가운데 애굽백성이 있어서 애굽성을 가지고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절망적인 생각밖에 안 나오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아무리 열 가지 혹은 열한 가지 열두 가지 재앙이 일어난 것을 본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지금 ‘물에 빠져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 마당에, 자기의 생명이 직접적으로 달려 있을 때에 ‘하나님이 이적으로 날 구원해 주실 것이다’ 하는 그게 믿어지겠느냐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하신 이 성경역사는 분명합니다. 지상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기사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이, 여러분들이 이것을 보고 읽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들이 물에 안 빠지고 살아난 그게 믿어지지요? 그 역사가 믿어진단 말이요.
그러나 문제는 그 역사는 내 몸 밖에서 일어난 것이고 현재 지금 우리 앞에, 내가 사는 앞에 이런 문제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또 일어났었기도 하고요. 그랬을 때에 여러분들은 어떤 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세가 믿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진 그 신앙의 산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그게 이제 신앙의 산 체험이지요. 예언 방언한 그런 체험이 아니고.
어떻습니까? 지났기 때문에 그게 또 무덤덤합니까? 자기는 안 믿어지고 자기 고집대로 나왔는데 그 사건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신 그것이 그 때에 깨달아지면서 오늘날까지 하나님께 감사한 그 산 경험이 신앙으로 안 나오지요? 자기는 경험을 했지만 신앙의 그 산 경험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한 것처럼 그런 산 경험이 체험이 안 나오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안 나오지. 이 무슨 말인지?
그래, 홍해가 가로놓여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다’ 한 그 사건은 지났지만 그 사건이 지났을 때에 하나님께 드린 그 감사 찬송이 오늘날 지금도 연속되고 있습니까? 앞으로 또 오는 사건에서 그게 안 믿어지는 겁니까? 이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 나에게 현실이 되어서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도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도리란 말이요.
모세 속에는 대립적인 지식이 나올 만도 하지요? ‘군중의 소리를 들어야 되느냐, 하나님이 소리를 들어야 되느냐? 일반적인 그 지식을 듣고 가야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지식대로 나가야 되느냐?’ 이 때 방해는 군중입니까, 지기 속에서 일어납니까? 자기 속에서 일어난단 말이요. 이게 제일 큰 문제요. 제일 큰 문제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성.
그러면 여러분들이 오늘날까지 신앙을 하면서 왔는데 오늘날 자기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지요. 또한 외부로부터도 많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도 외부로부터 오는 소리가 아닙니까? 이럴 때 내가 어느 주장의 소리를 내 마음 속에서 듣고 있는지? 이 자리에 앉아있어도 이 소리만 듣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자기 속에서 들어지는 그 비중성이 있어요.
여러분들, 이게 다 성경해석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큰 음성으로 외처 가라사대’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다’ 하는 이건 기차의 기적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말하는 것이냐? 하늘에서 번개치고 우뢰가 운다고 하는 걸 그런 소리로 연상을 하면 안 된단 말이요.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소리는 영적인 생명의 소리이기 때문에 소리 음성 자체는 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자기 속에서 세상의 그 어느 음성보다도 크게 비중을 차지하고 들려오기 때문에 그 소리가 큰 음성이고 큰 소리란 말이요. 이해갑니까? 그런 식으로 보면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실감이 날 거요. 오늘날 자기는 어느 소리를 크게 듣고 있느냐?
여러분들, 교인들 많이 만나보지요? 가만히 대화하다 보면 ‘아, 이 사람은 기복주의 주장의 소리를 크게 듣고 있구나.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 소리를 크게 듣고 있구나. 아, 이 사람은 옳은 것을 찾는다고 하면서 어떤 면에 대한 비중성이 더 크구나’ 그런 것이 나온단 말이요.
이 사람 속에서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뭐냐? 실지로 병이 들어서 앓지는 않고 있지만 소리를 가만 듣고 보니까 ‘아, 저 사람이 마음이 병을 앓고 있구나’ 그거 알 수 있잖아요? 몰라요? 단순히 ‘그 사람 고집이다’ 그렇게 몰아붙여 버립니까? ‘이건 세상소리다’ 그냥 그렇게만 몰아붙입니까?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의 주장이고,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병을 앓고 있고, 또 저렇게 보면 영적인 면에서 뭐가 허구성이고 그렇단 말이요. 구원도리로 보면 그렇단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화구원, 입어야 할 구원, 사상적으로 또 느낌적으로, 오각의 오감적으로 영적인 면에서 입어야 할 구원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다양하고 세밀하고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만이요? 이거 짐승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짐승이야 짐승.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제일 괴로운 사람이 목사에요. 목사 가정이 본이 못 돼 놓으면 목사 소리가 자꾸 작아져요. 여러분들 가정은 목사 가정보다는 책임이 덜하지요. 그러니 목사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그만큼 고통이지. 그러나 깨달으면 자기는 남이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지요. 거기에서 빗나가기 시작하면 자기는 불신자보다도 더 못한 하나님의 재앙이라든지 진노라든지 고통을 받을 수가 있어요.
여러분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꾸중을 많이 합니까, 알 만한 사람이 안 했을 때 꾸중을 많이 합니까? 그게 인간의 세계요. 예배드리는 분위기도 가만 보면 목사자식들이 예배태도가 제일 나빠요.
여러분들도 경험이 많이 될 거요. 아무리 개떡 같은 목사라도 그 목사소리 안 듣고 뺀질뺀질하고 있으면 반드시 시험이 들어요. 어떤 시험이 들어도 들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만큼 자기가 못 듣고 못 깨달으면 자기는 그만큼 둔해지는 거라. 모든 면에 사상적으로 그렇게 생활이 돼나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이요. 그래서 목사를 보면 점쟁이 같아요. ‘아 저렇게 가다가...’ 그게 보이는 거예요. 신앙의 태도에서 그 사람의 사상이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보면요 눈이 말똥말똥 해가지고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은 집중성이 있잖아요? 그런 정신이 연속적으로 돼나가면 그 사람 참 빨리 자랍니다. 깨달음이 많고 빨리 자라고 속에서 그 신앙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그 사람은 그 정신이 생활을 해 나가는 거지요. 그런데 예배태도부터 말씀 받는 자세부터가 틀려놓으면 그건 볼 장 다 본 거예요. 영리한 게 어디 있어. 그건 벌써 밀려나가는 거예요.
여러분들, 찬송 부르는 거라든지 하나님 앞에는 모든 것이 긍정이고 전부는 살아나는 거예요. 여러분들, 우리가 꼭 그 목적을 두지는 않지만 새벽기도 나가면 건강해집니까? 건강해져요, 안 해져요? 건강해지지요. 그럼 건강해지려고 새벽기도 나가는 겁니까? 신앙에 불이 붙어서 깨닫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고 하는 그 정신에 새벽기도를 나가다 보니 모든 것은 이겨져요. 웬만하면 다 이기고 나가요. 이겨지면 그것이 자기가 돼 나가는 거고.
여러분들, ‘A형이다 O형이다 AB형이다’ 하는데 그 피가 그대로 있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고혈압이고 저혈압이고’ 하는데 고혈압이면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고혈압입니까? 어제 그런 면에 얘기를 하는 의사가 많이 연구를 하고 말하는 거지요. 의사 앞에 와서 고혈압인지 저혈압인지 재면 전부 다 올라간대요. 고혈압이 된대요. 그게 다 일리가 있어요.
여러분들, 달음박질을 세게 하면 맥박이 빨리 뛰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가 싫어하는 어떤 흥분적인 성깔을 만나면 피가 기분 좋은 평상시대로 돌겠어요? 여러분들, 밥 먹고 체했을 때 그 피가 맑고 깨끗합니까? 수시로 변한단 말이요. 왜 그러냐?
그러니까 예배드리는 분위기 자체도요 하나님 앞에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을 공경하되 몸과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해서. 그렇지요? 여러분들, 찬송 부르는 시간에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 찬송 부르는 기분이 있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찬송은 감사함으로 힘 있게 부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예배는 왜 줬느냐? 성도에게 모든 면에 유익인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신령한 것을 주기 위해서, 또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것을 받게 하려는 그게 있고, 또 하나는 스트레스 해소가 거기 들어있고, 또 하나는 육체의 건강회복이 거기 또 들어있어요. 없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걸 우습게보지 말아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거, 그리고 또 말씀 전하는 자가 진리이치를 전하면 자기 속에서 생각 사상이 세밀해지고 지혜적이고 지식적인 것이 밝아지고 깨달아지고.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생활면에 물질 면에 인간 면에 깨달아진 대로 그게 또 쓰여 나가고, 쓰여 나가니 사랑받는 자가 되고, 사랑받는 자가 되니 사람이 기쁘고 평안하고 즐겁고. 다 연관성이 있다 그 말이요.
우리 성도가 예배드리는 자세부터 틀어져 놓으면 그거는 소용없어요. 예배드리는 정신이 바로 돼 놓으면 성령님이 임하는 거고,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거고, 그러나 그게 안 돼 놓으면 아무리 예배드리고 나가는 거지만 마귀하고 같이 나가요. 성경에 있지요? 마귀하고 같이 나가.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군중들이 주장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지? 내 속에서 누구의 소리가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있느냐? 자기 속에서 누구의 소리가 더 크게 여겨지고 있느냐? 이런 것을 자기 속에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하히롯으로 가라.’ 말씀이 이렇게 올 때에 이게 사건적으로 들리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인격으로 들리는지? 받는 내 입장에서 그 말이요. 현재적으로 우리는 삶 속에서, 애굽 같은 이 세상에서 신앙 사상적으로 신앙 성분적으로 실질적으로 이런 상황을 경험을 하고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비하히롯으로 가라.’ 이 명령이 사건화 되어서 나에게 올 때는 꼭 내 육신의 목숨을 끊어버리려고 하는 소리 같고 나를 죽이는 소리 같이 들려지기 쉽다 그 말이요. 안 그래요? 이럴 때 ‘하나님의 자비다’ 하는 이게 믿어지느냐? ‘이 세상 모든 사건 환경은 어떤 환난 역경이라도 아무리 큰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하는 목적으로 준 것이다’ 그렇게 아예 못을 박아놔 버려요.
그러면서 이제 거기에서 사건과 대립을 일으키지 말아라. 사건과 대립을 일으키지 않는 걸 예를 들면 권투장에 선수가 둘이 나가잖아요? 하나는 믿는 사람이고 하나는 안 믿는 사람이다 할 때 하나님 말씀이 ‘대립성을 일으키지 말아라. 충돌 마찰을 일으키지 말아라’ 그랬단 말이요.
그랬을 때에 권투장에 나가서 싸우려고 하는 믿는 사람의 자세가 권투 글러브를 끼고 나가서 가만있어야 됩니까? 가만있으라고 그 장소에 보낸 겁니까, 얻어맞으라고 보낸 겁니까? 어떻게 하라고 보낸 겁니까?
대립은 언제 일어나는가 하니 힘이 비등했을 때 일어나. 그런데 내가 상대를 이겨버리면? 그건 대립이 아니지. 즉 한 쪽이 세상을 ko시켜 버리면 그건 대립이 아니지요. 둘 다 똑같으니까 대립이 나오는 거지. 실력이 월등해야 이기고 피하고 때려눕히고 그러지요? 거기에는 실력이 있고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인간세상이 나에게 도전해 올 때에 나는 피해만 보고 있어야 됩니까, 진리의 능력을 가지고 그걸 깔아 눕혀야 됩니까? 어떻게 하라고 나한테 보낸 거요? 어떻게 하라고 그 사건을 일으킨 거요? 진리 가지고 사랑 가지고 때려 눕혀야지요.
나에게 오는 사건 환경을 인간의 편에서 보면 꼭 하나님이 날 죽여 버리고 날 망하게 하려는 것 같지만 그 사건 환경 속에는 하나님이 날 위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날 위하는 뜻이 그 속에는 있어요. 사람을 더 깨닫게 한다든지 구원도리를 더 깨닫게 한다든지 여러 가지 측면이 들어 있어요. 아무렴 경험을 안 한 사람보다도 경험을 한 사람이 더 지혜롭고 슬기가 있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만약의 경우에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애굽의 군대들이 추격을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둔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 애굽군대에게 밥이 돼서 다 죽는 거지요. 그야 뭐 말할 것도 없잖아요? 애굽군대들은 말을 타고 좇아오고 있고 이스라엘은 애들 데리고 걸어가는데 어떻게 당해낼 수가 있어요?
오늘날은 안 그렇습니까? 성화구원을 이뤄가는 것은 점차적이에요. 세상의 유혹성이나 미혹성들이 세상사상이 마치 애굽군대들이 말을 타고 오는 것처럼 나를 향해서 좇아온단 말이요. 급하단 말이요. 그럴 때에 여러분들의 신앙의 자세는 누구의 말을 믿겠느냐 그 말이요.
아무리 성화구원이 느리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 나간다면 애굽군대들은 다 죽고 맙니다. 죽여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 면에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보호가 따르는 겁니다. 문제는 자기가 하나님의 보호, 진리의 보호로 가지 않고 곁길로 나갔기 때문에 얻어터지고 제가 가서 피해를 보는 거지요. 하나님의 치리권 애정권을 자꾸 벗어나기 때문에, 말하자면 애굽군대 쪽으로 자기가 자꾸 가니까 그렇지 뭐.
하나님이 명령을 할 때는 그 명령 뒤에는 누가 책임을 지고 있지요? 하나님이. 그렇지요. 하나님의 명령 속에는 언제든지 ‘내가 책임지마’ 하는 요것이 들어 있잖아요. 책임 안 질 것 같으면 그 명령을 안 할 거 아니요.
하나님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신주주의입니다. 교회는 무슨 주의입니까? 교회는 무슨 주의요? 신주주의요, 민주주의요? 독재? 신주주의지. 교회는 신주주의인데 어떻게 보면 목사 제 고집을 하면서 ‘이게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렇게 붙이기가 쉽지요? 안 그래요?
하나님은 성도들의 육적인 면을 위해서 염려하고 걱정합니까, 영적인 면을 두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겁니까? 영적인 면이지요. 신앙이 자라게 하고 깨닫게 하고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교회가 그렇게 가르친다면 그건 하나님 말씀이고,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요. 그냥 단순한 인간 무슨 연설장에서 연설하는 하나의 인간의 말로 보면 안 되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종이다’ 하면서 맹목적은 안 돼요. 분별해서 ‘아, 이건 진리다. 저건 목사 제 소리다’ 분별을 해야지요. ‘아, 저건 목사 제 소리다’ 그렇게 들릴 것 같으면 거기 앉아 있을 필요도 없는 거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 깨달음이 오면 소리야 목사소리지만 그 소리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찾아서 나가야지요. 그게 설교 듣는 자세지요.
불과 기둥은 진리와 영감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하면서 이제 이스라엘 각 사람의 신앙성분들이 노출되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다 같이 애굽 속에 있을 때는 별로 모르잖아요. 애굽을 출발하니까 그런 성분들이 슬슬 노출이 돼요.
여러분들, 안 그럴까요? 당장 세상에서 돈 벌고 직장에서 돈 벌고 할 때는 잘 몰라요. 그런데 교회 와서 신앙의 달음질을 치니까 슬슬 노출되기 시작한다 그 말이지요. 출애굽을 하니까.
어떤 신앙들이 있느냐? 첫째는 대립적입니다. 두 번째는 호응적이 있고, 세 번째는 피동적 피동이 있고, 네 번째는 자원적 소원적이 있습니다. 그런 신앙의 경험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동은 뭐요? 자기 스스로. 피동은? 끌려가는 거. 꼭 명령을 해야 듣고. 그러나 대립성은 없어. 그런 사람도 있어요. 꼭 시켜야 만이 시키는 대로 해놓고 가만있어.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원적 소원적이 돼가지고 자기 일처럼 하는 거. 이 중에 어떤 사람이 사랑받을 거 같아요?
여러분들, 특히 여자들이 많이 느낄 수 있을 거야. 남자들 중에 그런 사람을 많이 보는데, 밥 먹고 자기 일이 아니라도 그 상 다 치우는 게 나아요, 남이 치울 때까지 가만있는 게 나아요? 어때요? 젊은 사람이 있으면 후다닥 치워야지 늙은 사람이 일어나서 치울 때까지 가만있어야 돼요? 거기에서 자기의 사랑이 따라와요. 안 그래요?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이 네 가지 등등의 사람이 있는데, 한 사건이 지나가고 또 한 사건이 지나가고, 사건이 지날 적마다 그런 사람들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자동적으로 드러나요. 자기가 드러내려고 해서 드러나는 게 아니고 가령 다르게 말하면 그 사건이 지나가면서 사건하고 안 맞으니까 사건이 그 사람을 드러내놓고 가게 돼요.
예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물감을 하얀 색깔을 좍 풀어놓고 그 안에 검은 색을 한 방울 떨어뜨려 놓으면 검은 것이 하얀 것을 드러낸 겁니까, 하얀 것이 검은 것을 드러낸 겁니까, 아니면 그게 그겁니까? 어떤 거요? 어떻게 생각을 해야 만이 자기에게 건설적이고 구원적으로 깨달음에 유익이 됩니까? 그런 것도 중요해요. 자기 기준으로 돼버려 놓으면 ‘이 사건이 내 마음에 안 맞는다’ 그렇게 되고, 그러나 하나님의 객관에 기준을 두고 생각을 하면 그 사건이 나를 드러내 버렸구나.
만일 그 사건이 안 지나갔으면, 사건이 없었으면 자기는 안 드러나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못된 그 자기는 안 드러나고 죽을 때까지 그대로 있을 거 아니요? 그러나 못된 것을 그대로 두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요. 그래서 인간사 세상 사는 것도 가만 보면 모든 사건 환경은 누구를 드러내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거지요?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과 그만큼 대립이 돼 있으면 대립이 된 그만큼 대립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사건 환경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돌아가는 거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그 사건이 나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사건인데 내가 구원적으로 이치적으로 지혜적으로 만들어지지를 못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그만큼 대립적으로 일어나는 거 아니요? 그러니 얼마나 손해냐?
그래서 그와 같은 이치로 보면 모든 면에서, 지혜라든지, 일을 처리하는 거라든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건, 사람과 물질 이런 면에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돼 있다면 나에게는 모든 사건 환경 속에서 긍정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런 사람은 자꾸 올라가는 거지. 그러나 을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고 자꾸 대립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에게는 모든 사건 환경 속에서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한 사건에서 그래요.
구약에 보니 목이 잘린 왕비가 누구지요? 와스디. 그래, 또 올라간 사람은? 에스더. 그러니까 그 한 사건이 한 사람은 그렇게 드러내주고. 한 사람은 그렇게 드러내 주지요. 성분적으로 볼 때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하는 그 사상성을 정복을 하면 그 사람은 영웅이 되지요. 다윗이 그랬지요. 골리앗을 눕혔잖아요? 그러니까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전부 다 날 위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실력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이질적인 세상적 기독교 이런 것을 볼 때에 분별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지요. 싸워야지.
그래서 저는 하나님 앞에 잘 깨닫지는 못합니다만 여러분들이 몇 명 안 되지만 제 소원성이 어쨌든 깨달아 가지고 그런 것을 볼 줄 알고 싸워서 영웅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 간절하지요. 그런 여러분들을 보고 싶어요.
오늘날 보면 제각금 다 영웅이라고 그러고 있지요?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보면 영웅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정말 다윗과 같은 그런 신앙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요. 저는 ‘예수를 믿고 편안히 살고 우리교회만 키워나가고 물질적으로 어쩌고’ 하는 그런 거는 하나도 없어요. 아예 그런 건 밟아버렸어요. 아무리 성경을 봐도 교회라고 하는 건 그게 아니니까.
사람 끌어 모아가지고 세상에서 놀지 못하는 거 교회 와서 놀게 하고, 교회 오면 즐겁고 가정으로 돌아가면 한숨만 푹푹 쉬고 하는 그런 걸 저는 원하지 않아요. 교회의 사상가지고 집에 가서도 사회에 가서도 돌격하고 정복하고 싸우고 이기고 하는 거. 저는 그런 신앙성격을 여러분들에게 원하고 있어요. 안 그러면 신앙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야 하고, 사람이 말과 행동이 이치적으로 밝아야 되고, 사상적으로 깐깐해야 되고, 도망가지 말고, 얻어맞지 말고 리드를 해야지요. 질 것 같으면 도망가 버리고, 얻어맞을 상 싶으면 도망가 버리고. 얻어맞고 질질 짜고 있으면 그게 무슨 꼴이요. 우리 성도가 어떤 성도냐 그 말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신분이냐 그 말이요.
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올라갈수록 교회에서 배워지고 깨달아지는 그 사상이 투철하고 깡깡해야 되겠는데 어린아이 때는 몰라서 그렇고, 못 깨달아 그렇고 점점 자라가면서 대학교, 사회적으로 돌아가면 사회적 세상적 사상이 홍수처럼 몰려오니까 그 속에 그냥 푹 빠져가지고 믿는 사상은 뒷전이 돼버리고, 하나님의 진리지식적 사상은 뒷전이 돼버리고. 이러면 그 사람에게는 어느 음성이 더 크게 들릴까요? 군중의 소리, 세상소리가 자기 속에서 크게 들려지고. 그러면 이거는 그 다음에 교회에서 멀어지는 겁니다. 교회에서 멀어져요.
이스라엘에게는 히브리 사상이 들어있고, 또 요셉의 신앙의 혼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손에 등용이 되어있고. 그렇다면 일을 크게 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체적인 성화를 가지는 면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되면 각성적인 영감의 감화가 있을 것이고, 또 내재적인 영감의 감화가 있을 것이고, 그런 감화 속에 모세가 또 들어있고. 그러면 그 인도받아서 나갈 수가 있지요.
신의 성품을 입는 구원은 순종으로 입어지는 겁니다. 사상적 정신적 순종은 자원적 능동적 소원적 순종에서 되어지면서, 몸 순종은 자동적으로 거기에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진리지식과 일반지식은 각기 주장을 하게 되면 이거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대립이 돼버려요. 소리는 같은 소리가 될는지 모르지만 의사성은 대립이 되는 겁니다. 기준이 다르다 그 말이요. 영에다 기준을 놓는 것과 육에다 기준을 놓는 것과 이건 다르지요. 사상적으로 다르고 목적적으로 다르고.
그래서 보면 세상 사람들은 일하는 것 외에는 힘을 쓸 줄을 몰라요. 하나님께서 어려운 일을 맡기시는 것은 일 목적이 아니고 일을 통해서 실력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지요. 그리고 일의 성공률을 가지고 하나님은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일의 성공률을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불공평이 돼버리고, 인간 편에서 볼 때도 인간끼리도 그거는 불공평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은 아니지요.
그러나 일이 크던 작던 힘 있는 대로 자기 힘을 다 기울이면 그 다음에 ‘일이 성공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그 문제는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책임질 문제다 그 말이요. 하나님이 따지 것을 내가 잡고 따져서는 안 되는 거란 말이요. 그런데 세상적으로 나가는 기독자들은 자꾸 일을 놓고 사람을 따지고 신앙을 따지고 평가하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신앙이 ‘좋네 나쁘네. 믿음이 있네, 없네’ 하고 따지고 들어가면 그게 바로 된 겁니까?
외세가 다 반대를 하고 돌아갈 때에 큰 수입을 보는 자는 모세가 큰 수입을 보고, 그 다음은 여호수아고, 그 다음은 모세를 호응하고 따라가는 그 자들이고. 이들이 수입을 본다 그 말이지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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