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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변모시키는 능력(Power To Transform the Reality)
시편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198 추천 수 0 2013.07.25 21:00:54성경본문 : | 시12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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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11월 18일 추수 감사 주일 설교
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현실을 변모시키는 능력(Power To Transform the Reality)
시편 126:1-6
1.
Happy Thanksgiving! 진정한 감사의 대상이며 또한 감사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은 매 년 '올 해의 단어'(the Word of the Year)를 선정하는데, 올 해에는 omnishamles라는 단어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이 단어를 "지속적인 실수와 착오가 만들어 낸 총체적 엉망진창 상태"(a situation that has been comprehensively mismanaged, and is characterized by a string of blunders and miscalculations)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올 해의 단어로 선정한 이유는 지금 이 세상이 그런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사상, 윤리 등 모든 면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라는 뜻입니다. 최근에 밝혀진 어느 전쟁 영웅의 추락은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지금 omnishambles라는 단어가 올 해의 단어로 성정된 시점에서 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고 또한 감사절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우 여러분 중에도 이러한 현실에 대해 공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감사절이 돌아오는데 딱히 감사할 것이 없는, 아니, 오히려 불평할 것이 더 많은 것이 우리 대부분의 삶의 형편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유 없이 설레이고 흥겹고 마냥 좋았던 감사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빛 바랜 사진처럼 기억의 한 구석에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 그런 설레임도 없고, 흥겹지도 않고, 좋을 것도 없습니다. 과거에 맛보았던 그 기쁨을 다시 맛보았으면 좋겠는데, 상황도 그렇지 않고, 마음도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감사절 예배에 오셨다면, 참 착찹할 것입니다. 감사절 예배에서는 일 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특별 헌금을 드리는 것이 교회 전통인데, 그럴만큼 경제적인 여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일까?' 혹은 '저 사람들은 형편이 얼마나 좋아서 저렇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의 상황이 엉망진창이 되니 개인의 삶이 그렇게 되었고, 외적인 삶의 형편이 뒤죽박죽이 되니 마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1621년, 53명의 청교도들이 인디언 원주민들을 초청하여 첫 추수 감사 예배를 드렸을 때 역시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 플리마우스(Plymouth)에 도착한 110명의 청교도 중에서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첫 농사의 수확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만, 새로운 땅에서 그들의 미래가 어찌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감사의 조건보다 불평의 조건이 더 많았고, 희망의 조건보다는 절망의 조건이 더 많았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들의 삶의 상황도 인간적으로 보자면omnishambles 즉 뒤죽박죽이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구운 터키와 과일들을 차려 놓고 감사의 예배를 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뒤죽박죽이요 엉망진창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손 안에서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롬 8:28)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절망의 조건이 더 많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니 희망과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불평의 조건이 더 많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보니, 감사의 정이 마음에 들어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2.
오늘 저는 그 동안 읽었던 마가복음을 떠나 시편 126편을 읽었습니다. 추수감사절 예배를 위해 정해진 본문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제목의 연속 설교를 시작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신조들(articles of the Apostles' Creed)을 하나씩 따라 가면서 우리의 믿음에 대해 확인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된 열 네 개의 시편 중 하나입니다. 이 시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순례하는 동안에 불려졌던 것들입니다.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축제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길고 고단한 캐러반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그 고단한 행군을 견디게 해 주고 또한 그 여행을 순례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이 시편들입니다. 이 시편들을 노래하며 순례자들은 장차 예루살렘 성전에서 경험하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고, 그 기대감이 여행의 고단함을 이기게 해 주었습니다.
시인은 성전을 향해 가면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많았지만, 시인은 특별히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조상들을 구해 내신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때 살았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1절)
유대인들은 주전 587년에 바빌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주전 538년에 포로 생활이 끝나고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어른으로 끌려 간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조국 땅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조국에 대한 사랑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들은 언제고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땅, 그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70년이 지났으면 이제 포기하고 바벨론 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할만도 했는데, 여전히 조국을 그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코 올 것 같지 않았던 그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바벨론의 영화가 시들어가더니 신흥 강국 페르시아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살고 있던 모든 외국인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 살아도 좋다는 칙령을 내립니다. 예언자들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통해 유다 백성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처음 조국 땅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다. 오랜 외국 생활 끝에 고향을 방문해 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그 감흥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들이 느꼈던 기쁨과 감격의 크기는 능히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말하듯, 그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때의 감격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2절)
그들을 특별히 행복하게 만들었던 일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귀환하는 모습을 보고 다른 나라 백성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 일을 하셨다. (2절)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 그리고 포로 생활이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을 때, 그들을 지켜보는 이방인들이 그들의 처지를 두고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저들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라고도 했고, "저들의 하나님은 죽었는가?"라고도 했습니다. 혹은 "저들의 하나님이 저들을 버렸는가?"라고도 했습니다.
당해 본 사람은 압니다. 나의 실패를 두고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는 것은 그래도 참겠는데, 내가 믿는 하나님을 조롱할 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참혹한 멸망을 보고 하나님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진정으로 살아 계시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 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3절)
3.
시인은 지금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오는 조상들 틈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노래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4절)
이스라엘의 지형을 모르는 사람들은 '네겝의 시내'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네겝은 이스라엘 남부 지방에 펼쳐져 있는 드넓은 사막 지대입니다. 이 사막 지대에는 수십만년 전 그곳이 비옥할 때 흐르던 강물의 길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물길이 사막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네겝의 물길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래 도록 비가 오지 않아 황량한 모래 골짜기가 되어 버린 네겝의 물길처럼 자신의 현실이 그토록 절망적이고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또한 자신을 '포로'로 봅니다.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다른 누구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시인은 지금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면서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시인을 포로로 만들고 있었는지,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죄에 속박되어 있었는지 모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포로된 것처럼 어렵게 살고 있었을 수도 있고, 치료되지 않는 질병 혹은 삶의 짐을 힘겹게 하는 장애에 갇혀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울증의 감옥에 갇혀 있었는지, 혹은 깨어지고 엉킨 인간 관계의 끈으로 칭칭 묶여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환경, 혹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달라지지 않는 삶의 늪 속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포로가 되어 살다 보니 그 인생이 마치 네겝 사막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네겝 사막'과 '포로됨'의 두 비유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상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그 상황이 한 없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지나간 허리케인 샌디처럼, 한 순간 휩쓸고 지나가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네겝 지방이 사막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가 내리지 않은 기간이 너무도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는 이 기도를 통해 희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희망하고 불평할 것밖에 없는 상태에서 감사하며 낙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용기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기억 때문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네겝 사막과 같던 사라의 태에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70년의 포로 생활로부터 유다를 건져내신 하나님--그 능력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기억했기에 시인은 네겝의 물길처럼 메말라버린 자신의 삶에 다시금 물길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70년 동안 포로로 묶여 있던 조상들을 구출해 내신 하나님이라면 자신의 포로 상태 역시 해결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4절)
4.
그런데 문제는 그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구원이 눈 앞에 나타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100살이 될 때까지 기다린 아브라함처럼,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며 430년을 가다린 조상들처럼, 혹은 포로로 잡혀 가 70년을 기다린 조상들처럼, 시인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언제 나타날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5-6절)
오늘 말씀을 위해 이 시편을 묵상하는 중에 저는 이 구절을 두고 한 동안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부리고 울며 씨를 뿌린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씨를 뿌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는 압니다. 곡식이나 채소의 종류에 따라 씨를 뿌리는 방법이 다릅니다. 망태기에 씨앗을 담아 밭에 휘휘 뿌리는 경우도 있고, 이랑을 만들어 씨앗을 하나 하나 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저도 다 해 보았지만, 눈물을 흘릴 정도로 혹은 울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보다 더운 곳이니 일하기가 훨씬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렇게 과장한 것일까요?
그것은 시인이 지금 처해 있는 네겝 사막같은 혹은 포로로 잡혀 있는 것과 같은 현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펼치셔서 행동하실 때까지 그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참고 인내하는 것은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절망적인 현실을 견디며 희망의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때로 눈물나는 일이고 때로 무너져 울어야 할 일입니다.
씨앗을 뿌린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메마른 볍씨에서 싹이 나오고 줄기가 뻗어 수백톨의 벼를 열매로 맺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경험해 본 사람만이 그것을 믿고, 그것을 믿기에 씨앗을 심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싹을 내고 줄기를 뻗어 자라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맺도록 가꾸어 줍니다. 씨앗을 심는 일은 곧 기다리는 일입니다.
절망적인 현실을 견디는 것은 마치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 될까 의심되는 일입니다. 씨앗을 심고 열매를 보기까지는 오래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견디는 것은 눈물나는 일이요 울어야 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 때는 온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까지 견디고 기다리기가 때로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림으로써 현실을 바꿉니다. 현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며 그분을 찬양합니다. 현실에 감사할 아무런 조건이 없을 때, 우리는 과거에 행하셨던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으로 믿고 기대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현실을 돌파할 힘을 주십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안에서 구원해 주신다"(God delivers us not from suffering but within suffering)라고 말입니다. 권능의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가 빠져 있는 수렁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가 오기까지 우리는 수렁 안에서
그분의 구원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어느 교우의 페이스북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요즘 일이 풀리는 걸 보면, 마치 제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착각을 합니다. 역풍일때보다 순풍일때 더 신중해야 하는데요, 자칫 바람에 묻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부족한 그릇에 차고 넘치는 은혜, 뭐라 표현해야 할지요! 더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이 교우처럼,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정이 억누를 수 없이 솟아 나옵니까? 모두들 힘들다고 하는데, 세상이 뒤죽박죽이라고들 하는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은 든든한 기초 위에 지어진 집처럼 흔들림이 없고, 창고에 곡식을 가득 채운 농부처럼 마음 든든합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그렇게 사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설마 '다 내 덕이야! 내 힘으로 이룬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이던 인생도, 요즘 말로, "한 방이면 훅 갑니다."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인용한 교우의 마음처럼, 겸손해 져서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나만의 행운에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 빠진 것 같은 이들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오늘 만난 시인의 형편같이 심각하지는 않아도, 감사할 이유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 살고 계십니까? 매일의 현실을 견디며 사는 것이 눈물 나는 일은 아닐지라도, 그다지 기쁠 것도 없고 감사할 것도 없는 형편입니까?
무료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바꿀 힘은 오직 위로부터 임합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기도하고 찬송함으로 빛 바랜 흑백 사진같은 일상을 총천연색의 일상으로 바꾸실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는 현실을 바꾸는 가장 큰 능력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시인과 같은 상황에서 사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죄에 속박되어 사시는 분도 있고, 경제적인 면에서 포로된 것처럼 사는 분도 계십니다. 치료되지 않는 질병 혹은 삶의 짐을 힘겹게 하는 장애에 갇혀 있는 분도 계시고, 우울증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분도 계십니다. 깨어지고 엉킨 인간 관계의 끈으로 칭칭 묶여 있었는 분도 계시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달라지지 않는 삶의 늪 속에 빠져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저는, 오늘 우리가 만난 시인의 노래를 묵상해 보기를 권합니다. 이 기도는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상황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려진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이 미래에 하실 일을 기대하며, 오늘의 현실을 견디고 인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그것이 때로 눈물나는 일이지만, 그렇게 씨앗을 심고 기다릴 때, 하나님의 때가 올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 현실을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올림픽 경기에서 양학선이라는 체조 선수가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그 어머니가 '형'이라는 노래를 응원가로 불러주었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무슨 노래인가 하여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더니, 마음을 찡하게 하는 가사의 노래였습니다. 남성 두엣이 부른 노래인데, 그 두엣의 이름이 '노라조'입니다. 그 이름만 보아가지고는 노래를 들어 볼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데, 알고 보니 아주 좋은 노래였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삶이란 시련과 같은 말이야
고개 좀 들고 어깨 펴 짜샤
형도 그랬단다
죽고 싶었지만
견뎌보니 괜찮더라
맘껏 울어라
억지로 버텨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
바람이 널 흔들고 소나기 널 적셔도
살아야 갚지 않겠니
더 울어라 젊은 인생아
져도 괜찮아
넘어지면 어때
살다보면
살아가다보면
웃고 떠들며 이 날을 넌 추억할테니
세상에 혼자라 느낄테지
그 마음 형도 다 알아 짜샤
사람을 믿었고
사람을 잃어버린 자
어찌 너뿐이랴
맘껏 울어라
억지로 버텨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
더 울어라 젊은 인생아
져도 괜찮아
넘어지면 어때
살다보면
살아가다보면
웃고 떠들며
이 날을
넌 추억할테니
세상이 널 뒤통수 쳐도
소주 한잔에 다 털어버려
부딪히고 실컷 깨지면서 살면
그게 인생 다야
넌 멋진 놈이야
6.
작사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인생의 진실을 상당히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이 가사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대중 가요 가사에 하나님을 넣을 수 없었겠지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지만, 해를 뜨게 하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희망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희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다만, 그 희망을 손에 쥘 때까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때로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또한 때로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기에, 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날을 맞을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 한 가지 아쉬운 구절이 있습니다. "소주 한 잔에 다 털어버려"라는 가사입니다. 현실에서 당하는 고통이 소주 한 잔에 털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한국 질병관리본부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자살한 사람의 39%가 자살 직전에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32%로 약간 낮지만, 여전히 자살한 사람 셋 중 한 사람은 술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술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술은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을 더 자극시킬 뿐입니다. 술은 삶의 현실에서 도피하는 길입니다.
네겝 사막같은 현실은 도피가 아니라 돌파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 현실을 돌파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그 믿음에서 솟아나는 감사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그렇게 구원의 손을 펼치실 미래를 기대하며, 그 믿음으로써 포로된 것과 같은 상황에서, 모든 것이 엉망진창, 뒤죽박죽 된 것 같은 상황에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으로만 우리는 현실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함께 모여 찬양하고 경배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넉넉치 않은 형편에서도 감사의 예물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팍팍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고 기쁨으로 감사절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돌아보니 감사할 것 밖에 없는 사람도, 삶의 상황이 무료하고 권태롭고 지루한 사람도, 혹은 이를 악물고 하루 하루를 버텨야 하는 사람도, 모두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가 당한 현실을 바꾸어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를 앞당겨 맛보게 해 주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참된 감사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네겝 사막같은 현실까지도 돌파할 수 있게 하는 감사의 능력을 소유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망각함으로 인해 감사의 마음이 사막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감사의 은총을 나누어 주는 귀한 감사절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을 기억합니다.
저에게 베풀어주신 그 모든 은혜를 기억합니다.
그 사랑과 은혜로
지금도 저를 붙들고 계심을 믿습니다.
비록 지금 사막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비록 지금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주님의 시간에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줄 믿습니다.
오, 주님,
저희로 하여금
눈물로 씨 뿌리는 일을 지속하게 하소서.
울더라도 희망의 씨앗을 계속 뿌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눈물이 그치며
울음이 웃음으로 변하는 날을 보게 하소서.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멘.
<속회자료>2012년 11월 18일 추수 감사 주일 설교
"현실을 변모시키는 능력"(Power To Transform the Reality)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301장(통 460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시편 126편을 읽고,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당신에게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나 표현을 찾아 보십시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가장 인상 깊었던 추수 감사절의 경험을 하나씩 이야기해 보십시오. 지금 감사절을 맞는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3) 당신의 삶의 형편은 시인의 형편에 비해 어떻습니까? 현실을 돌파하는 능력이 감사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이번 감사절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5. 기도
1) 네겝 사막을 지나는 것 같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십시오.
2) 물질에는 절제되고 의미에는 풍성한 감사절을 보내도록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391장(통 446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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