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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Due to Love)

골로새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67 추천 수 0 2013.07.25 21:00:54
.........
성경본문 : 골1:24-29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2년 12월 30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무엇을 믿는가?'(5) 
사랑 때문에(Due to Love)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골로새서(Colossians) 1:24-29

1.

오늘로 우리는 2012년을 보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형편은 각각이지만, 한 가지 사실은 동일합니다. 산다는 것은 수고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평탄한 길을 걷고 있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평탄한 길이 되게 하려고 충분한 값을 치루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화려한 꽃밭에서 행복을 맛보고 있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꽃이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고 계십니까?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형편이 어떻든지, 모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가리켜 '고해'(苦海)라고 부릅니다. 고통이 가득한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정확한 현실 인식입니다. 성경도 인생에 대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도서'(the Ecclesiastes)에는 이같은 현실 인식을 담은 말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최고의 수준으로 누려 본 솔로몬 왕이 '전도서'에서 이렇게 한탄합니다.

나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살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지혜가 늘 내 곁에서 나를 깨우쳐 주었다.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다 자랑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수고하여 얻은 나의 몫인 셈이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 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 (전 2:9-11)

세상에서 애쓴 모든 수고를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는 실망뿐이다. 수고는 슬기롭고 똑똑하고 재능있는 사람이 하는데, 그가 받아야 할 몫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차지하다니, 이 수고 또한 헛되고,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속썩이지만, 무슨 보람이 있단 말인가? 평생에 그가 하는 일이 괴로움과 슬픔뿐이고, 밤에도 그의 마음이 편히 쉬지 못하니, 이 수고 또한 헛된 일이다. (전 2:20-23)

여러분 중에는 이 고백을 들으면서 구구절절 공감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아직 잘 공감하지 못하는 분들도 머지 않아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살이의 쓴 맛을 어느 정도 알아야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악담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처 투성이의 인간들이 깨어진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생 살이는 말 그대로 수고와 고생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말은 고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매일같이 발버둥치며 노력하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고생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혹은 '고생을 면하기에 가장 유리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 와서 몇 년만 뼈 빠지게 고생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미국에 와서 반백년이 넘게 살면서 미국 사회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넉넉한 재산을 모은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분들에게는 고생과 수고가 전혀 없고, 매일 꿈 같은 행복을 누리고 있던가요? 아닙니다. 그분들에게는 그분들 나름의 고생과 수고가 있습니다. 고생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늘 말하듯, 고생은 무덤에나 가야 끝이 납니다.

2.

인생에서 겪어야 하는 고생과 수고는 다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지워진 고난'이 있습니다. 태어난 형편과 처지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생과 수고를 말합니다. 천성적으로 약한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장애를 지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땅에 태어나 고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난한 가정 혹은 분란이 심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어릴 적부터 풍상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알고 보면 이 고생과 수고를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나만'이라는 생각입니다. '나만' 혹은 '내 가족만' 이 고생에서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 나와 내 가족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이민 생활을 하면서 친구 사이가 원수 사이가 되고 형제 자매 사이가 갈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생과 수고를 벗어나려는 절박함이 너무 크다 보니, 때로 눈이 머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워진 고난과 수고'에 대해 좀 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 나 혼자만 고생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고생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고생해야 합니다. 내가 당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만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 모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생과 수고가 우리 사회에서 줄어들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고 뭔가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욕심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병을 얻기도 하고, 사업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족하고 살았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욕심으로 인해 자녀를 망가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혹을 잘 못 다루어 가정을 깨뜨리기도 하고, 감정을 잘 못 다루어 외톨이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큰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고난은 우리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생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1:15)라고 말했습니다. '잠언'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4:23)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지키면 안전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있고 비틀려 있고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이 나왔으며, "마음이 마음같지 않아!"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수양을 하고 노력을 해도 자꾸만 욕심에 끌리고 불필요한 고생을 자초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거듭나야 하고, 속 사람이 지속적으로 자라도록 믿음의 길에 정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타락한 마음은 관리할 대상이 아니라 변화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짊어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고생을 감당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생을 자초하기까지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프지 않고 사랑할 방법은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고생이라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 고생과 수고를 기꺼이 감당합니다. 때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예배당에 와서 이곳 저곳을 닦고 치우는 분들을 봅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숨은 자리에서 묵묵히 감당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거룩해 보이는지요! 그런 사랑 때문에 교회가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고생과 수고를 기꺼이 감당합니다.

자신의 가족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가족을 위해 고생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은 훌륭하다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교회를 위해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들은 존경할만 합니다. 같은 이유로,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고생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칭찬할 만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가족이 아닙니까? 자기 교회가 아닙니까? 자기 직장이요, 자기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 때로 자기와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외국에 나가 온 가족이 선교사로서 생을 바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한 민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선교사의 길로 나선 사람들 앞에 서면 저는 자주 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그들을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결단한 그들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에 비하면 저의 사랑은 참으로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고난이 인생이라는 패키지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고난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산다는 것은 곧 수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수고를 왜 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3.

저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제목으로 '사도신경'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고백의 전반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렇게 고백한 후에 '사도신경'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이어갑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고백 후에 곧바로 그분이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고백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 중 두 가지가 특별히 중요합니다.
첫째,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사도신경'에 올려 수 천 년 동안 예배 때마다 그를 공개적으로 정죄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주일에 다루려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생애를 "고난을 받아"라는 한 마디로 요약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라는 구절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전도하시고 가르치시며 치유하셨다"는 핵심 활동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생략하고 "고난을 받아"라는 한 마디로 그분의 생애를 요약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고난을 받아"라는 표현이야말로 그분의 전 생애에 대한 가장 탁월한 요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할 것처럼, 산다는 것은 곧 고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의 삶 전체를 헌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인생은 고난 자체였습니다. 그분에게는 놀라운 지혜와 능력이 주어졌지만, 그것이 그분의 수고를 덜어 준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마법을 부리듯 툭툭 치고 다니면서 치유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 의해 한 사람이 치유될 때마다 그분에게서 엄청난 힘이 빠져 나갔습니다. 전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신 모든 활동은 그분의 생명을 갉아 먹는 일이었습니다.

빌라도에게 받은 고난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된 고난의 여정이 지속된 것이고 또한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이 세상과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셨고, 그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게 만들었습니다. '고난'을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분은 고난을 자초하였고, 고난의 끝까지 가셨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고난을 받았다"는 한 마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요약하는 말로써 가장 적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분은 30여년의 생애 동안 늘 고통 속에서만 산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기쁨도 느끼셨고, 때로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하기도 하셨습니다. 한가로이 물러앉아 고요를 즐기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즐기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곧 일어나 사랑이 이끄는 길로 가셨고 사랑이 이끄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길에 고난이 기다리고 있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분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가리켜 '고난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고백할 때,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그 고난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고 그 사랑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 주님,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위해 고난 받으셨으니, 그 사랑에 항복합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참된 만족을 얻고 참된 쉼을 얻게 됩니다. 인간은 사랑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랑은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조잡한 모조품일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채 인간의 사랑에 목매고 사는 사람은 결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는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실망시킬 때라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주시는 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의 힘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고난받기까지,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온갖 두려움과 외로움을 사라지게 할만한 큰 힘입니다.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또한 그분을 닮아 오직 사랑으로 살고 사랑 때문에 고난을 기꺼이 짊어지는 인생을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분처럼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 할 때, "그는 우리를 사랑했고 그래서 고난을 받았다"고 적는다면, 우리는 진실로 우리의 믿음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속에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골 1:24)

사도 바울의 일생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 때문에 고난 받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난 속에서 놀라운 비밀을 경험했습니다. 교회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님을 위해, 다른 영혼들을 위해 고난 받는 중에 신비로운 기쁨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은 것을 기쁘게 여긴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29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비밀이 있습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면, 주님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수고와 고생을 자초하게 만듭니다. 희생도 마다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렇게 사랑 때문에 수고와 고생을 감당하다 보면, 그 안에서 신비로운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때로 지치지만 그래도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5.

우리 말 중에 영어로 충분히 번역되지 않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수고했다" 혹은 "애썼다"라는 말입니다. 경상도 사투리로는 "욕봤데이!"입니다. 누군가가 사랑 때문에 나를 위해 수고했을 때, 감사하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말할만큼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누군가가 나의 작은 수고를 알아준다는 것도 또한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해마다 잠시라도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며칠을 함께 지내고 떠나 올 때, 아버님께서 늘 그러십니다. "애썼다. 고맙구나!" 제가 수고한 것은 별로 없지만, 아버님께서 그렇게 느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 말이 저에게는 참 큰 위로입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네가 아들이 되어 그 정도도 못하느냐? 당연한 게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수고를 크게 받아들이고 "애썼다! 고맙구나!"라고 말씀해 주실 때, 저에게는 더 큰 사랑이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이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감당한 작은 수고와 희생을 두고 주님께서 "수고했구나! 참, 고맙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세상은 다 가진 것 같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결산할 때, 그분은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내 수고는 무엇을 위한 수고이며, 하나님께서는 내 수고에 대해 뭐라고 말하실까?

태어난 환경과 조건 때문에 혹은 살아가면서 얻은 불행 때문에 고생하며 살았던 분들이 하나님께 이를 때면, "참, 고생이 많았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 고생을 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자신에게는 없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그 고생을 감당해 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간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생을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지지 않아도 될 고생과 수고의 짐을 지고 사신 분이 하나님 앞에 이른다면, 하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수고 많았구나! 헌데, 그러지 말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 네 인생을 허비하고 말았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안타까운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를 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떨까요? "참, 수고가 많았구나. 너의 사랑이 너로 하여금 큰 고난을 감당하게 했구나. 너의 고난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고생이 덜어졌으니, 참으로 장하구나. 고맙다. 내 뜻을 그렇게 잘 받들어 주었으니! 이제는 내 집에서 쉬거라."

이번 성탄절에 우리 교회 장로님 중 한 분께서 뉴욕에 있는 자녀들을 방문하시는 중에 저에게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지난 주 설교를 듣고 당신이 느낀 바를 적어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의 허락을 받고 그 메일의 일부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한 노인의 참회록'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편지의 말미에서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교회 봉사 뿐만 아니라 사회 봉사와 사회 정의에 관심을 두고 기독교인다운 본을 보이고 믿음과 실천이 조화된 생활을 해야된다고 생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 생활을 돌이켜 보면 영적 훈련이 결핍되었던 것 같습니다.  내 영적 생활에 경견함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 기관의 큰 지위를 맡고 늘 분주 하게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주님을 잃은 적이 많았고 교회 모임에 참여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이제 예수의 제자로서의 본질을 재인식하고 데렉 레드몬드처럼 신앙의 경주를 지속하여야 하겠습니다. (중략)

저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힘차게 값있게 살아 보려고 노력해 왔고 또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 개인의 안락 보다도 이웃과 사회 복지를 위해서 봉사해 보려고 제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값있게 진실하게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숨도 많이 짓고 낙심도 했고 육신으로 많은 피곤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성취의 영광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려움과 피곤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삶도 똑같이 되풀이하려고 합니다. 기진 맥진 할 때까지, 내 힘이 감당 할 수 있을 때까지, 쓰러질 때까지 참되고 값있는 삶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장로님의 마음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같은 마음으로 지난 한 해를 정리하고, 다가오는 새 해에는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랑 때문에 수고하기를 기뻐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더욱 거룩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되며, 몸된 교회가 더욱 왕성하게 사명을 이루고, 그로 인해 주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는 역사가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가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수고했다. 참 잘 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어 고맙구나." 이 음성을 들을 때, 우리 마음 안에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이 솟아 오릅니다. 생명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열정이 솟아 오릅니다. 그 맛으로 헌신하는 것이고 희생하는 것이며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관되게 살아갈 때, 우리의 무덤가에서 누군가 우리의 삶을 요약하여 "사랑 때문에 고난 당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받으신 찬사를 우리도 받게 된 것이니 말입니다. 또한 인생의 모든 경주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을 때, 그분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욕봤데이. 참, 고맙데이!" 인생의 성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의 왕이신 주님,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저희를 사랑하신 주님,
저희로 하여금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그 사랑 때문에
저희도
고난받기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2012년 12월 30일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5)
"사랑 때문에"(Due to Love)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329장(통 267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골로새서 1장 24-29을 읽습니다. 바울 사도가 채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세 가지의 고난 중에서 당신은 지금 어떤 고난을 가장 많이 겪고 있습니까?   
3) 지금 하나님 앞에 간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수고에 대해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4) 설교에 인용된 어느 장로님의 글을 다시 읽고 당신의 느낌을 말해 보십시오. 
5. 기도
1) '주어진 고난'을 기꺼이 감당할 힘을 구하십시오. '욕심으로 인한 고난'을 겪지 않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2) 주님을 위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고난 받기를 기뻐할만한 사랑을 구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341장(통 367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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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7 고린도전 다양성과 조화 고전12:12-31  한태완 목사  2013-07-26 2170
9496 마태복음 이유 있는 낙관주의(Optimism with Reasons) 마24:45-51  김영봉 목사  2013-07-25 2172
9495 사도행전 내 앞에 그 보좌가 있다(His Throne Is Before Me) 행1:9-11  김영봉 목사  2013-07-25 2079
9494 고린도전 내 안에서 그를 보라(See Him Within Me) 고전15:3-8  김영봉 목사  2013-07-25 2141
9493 호세아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Between Friday and Sunday) 호6:1-3  김영봉 목사  2013-07-25 2492
9492 베드로전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 밷전3:18-22  김영봉 목사  2013-07-25 2868
9491 마가복음 죽어 놓고 산다(We Live After Being Dead) 막15:42-47  김영봉 목사  2013-07-25 2074
9490 이사야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Key to the Kingdom of God) 사53:4-7  김영봉 목사  2013-07-25 2297
9489 요한복음 우리가 속한 나라(The Kingdom We Belong) 요18:33-40  김영봉 목사  2013-07-25 2303
» 골로새서 사랑 때문에(Due to Love) 골1:24-29  김영봉 목사  2013-07-25 2467
9487 빌립보서 내가 안다(I Understand) 빌2:6-11  김영봉 목사  2013-07-25 2280
9486 마태복음 우리로는 안 된다(No Hope In Us) 마1:18-25  김영봉 목사  2013-07-25 2325
9485 요한복음 믿음의 원점(Ground Zero of Faith) 요20:24-29  김영봉 목사  2013-07-25 2434
9484 히브리서 크레도 에르고 숨 (Credo Ergo Sum) 히11:1-3  김영봉 목사  2013-07-25 2846
9483 시편 현실을 변모시키는 능력(Power To Transform the Reality) 시126:1-6  김영봉 목사  2013-07-25 2198
9482 레위기 내려놓음의 복 레18:1-23  최장환 목사  2013-07-24 3243
9481 출애굽기 동행할 친구 출38:1-20  최장환 목사  2013-07-24 2497
9480 시편 크리스천의 나라사랑 시33:12  한태완 목사  2013-07-24 1920
9479 요한일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자 요일3:16  한태완 목사  2013-07-22 2456
9478 출애굽기 교회는 민주주의냐, 신주주의냐? 출13:17-14:9  김경형 목사  2013-07-22 1917
9477 누가복음 진짜 크리스천 눅14:26-27  한태완 목사  2013-07-21 2246
9476 로마서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 롬16:1-27  민병석 목사  2013-07-21 1789
9475 로마서 한 몸의 지체를 이루는 성도들 롬12:3-5  민병석 목사  2013-07-21 2601
9474 로마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예배 롬12:1-2  민병석 목사  2013-07-21 2290
9473 로마서 권세 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 롬13:1-7  민병석 목사  2013-07-21 1677
9472 로마서 사랑의 사회생활 롬12:14-21  민병석 목사  2013-07-21 1348
9471 로마서 사랑의 생활 지침 롬12:9-13  민병석 목사  2013-07-21 1365
9470 로마서 지체로서의 은사 롬12:6-8  민병석 목사  2013-07-21 1441
9469 로마서 축복의 사자 롬15:22-33  민병석 목사  2013-07-21 1381
9468 로마서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 롬15:15-21  민병석 목사  2013-07-21 1776
9467 로마서 로마교회가 받은 칭찬 롬15:14  민병석 목사  2013-07-2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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