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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

베드로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856 추천 수 0 2013.07.25 21:00:54
.........
성경본문 : 밷전3:18-22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3년 2월 10일 주일 설교
담임 목사 김영봉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9)
하늘, 땅 그리고 땅 아래(Heaven, Earth and Under the Earth)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
베드로전서 3:18-22

1.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우리 말 '사도신경'에는 원문에 있는 문장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영어 번역본에서는 주로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로 직역하면 "그는 지옥에 내려 가셨다"가 됩니다. 

왜 이 고백문이 개신교의 '사도신경'에서는 삭제되었는지, 그 경위가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 시작은 1792년에 미국 감리교회(American Methodist Church)의 결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미국 감리교회는 찬송가를 편찬하면서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고백문을 '사도신경'으로부터 삭제하기로 결정했고, 그 이후 거의 2백년 동안 그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이 결정에는 나름대로의 신학적 이유와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고백문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어에서 hell이라고 번역된 라틴어 inferne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 의견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둘째, 이 고백문에 대한 성서적 근거가 약합니다. 이 고백문과 연결지을 수 있는 성경 구절을 다 긁어 모으면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3장 19절, 4장 6절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51-53절이 전부입니다.

역사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 고백문이 가장 늦게 첨가되었고 또한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사도신경' 사본은 주후 337년 경에 쓰여진 것인데, 그 때까지만 해도 이 고백문이 없었습니다. 이 고백문이 '사도신경' 안에 확고히 자리를 잡은 것은 주후 750년의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과 함께 가장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에는 이 고백문이 없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이 구절을 삭제하는 결정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1989년에 찬송가를 개편하면서 이 고백문을 회복시켰습니다. 다만,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번역대신 He descended to the dead라고 번역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 사용되는 연합감리교회 찬송가 부록에 보면, Traditional Version이라는 이름으로 된 '사도신경' 본문이 있고, Ecumenical Version이라는 이름으로 된 '사도신경' 본문이 있습니다.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고백문이 빠진 것이 Traditional Version입니다. 지금 연합감리교회에서는 이 고백문이 회복된Ecumenical Versio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배경에서 눈을 한국 기독교 역사로 돌려 보십시다. 1887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후, '사도신경'은 비공식적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에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동일한 찬송가를 사용하기 위해 <합동찬송가>를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감리교 대표들이 미국 감리교회의 전통을 따라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구절을 삭제하자고 제안했고, 장로교회 대표들이 이 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천주교의 '연옥'(purgatory)의 교리를 견제하기 위해 이런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고백문을 삭제했던 미국 감리교회는 30년 전에 이 고백문을 회복시켰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도 그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민 교회에서 영어권 자녀들과 합동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할 때면, 이 부분에서 박자가 맞지 않아 주춤 거리곤 합니다. 이 고백문이 없는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이 고백문이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연옥의 교리와 혼동할 염려도 있고, 성서적인 근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세계 교회와 같은 정신으로 가려면 이 구절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고백문이 여러 가지로 잘 못 해석될 수 있지만 우리가 믿는 믿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차원에 대해 고민하게 해 줍니다. 이 고백문을 넣어야 한다고 믿은 사람들에게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2.

이 고백문이 영어 '사도신경'에서는 대부분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 inferne는 '아래'(on the lower side, below)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지옥'으로 번역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에서는 He descended to the dead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다"라는 뜻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저승에 가시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우리 말 사전에 보면 '저승'을 "사람이 죽은 후에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고성소'(古聖所, 림보)라고 번역했습니다. '고성소'는 심판이 유보된 사람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 즉 연옥(purgatory)을 말합니다. '고성소'라는 번역을 포기한 배경에는 예수께서 연옥으로 내려 가셨다고 해석하지 말라는 뜻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믿음에 의하면, '저승'은 연옥과 지옥과 낙원을 모두 포함한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 고백문의 가장 큰 문제는 라틴어 inferne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문을 만든 사람이 일부러 inferne라는 모호하고 포괄적이며 비유적인 단어를 택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 후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세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 세계가 전부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논의가 무의미한 시간 낭비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물질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이견이 없는데, 죽음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생겼으며, 죽음 이후에 우리의 영혼이 어떤 상태로 변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가장 믿을만한 참고서입니다만, 성경 자체도 이 문제에 대해 딱 부러진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한 편에서는 죽은 후에 곧바로 천국에 가는 것처럼 말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죽은 후에 잠 자는 상태로 있다가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 것처럼 말합니다. 종종 이 둘 중 하나만을 택하여 그것을 절대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천주교는 매우 정교한 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그 사람이 살아 생전에 쌓은 공덕에 따라 다른 운명을 맞습니다. 곧바로 천국에 가는 사람도 있고, 최종 심판이 미루어진 사람도 있으며, 곧바로 지옥에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죽은 이후의 세계에는 '천국'과 '지옥'만이 아니라 '연옥'과 '낙원'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기를 꺼립니다. 성경에 없는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와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개신교회가 취해 온 태도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의 저자들 중에 죽음 이후의 세계를 직접 보고 기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기록한 것이 실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죽음 이후의 세계는 너무도 광대하고 신비롭기 때문에 한 면을 보고 다 보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라틴어 inferne를 '지옥'으로 번역하는 것도 옳지 않고, '고성소'라고 번역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저승'이라는 말이 더 낫기는 합니다만, 이 단어는 전설과 민담에서 너무 많이 사용되어 오해의 여지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연합감리교회에서 채택한 번역이 제일 좋습니다.

He descended to the dead.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가셨다.

이 번역이 좋은 이유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어지는 고백문과 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고백문을 만든 사람들이 inferne라는 모호한 단어를 사용했으니, 번역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관한 고백을 제 말로 번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습니다.
사흘만에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3.

그렇다면, 이 고백문에는 어떤 믿음이 담겨 있습니까? 우리가 세계 교회와 함께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까?
첫째, 우리는 이 고백을 통해 인생이 육신의 목숨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의 목숨으로 모두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됨으로써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의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크고 우리의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태아에게 우리와 같은 의식이 있다면, 태아는 열 달 동안의 생이 전부이고, 어머니의 자궁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고 태아 시기와는 전혀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태어날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이 죽는 것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울면서 태어나는 것인가요?

죽음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세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죽음은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한 산고(birth-pang)가 아닐까요?

저는 목사로서 임종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 볼 기회를 자주 갖습니다. 그것은 목사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우들의 임종 과정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인간이 매우 신비로운 영적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차원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임종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의 눈에 씌였던 비늘이 말끔히 벗겨져 하나님 나라를 환히 보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아무 거리낌 없이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있다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죽어 매장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경의 말씀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을 임종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확인 받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죽음을 보면 죽음이 달라 보입니다. 죽음을 대면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셈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시신이 매장된 후에도 우리의 존재는 없어지거나 정지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태아가 새로운 세계로 밀고 나오듯, 우리도 이제까지 우리에게 보이지 않던 세계로 밀고 나갑니다.

다만, 그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모태에 있던 태아가 질병과 가난에 찌든 아프리카의 빈민촌에 태어날 수도 있고 넉넉한 환경에 있는 사랑 가득한 가정에 태어날 수도 있는 것처럼, 죽음 이후에 우리도 각기 다른 운명에 처할 수 있습니다. 태아로서는 자신이 처할 운명을 선택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4.

둘째,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이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가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19-20절)

이 말씀은 성경 말씀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중 하나인데, 성서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20절에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여 죽음을 당한 사람들만을 언급했을까요? 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의 예'로 언급된 것으로 여깁니다. 즉,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죽기 전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 모두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4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 대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4:6)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수수께끼같은 본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있었던 일들을 묘사하는 중에 마태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27:51-54)

이 말씀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의 의미를 자세히 알려고 씨름하다 보면 이단(cult)으로 빠집니다. 다만, 우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죽은 자들의 세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변화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셔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나오는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표현에서 '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천주교인들은 '연옥'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지옥'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가셔서 타락한 천사들까지도 모두 구원하셨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지옥은 있다. 하지만 그 지옥은 텅 비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아내려고 씨름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나오는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표현과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나오는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동의어로 생각하고, 예수께서 죽은 자들의 세계로 내려가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이상을 알려는 것은 과욕이며, 그 결과는 이단(cult)입니다.

5.

3차원 공간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1차원에 갇혀 있는 시간만을 전부로 아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말이 황당무계하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이 증명했듯, 3차원 공간을 넘어서는, 우리가 꿈에서나 경험하는 차원이 있으며, 1차원의 시간을 넘어서는, 역시 꿈에서 자주 경험하는 시간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 내려 가셨습니다"라는 고백에 담긴 믿음에 수긍이 갈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면, 3차원 공간을 초월하여 활동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워 안으로 걸어 잠근 다락방에 그분은 홀연히 나타나셨다가 홀연히 사라집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도 슬며시 나타나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다가 식사를 나누는 중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십니다. 2차원에 사는 존재에게 3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3차원에 사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활동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3차원 공간을 초월하여 활동하신 예수님은 1차원 시간도 초월하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진행하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인류 역사의 한 복판 즉 서기 1세기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서 잠시 동안 1차원 시간 속에 갇히셨지만, 죽음 이후에 그 한계를 벗어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신 후에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은 그분의 복음이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생명에게 제공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속회의 보고서를 보니, 이번 사도신경 연속 설교를 통해 꼭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질문을 몇 가지 적어 놓았습니다. 그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면, 예수님 이전에 태어나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한 사람이나 복음이 미치지 않는 아마존 정글에 사는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한 가지 이유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부당하지 않습니까?

참 많은 사람들이 묻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과 공간에 갇힌 분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 내려 가셨습니다"라는 고백에 담긴 의미를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사람과 죽어있는 사람 모두의 구원자이며, 그분의 통치력은 이 지구만이 아니라 온 우주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미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옛날 다윗이 쓴 고백이 기억납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시 139:7-10)

이 시편에서 다윗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이 세상을 넘어 존재하는 가장 높은 곳에서도 그리고 이 세상을 넘어 존재하는 가장 낮은 곳에서도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늘의 하늘 가장 높은 곳까지 미치고 지옥의 가장 낮은 곳까지 미칩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세계의 왕이시며 구원자입니다. 그분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분의 구원의 소식이 미치지 못한 시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1차원의 시간에 갇힌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예수께서는 지나간 모든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또한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도 그리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 쓴 초대 교인들의 찬송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2:9-11)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목숨보다 큽니다. 우리의 세상은 허블 망원경으로 관측할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광활하고 신비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세계를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큼 그들도 사랑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셨으며,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의 주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처럼 그리고 이미 천국에 사는 사람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평안의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의 능력을 알고 있던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7-39)

이번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 기간 동안에 저와 함께 40일간의 영적 여정에 오르실 것을 권합니다. 할 수 있으면 새벽기도회로 모이기 바랍니다. 홀로 기도하는 것보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기도의 골방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40일 동안 산상설교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가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예수'를 만납시다. 그분을 더 깊이 알수록 우리는 더 온전한 제자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내 수준에 맞게 축소시켜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크기로 내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예수를 예수로 믿는 믿음만이 이 땅에서 우리의 길잡이가 될 것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지키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 줄 것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하늘의 주님,
땅의 주님,
땅 아래의 주님,
과거의 주님,
현재의 주님,
미래의 주님,
산 자의 주님,
죽은 자의 주님,
앞으로 살 자들의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주님을 주님으로 믿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그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며
그 믿음으로 주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3년 2월 10일 주일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9)
"하늘, 땅, 그리고 땅 아래"(Heaven, Earth and Under the Earth)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 내려가셨다(He descended to the dead)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80장(통 101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이사야 53장 전체를 읽습니다. 이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당신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느껴본 일이 있습니까? 언제 어떻게 그런 깨달음을 가졌습니까?   
3) 당신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믿습니까? 어떻게 그 믿음을 확신합니까?
4)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땅 그리고 땅 아래"의 주님이시라면, 그 믿음이 당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겠습니까?    
5. 기도
1)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2) 예수님을 예수님의 크기로 믿도록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246장(통 221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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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22 출애굽기 강퍅 출7:14-19  신윤식 목사  2013-07-27 1572
9521 출애굽기 듣지 않음 출6:2-9  신윤식 목사  2013-07-27 1242
9520 출애굽기 여호와가 누군관대 출5:1-9  신윤식 목사  2013-07-27 1487
9519 출애굽기 하나님의 아들 출4:18-26  신윤식 목사  2013-07-27 1317
9518 출애굽기 세 가지 이적 출4:1-9  신윤식 목사  2013-07-27 1937
9517 출애굽기 신을 벗으라 출3:1-12  신윤식 목사  2013-07-27 1760
9516 출애굽기 구원의 방식 출2:11-15  신윤식 목사  2013-07-27 1309
9515 출애굽기 이스라엘과 애굽 출1:8-14  신윤식 목사  2013-07-27 1579
9514 로마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사랑 롬5:8  한태완 목사  2013-07-27 2012
9513 요한복음 믿어주시는 사랑 요21:15-17  류공석 목사  2013-07-27 1937
9512 빌립보서 십자가가 또렷해지는 사람 빌3:4-9  류공석 목사  2013-07-27 2080
9511 하박국 부흥을 준비하는 교회, 성도 합3:2  류공석 목사  2013-07-27 2724
9510 빌립보서 과정과 목표를 구별하세요. 빌3:12-14  류공석 목사  2013-07-27 2046
9509 사무엘상 에벤에셀! -송구영신 삼상7:5-14  류공석 목사  2013-07-27 2649
9508 마태복음 토라의 울타리를 넓히라 마5:21-26  류공석 목사  2013-07-27 2124
9507 누가복음 빈방 있습니까? -성탄 눅2:1-7  류공석 목사  2013-07-27 3047
9506 요한복음 토라가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요1:1-14  류공석 목사  2013-07-27 1832
9505 마태복음 수준이 다르다! 마5:17-20  류공석 목사  2013-07-27 1894
9504 마태복음 ID 카드를 보여주세요. 마5:13-16  류공석 목사  2013-07-27 1832
9503 마태복음 하늘의 상이 큼이라! 마5:10-12  류공석 목사  2013-07-27 2192
9502 마태복음 중간은 없다 마5:10  류공석 목사  2013-07-27 1725
9501 마태복음 샬롬의 조건 마5:9  류공석 목사  2013-07-27 2727
9500 마태복음 하나님이 보이세요? 마5:8  류공석 목사  2013-07-27 2184
9499 마태복음 잃어버려서는 안 될 가치 마5:7  류공석 목사  2013-07-27 2417
9498 마태복음 하늘 백성의 주림과 목마름 마5:6  류공석 목사  2013-07-27 2132
9497 고린도전 다양성과 조화 고전12:12-31  한태완 목사  2013-07-26 2160
9496 마태복음 이유 있는 낙관주의(Optimism with Reasons) 마24:45-51  김영봉 목사  2013-07-25 2153
9495 사도행전 내 앞에 그 보좌가 있다(His Throne Is Before Me) 행1:9-11  김영봉 목사  2013-07-25 2071
9494 고린도전 내 안에서 그를 보라(See Him Within Me) 고전15:3-8  김영봉 목사  2013-07-25 2119
9493 호세아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Between Friday and Sunday) 호6:1-3  김영봉 목사  2013-07-25 2464
» 베드로전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 밷전3:18-22  김영봉 목사  2013-07-25 2856
9491 마가복음 죽어 놓고 산다(We Live After Being Dead) 막15:42-47  김영봉 목사  2013-07-25 2059
9490 이사야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Key to the Kingdom of God) 사53:4-7  김영봉 목사  2013-07-25 2281
9489 요한복음 우리가 속한 나라(The Kingdom We Belong) 요18:33-40  김영봉 목사  2013-07-25 2288
9488 골로새서 사랑 때문에(Due to Love) 골1:24-29  김영봉 목사  2013-07-25 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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