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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과 일요일 사이(Between Friday and Sunday)
호세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92 추천 수 0 2013.07.25 21:00:54성경본문 : | 호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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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3년 2월 17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10)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Between Friday and Sunday)
장사된지 사흘만에
호세아(Hosea) 6:1-3
1.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어리둥절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서 한국에서는 전혀 문제 되지 않던 것이 미국에서는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바로 '사흘 후에'(after three days) 혹은 '사흘만에'(on the third day)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죽어 장사된지 '사흘 후에'(마가복음) 혹은 '사흘만에'(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부활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금요일에 운명하셔서 일요일에 부활하셨으니, "사흘만에"라는 표현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강의 시간에 이 문제를 놓고 미국인 교수와 학생들이 열띤 논쟁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예수님이 죽은 상태에 있던 시간이 금요일 오후 세 시부터 부활하신 일요일 아침까지, 만 하루 반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는 이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시간 계산법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가령, 12월 31일에 태어난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우리는 하루 지난 1월 1일이 되면 그 아이가 두 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루만 걸쳤어도 한 해를 보냈다고 간주합니다. 반면, 미국 사람들은 다음 해 12월 31일이 되어야 한 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어느 해에 속했느냐가 중요하고, 미국 문화에서는 한 해를 채웠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법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다만, 하루의 시작을 일몰부터 계산하는 것이 다릅니다. 금요일에 해가 떨어지면 토요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미국 사람들처럼 24시간을 채웠을 때 하루가 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처럼 날이 지면 그것으로 하루가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2.
문화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수가 있습니다. 서양인들에게는 7이라는 수가 행운의 수이고, 6 혹은 13이 불길한 수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4라는 수를 불길하게 생각하고 9라는 수를 가장 큰 수로 생각합니다. 한 없이 먼 거리를 가리킬 때 '구구만리'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숫자 3, 7 그리고 12가 중요했습니다. 세 숫자 모두 완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완전수'라고 부릅니다. 이 숫자가 채워져야만 안정감이 듭니다. 2는 불안하고 4는 넘칩니다. 6은 모자라고 8은 넘칩니다. 11은 모자라고 13은 넘칩니다. 불길한 숫자 6이 세 개 합쳐진 666은 극대치의 불길함을 의미합니다.
숫자 3은 완전수 가운데 가장 작은 수입니다. "사흘만에"라는 표현은 가장 작은 완전수 3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흘은 완전한 것이 이루어지는 가장 빠른 시간입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6:1-2)
호세아는 여기서 회개에 신속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뿌리깊은 죄악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할 때 즉시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흘 만에"라는 말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라는 뜻인 동시에 "빠른 시간 안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을 때, 바리새파 사람 몇몇이 와서 말합니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13:31).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13:32)
여기서도 "사흘째 되는 날"은 '가까운 장래'를 말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몇 주일이 지나서 당신의 일을 끝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흘째 되는 날"은 꼭 사흘 밤 낮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가까운 미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여러 번 다음과 같이 예고하셨습니다.
인자가 곧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마 17:22-23)
여기서 보듯,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즉 "사흘만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일으켜 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고대로 예수님은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있는 한, 죽음은 끝이 아니며, 무덤이 종착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살아계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당신이 정한 때에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어 장사된 예수 그리스도를 "사흘만에" 부활시키신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때로 우리는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살아야 합니다. 금요일은 실패의 시간입니다. 고난과 고통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게 만드는 깊은 절망과 죽음의 시간입니다.
토요일은 철저한 침묵의 시간입니다. 무덤같은 시간입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부활 주일 직전 토요일에는 강단의 모든 장식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이 날을 '검은 토요일'(Black Saturday)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이 빛을 잃은 시간입니다. 웃을 일도 없고, 음식 먹을 이유도 찾을 수 없고, 아침에 눈은 떳지만 몸을 일으킬 힘이 없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때로 그런 시간을 만납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아무리 건강에 신경을 쓰더라도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없고, 때로 그 병으로 인해 삶의 모든 터전이 무너져 버리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고를 만나고, 그로 인해 영원히 되돌이킬 수 없는 장애의 굴레 속에 갇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의 일부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교회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설날 잔치를 하는데, 식탁에 마주 앉은 교우께서 그러십니다. 주일에 한 번 넥타이를 매는데, 어느 주일 아침, 넥타이가 매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지난 주일만 해도 손이 저절로 움직여 매지던 넥타이였습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재정적인 문제도 우리의 삶을 한 순간에 무덤 속에 던져 넣습니다. 돈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정도 이상으로 탐욕을 부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돈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기초가 무너져 버립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냐? 돈이 거짓말을 하지!"라고들 말합니다. 인간성이 망가지는 원인이 돈에 있다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만큼 돈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관계도 그렇습니다. 심하게 뒤틀린 인간 관계는 일상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에
문제가 심각해지면 캄캄한 어둠 속에 내던져지는 것 같습니다. 부부 사이에 혹은 자녀와 부모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가정이 무덤이 되거나 전쟁터가 되어 버립니다. 직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출근하는 것이 도살장에 끌려 가는 심정입니다. 누군가와 문제가 생겨 소송에 휘말려 보셨습니까?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고난입니다.
하지만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혹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보면,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선한 뜻으로 교회를 위해 헌신할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아직도 만만치 않은 힘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진하게 경험했던 바울 사도입니다.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일했습니다. 하지만 때로 그는 모함과 오해와 질투와 박해로 인해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이렇게 권면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갈 6:9)
4.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어떤 것이든, 때로 그 고난이 한 없이 지속될 것 같아 보입니다.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을만큼 사방이 막힌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 주님께서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릴 때, 배고프고 불편하고 어려운 현실에 대해 불평하는 저희 형제들에게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세 밤만 기다려라. 세 밤만 자고 나면 된단다." 그렇습니다. 세 밤만 자면 됩니다. 사흘이면 달라집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머지 않아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다 됐다 싶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십니다.
미국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요 저자 중에 토니 캠폴로(Tony Campolo)가 있습니다. 펜실배니아에 있는 Eastern College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분인데, 신학자나 목회자보다 더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가 쓴 책 중에 It's Friday But Sunday's Coming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캠폴로가 잊지 못하는 명설교의 주제입니다.
캠폴로에 의하면, 어느 흑인 목사가 거의 한 시간 반 동안이나 한 문장을 반복하며 설교를 했습니다. 그 문장은 It's Friday but Sunday's comin'!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교의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금요일에 나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건 금요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눈이 빠지도록 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목자를 잃은 양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금요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이 남았습니다. (It was Friday. It was Friday and my Jesus was dead on the cross, but that's because it was Friday. Sunday's coming. It was Friday and Mary was cryin' her eyes out. The disciples were runnin' in every direction,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but that was Friday, and Sunday's comin'!)
캠폴로에 의하면, 그 설교자는 다음과 같이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아직 금요일입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세상을 보며 말합니다.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고. 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러나 그 회의주의자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 금요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일요일이 오고 있습니다. 아직 금요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금요일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고난받게 하는 힘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요일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일요일이 오고 있습니다! (It was Friday. The cynics were lookin' at the world and sayin' 'As things have been so shall they be. You can't change anything in this world. You can't change anything. But those cynics don't know that it was only Friday. Sunday's comin'! It was Friday, and on Friday those forces that oppress the poor and make the poor to suffer were in control. But that was Friday! Sunday's comin'!)
식당 체인점 중에 TGI Friday라는 것이 있지요. 이 식당의 이름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아시지요? Thank God! It's Friday!라는 말에서 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금요일이 오면 모두 해방감을 즐기며 주말을 즐기기 위해 부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그 흑인 목사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It's only Friday, but Sunday is coming!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금요일에 살고 있습니까? 마치 금요일을 향해 미끌어져 내려가는 듯한 기분입니까? 혹은 금요일도 지나 텅 빈 토요일에 살고 있습니까? 아무런 생의 낙도 없고, 하루 하루 삶의 줄을 붙들고 살기조차 버거우십니까?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고 지쳐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아직 금요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토요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이 오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일요일이 너무 더디게 오는 것 같습니까? 영영 그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맙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호세아가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3절)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한 고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망각하는 데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직도 살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라는 것, 그 능력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정한 시간에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금요일에도 혹은 토요일에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았던 바울 사도가 그래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갈 6:9)
5.
이 즈음에서 이렇게 말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요. 참고 기다리면 일요일의 아침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아십니까? 영영 금요일에서 시간이 멈추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로는 토요일의 절망감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 잘 압니다. It's Friday but Sunday's comin'!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It's Friday and that's it!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앤 바우어(Ann Bauer)라는 작가가 어느 저널에 기고한 글을 읽었습니다. 2009년에 오하이오에 있는 켄트 대학교(Kent University)의 트러디 스튜어내겔(Trudy Steuernagel) 교수가 18세의 아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사를 읽고 쓴 글입니다. (지금부터 자폐아를 둔 가정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자폐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시는 분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합니다.)
어머니를 때려 죽게 한 그 아들은 자폐아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자폐증을 앓는 아이들은 자기만의 세계 안에 갇혀 살기 때문에 조용하고 온순한 편입니다. 그런데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만 있다고 합니다. 트러디 교수의 아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작가 앤 바우어는 트러디 교수에 관한 기사를 읽는 순간, 구역질과 공포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지요.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들 앤드류(Andrew)도 같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앤드류도 역시 아주 온순하고 착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21세를 넘기면서 폭력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내가 그 아이를 아무리 지독히 사랑하고 아무리 많은 치료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기적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소동을 일으킵니다. 흥분한 아들을 말리다가 앤은 갈빗대가 부러지기도 했고 간에 손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술도 몇 번 했습니다.
결국, 그 아이의 방에 두 겹으로 된 철문을 설치하고 가두어 놓게 되었습니다. 방 안에는 아무 것도 두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부수고 던지고 그것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기 몇 주일 전에 우리 교회에 나오는 어느 교우로부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자매께서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들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아들의 폭력으로 인해 몸에 성한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해와 폭력을 일삼는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고달픈 일상을 한 없이 쏟아 놓으셨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무슨 힘으로 여태까지 버티셨습니까?" 그게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인데, 그런 모진 일상을 살면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기에 그렇게 여쭈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입장이었다면 벌써 나가 떨어졌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존경심이 솟아 나왔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앤 바우어에 의하면, 폭력적인 자폐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전쟁터(war zone)에 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보통의 전쟁은 끝이라도 있지요. 이 전쟁에는 끝이 없습니다. 죽어야 끝이 나는 전쟁입니다.
그 자매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같은 부모의 소원은요...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사는 겁니다." 이 말씀을 듣는데 얼마나 가슴이 먹먹했는지요! 그것이 끝나지 않을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울고 불고 했는지 모른답니다. 별 사람에게 기도도 받아 보고, 별의 별 치료법을 다 써 보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끝나지 않을 전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끝까지 싸우기를 결심한 것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 아버지들은 중도에 포기한다고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실로 강합니다.
이렇듯, 시간이 금요일에서 멈추어 버린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토요일에서 시간이 멈추어 영영 무덤 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어디 그 자매의 경우뿐이겠습니까? 사정은 다르지만 "내 시간은 금요일에서 멈추었구나!" 싶은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누구나 한 번은 그런 때를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영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누구나 한 번은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It's Friday, but Sunday's comin'!"이라는 말이 허튼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길어야 '사흘길'밖에 되지 않습니다.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10절)
아직 젊은 사람들에게는 나이 80 혹은 90이 까마득해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나이를 사신 분들에게 여쭈어 보십시오. 하나같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고 말합니다. 인생은 사흘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흘길에서 어떤 사람은 재미를 많이 보고 어떤 사람은 쓴 맛만을 보고 삽니다. 당시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지나고 보면 별 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흘길 인생에 이어지는 영원한 생을 얻느냐에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일요일'이 동터 옵니다. 그것이 죽음 이후에 곧바로 이어지는지 혹은 자다가 나중에 부활한 다음에 이루어지는지를 논하는 것은 1차원 시간 안에 갇혀 있기에 붙들리는 어리석은 논쟁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는 자에게 약속된 '영원한 일요일'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장로 요한이 환상 중에서 본 것이 바로 그 '영원한 일요일'의 모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계 21:3-4)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당신이 정한 시간에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십니다. 세 밤만 자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길 인생이 끝났을 때 '영원한 일요일'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일으키신 그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사느냐에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한다면, 이 땅에서 지나야 하는 금요일과 토요일을 거뜬히 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흘길 인생이 험한 질곡을 걷는 것과 같더라도 결국 '영원한 일요일'이 통 터 올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산다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시시하고 덧없는 것에 붙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때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시키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사흘길 인생을 가는 동안
아버지를 온전하게 의지하고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며
밝고 힘있게 걷도록
저희를 지키소서.
그리하여
수 많은 금요일과 토요일을 거쳐
영원한 일요일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3년 2월 17일 주일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10)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Between Friday and Sunday)
--장사된 지 사흘만에(On the Third Day)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549장(통 431)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호세아 6장 1-6절을 읽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당신이 겪어 본 금요일과 토요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일요일이 오기까지 어떻게 견뎠는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3) 지금 당신은 어느 요일에 살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4) 영영 희망이 없어 보일 때, 믿음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 줍니까?
5. 기도
1) 일요일을 기다리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2)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623장(새 찬송)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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