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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그를 보라(See Him Within Me)

고린도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141 추천 수 0 2013.07.25 21:00:54
.........
성경본문 : 고전15:3-8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3년 2월 24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11)
내 안에서 그를 보라(See Him Within Me)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고린도전서 ( 1 Corinthians)  15:3-8

1.

기독교 신앙은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묵상하고 있는 '사도신경'도 부활에 대한 고백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기독교가 '부화되는 사건'(hatching event)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부활은 없어도 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십자가에 있지 부활에 있지 않다."
얼른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해 자신이 없기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설사 부활이 거짓으로 판명나더라도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살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린 그 유대 청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자들과 처음 신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십자가 사건의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십자가들 중 하나로 잊혀졌을 것입니다.

문제는 부활을 믿기가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우선, 그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만일 부활한 것이 아니라 '소생'(resuscitation)된 것이라면,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부활은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과학은 물질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만을 연구하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물질 세계를 뛰어 넘는 사건입니다.

우리 말로 '부활'(復活)은 '다시 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소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부활을 가리키는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는 '다시 일어서다'는 뜻입니다.  영어의 resurrection이라는 말도 'rise again'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세상의 어느 나라 말에도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정확히 표현할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사건을 자체를 두고 따지는 것은 아무런 소득 없는 논쟁입니다. 그보다는 '물질 세계를 뛰어넘는 차원이 존재하느냐?'를 묻는 것이 더 소득이 있을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 세계를 뛰어넘는 차원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말은 그 차원으로 옮겨가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질 세계를 전부로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만일 받아들인다면 그는 부활이 아니라 다른 현상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이 믿을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려면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그분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일어난 변화들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어 매장된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2.

먼저,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장사된 예수님에게 일어났을만한 일을 모두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1) 그분의 시신이 무덤에 그대로 있었는데, 제자들이 집단적인 환상을 보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었다.

2) 십자가에서 내려졌을 때 그분은 기절한 상태였고, 무덤에서 쉬고 난 다음에 기력을 되찾았다.

3) 제자들이 몰래 그분의 시신을 훔쳐다가 숨겨 놓고 부활했다는 믿음을 조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 가지 밖에는 다른 경우를 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를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그분의 시신이 무덤에 그대로 있었는데, 제자들이 집단적인 환상을 보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이 가정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그 같은 집단적인 환상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데 있습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도 어렵지만, 그런 현상이 일어나려면 집단적으로 무엇인가를 간절히 갈망해야 합니다. 사도들과 신도들이 모여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열광적으로 기도했다면 혹시 그런 환상을 볼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듯,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기는커녕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인들이 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즉시로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인 환상을 보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만보를 양보하여, 집단적인 환상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다니며 예수가 부활했다고 선전하며 다녔다고 합시다. 그랬다고 해도, 부활의 복음은 얼마 가지 못하여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가서 진위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처럼 퍼지는 '예수의 도'를 막기 위해 유대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고심했습니까? 만일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그대로 있었다면, 왜 그냥 두고 보았겠습니까?

둘째, 십자가에서 내려졌을 때 예수님은 기절한 상태에 있었고, 무덤에서 쉬고 난 다음에 기력을 되찾았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즈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이 불과 여섯 시간만에 운명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조차도 아리마대 요셉의 요청을 받고 정말 운명했는지를 확인하도록 명령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운명은 보통보다 빨랐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고문 기술자'들이었고 '살해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것과 기절한 것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미숙하고 또한 서툴렀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가정입니다.

백번 양보하여, 그분이 기절했었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력을 되찾은 예수께서 사도들을 찾아가 부활했다고 속였다는 뜻인데, 살아생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한 것을 감안해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하고 참되게 살았던 분이 마지막 순간에 그같은 사기극을 도모할 리가 있습니까? 또한, 소생한 것과 부활한 것을 구분하지 못할만큼 사도들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나친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가정은 예수님을 사기꾼 정도로 취급하고 사도들을 분별 없는 사람들로 간주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는 가정입니다.

셋째,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훔쳐다가 어딘가에 숨겨놓고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렸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소문이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 소문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서 나왔다고 보도합니다. 무덤 경비병들이 예수의 무덤문이 열린 것을 보고 놀라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경비병에게 은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하고 말하여라.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잘 말해서, 너희에게 아무 해가 미치지 않게 해주겠다. (마 28:13-14)

만일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목숨을 아까지 않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 자신이 만든 거짓말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제자들이 그런 거짓말을 통해서 지킬만한 기득권도 없었고 얻을 유익도 없었습니다. 통일교처럼 거대한 이권이 걸려 있었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지키려고 했겠지만, 예수님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그 거짓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박해와 고난 뿐이었습니다.

3.

그렇다면, 남은 것은 결국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그분의 무덤이 비었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여러 신도들을 만나 주셨다는 것뿐입니다. 비록 '부활'이라고 부르는 사건을 경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 실의와 낙심에 빠져 있던 제자들과 신도들이 왜 신속하게 회복되었는지?
• 생전에 부활을 예고할 때는 이해하지도 못했던 제자들이 왜 부활을 믿게 되었는지?
• 아무런 기득권도 없었는데 그들이 왜 목숨을 내걸고 부활의 복음을 전했는지?
• 유대교 지도자들이 왜 부활의 복음을 침묵시킬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는지?

이만해도 충분하다 할 수 있지만, 아직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분들을 위해 중요한 증거 몇 가지를 더 말씀 드리려 합니다.

첫째, 복음서들을 읽어 보면, 빈 무덤을 목격하고 증언한 사람들이 여자들입니다. 복음서들마다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한 사람의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일요일 이른 시간에 향료를 준비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 문은 이미 열렸고, 천사로부터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남성이 아니라 여성들이 부활의 소식에 대한 최초의 증인이라는 사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여성들은 증인으로서의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여성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자격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 중동의 어느 국가에서는 여성 세 명의 증언과 남성 한 사람의 증언이 같은 값이라고 판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2천 년 전에는 얼마나 더 그랬겠습니까?

그러므로 부활 이야기를 누군가 꾸몄다면, 그는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만한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아마도, 복음서 저자들 중에는 빈 무덤 이야기를 적으면서 "아, 어째서 이 중대한 시점에서 왜 하필 여자들이란 말이냐?"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나중에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아, 남자들이 빈무덤을 발견했더라면!"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네 복음서에는 하나같이 여성들이 부활에 대한 첫 목격자로 나옵니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주일 예배의 전통이 시작되었다는 것도 부활 사건에 대한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처음 제자들과 신도들은 대부분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안식일, 즉 토요일에 회당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유대교인들은 안식일 다음 날 즉 일요일에도 예배를 위해 모였습니다. 가정에서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했습니다. 바울이 할동할 시기에 주일 예배의 전통은 이미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을 완성한 사건이기에 부활하신 날 즉 주간 첫 날을 귀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안식일 예배보다 주일 예배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안식일 계명을 어기고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전투적으로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면, 기독교가 시작될 초기에는 얼마나 더 그랬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주일 예배가 기독교의 예배일로 정해진 이유는 로마 황제의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우리 모두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 바로 일요일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면, 주일 예배의 전통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 사도들과 초기 신도들이 나사렛 청년 예수를 예배했다는 사실도 역시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사도들과 처음 신도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대교가 생명과 같이 여기는 신조를 어겼습니다.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유대교 지도자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유대교의 유일신관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영어로 zero tolerance라고 하지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도 예수가 신적인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과 처음 신도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곁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그분을 신으로 높인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까지도 그랬습니다. 유대교인들의 믿음으로 볼 때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인간으로만 알았던 예수를 신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4.

이렇게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부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사도들과 초기 신도들에게 일어난 심경의 변화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한 두 사람에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면 달리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집단적인 패닉 상태와 우울증에 빠졌던 사도들과 신도들이 한 순간에 돌변하여 집단적인 환희에 사로잡혔고 위험을 무릎쓰고 예수의 부활을 선전하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들의 심리에 일어난 변화라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태가 벌어졌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신도들에게 나타나셔서 진실로 부활하셨음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 게바에게--베드로의 아람어 이름
• 열두 제자에게
•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그들 중 대다수가 아직 살아 있음
• 야고보에게--예수님의 친동생
• 모든 사도들에게 한꺼번에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사례만 따져도 몇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그 예입니다. 왜 언급하지 않았을지 짐작이 되시지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인들은 증인으로서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을 이렇게 열거한 후,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고전 15:8)  

바울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적어도 5년 이후의 일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사람들은 승천하시기 이전에 부활한 주님을 만난 것이고, 바울 사도는 승천하신 후에 만난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승천하기 이전의 주님을 만난 것과 승천하신 후의 주님을 만난 것이 똑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바울 사도는 같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근본적인 성격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승천하신 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을 만나 주셨다면, 그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부활하신 주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믿는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 만남의 사건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리스트는 한 없이 연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리스트 안에 저와 여러분의 이름도 들어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을 만나는 순간 세계관이 바뀝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믿고 있었는데, 물질을 넘어서는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생관이 바뀝니다. 먹기 위해서 살던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으로 달라집니다. 생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믿음이 얼마나 좁은 생각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고 나면 더 이상 같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예일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쳤던 야로슬라브 펠리칸(Jaroslav Pelikan) 교수는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면, 아무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아무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 (If Christ is risen, nothing else matters. And if Christ is not risen--nothing else matters.)

기가막힌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그 어떤 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의미를 잃습니다. 육신이 전부요, 이 세상이 전부요, 악인이 번성하는 것이 현실의 끝이라면, 이 세상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입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믿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박멸하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보았기에 그에게는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 총독 관저에서 신문을 받을 때, 바울 사도는 그 자리에 와 있던 아그립바 왕에게 말을 겁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행 26:28)라고 묻습니다. 바울은 그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26:29)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참된 행복을 맛 보았습니다. 율법학자로 살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영적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그 행복을 모든 사람이 알았으면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난관을 헤치고 복음을 전하러 다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른 증거를 대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자신과 같은 변화를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5.       

이제 잠시 후면 결단 찬송으로 162장 "부활하신 구세주"(He Lives)라는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이 찬송은  알프레드 애클리(Alfred Ackley)가 작사 작곡한 것입니다. 애클리는 음악과 신학을 공부한 장로교 목사로서 부흥사로도 활동했습니다.  그가 펜실베니아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젊은 유대인 청년이 그를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제가 왜 죽은 유대인을 예배해야 합니까?"(Why should I worship a dead Jew?)

그 때 애클리 목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닐쎄, 그분은 살아계시네!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계시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오늘 더 살아계시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증언 뿐 아니라, 내 자신의 체험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네. (He lives! I tell you, He is not dead, but lives here and now! Jesus Christ is more alive today than ever before. I can prove it by my own experience, as well as the testimony of countless thousands.)

그 대화가 끝난 다음, 애클리 목사는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면서 이 찬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찬송의 후렴이 우리 번역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셔서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찬송을 번역할 때는 곡조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원래의 뜻을 손상시켜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 경우가 그렇습니다. 곡조를 상관하지 않고 내용만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네! 살아 계시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시네!
그분은 인생의 좁은 길을 나와 함께 걸으시고
나와 함께 이야기 나누시네.
그분은 살아 계시네!
살아 계셔서 구원을 주시네!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당신은 묻지요?
그분이 제 마음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He lives! He lives! Christ Jesus lives today!
He walks with me and talks with me along life's narrow way.
He lives! He lives! Salvation to impart!
You ask me how I know He lives? He lives within my heart.

부활에 대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부활의 증거가 우리의 삶 속에 없으면 그 모든 지식이 소용이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증거를 아무리 많이 모아 놓았어도 우리의 삶 속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변화가 없다면, 그 모든 증거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앞에서 저는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의 증거들을 제시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 받은 사람은 그런 증거 하나 없어도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항상 어떤 체험의 순간을 찾습니다. 환상을 보았다든가 뜨겁거나 차거운 체험을 했다든가 질병에서 치유된 경험이 없는지 찾습니다. 그런 것을 기준으로 찾으면 오도되기 쉽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돌아 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변화가 나에게 있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던 것이 믿어지는 변화, 결코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던 죄에서 해방되는 변화, 나의 결심으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삶의 변화, 성형수술로도 만들 수 없는 표정의 변화 같은 것들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면, 오감으로 느끼지 못했다 해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만났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애클리 목사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니, 그분은 부활하신 것이 틀림 없다"고 말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분을 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능력으로 변화 받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아무리 자신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할만한 변화를 찾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 사순절 동안에 더욱 부활하신 주님을 여러분의 삶에 더 깊이 모셔 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시면, 아무 것도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펠리칸 교수의 말을 저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하렵니다.

만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면, 아무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 만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 If we meet the risen Lord, nothing else matters. If we don't meet the risen Lord, everything matters.

다시 한 번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 들이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주권을 그분에게 내어 드리십시오. 머지 않아 그분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변화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믿기 어려운 변화를 보면서 "어,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네! 주님께서 진실로 부활하셨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저의 삶을 주님께 활짝 엽니다.
저의 중심에 와 주소서.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주소서.
제 안에 부활의 증거들을 만들어 주시어
저의 삶으로 부활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3년 2월 24일 주일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11)
"내 안에서 그를 보라"(See Him Within Me)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162장(통 151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읽습니다. 부활 신앙이 왜,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핍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 중에 당신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만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부활에 대해 증거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설명해 보십시오.
4)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 만들어 놓으신 변화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씩만 이야기해 보십시오.    
5. 기도
1) 부활하신 주님을 참되게 만나도록 기도하십시오.
2) 당신의 삶 속에 부활의 증거가 더 많아지도록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170장(통 16장)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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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9501 마태복음 샬롬의 조건 마5:9  류공석 목사  2013-07-27 2740
9500 마태복음 하나님이 보이세요? 마5:8  류공석 목사  2013-07-27 2191
9499 마태복음 잃어버려서는 안 될 가치 마5:7  류공석 목사  2013-07-27 2423
9498 마태복음 하늘 백성의 주림과 목마름 마5:6  류공석 목사  2013-07-27 2141
9497 고린도전 다양성과 조화 고전12:12-31  한태완 목사  2013-07-26 2170
9496 마태복음 이유 있는 낙관주의(Optimism with Reasons) 마24:45-51  김영봉 목사  2013-07-25 2172
9495 사도행전 내 앞에 그 보좌가 있다(His Throne Is Before Me) 행1:9-11  김영봉 목사  2013-07-25 2079
» 고린도전 내 안에서 그를 보라(See Him Within Me) 고전15:3-8  김영봉 목사  2013-07-25 2141
9493 호세아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Between Friday and Sunday) 호6:1-3  김영봉 목사  2013-07-25 2492
9492 베드로전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 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 밷전3:18-22  김영봉 목사  2013-07-25 2868
9491 마가복음 죽어 놓고 산다(We Live After Being Dead) 막15:42-47  김영봉 목사  2013-07-25 2074
9490 이사야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Key to the Kingdom of God) 사53:4-7  김영봉 목사  2013-07-25 2297
9489 요한복음 우리가 속한 나라(The Kingdom We Belong) 요18:33-40  김영봉 목사  2013-07-25 2303
9488 골로새서 사랑 때문에(Due to Love) 골1:24-29  김영봉 목사  2013-07-25 2467
9487 빌립보서 내가 안다(I Understand) 빌2:6-11  김영봉 목사  2013-07-25 2280
9486 마태복음 우리로는 안 된다(No Hope In Us) 마1:18-25  김영봉 목사  2013-07-25 2325
9485 요한복음 믿음의 원점(Ground Zero of Faith) 요20:24-29  김영봉 목사  2013-07-25 2434
9484 히브리서 크레도 에르고 숨 (Credo Ergo Sum) 히11:1-3  김영봉 목사  2013-07-25 2846
9483 시편 현실을 변모시키는 능력(Power To Transform the Reality) 시126:1-6  김영봉 목사  2013-07-25 2198
9482 레위기 내려놓음의 복 레18:1-23  최장환 목사  2013-07-24 3243
9481 출애굽기 동행할 친구 출38:1-20  최장환 목사  2013-07-24 2497
9480 시편 크리스천의 나라사랑 시33:12  한태완 목사  2013-07-24 1920
9479 요한일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자 요일3:16  한태완 목사  2013-07-22 2456
9478 출애굽기 교회는 민주주의냐, 신주주의냐? 출13:17-14:9  김경형 목사  2013-07-22 1917
9477 누가복음 진짜 크리스천 눅14:26-27  한태완 목사  2013-07-21 2246
9476 로마서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 롬16:1-27  민병석 목사  2013-07-21 1789
9475 로마서 한 몸의 지체를 이루는 성도들 롬12:3-5  민병석 목사  2013-07-21 2601
9474 로마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예배 롬12:1-2  민병석 목사  2013-07-21 2290
9473 로마서 권세 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 롬13:1-7  민병석 목사  2013-07-21 1677
9472 로마서 사랑의 사회생활 롬12:14-21  민병석 목사  2013-07-21 1348
9471 로마서 사랑의 생활 지침 롬12:9-13  민병석 목사  2013-07-21 1365
9470 로마서 지체로서의 은사 롬12:6-8  민병석 목사  2013-07-21 1441
9469 로마서 축복의 사자 롬15:22-33  민병석 목사  2013-07-21 1381
9468 로마서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 롬15:15-21  민병석 목사  2013-07-21 1778
9467 로마서 로마교회가 받은 칭찬 롬15:14  민병석 목사  2013-07-2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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