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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24:4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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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3년 3월 10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13)
이유 있는 낙관주의(Optimism with Reasons)
거기로부터 ... 오십니다.
마태복음(Matthew) 24:45-51
1.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예수님의 재림(second coming of Jesus Christ)입니다. 2천년 전에 육신을 입고 베들레헴에 나셨던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교리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는 극명하게 둘로 나뉩니다. 다른 어떤 교리도 이 교리만큼 극단의 두 입장으로 갈라지게 만드는 교리가 없습니다.
한 극단에는 재림의 교리를 신화나 전설처럼 취급하고 외면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분들 중에도 재림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 자신도 청년 시절에 이 교리를 기독교 사상의 오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매우 고상하고 심오한 기독교 신학이 재림의 교리 때문에 품격이 떨어졌다고 느꼈습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재림의 교리를 오해했었음을 깨닫고 이 입장에서 떠났습니다만, 이런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부디, "재림에 대해 설교한다구? 아, 오늘은 귀 닫고 있어야겠다"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 귀를 열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재림의 교리를 외면하는 반대 극단에는 재림의 교리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교리에 붙들린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판단력을 상실합니다. 재림 신앙에 사로잡힌 설교자들은 항상 재림만을 설교합니다. 교인들도 오직 재림의 날만을 기다리며 다른 무엇에도 가치를 두려 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재림의 날이 가까왔다는 증거들을 찾으며, 시대를 해석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그러다가 뭔가 단서를 잡았다 싶으면 재림의 날을 알아냈다고 선전하고 그 날을 위해 모든 것을 걸게 만듭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우리는 이 두 극단을 모두 피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교리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교리, 운명하신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 내려가셨다는 교리,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교리, 그리고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교리와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이 모든 교리 안에는 관통하는 맥이 있고 논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반면, 재림 신앙에 함몰되는 것도 피할 일입니다. 그런 경향에 기울어진 목회자들과 교회를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이 있습니다. 종말과 재림을 강조하는 설교자들은 두 경우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교인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경우입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여 교인들의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놓고 재산을 모두 바치게 하거나 성적으로 유린합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자신이 설교하는 교리를 자신은 믿지 않습니다. 재림 신앙을 위협용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설교자 자신이 심리적인 문제로 인해 재림 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 사교 집단에 빠지거나 재림 신앙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은 치유되지 않은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림과 종말에 붙들린 설교자는 해결되어야만 하는 심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휴심정'이라는 웹진에서 종말론에 빠진 교회에 미쳐서 집안 일을 등진 아내로 인해 고통받는 남편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이 "당신이 천국에 집착하자 나에게는 지옥이 다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가슴 아픈 제목입니다. 그 남편에 의하면 아내에게는 중독의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말 신앙에 빠지기 전에는 펀드에 빠져서 큰 빚을 졌다는 것이지요. 무엇엔가 자신을 다 내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심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여인은 종말론에 빠진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재림에 대한 균형잡힌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재림의 교리를 생각할 때, 부활과 승천에 대해 강조했던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 세계를 넘어서는 더 광대하고 신비롭고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승천하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3차원에서 하나님의 차원(divine dimension)으로 옮겨가셨다는 뜻입니다. 육신을 입고 활동하실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시며 또한 활동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영'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영'은 '공기' 혹은 '바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은 영적으로, 즉 바람처럼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적 감각이 어두워져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승천에서 재림으로 넘어 가면서 "거기로부터"라는 어구를 사용합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우편'을 말합니다. 지난 주에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어느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가리킵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거기로부터 다시 오십니다"라는 표현은 비유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한다는 말은 다른 어느 장소에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가셨던 주님께서 다시금 우리가 사는 차원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읽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들려 올라가시고 구름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제자들은 망연히 하늘을 쳐다 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행 1:11)
이 말씀에 근거하여, 승천이 선녀가 하늘로 가듯 부활하신 주님께서 공간 이동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재림은 선녀가 강림하듯 지상으로 공간 이동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누가가 기록한 것은 그가 경험한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도 못하고 언어로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승천'은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림'은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가서 영이 되신 주님께서 다시금 우리의 차원으로 당신을 환히 드러내시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가만히 살펴 보면 어폐(oxymoron)가 있는 것이 많습니다. 가령,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떠나려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하나님께 붙어 있겠다는 다짐입니다. 또한, 찬송할 때 우리는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령께서 우리 중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성령께서 우리 중에 항상 계십니다. 그러니 이 말은 성령의 임재를 더 충만하게 느끼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기도하면서 '마라나 타'(maranatha) 즉 "우리 주님, 오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도 딱히 옳은 말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오십시오"라는 기도는 우리 중에 영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환히 드러내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 마치 공기처럼 알듯말듯, 잡힐듯 말듯, 보일듯 말듯, 들릴듯 말듯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중에 있지만, 마음의 눈을 뜨지 않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하자면 부정할 수 있고, 거부하자면 거부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은 이러한 은밀한 하나님의 통치가 환히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3.
재림의 교리에 빠진 사람들은 재림의 시나리오를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재림의 시나리오' 혹은 '종말의 시나리오'라고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시나리오를 발견하실 것입니다. 잠시 그것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다 제각각입니다. 그리고 다들 자기 주장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휴거'(rapture)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조차도 이 단어를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휴거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믿는 사람들이 공중에 들려 올려지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무서운 고난을 당한다는 교리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기초로 하여 성경의 이곳 저곳에서 예언을 끌어 와 만든 교리입니다.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홀 린드세이(Hal Lindsay)가 쓴 유명한 책 Late Great Planet Earth(1970)로 인해 유명해졌습니다. 기독교 역사 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이 책은 주로 휴거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팀 라헤이(Tim LaHaye)와 제리 젠킨스(Jerry Jenkins)가 쓴 Left Behind라는 제목의 어린이 소설로 유명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네스트 앵글리(Ernest Angly)가 쓴 <휴거>라는 소설이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3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청년 시절에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여학생 한 명이 제발로 교회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스스로 교회를 찾아 나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학생이, <휴거>라는 소설을 읽고 너무 무서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소설이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흐름으로 인해 지금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휴거가 확고부동한 성경적 진리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휴거'라는 말은 1830년 이전까지는 듣도 보도 못했던 단어였습니다. 지금까지 남겨진 자료에 의하면, 1830년에 스코틀란드에 사는 마가렛 맥도날드(Margaret McDonald)라는 여인이 처음으로 휴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이 믿음이 야금야금 퍼져 가더니, 마침내 미국에 사는 싸이러스 스코필드(Cyrus Scofield)라는 사람이 이 믿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1903년에 간략한 해설을 곁들인 성경책을 발간했는데, 종말 혹은 재림과 관련된 구절마다 휴거와 연결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코필드 성경>(Scofield Bible)입니다. 이 주석 성경이 휴거에 대한 믿음을 널리 퍼뜨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휴거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아니라 우연히 생겨나 걷잡을 수 없이 퍼져버린 사이비 신앙입니다. 신뢰할만한 성서학자들은 대부분 휴거에 대한 대중적인 믿음이 '비성서적'(unbiblical)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시나리오를 말하는 사람들이 자주 논쟁을 하는 또 다른 주제가 '천년왕국'(millennium)입니다.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천 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이 요한계시록 20장 1-10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림 이전에 오느냐 혹은 재림 이후에 오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려 있습니다. 천년 왕국이 오기 전에 재림하신다고 믿는 견해를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이라고 부르고, 천년 왕국이 지난 후에 재림한다고 믿는 견해를 '후천년설' (post-
millennialism) 이라고 부릅니다. 이 예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견해를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라고 부릅니다. 이 논쟁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해결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외에도 종말 혹은 재림과 관계하여 거론되는 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의 정체(계 13:18)는 무엇인가? 아마겟돈 전쟁(계 16:16)은 무엇인가? 적그리스도(Anti-Christ)는 누구를 말하는가? 이런 문제들을 논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또한 이 문제들에 관한 한,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합의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 제각기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이 모든 논쟁들과 관계하여 세 가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재림과 종말에 대한 성경 말씀들은 모두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대한 모든 말씀은 우리의 경험과 이해를 뛰어 넘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부활'이니, '승천'이니, '재림'이니 하는 말들도 모두 비유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말에 담은 것입니다.
재림의 때에 그리고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들은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예언을 읽으면서 그 모든 것이 비유요 상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유와 상징을 사실 언어로 받아들이고, 지금 시대의 어떤 사건이나 인물과 연결시키려 합니다. 666이 바코드라는 주장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때, 스탈린이 적그리스도로 지목된 적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해석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에 솔깃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잘 '꿰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둘째, 성경에 기록된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언들은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말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사람들은 마치 한 사람이 성경 전체를 쓴 것처럼 이쪽 저쪽에서 끌어다가 마구잡이로 짜깁기를 합니다. 물론, 성경의 실제적인 저자는 성령 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여러 시대에 여러 사람을 통해 종말과 재림의 실상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이 중 어떤 예언은 유다의 종말에 대한 것이고, 어떤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예언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것이고, 어떤 예언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예언은 재림에 관한 것이고, 어떤 예언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림과 종말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사람들은 예언을 모두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자기 좋을 대로 짜맞춥니다. '휴거'에 관한 믿음이 그렇게 나온 것이고, '천년왕국'에 대한 논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성경에 기록된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예언은 실제로 일어날 일들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재림과 종말에 대한 기록들은 500조각으로 되어있는 퍼즐 중에서 열 조각 정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500조각을 다 맞추면 창공을 날아가는 멋진 독수리 그림으로 완성되는 퍼즐 중에서 열 조각을 책상에 펼쳐 두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그림인지 알아 맞춰 보라고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면 아마 백 사람이 다 각각의 그림을 상상할 것입니다. 재림 혹은 종말에 대해 목청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은 오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5.
그렇다면 재림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재림의 교리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그것에 사로잡혀도 안 된다면, 어떻게 믿어야 옳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예언들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적어도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재림의 교리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믿음입니다. 불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는 역사를 순환하는 것으로 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류 역사에 시작점이 있었듯이 끝날 때가 있다고 믿습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의 창조로 인해서 시작된 시간의 역사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함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지구의 멸망'과 성경이 말하는 '재림'과 '종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지구의 파멸을 예고합니다. 실로, 지금처럼 지구 환경을 파괴시킨다면, 그들의 예언대로 머지 않아 인류는 끔찍한 종말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해 파괴된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망하는 종말이 아니라, 모든 것이 회복되고 완성되는 종말입니다.
종말 혹은 재림을 미리 내다 본 성경의 저자들은 여러 가지의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실 미래의 희망을 예언합니다. 그 모든 비유를 통해 성령께서 믿는 이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미래가 있다는 것, 그 미래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당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미래에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파국과 재앙의 날이 아니라 환희의 날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진실을 깨닫고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림에 관한 예언을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둘째, 재림의 교리는 역설적이게도 미래에 붙들리라는 뜻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종말과 재림을 강조하는 설교자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집안도 내버리고 직업도 등지고 오직 임박한 종말을 위해서만 살라고 유도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종말과 재림을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현재의 삶에 신실하도록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미래가 있음을 믿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흔들리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무슨 이유를 댄다 해도 가정을 내버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해야 합니다. 직장 생활에 소홀히 하도록 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해야 합니다. 매일 주어지는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살도록 돕고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예배 드리듯 섬기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른 기독교입니다. 종말과 재림에 대한 바른 신앙은 현재의 삶을 미래의 눈으로 보게 하고 전과는 다른 태도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만일 그 반대 결과가 생긴다면 그것은 분명 이단이요 사이비입니다.
셋째, 재림의 교리는 언제나 마지막을 위해 준비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시리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재림보다는 죽음을 더 먼저 맞이했습니다. 확률적으로 볼 때,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죽음과 재림에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때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날을 미리 알 방법이 없는 것처럼, 재림의 날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정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날을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그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먼저 오든 재림이 먼저 오든,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에 대해 준비된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재림 혹은 종말에 관한 예언에 늘 등장하는 것이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항상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재림의 날짜를 알아냈다는 말에 솔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언제 마지막이 온다 해도 그 날은 재앙의 날이 아니라 환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집 하인들을 통솔하게 하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맡겼으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종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47절)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미래를 내다 볼 때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미래에 대해 낙관한다면 왜 낙관하십니까? 비관하신다면 왜 비관하십니까?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께서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미래를 낙관할 진정한 이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온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시고, 마침내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완성시키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땅인 미래를 바라보면, 비록 현실이 어렵고 힘들어도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지금 손에 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라면 열 번도 더 포기했을 상황에서도 다시 힘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낙관주의자입니다.
재림의 교리를 외면하는 것은 알고 보면 큰 것을 잃는 것입니다. 재림의 교리에 빠져 버리는 것은 영적 질병에 걸렸다는 뜻입니다. 재림을 믿지만,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쁜 종'처럼 제 욕심대로 사는 것은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다시 오신다고 믿는다면, 즉 그분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완성될 날이 필경 온다고 믿는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낙관주의자가 되고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오셨던 주님,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
장차 우리에게 오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주님의 미래를 믿는 믿음을 주소서.
그 믿음으로 현실을 살게 하시고
현실을 변모시키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낙관주의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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