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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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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하늘 백성의 주림과 목마름
2009년 10월 24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6
갈릴리 호수 북쪽에 가면 언덕 위에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이른바 팔복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있는 산을 팔복산이라고 합니다. 그곳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이고, 그 첫 번째 말씀이 팔복에 대한 선언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7장을 산상복음,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교회로 들어서는 길 초입부에 보면 안내판이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하르 오쉐르’, 영어로는 ‘Mount of Beatitudes’ 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하르 오쉐르’, ‘하르’는 산을 뜻하고 ‘오쉐르’는 ‘행복, 축복’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원적으로 보면 ‘행복, 축복’을 의미하는 ‘오쉐르’는 ‘아쌰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go straight, go on’이란 의미의 동사입니다. 뜻 그대로 곧장 가는 겁니다, 바르게 가는 겁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겁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가는 겁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한눈 팔지 않고 계속해서 가는 겁니다. 그것이 ‘아쌰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아샤르’ 동사에서 나온 단어가 바로 ‘행복, 축복’ 뜻을 가진 ‘오쉐르’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이고 축복인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무엇이 참 행복이고 축복입니까? go straight, go on 하는 겁니다.
무엇에 따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장 가는 겁니다. 중간에 한 눈 팔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가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바로 복이고, 그럴 때 진정한 행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의 문제입니까?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이고 방향의 문제라는 겁니다.
영어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복을 ‘the Beatitudes’라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최고의 복, 더 없는 행복, 지복을 뜻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beatitude라는 이 영어단어는 라틴어인 beatus에서 나왔는데, 태도와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그 뜻이 be-attitude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태도를 취도를 취하라’ 그런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영어의 표현에서도 복은 무엇이다? 내가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리고 어떠한 삶의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여덟 가지의 복은 소유의 복이 아니라 태도의 복이고 방향의 복입니다.
하늘 백성으로서 어떠한 마음의 태도,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삶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8가지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 최고의 행복, 지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진정한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이고 방향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그 존재가치가 건강하지 않으면 불행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했다 할지라고 삶의 태도와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행복한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참된 행복, 진정한 행복은 존재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이고 방향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행복,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존재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 삶의 태도의 문제, 인생의 방향의 문제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소유가 행복인지 압니다. 성취가 행복인줄 압니다. 그래서 그것에 목말라 하고 배고파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먹을까 더 마실까 더 입을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목말라하고 굶주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본질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진단을 내리게 됩니다. 내 인생의 굶주림과 목마름은 성공이다, 돈이다, 출세다, 혹은 먹고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오진을 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28살 때 주일예배를 마치고 성가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윗배가 아파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가까운 병원엘 갔어요. 의사가 진찰을 했는데 위염이랍니다. 그래서 링거 맞고 주사도 맞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내내 배가 아파서 제대로 잠을 못자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병원엘 갔더니 아무래도 맹장이 터진 것 같다며 일단 째보자고 하더군요.
결국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이 된 것인데, 처음에 정확한 진단을 했으면 수술도 간단하고 일주일이면 퇴원할 수 있는 것인데, 잘못된 진단으로 맹장도 터지고 수술도 커졌고 이주일 기본 입원에 장마비 증세까지 와서 거의 40일 가까이를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본질적인 문제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알지 못하면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다가 인생 끝나고 맙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파스칼이 그의 명저인 팡세에서 그런 말을 했지요?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공간이 있다 라고 말입니다.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겁니다. 채워질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공간이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목말라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목마름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돈이 채워줄 줄 알고 돈돈 하면서 살고, 권력, 성공, 쾌락 이런 것에 목말라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이건 결국 목마르다고 바닷물 퍼먹는 것과 같거든요. 절대 그 갈증 해결 안됩니다. 더 목말라져요.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빈공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채워져야 본질적인 목마름이 해결이 되는 겁니다. 그럼 소유와 상관없이 만족을 느끼고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목마름과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만이 참된 하나님을 만나고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야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22부터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25절)
예수님을 찾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
무슨 뜻입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헤맸는가? 얼마 전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거든요. 그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고 나서 찾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속해서 떡을 기대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분이 왕으로 모시면 우리가 배부르게 먹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들에게는 그저 떡에 대한 굶주림,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굶주림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 하십니까?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나를 먹고 마시라는 겁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며 생명의 음료이니 내게 와서 나를 먹고 마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자매의 고백입니다. 이 자매는 인생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평탄치를 않았습니다. 참 어려웠어요.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나름 성공 했습니다. 나름대로 성취했고 소유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깊은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는 겁니다. 너무 힘들었을 때 점쟁이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해결이 안되요.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는데, 점점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하시더라는 겁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자기 안에 예수님이 없더라는 겁니다. 분명 교회는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예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가 없는 하나님은 그저 내게 복주는 신에 불과합니다. 그저 도깨비 방망이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없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 없이 교회를 다닌단 말이죠. 그러니 교회를 다니고 신앙의 연수는 쌓이는데 늘 갈증이 있고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 자매가 그걸 깨달은 겁니다. 드디어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본 겁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마음속에서 부터 깊은 갈망이 터져 나오더랍니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구나 이걸 깨닫고는 부르짖었다는 것이지요. 갈망했다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예수님, 내 안에 오십시오. 나를 채워주십시오. 나를 새롭게 해주십시오. 예수님!’하면서 부르짖었다는 겁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 정말 그 자매 안에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데 방언이 터졌어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했어요. 그 안에 예수님이 채워진 겁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밝아졌는지 몰라요. 예전에는 좀 교회와 신앙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는데 싹 바뀌었어요.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얼굴을 보면 정말 행복해 보여요. 근본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이 해결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신앙훈련을 받고 싶답니다. 그래서 제대로 예수쟁이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시며 생명의 음료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근본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해결이 됩니다. 그래야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는 개인의 윤리적인 의로움이나 사회적인 정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어느 정도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이건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 속성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공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인 공의와 사랑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미워하시고 진노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특별히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덩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죄인을 벌해야 합니다. 심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덩어리인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멸하시는 것보다는 구원하시는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이, 왜 메시야가 나무에 달려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만 합니까?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습니다.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닙니다. 진노를 뛰어넘는 사랑이고 구원입니다. 예수께서 나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메시아, 나의 그리스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믿는 자에게는 죄용서와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 사랑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곧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말하고, 이는 곧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굶주려 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목말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왜요? 이것이 본질적인 굶주림이고, 본질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 굶주려 하고 목말라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 만나지 못하면 인생 끝입니다. 결코 진정한 행복 경험하지 못합니다. 제대로 만나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며 음료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먹고 마셔야 합니다. 날마다 먹고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의 먹고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치관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순결하심과 온유하시고 겸손하시고 순종하셨던 그 모든 것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럴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영적 비만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떨 때 걸리는 지 아십니까? 먹지 않을 때 걸립니다. 육적인 비만증과는 달라요. 영적 비만증은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지 않을 때 걸리는 겁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절대 영적 비만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안에서부터 새로운 목마름, 새로운 배고픔이 생기거든요. 이건 인생의 근본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이 아니고 , 이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해결되었습니다. 해결되었는데, 내 안에서 더욱 더 예수님을 먹고 마시고 싶은 열정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제 예수 맛을 안겁니다.
‘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뜻이구나. 아, 이것이 바로 신앙의 맛이구나. 예수 믿는 맛이구나.’ 깨달아지니까 더 먹고 싶은 겁니다. 더 마시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더 사모하게 되고 더 갈급해하고 더 부르짖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계속되는 영적인 갈망과 사모함이 있는 사람은 결코 영적 비만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날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이 있는 사람들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 오늘 더 주님 알기를 원합니다. 더 주님 먹기를 원합니다. 더 주님 마시길 원합니다. 더 주님 은혜로 채워주시옵소서. 더 주님 알기를 원합니다. 더 주님 순종하길 원합니다. 주님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이런 갈망과 사모함이 여러분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의로움이나 사회적인 공의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3:10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개인적인 의로움, 윤리적인 의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의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정말 착각 중에 대단한 착각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3:22-24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인정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근간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자에 보면 ‘의’라는 글자가 참 성경적입니다. 義, 羊 밑에 나 我, 즉 내가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 부흥회를 했는데, 그때 강사 목사님이 이 설명을 하는 겁니다. 의가 무엇이냐? 어린 양 아래에 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기가 막힌 해석 아닙니까? 딱 로마서 3장의 말씀입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결코 의가 되지 않아요. 그러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나의 죄가 어린양의 보혈로 씼겨졌을 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내 삶이 의로운 삶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어린양 예수 없는 의로움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움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행위적인 의에 불과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신의 당당함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버린 사람입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가운데 예수님의 인격과 삶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의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자신의 당당함을 잃어버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을 잃어버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아, 여러분의 그 강한 생각과 고집 다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신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나를 통해 예수님의 인격과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의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늘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런 믿음과 순종과 겸손의 고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의인입니다.
사회적인 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20대 초반에는 정의파였습니다. 제가 386세대인데, 그때만 해도 교회 청년부가 안기부 감시를 받았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전두환, 노태우 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군사독재, 부정부패, 경제 불균형 등등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많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데모를 했고, 많은 교회의 청년부에서도 이런 현실에 대해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부에 올라가서 일대일 성경공부를 했는데,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 민중신학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후에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서, 예수님을 먹고 마시고 나서 보니까 돌을 들고 화염병 들고 거리로 나가고 투쟁을 한다고 해서 사회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없는 사회 정의는 투쟁과 폭력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유를 얻었다, 그 결과 또 다른 독재와 폭력, 또 따른 부정부패를 낳게 됩니다. 그것이 공산주의이고,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4.19 의거, 6.10 항쟁을 주도했던 세대들에 의해 또 다른 부정부패가 양산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없는 사회 정의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모스서에 있는 말씀처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암 5:24)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거짓된 저울과 뇌물을 미워하십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경제적인 불평등과 부자와 권력있는 자들의 탐욕과 횡포에 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회적인 정의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순서는 우리 안에 예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의 정신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정신,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인격과 삶을 따라서 세상에서 정직하고 법을 지키면서 장사하고 직장생활을 해야 하고, 나아가 사회적인 불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에는 내게 있는 빵을 주는 것이 의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봐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입니다. 이 땅에 강도만난 자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고 그것이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가르침이고 삶이고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의이고 사회 정의의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면, 그리고 날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 눈이 달라집니다. 관심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삶의 태도가 달라지게 되고, 방향이 달라지게 되고 갈증의 대상도 달라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그전까지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이런 문제에 집중하고 그것에 배고파하고 목말라했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채워지니까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날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니 눈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내 삶의 관심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에서 다른 것으로 향해진다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이 말씀을 듣던 당시 사람들은 하루에 두 끼, 그것도 정말 간소하게 먹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옷도 그렇게 좋은 옷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어려운 삶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말씀은 관심의 눈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갈망의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그저 먹고 사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먹고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안 먹고는 살 수 없고 안 입고는 살 수 없거든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음식과 의복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어야 살지만 음식이 본질이 아니거든요. 내 목숨이 본질이에요. 내 영혼이 본질이에요. 음식보다 중요하고 의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에 눈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을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3-34)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나의 관심, 나의 갈증, 나의 삶의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돈을 법니까? 왜 공부합니까? 왜 일합니까? 왜 삽니까? 여러분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무엇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까? 내가 살아가면서 정말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입니까? 나 개인에게 국한된 것입니까?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교회를 다녀도 삶의 관심사와 추구하는 갈증과 방향이 개인적인 것에 집중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 자신에게 집중되고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 집중된 나의 관심사와 갈증과 방향을 바꾸라는 겁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라는 겁니다.
이어지는 34절에 보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일 일에 대한 염려에서 주어가 내일입니다. 내가 아니에요. 내일이 주어가 되어 사용되고 있어요.
내일에 대한 염려는 내가 할 것이 아니라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는 겁니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다른 뜻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 너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예 관심을 두지 말고 그것에 마음 뺐기지 말라는 겁니다.
실제로 염려한다고 되는 것 아니거든요. 염려는 내 관심이 뺏기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이 먹고 사는 삶의 문제든, 내 장래의 문제든, 내 개인적인 일에 관심이 뺏기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해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내 관심, 내 열정, 내 갈급함,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나에게 맞추어져 있으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없어요. 관심이 다 뺐겨 있는데 뭘 구합니까? 내 모든 갈증과 목마름이 나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해 목말라합니까?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눈이 가겠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눈이 달라지는 사람입니다. 관심의 대상이 달라지고 목말라하는 대상이 달라지고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을 통해 이루어지고 확장되어 지고 궁극적으로는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목마름의 대상이 되고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되는 사람이 될 때 복이 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거든요. 만족케 하시거든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전교인수련회 강사로 오셨던 왕십리중앙교회 양의섭 목사님 친구 목사님의 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미국 산호세에 있는 교회인데, 자체 건물이 없어서 미국인 교회에 세 들어 예배를 드려왔답니다. 오전엔 미국인이, 오후엔 한국인들이 예배드렸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미국 교인들은 점점 줄어들고 한국 교인들은 점점 늘어나고 급기야 한인 교회는 장년 출석 300명을 넘게 되어 성전을 독립적으로 가져야할 상황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교인이 뜻을 모아 성전 건축을 위해 헌금도 했습니다. 12억원을 모았답니다.
그리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답니다. 미국에서 12억으로 구할 수 있는 건물은 별로 없고, 또 그것으로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얼마 전 세 들어 살던 그 미국인 교회를 1원 주고 샀답니다. 아마도 1센트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우리가 가끔 예화로 듣던 일이 진짜로 벌어진 것이지요. 미국 교회가 쇠퇴해 가는 바람에 미국 교단에서 폐쇄를 결정하고 그 교회당 건물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세 들어와 있던 한인 교회에 1원에 증여했다는 겁니다. 성전을 마련해야 하지만 자기들 힘으론 할 수 없었던 성도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가고 확장하여 가는 공동체 아닙니까? 그런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함으로 목마름으로 구했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성전을 주옵소서.
그러는 중, 갑자기 날아 들어온 소식이 대지 5천 평의 교회당을 단 돈 1원에 주겠다는 겁니다. 복음이지요? 조건은 단 하나, 부흥하기를 원한다는 것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미국 교회 멋지죠? 폐쇄될 정도로 침체된 것은 마음 아프지만 하나님의 전을 팔아버리는 게 아니라 가난하지만 열정적으로 모이는 외국인 교회에 넘긴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 아십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요, 너무 계산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늘 끝없이 계산하고 가능성을 따집니다.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거기에서 눈이 머물러 있어요.
그렇다고 일이 되냐? 안돼요. 거기에 눈이 머물러 있으면 절대 일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하고 우리의 목마름이 그것을 향해 있다면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욱 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목말라하고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영적 갈망이 우리 안에 더욱 더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 말씀처럼 우리의 눈을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돌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고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모든 것을 더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우리 모두와 우리 교회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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