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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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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샬롬의 조건
2009년 11월 14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9
지난주에 팔복 중에 여섯 번째인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는데, 지난 주중에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시간들을 잘 가지셨습니까? 제가 비닐까지 들고 나와서 설명한 것 기억나시죠?
내 마음에 그렇게 하나 둘씩 무언가 끼어들면 하나님이 흐릿하게 보이고 나중에는 아예 안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대로 안보이니까 딴 것 보고 딴 짓하게 되고 나중에 자기가 뭘하고 모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못 보게 하는 것, 내 영적인 눈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시간을 가지셨냐 하는 질문입니다.
내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매우 심각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잘 기억하시고 무언가로 인해 내 영적인 눈이 흐려졌다 싶으면 지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으시고,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깊게 기경해서 굳어진 마음을 갈아엎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어지는 팔복의 일곱 번째 말씀을 전하기 전에 지난 주 말씀을 확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peacemaker입니다.
그런데, 화평하게 하는 자, 평화를 추구하는 자, 평화를 이루는 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자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그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기경되어서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걷어내고 제거하지 않으면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면 분명해집니다. 먼저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보통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성경에서 말씀하는 평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우선 인간 사이에 다툼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차별이 없이 평등하고 잘 사는 상태, 혹은 마음의 안정을 보통 평화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도 이런 것이냐 하는 겁니다. 어느 정도는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이런 차원을 뛰어넘습니다. 그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화평, 즉 평화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ειρηνη’(에이레네)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שלום을 번역한 것인데, 이 샬롬의 뜻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샬롬하면 우리는 의례 평화라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히브리어 인사에도 샬롬을 묻는 인사가 많습니다. 아랍어 역시 쌀람이라는 인사를 자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에는 참 익숙한 말이 바로 샬롬입니다.
그런데 이 샬롬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평화냐는 겁니다. 샬롬이라는 단어는 שלם이란 단어에서 왔습니다. 동사인데, 그 뜻이 '완전하게 하다, 충족하게 하다'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완전, 충족, 만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샬롬은 완전함을 말하는 겁니다.
완전함이 무엇입니까? 흠이 없는 상태, 결함이 없는 상태,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한 완전한 상태가 무엇이다? 샬롬이라는 겁니다. 완전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완전한 상태,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바로 샬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이 외적으로 갈등이나 전쟁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한 샬롬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비록 외적으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평등하고 차별이 없고 풍족하다 해도 그것을 진정한 샬롬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의 시대적인 배경이 로마시대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시대를 대변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Pax Romana입니다. 로마의 평화란 뜻입니다. 로마제국 이전에는 곳곳마다 작은 나라와 민족 간에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중해에는 늘 해적들이 있었고, 육지에도 강도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이 세워지고,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인해 작은 나라들간의 전쟁이 사라졌고, 지중해의 해적들도 소탕했고 육지에서도 강도떼들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경제적, 문화적인 번영이 있었습니다. 외적인 상황만을 보면 이것을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정한 평화, 샬롬인가 할 때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건 강력한 힘에 의해 눌려있는 것이지 진정한 화해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아무리 외적인 면에서 안정적인 것들이 충족이 되어도 내적인 부분이 충족 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샬롬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내적인 충족, 완전함이 무엇입니까? 시편 122:6에 보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שאלו שלום ירושלים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압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을 보통 두 단어가 합쳐진 것으로 봅니다. 도시를 뜻하는 'עיר'와 평화를 뜻하는 'שלום'이 합쳐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뜻을 '평화의 도시'라고 봅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얼룩 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비슷합니다.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시기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는 이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예루살렘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게끔 구하라는 것입니까?
보다 근본적인 שלו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내적인 샬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샬롬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의 문제는 외적인 전쟁이 없는 샬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샬롬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샬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충만함, 완전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될 때 인간은 참된 샬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샬롬이 부족한 것이 없는 완전함, 결함이 없는 완전함을 뜻한다고 했는데 세상의 그 무엇이 인간에게 그러한 충족과 완전을 줄 수 있습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예쁜 여자, 멋있는 남자랑 결혼하면 될 것 같습니까?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을 샬롬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러한 완전함은 완전한 존재, 부족함이 없는 존재, 흠이 없는 존재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를 내가 소유할 때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만 그러한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샬롬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즉 온 우주에서 완전한 유일한 존재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인간은 참된 완전함, 흠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진정한 샬롬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문제는 외적인 샬롬보다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내적인 샬롬이 더 문제였습니다. 성경을 보고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 전쟁이 일어나요?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구하라는 말씀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을 수 있도록, 그 무너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샬롬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샬롬을 누려야 합니다. 일시적인 안정, 일시적인 만족, 일시적인 번영, 일시적인 기쁨이 샬롬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주어지는 안정감, 그 만족함, 그 기쁨, 그 행복, 이것이 진정한 샬롬이고 이러한 샬롬을 경험하고 누려야 합니다. 이 샬롬을 경험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peacemaker가 됩니까?
하나님과의 샬롬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과의 샬롬이 있어야 합니다. 샬롬이 평화, 화목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화목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화목의 반대말을 불화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불화의 상태라면 내 안에 진정한 샬롬은 없습니다. 이미 흠이 났는데, 결함이 생겼는데 그건 완전함이 아니거든요. 완전함이 깨졌어요. 그러니 마음에 샬롬이 없지요.
내가 하나님과 불화한지 화목한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안에 감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 말입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하는 그런 상투적인 것 말고, 조건과 상관없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말하는 겁니다. 이러한 감사가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무엇을 가져서 누려서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내가 기뻐할 수 있냐는 겁니다. 그리고 예배입니다. 정말 여러분들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냐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이 내 안에 있다면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과 그리 화목한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안에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고 찬양이 사라지고 예배가 식어진 겁니다. 내 안에 진정한 샬롬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저는 거창하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먼저가 아니거든요. 출발점은 내 안에 참된 샬롬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샬롬을 맛봐야하고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나가 샬롬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안에 이 샬롬이 있습니까?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나에게 완전한 샬롬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 관계가 회복해야 하고 늘 올바른 관계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샬롬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샬롬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샬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왭니까?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고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하나님의 샬롬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복음 2:14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찬양이 나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이 왜 사람들 중에 평화를 말합니까?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간에 막힌 그 죄가 해결될 때 진정한 평화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 없이 샬롬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5:34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혈루증, 하혈 증상, 부인병입니다. 12년 동안을 하혈을 앓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직접 만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댑니다. 여자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막 5:28)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고 그 결과 그녀의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알고는 이 여자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지금 구원과 평안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구원 없이 평화는 없다는 뜻입니다. 죄의 문제 해결 없이, 죄로부터의 구원 없이 샬롬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샬롬이고 샬롬은 곧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이 있어야 내게 샬롬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과 나를 화목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필요합니다. 예수 없이 진정한 샬롬은 없습니다. 예수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야의 이름이 peacemaker입니다. 죄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샬롬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진정한 샬롬의 길을 가르치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진정한 샬롬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나의 평화, 나의 שלום을 주는 데, 이 평화, 이 שלום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요 14:27)고 하신 겁니다. 다를 수밖에요. 세상이 줄 수 있는 평화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일시적인 것이거든요. 그것은 진정한 샬롬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진정한 샬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된 샬롬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은 샬롬입니다. 여호와 샬롬. 예수님이 없는 샬롬은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있어야 샬롬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제가 거의 매주 설교 때마다 여러분들에게 권고하며 축복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 없이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영접은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내 마음 문밖에서 노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는 문을 꽉 잠그고 있어요. 내 안에 지금 샬롬이 없어요. 그런데도 나는 문을 꽉 잠그고 있어요. 그 문을 여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샬롬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는 겁니다. 그것이 영접하는 겁니다.
그럴 때 나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래야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이 말씀 역시 매주 하는 말일 겁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죄를 회개하고 죄용서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진정한 샬롬이 나에게 회복되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 영접하고 난 후 계속해서 이 샬롬을 맛보고 있냐는 겁니다. 어떠세요? 그럴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거든요. 지난 주 말씀처럼 내 안에 죄가 들어오고 불순종과 영적 게으름이 들어오고 음란이 들어오고 미움이 들어오고 염려걱정이 들어오고 교만과 거짓과 위선이 들어오면 내 영적인 눈이 가려집니다. 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잘 안보이게 되고 내 안에 샬롬이 깨지게 됩니다.
샬롬은 완전한 상태라고 했어요. 그러한 것들이 들어왔으니 깨지지요. 그러니 내 안에 샬롬이 깨지는 겁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지고 예배가 메마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힘들죠. 그러니 예배도 힘들고 감사도 힘들고 사랑하는 것도 힘들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져요. 샬롬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이 깨어진 샬롬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처음으로 내게 샬롬이 주어진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보혈로 깨어지고 흠이 나버린 샬롬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 샬롬을 이루는 자는 다른 것 아닙니다. 샬롬의 하나님을 나누어주는 겁니다. 샬롬의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겁니다. 상속시켜 주는 겁니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내 안에 그 하나님의 샬롬이 없으면 못 줍니다. 나누어주고 싶어도 못줘요. 상속시켜 주고 싶어도 못줘요. 보여 주고 싶어도 못합니다.
말할 수는 있지요. 그것뿐입니다. 왜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고 교회를 욕합니까? 단순히 세상이 악해서입니까? 아니거든요. 우리가 샬롬의 하나님의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나누어주질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만합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은 고집스럽고 인색하고 위선적인 것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복이 있는데 그 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요 1:12)습니다. 내가 적어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우리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워질 수 있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어요. 누군가가 나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하고 부르는 그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럴 수 있냐는 겁니다.
아버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아들이고 딸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그 아들을 통해 사람들은 아버지를 봅니다. 누군가 잘못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뉘 집 아들이야?" 무슨 뜻이에요. 그 사람을 통해 그의 아버지를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납니다. 우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인데 세상은 우리를 통해 아버지를 본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겁니다. 싫든 좋든 보게 되어 있어요. 내가 원하든 원치 않는 나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보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아버지 하나님의 샬롬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나를 통해 샬롬의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여지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요한일서 4:12 말씀이 한 예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샬롬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샬롬이 있어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샬롬이 내 안에 있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샬롬이 우리 안에 더욱 더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누구를 보게 된다?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싫든 좋든 내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샬롬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샬롬의 하나님을 볼 것이고, 내 안에 하나님의 샬롬이 깨어졌거나 흠이 나있거나 더럽혀져 있다면 사람들은 나를 통해 깨어지고 흠이 나고 더럽혀진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만일 후자가 나의 모습이 된다면 그것만큼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아들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딸이 되고 싶으세요?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아들딸이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전혀 다른 아버지, 잘못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들딸이 되길 원하십니까?
후자를 원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봅니다. 실제의 삶에서는 그럴지라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문제는 내 안에 하나님의 샬롬이 온전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샬롬해야 합니다. 이 샬롬을 위해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내 안에 지성소가 있어야 합니다. 지성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입니다. 내 죄를 법궤 안에 넣고 그 위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리는 자리입니다. 그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 죄용서를 해주시는 자리입니다. 내 죄와 허물을 사해주시는 자리입니다. 이 지성소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내 삶에, 날마다 삶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저 교회만 다닌다고, 그저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 드리고 봉사 좀 한다고 해서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안에 지성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내 안에 들어온 죄와 불순종과 영적 게으름과 미움과 염려걱정과 교만과 거짓과 음란과 위선, 하나님과의 샬롬을 깨뜨리고 막아버리는 것들을 다 씻어내야 합니다. 걷어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갈아엎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을 기경하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굳어진 마음, 강퍅한 마음, 인색한 마음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진정한 샬롬이 회복되는 겁니다. 다시금 샬롬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샬롬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저절로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나오고 찬양과 예배가 나오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 세상이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실제로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될 수 있고, 그러면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하나님의 자녀야'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거듭거듭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없이는 샬롬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더불어서 샬롬은 값을 지불할 때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어로 값을 지불한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משלם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에서 온 것 같습니까? 발음을 잘 들어보시고 단어의 모양을 잘 보세요. שלם에서 나온 말입니다.
שלם, 완전함은 어떻게 이루어는가? 그 값을 치를 때 완전해진다는 겁니다. 빚이 있어요. 그건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값을 치러야 합니다. משלם해야 합니다. 그래야 שלם, 완전해 집니다.
결국 שלום은 값을 치를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샬롬을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어요. 즉 죄가 치러야 할 값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내가 치러야할 값은 죽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대신 그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대신 값을 치루었다, 그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양과 소, 비둘기를 통해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내 죄로 인해 내가 죽음으로 나의 죄값을 משלם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나 대신 이 양이, 이 비둘기가, 이 소가 죽음으로써 내 죄 값을 대신 משל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하질 않습니다. 짐승의 피고 죄를 지을 때마다 이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고 단번에 드리는 משלם을 위해 오신 분이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죄값을 משל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שלו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משלם없이 שלום은 없습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없이는 진정한 שלום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의 משלם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이미 משלם하신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씻음 받아 내 안에 하나님의 שלום이 이루어졌다면 내가 화평케 하는자, peacemaker, 히브리어로는 עושה שלו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משלם해야 합니다. 나 역시 משלם해야 합니다. 값을 치러야 합니다. משלם없이 שלום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치러야 할 משלם이 있습니다. 구원과 죄 용서에 대해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완벽하게 값을 치루셨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샬롬을 갖기 위해서 내가 치러야할 משל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 그리고 또 무엇이 있습니까? 순종이라는 משלם입니다. 순결이라는 משלם입니다. 거룩이라는 משלם입니다. 자기부인이라는 משלם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하는 משלם입니다.
예수는 믿는 것 같은데 순종이라는 משלם이 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משלם이 없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משלם이 없다 라고 했을 때 과연 하나님과의 샬롬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노력과 희생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משלם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치러야 할 값이 있단 말입니다. 그걸 משלם해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지속적이고 더 깊은 샬롬이 오는 겁니다. משל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화평케 하는 자, 평화를 이루는 자, עושה שלום을 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를 나누어주고 보여주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려면 반드시 משל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משלם없이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회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 가장 작은 세상, 가장 작은 사회가 뭡니까? 가정입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사회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하고 그 기초가 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리고 나라가 흔들리게 됩니다. 왜 오늘날 가정의 위기를 말합니까? 왜 많은 가정들이 문제가 있습니까? 왜 많은 가정에 평화가 없습니까? 왜요? משלם이 없어서 그래요. 남편이, 아내가 משלם을 안해요.
'난 죽어라 고생해서 돈 벌어오는데요? 난 맨날 아이들 보고 밥하고 청소하고 집안일 하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맞아요. 그것도 משלם입니다. 내 남편이 지금 열심히 직장에 나가 고생하면서 가족들을 위해 משלם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와 자녀들이 인정해줘야 합니다. 당연하게 받으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 아내가 눈에 별로 띄지도 않는 집안일을 정말 열심히 하면서 가족들을 위해 משלם하고 있다는 것을 남편과 자녀들이 인정해줘야 합니다. 그 משלם을 인정해줘야 שלום이 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해야 할 משלם 잘 해야합니다. 그래야 שלום이 옵니다. 음식 정성껏 맛나게 해줘야 살롬이 옵니다.
그런데 사실 그건 משלם이지만 동시에 의무입니다. 가장으로써, 남편으로 해야 할 의무입니다. 아내로써 어머니로써 해야 할 의무입니다. משלם이지만 의무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진짜 משל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샬롬이 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먼저 하는 겁니다. 내가 무언가 더 수고하는 겁니다. 더 값을 치르는 겁니다. 그것이 משלם입니다. 가령 부부간에 싸웠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משלם해야 하는데 안했다는 겁니다. 싸움과 갈등, 불화의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아요. 당신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משלם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는 משלם하려고 하지 않아요.
거기에 원인이 있는 겁니다.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서의 문제가 여기 있고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가 여기에 있어요. 늘 당신이 문제라는 겁니다. 당신만 משלם하면 된다는 겁니다. 당신만 바뀌면 된다는 겁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니거든요. 나에게도 משלם해야 할 것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안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네가 משלם하면 샬롬이 온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탄의 말입니다. 세상의 말입니다. 거기에는 답이 없어요. 결코 샬롬이 안 옵니다.
네가 아니라 내가 משלם하면 샬롬이 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말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즉 내 안에 십자가의 משלם이 있어야 샬롬이 오는 것이고, 그 십자가의 משלם에 힘을 얻고, 그 십자가의 משלם을 본받아 내가 먼저 משלם을 하는 것을 통해 샬롬이 온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말이 돼야 되고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8:6 말씀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네가 משל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우리 교회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우리 관계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사회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민족과 국가 간의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맞을 수도 있어요. 객관적으로 볼 때 상대방이 משלם해야 할 것 있어요.
그러나 늘 그 원인을 남에게 돌리고 상대방에게만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고 사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소리입니다. 해결 안되요. 더 큰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게 돼 있어요. 그 끝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달라요. 성령의 생각은 달라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생명과 평안은 연결되어 있고 같은 의미입니다. 그 상황에서 먼저 그리스도의 생명과 샬롬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신 משלם을 생각합니다. 그 משלם 때문에 내가 생명을 얻은 겁니다. 그래서 샬롬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의 사람은 이걸 생각하는 겁니다. משלם의 대가는 샬롬이고 생명입니다.
실제로 해 보세요. 여러분의 가정에서 실제로 여러분 자신이 먼저 משלם해 보세요. 부부관계에서 먼저 משלם해 보세요. 자녀와의 관계에서 먼저 משלם해 보세요. 교회 안에서도 먼저 משלם해 보세요. 직장에서도 먼저 משלם해 보세요. 사회에서도 먼저 משלם해 보세요.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 말씀 그대로 샬롬과 생명이 주어집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남편이 설거지나 청소나 힘든 일을 해주는 겁니다. 설거지의 경우 사람마다 편차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남자는 부엌에서 손에 물 묻히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 이걸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하는 것이 바로 משלם입니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 해보지 않은 일, 별로 내키지 않는 일 하는 것이 바로 משלם입니다.
자,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어요. 피곤합니다. 힘들어요. 할 일도 있어요. 그런데 아내가 좀 힘들어 보입니다. 사실 집안일이 표시는 안나는데 힘들어요. 혹은 아내가 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혹은 아내가 설거지를 부탁했어요.
그럴 때 반응은 둘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 왜 그걸 나한테 하라고 해.' 할 수 있어요. 반대로 '나도 힘들지만, 나도 피곤하지만, 나도 할 일이 있지만 당신을 보니 힘들어 보이네, 하루 종일 참 수고한 것 같네, 까짓것 설거지 내가 할께' 할 수도 있단 말이죠. 날마다 하는 것 아니잖아요.
이건 한 예를 든 건데, 이럴 때 뭐가 와요? 샬롬이 오는 겁니다. 아내에게 물어보세요. 남편이 그런 משלם할 때 어떤지. 샬롬 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내가 더 힘들다, 니가 한 것 뭐 있냐, 당신이 משלם하면 우리 가정에 샬롬이 온다라고 생각하면 절대 샬롬이 오지 않습니다. 샬롬은 네가 아닌 내가 값을 치를 때, 내가 משלם할 때 오는 겁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더 많은 예를 들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단순히 자신만의 평화를 즐기며 사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자신의 독생자를 משלם하신 그 엄청난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샬롬을 위한 משלם을 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샬롬을 위해 משלם을 하는 사람, 교회에서 샬롬을 위해 משלם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샬롬을 위해 משלם하는 사람, 직장과 사회에서 샬롬을 위해 משלם하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벽을 쌓을 때 그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그래서 샬롬을 이루는 사람 되고, 원수된 자들을 화목케 하는 일을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도 화목하게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 사람들이 샬롬의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샬롬을 나누어주고 전해주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샬롬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 peacemaker, עושה שלום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이 사람들 정말 하나님의 아들들이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우리를 보시고 "너희들 정말 내 아들딸들이다"라고 기뻐하실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람 되어 이 복을 누리는 자 되길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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