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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은 없다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1731 추천 수 0 2013.07.27 08: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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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0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2009년 11월 21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팔복산 현장예배

이번 주는 예수님께서 친히 팔복의 말씀을 전하셨던 갈릴리 호수 옆 팔복산(팔복교회)에 가서 현장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가 점심시간에는 문을 닫아 산 비탈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오히려 더 현장의 느낌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중간은 없다

마태복음 5:10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말씀을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는 박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박해, 다른 말로하면 고난, 핍박 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박해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8-20 말씀을 봅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 말씀을 보면 고난, 박해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와 잘못으로 인해 받는 고난입니다.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자기의 죄로 인해, 자기 잘못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박해가 아닙니다. 자기 죄 때문에 당하는 일인데 무슨 박해입니까? 이런 유의 고난은 대부분 자기 욕심 때문에 생긴 경우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가 된 경우입니다. 복이 되기는커녕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화가 됩니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베드로전서 4:15 말씀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권고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일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고난을 받는 건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일들을 종종 본다는 겁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정말 경계하고 피해야할 일입니다.

  두 번째 고난은 부당하게 받는 고난입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애매하게 받는 고난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받게 되는 고난입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부당하게 애매하게 억울하게 받는 고난입니다.

이런 경우가 많이 일어납니다. 나는 조심했는데 옆집에 불이 나서 우리 집도 타버렸어요. 나는 조심했는데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교통사고가 났어요.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나는 성실하게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사회적인 구조악으로 인해 내가 피해를 봤어요. 이런 경우들입니다. 부당하죠. 애매하고 억울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갖는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이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아니면 ‘마귀가 나를 시험하고 있어’이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이것 옳은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그런 어려움 하나님이 주시는 것 아닙니다. 원인은 둘 중 하나입니다. 내 잘못이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인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나를 보호하시는 것이고 내게 닥친 고난의 상황을 통해 나를 가르치시고 나를 다듬으시고 연단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게 닥친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라는 식의 말이나 원망을 하지 마십시오.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준 일이라고도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너무 이분법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않 좋은 것은 다 마귀가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김기동 집단, 성락교회, 베뢰아라고 하는 이단 집단에서는 인간에게 오는 모든 안좋은 일들을 다 마귀가 준 것으로 가르칩니다. 감기도 마귀가 준 겁니다.

그런 사고를 갖고 있으면 우리의 세계관은 마귀적인 세계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관입니다. 우리의 세계관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 되어야 합니다.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 것이 있고 그냥 찾아오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이걸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해서 우리를 악으로 빠지게 하는 겁니다. 그것만 잘 구별하면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충동해서 우리를 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잘 구별해야 합니다.

  이제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성경은 이렇게 부당하게 받는 고난, 애매하게 받는 고난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가르칩니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절)

  어떻게 하라? 하나님을 생각하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부당하게 받은 고난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처음엔 억울하겠죠. 황당하죠.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런 일을 당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때 예수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있어서 그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아니거든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의 상황을 잘 이겨내라는 겁니다. 공연히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영적인 힘을 낭비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은 처리해야 하지만 그러면서 영적인 힘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부당하게 당한 고난이지만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 슬픔을 잘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 바라보는 믿음으로 잘 견뎌내고 이겨내는 사람을 볼 때 정말 아름답습니다. 왜요? 성숙하거든요. 정말 믿음이 보이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당하게 애매하게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는데 그때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비록 내게 부당하고 애매하고 억울한 고난이 찾아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 나와 함께 하셔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잘 참고 이겨내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세 번째 고난입니다. 20절 말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 고난은 다른 데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도 아니고 부당하게 받은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을 행함으로” 이것이 고난을 받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팔복의 마지막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같은 의미입니다. 선을 행하다, 의를 행하다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아니 선을 행하고 의를 위하여 살다보면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왠지 아십니까?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의를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선, 윤리적인 선이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선과 의를 말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박해라는 겁니다. 미움이고 고난이라는 겁니다. 물론 큰 복과 은혜가 오지요. 이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고난과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라고 하셨는데, 이어지는 11절에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나를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은 자를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 예수님의 말씀과 뜻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 예수님을 전하는 자, 예수님께 헌신하여 드리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고난과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 말 들으니까 예수 믿기 싫습니까? 겁납니까? 사람들이 그런답니다. ‘복 받으십시오.’하면 ‘아멘!’하는데 ‘고난 받읍시다’하면 대답이 없답니다.

  여기에는 큰 축복이 있습니다. 고난과 박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말씀드리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고난에도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택해야할 고난은 세 번째 고난, 선을 행하다 받는 고난, 의를 위하여 살아가다가 받는 고난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의를 위하여, 즉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과 박해라고 할 때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의 근원이십니다. 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 예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가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는 삶을 살 때는 무엇이 드러나게 될까요?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이 드러나게 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샬롬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분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순결과 그분의 의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의롭질 않아요. 불의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의롭질 않아요. 그 안에 예수님이 없고 예수님의 의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충돌이 일어나고 대립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은 거짓이 그들의 밥입니다. 거짓을 행하고 남을 속입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 진실을 택합니다.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불법을 행합니다. 뇌물을 주고 받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하고 불법을 행합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위해 정직을 택했습니다.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음란의 문화입니다. 불륜이 무슨 자랑이고 음란한 문화가 판을 칩니다. 술도 술로 끊나지 않습니다. 성적 음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순결을 택했습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무시합니다.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미움과 복수의 문화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 세상의 코드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따라 용서와 사랑을 택했습니다.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우상숭배를 합니다. 탐심을 숭배하고 돈을 숭배하고 권력을 숭배하고 온갖 거짓된 신들을 숭배하고 죽은 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깁니다.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전하는 것 싫어 하고 예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욕합니다. 안티를 위한 안티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합니다. 충돌이 일어납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날조차도 자기를 위해 보내고 죄를 짓는데 보냅니다. 그러나 나는 그날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기에 마땅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위해 하루를 보냅니다.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예들을 무수히 들 수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갈 때 이러한 것들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닮은 진실이 나타나고, 정직이 나타나고, 순결이 나타나고, 용서와 사랑이 나타나고, 순종과 거룩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의가 나를 통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때로는 미움으로, 때로는 질시로, 때로는 고난과 박해로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왜요? 다르거든요. 자신들의 불의함이 드러나거든요. 열 명이 똑같이 못된 짓할 때는 모르지만 그 중에 한 명이 착한 짓하면 못된 짓 하던 다른 아홉이 좋아할 리가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충돌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내 주위에는 정말 정직하고 젠틀한 사람들만 있어서 일까요? 그러면 참 좋겠는데 아니라는 것이지요. 원인은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이 거짓을 행할 때 나도 슬쩍 묻어 거짓을 행합니다. 세상이 불법을 행할 때 나도 두 눈 딱 감고 이번만 하면서 슬쩍 묻어 불법을 행합니다. 세상이 음란을 행할 때 나 역시 그 음란을 쫒아갑니다. 나 역시 미움과 복수의 길을 택합니다. 나 역시 불순종의 길을 택하고 탐심을 숭배하고 돈을 숭배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이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러면 충돌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데 무슨 충돌이 있습니다. 다만 내 마음 가운데 갈등만 있을 뿐이지요. 약간의 죄책감과 더불어 말입니다.

  이것 아십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간을 좋아한답니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하라는 것이지요.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군대에서도 그렇게 배웁니다. 너무 튀지도 말고 너무 못하지도 말라는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까지도 영향을 끼친 건지 신앙에 있어서도 중간쯤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타협입니다. 자기 합리화입니다.

‘이 정도는 뭐...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렇게 해서 세상 어떻게 살아. 그건 그저 그렇게 하면 좋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이 정도면 돼’

  그런데 신앙엔 중간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중간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순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불의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래도 나는 주일날 교회 나가고 십일조도 내고 봉사도 하니까 좀 낫다? 좀 낫기는 하겠지만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별 다를 것 없습니다.

  예전에 투갑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안성기 씨가 형사로 나오는데, 뇌물 좋아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 큰 집을 갖고 있는데 그걸 숨기기 위해 허름한 집을 따로 하나 두고 있는 형사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일 때는 경찰의 정신으로 악당들을 소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립니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서 집에 와서 하는 말이 “회개 기도했더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겁니다. 그리곤 또 다시 뇌물을 받고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읍니다.

  이 영화 참 재미있게 봤지만 그 장면에서는 참 씁쓸했습니다. 어떤 시나리오 작가가 썼는지 모르지만 그냥 썼겠습니까? 본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봤기에 그리 쓸 수 있는 겁니다.

  이런 투캅스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만 보여주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골방에서만 보여주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실제의 나의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에 중간은 없습니다. 그렇게 타협하고 적당히 묵인하고 똑같이 살아갈 때 충돌이 없으므로 고난이나 박해는 없겠지만 대신 찾아오는 것은 조롱과 비웃음, 수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을 통해 그 어떤 영향력도 변화도 감동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아는 한 내가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 때 그들에게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이 말씀, 좀 무거운 주제일 수 있습니다. 좀 불편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데 와서 뭐 그렇게 무겁고 불편한 말씀을 하실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이것이 주님의 말씀인데요. 이 말씀 무겁게 받지 마십시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그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그 차원에 머물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 다녀서 마음의 평안 얻고 복 받는 그런 차원에 머물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정말 내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애쓰고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쫒아 살아가려고 씨름하고 애 쓰는 사람, 내 입술과 삶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 예수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기를 늘 소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그로인해 미움과 질시와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고난이라면 오히려 감사한 일 아닐까요?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감으로 인해 얻어지는 미미한 안정보다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감으로 인해 얻어지는 박해가 훨씬 더 복 있는 것 아닐까요?

  팔복산을 영어로 ‘Mount of Beatitudes’ 라고 하고, 히브리어로 ‘하르 오쉐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beatitude의 뜻과 오쉐르의 뜻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둘 다 삶의 태도, 삶의 방향과 관련된 말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오쉐르, 무엇이 복이냐? 아샤르, go straight, go on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따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장 가는 겁니다. 중간에 한 눈 팔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가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바로 복이고, 그럴 때 진정한 행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영어의 beatitude라는 말도 그 뜻이 be-attitude라고 했습니다. 결국 복은 무엇이다? 내가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리고 어떠한 삶의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여덟 가지의 복은 소유의 복이 아니라 태도의 복이고 방향의 복입니다. 하늘 백성으로서 어떠한 마음의 태도,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삶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8가지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 최고의 행복, 지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be-attitude, 나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더 이상 타협하지 마세요. 자기 합리화하지 마세요. 영적 무감각에 빠져서 살지 마세요. 중간은 없습니다. 결단하십시오. 삶의 태도를 바꾸십시오. 방향을 바꾸십시오.

  그리고 아샤르, go straight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 더욱 더 go straight, go on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가장 큰 복, 지복이라고 할 수 있는 beatitude, 오쉐르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하늘 백성들이 누리는 최고의 복입니다. 이 복을 모두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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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4 마태복음 ID 카드를 보여주세요. 마5:13-16  류공석 목사  2013-07-27 1839
9503 마태복음 하늘의 상이 큼이라! 마5:10-12  류공석 목사  2013-07-27 2196
» 마태복음 중간은 없다 마5:10  류공석 목사  2013-07-2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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