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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상이 큼이라!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192 추천 수 0 2013.07.27 08: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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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0-12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하늘의 상이 큼이라!
2009년 11월 28일 대림절 첫째 주, 텔아비브 욥바 교회
마태복음 5:10-12

  지난주에 이어 팔복의 마지막 말씀을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박해, 다른 말로는 고난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고난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죄나 잘못, 욕심으로 인해 당한 어려움입니다. 사실 이건 고난이나 박해라고 하긴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할 고난입니다.

  두 번째 고난은 부당하게, 애매하게 받는 고난입니다. 내가 잘 못한 것이 아닌데 받는 고난입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다름 사람들 때문에 받는 고난, 혹은 사회적 구조악에서 받는 고난입니다. 사실 이런 고난이 많은데, 이런 경우 어떻게 하라? 쓸데없이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주셨다는 말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런 식의 시험을 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부당하게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다? 나를 보호하시고 내게 닥친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내게 닥친 모든 일들을 합력하게 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고난을 참고 이겨내셨을 때 주님께서 얻으신 영광을 생각하면서 잘 참아내라는 겁니다. 그 문제를 해결은 해야 하지만 쓸데없이 원망하고 염려하고 미워하면서 영적인 힘을 낭비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모습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보는 이들에게 아름답고, 그 과정을 통해 더욱 더 성숙한 신앙으로 연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고난은 무엇입니까?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 박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고난은 바로 이러한 고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내 맘에 모시고 살아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예수님의 정신과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가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오는 것이 세상과의 충돌이라고 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사는 자,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자, 필연적으로 세상과 충돌을 겪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미움으로, 배척으로, 핍박과 박해로 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이 있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이고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이 충돌은 내가 잘못하고 내가 욕심 부리고 해서 생기는 충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욕 얻어먹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의를 위하여 살아감으로써 생기는 충돌보다는 나를 위해 살아가다 생기는 충돌, 내 욕심과 세상의 본성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다 생기는 부정적인 충돌입니다. 이건 고난도 박해도 아니고 내 욕심으로 주어진,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함으로 인해 주어진 치욕이고 수치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건강한 충돌이 있기를 바랍니다.

  12절을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잘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을 누구와 동일시하고 계십니까? 선지자들. 구약의 예언자들과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은 의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내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대열에 속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곧 예언자라는 겁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을 잘 보면 예언자들에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축복을 선언하는 예언자들과 재앙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입니다. 북 왕국이 멸망하기 전에도 그랬고, 남 유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앗수르,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적 앞에 풍전등화처럼 나라의 운명이 위태할 때 서로 다른 예언을 하는 예언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다.’ 축복을 선포하는 예언자 그룹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소수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재앙과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죄로 인해 심판받아 멸망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버렸기에 하나님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다. 심판을 피하려거든 이제라도 옷을 찢고 회개하고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소수의 예언자들이 이러한 재앙과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미가, 스가랴,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입니다. 기득권층이나 백성들이 듣고 싶은 것은 안녕과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좋아할 리가 없지요. 이들을 배척했고 많이 박해를 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 같은 경우 매국노로 몰리기까지 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당시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이후 그다랴를 유다의 총독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그다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마엘에게 살해를 당하고, 이스마엘은 도망갑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군대장관이었던 요하난은 반역에 대한 책임추궁이 두려워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가려했습니다. 바벨론에 대항해서 싸워줄 수 있는 나라는 애굽뿐이라고 믿고 애굽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무어라 말합니까? 애굽으로 가지 말고, 또 애굽을 의지하지도 말고 유다 땅에 남아 있으면서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내려진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원했던 답은 그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예레미야는 매국노로 몰리고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그가 예언자라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 선지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고난과 박해를 받아야 합니까?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사람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주신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를 특징짓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모스 3:8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때문에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선지자들과 동일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의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는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그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예언자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예언을 무슨 점치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 앞에 사람들이 설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 자신의 허물, 자신의 거짓과 위선을 깨닫게 하고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언에는 회개와 용서로 인한 평안이 따릅니다. 점쟁이들의 예언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 사명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예언자적 사명이라고 합니다. 목사인 저에게는 예언자적 사명이 있습니다. 설교가 무엇입니까? 지루하고 따분한 종교적인 강의입니까? 잘살아야 한다는 윤리 강의입니까? 화려하고 재미있는 말솜씨를 늘어놓는 시간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대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위로도 있지만 책망과 회개의 촉구도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예언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적이거나 이상한 것들이 섞이면 그건 예언이 아닙니다.

  저는 이 예언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합니다.
‘내게 말씀을 먹여 주시옵소서. 주님 손에 들린 말씀의 두루마리를 내게 먹여 주옵소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뜻만을 전하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순종하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과 변화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저의 날마다의 기도제목입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예언자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누구를 향해서? 세상을 향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에게는 예언자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선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답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언자는 우선 하나님 앞에 선 자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세상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대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허튼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왜 죄인이며,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무엇인지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본질적인 해답이고 예수님이 참된 행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부패하고 음란하고 정직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정의와 순결과 정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가 정치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죄악과 부정부패로 썩어져가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예언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정치가 어떠니 가진 자들이 어떠니 하면서 세상을 욕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를 생각하면서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실천해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사가 내게 불법을 행하라고 했을 때 어찌할 것인가? 먹고 사는 것을 위해 그 불법을 행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절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후자를 택했을 때 따라오는 결과는 고난입니다. 미움이고 고난입니다.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할 것인가? 실제적인 문제 앞에 고민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목사로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목사로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후자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불법을 거절했을 때 쫓겨난다고 해도 그것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취업도 어렵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인데 너무 세상 물정 모른다고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상 물정보다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물정 몰라도 하나님 말씀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 물정 몰라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서 망하는 겁니다. 세상 물정 몰라도 하나님 말씀 알고 그 말씀 지키면 돼요.

  불법인 것을 알고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됨을 알면서도 그것을 택해서 나의 자리가 유지되고 승진이 된다할지라도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 수치이고 치욕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지된 내 자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굶더라도 후자를 택하십시오. 단언하건데 안 굶습니다. 하나님이 굶길 것 같습니까? 아니요. 굶기지 않으셔요.

  그리고 설령 굶게 되더라도 서럽지 않아요. 그 사람 행복하게 굶을 수 있어요. 왠지 아십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쪽이 다수다.”

  멋있는 말이지요?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참된 예언을 했던 선지자들을 소수였어요. 늘 그랬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불의하기 때문에 이런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을 싫어했어요. 배척했어요. 미워했고 박해했습니다.

  다수가 다 그릇 행하는데 나 혼자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소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쪽이 다수입니다. 결국에는 승리하게 돼 있어요.

  신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믿는 것 아니고 골방에서만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고, 이러한 삶이 바로 예언자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갈 때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후에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했던 것이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하신 일입니다. 열두 제자만 보내신 적도 있고 이차 제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포함해서 칠십 명을 보내신 적도 있으십니다. 그때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2-2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오늘 본문인 팔복의 마지막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같은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최초로 복음을 전한 유대인 선교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오는 것이 배척과 박해라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지만 배척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복음을 열심히 전했고 그 결과 유대인들에게 많은 미움과 박해를 받았고, 이후에는 로마의 박해까지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 생각난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이 말씀입니다.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그 아름다운 산기슭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말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거든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실제적인 위로였고 소망이었고 모진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그 믿음을 잃지 않은 실제적인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 땅에서 복음을 전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복음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해 배타적이고 싫어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반선교단체에 의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비자를 못 받아 추방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눈물이 묻어있는 복음이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물론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선교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눌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부러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지혜롭고 점진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눌려있어요. 움츠리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있을 배척과 핍박에 말입니다.

눌려있으면 안됩니다. 움츠려들면 안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지혜가 필요하고 선교전략이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받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예언자의 삶입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자로서 그저 공부만 하다가, 비즈니스만 하다가, 키부츠 경험만 하다가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움츠려들지 맙시다. 우리에게 있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유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세요. 유대인 미워하면서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좀 힘들겠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복음에 대해 그리 반감이 크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괜히 종교인들 붙잡고 말싸움 하지 말고 그런 사람들에게 전하면 됩니다.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이나 박해를 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고 실제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데, 단순히 물질의 지원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그들을 위한 기도가 따라야 하고, 특별히 메시아닉 전도자들과 교회들이 모든 박해를 이겨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한번 말씀드렸고 아시는 것처럼 우리 교회에 나오고 있는 유대인 지체들의 경우 종교인들에 의해 여러 번 협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을 위해 정말 우리가 두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담대할 수 있도록, 그 협박과 박해가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유대인 지체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예언자들입니다. 최초의 유대인 선교사였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여러분들도 선교사들입니다. 더욱 더 복음의 능력으로 담대하고 강건해지길 축복합니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의 일인데요, 루마니아에서 목회를 하며 복음을 전하던 죠셉 돈 목사님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정부의 박해를 받아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었는데 얼마 후 소련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습니다.

하루는 복음주의 잡지사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대답하기를“저는 두렵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기자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공산권이 무너지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죠셉 돈 목사는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는 성도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예수를 바라보고 더 열심을 냈습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국이 개방되었을 때 내 조국의 교회가 예수를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질 까봐 두렵습니다.”

  참 마음에 와 닿는 말 아닙니까?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국이 개방되었을 때 내 조국의 교회가 예수를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질 까봐 두렵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대형화되고 몇 천, 몇 만 명씩 모인다는 교회들은 많아지는데 정작 예수를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박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없는 것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정신과 말씀과 뜻을 좇아 살아갈 때 세상과의 충돌이 일어나고 그랬을 때 그것이 때로는 미움과 고난과 핍박으로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아는 사람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작년 8월 인도에서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힌두교도들에 의한 기독교 박해였습니다. 매우 처참했습니다. 인도 정부의 보고에 의하면 100여명이 사망하고 1만 여명이 부상을 입었고 4200채의 집이 파괴되고 교회도 250여 곳이 파괴되었습니다. 인도정부에서 서둘러서 사건을 종결한 후에 난민촌도 폐쇄를 해버려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 슬럼가로 들어와서 싸구려 월 셋방을 얻고 품팔이 노동을 하며 그 날 그 날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한 분이 이들을 찾아가 만났다고 합니다. 신앙 때문에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삶의 모든 근거를 잃은 그들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우리는 예수를 포기할 수 없어서 목숨과 재산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를 버리면 모든 것을 건질 수 있었지만 우리는 예수를 붙잡았고 대신 삶의 터전을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를 버리면 살 수 있는데, 예수를 부인하면 모든 것을 건질 수 있었는데, 예수를 포기할 수 없어서 목숨과 재산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시냐고요? 도대체 예수가 무엇이길래 예수 붙잡고 목숨과 재산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안에 예수가 있으면 이럴 수 있어요. 그 안에 예수님이 있어서 내 죄가 용서받고 새 생명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 못 버려요. 내가 정말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서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면 예수님 못 버려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는데, 그리고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버립니까?

  예수를 소유하면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이 다 배설물처럼 여겨집니다. 최고의 가치를 찾았는데, 최고의 보물을 찾았는데, 최고의 행복, 행복의 근원을 찾았는데 당연하지요. 예수만 있으면 다른 것은 없어도 돼요. 좀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 참을 수 있어요. 최고의 것이 없으니까 다른 하찮은 것들에 목매고 그 하찮은 것들 때문에 예수를 부인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보물, 최고의 가치, 최고의 행복이 있는가 말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돼요. 예수님을 위해 고난과 박해를 받을 수 있어요. 예수를 위해 목숨과 재산도 포기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서도 감사할 수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붙잡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버렸지만 그들은 그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고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박해 없는 미국과 다른 나라의 교회들이 얼마나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사실 위험한 것은 박해의 상황이 아니라 아무런 고난도 박해도 없을 때입니다. 세상 말로 등 따시고 배부를 때가 더 위험합니다. 그럴 때 영적 게으름에 빠지고 영적 무감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고난이나 박해가 우리에게 매우 큰 고통을 주지만 그 고난과 박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연단을 받아 강해지고 순결해집니다. 마치 용광로에 들어간 쇳덩이가 불순물들이 녹아 정금처럼 나오는 것처럼 고난과 박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더욱 순결해지고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안락하고 평온할 때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깨어 기도함으로 잠들지 않게 하라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의 안락함으로 인해 영적으로 잠들어 있거나 영적 무감각, 영적 게으름에 있다면 다시금 깨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즉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다가 고난과 박해를 받는 자들을 향해 복을 선언하십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겁니다. 100%의 보장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고난과 박해를 받은 자를 주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어로 박해를 받는다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가 נרדף입니다. 박해라는 의미로 번역했지만 원뜻은 쫓긴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נדף의 수동형인데, נדף의 뜻은 ‘무엇을 쫓다, 뒤쫓다, 추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앞서 일곱 번째 복인 화평하게 하는 자를 보았는데, 이것을 עושה שלום이라고도 하지만 נודף שלום라고도 쓸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번역이 둘 다 나옵니다.

'의를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의를 쫓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뒤쫓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נדף, 쫓아가면 무엇이 נרדף, 무엇이 쫓아온다? 그것을 싫어하고 거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쫓아온다는 겁니다. 미움과 고난과 박해가 쫓아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만 נרדף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엇이 나를 쫓아옵니까? 천국이! 하늘의 상이!

  내가 의를 쫓아가는 삶,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삶을 살 때 내게 고난과 박해가 쫓아오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가슴 벅찬 천국이 나를 쫓아오고 하늘의 상이 나를 쫓아온다는 겁니다. 이걸 알기에 복이 있는 것이고, 이걸 알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겁니다.

  이제 곧 성탄절인데, 보십시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고난입니다. 복음을 전하실 때도 집도 재산도 없었습니다.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배척과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하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고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쫓을 때 미움과 고난과 박해가 쫓아왔습니다. 그리고 끝입니까? 아니요.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이루어졌고,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또 장차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고 영원히 왕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쫓아갈 때 박해도 쫓아오지만 천국이 쫓아온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늘 백성입니다. 이 땅의 것이 다인 것처럼 살지 맙시다. 이 땅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야 하지만 이 땅의 것이 다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언자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과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과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미움도 받고 배척도 받고 고난과 핍박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임을 기억합시다. 내가 지금 제대로 예수 믿고 사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임을 알고 감사합시다. 천국이 나를 쫓아옵니다. 하늘의 상이 나를 쫓아옵니다. 천국이 나의 것입니다. 하늘의 상이 큽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즐거워합시다. 나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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