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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가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요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1840 추천 수 0 2013.07.27 08:02:37
.........
성경본문 : 요1:1-14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토라가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2009년 12월 19일(토) 대림절 넷째 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요한복음 1:1-14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이 대림절 넷째 주고, 이제 곧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산상수훈을 잠시 멈추고 요한복음 1장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왜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자신지를 설명하면서 유대교의 성경해석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각나십니까?

  유대교의 성서해석을 미드라쉬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성서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창세기 1:1에 대한 미드라쉬를 보면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누구의 조언을 듣고 했냐 하면 토라의 조언을 듣고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토라가 일종의 천지창조의 청사진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토라를 보고 또 토라를 참고하시고 그 조언을 들으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유대교의 창세기 미드라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창 1:1) '처음'은 토라를 가리킨다. "주는 그분의 길의 처음에 나를 소유하셨다(잠 8:22)'

  좀 어려우시죠? 이걸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이 구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베레쉿 바라 엘로힘 엣 하샤마임 베엣 하아레쯔)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בראשית'(베레쉿)가 무엇이냐? 우리말로는 "태초에, 처음에"라고 번역된 이 'בראשית'(베레쉿)가 무엇이냐? 토라라는 겁니다.

이 해석을 보다가 제가 발견할 것인데, 이 말에 따라 보면, בראשית (베레쉿)앞에 있는 'ב'(베)를 영어 성경이나 우리말 성경에는 'in'의 의미로 번역을 해서 'In the beginning, 태초에, 처음에'로 번역을 했는데, 이것을 'by 혹은 with'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석이 됩니까? "'ראשית(레쉿)에 의해서, ראשית(레쉿)으로' 혹은 'ראשית(레쉿)과 함께'가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창세기 1:1을 어떻게 읽을 수 있습니까?
"ראשית(레쉿)에 의해서, 혹은 ראשית(레쉿)으로, 혹은 ראשית(레쉿)과 함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ראשית(레쉿)이 무엇이냐? 'beginning, first, origin'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말로 하면 '시작, 처음,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바로 토라라는 겁니다. 이 토라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께서 이 토라를 보시고 토라의 조언을 들으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에 대한 근거를 잠언 8:22로 들고 있는 겁니다. 잠언 8:22에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나'는 지혜를 말합니다. 지혜는 토라를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즉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토라를 가지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토라는 창조 이전부터 있었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혹은 하나님께서 이 토라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유대교의 창세기 미드라쉬의 내용입니다.

  잘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해석을 굳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이 토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요한복음은 이러한 유대교의 성서해석을 바탕으로 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가 없이 본문을 보면 나름대로 은혜는 되는데 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고 보다 깊은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에서 말하는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이라고 하면 무엇을 연상하게 됩니까? 일차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언어입니다. 그리고 문자로 기록된 글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말씀'을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말씀을 그냥 창세기 1장에서처럼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말씀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토라'입니다. 토라 역시 우리는 그저 모세 오경, 혹은 율법 정도로 이해하는데, 토라는 단순한 율법의 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협의적인 의미이고, 여기서 말하는 토라는 우리의 삶에 있어 지켜야할 율법의 계명을 포함하는 모든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사람의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입니다.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신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토라는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토라는 곧 하나님 자신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토라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18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우리말로는 '하나님 품속'이라고 했는데, 원뜻을 살려 번역하면 '하나님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유대교의 성경해석에서 토라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 자신이라는 해석을 사도요한이 인용하면서 그 토라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유대교의 성서해석의 배경에서 본문을 보자는 겁니다. 먼저 1절을 볼까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유대교의 성서해석이 생각나면서 아하! 하는 감탄사가 나오면서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분들은 앞서 말씀드린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신 겁니다. 어떠십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의 서두는 창세기 1:1을 떠올리게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요한복음 1:1에서의 태초의 의미는 좀 다릅니다. 창세기 1:1의 태초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토라와 함께, 토라를 보시고 토라를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사도요한은 유대교의 성서해석을 인용하면서 이것을 기록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1의 태초는 유대교 성서해석에 말한 토라를 의미하는 태초가 아니라 창조이전의 시간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훨씬 이전부터 말씀, 즉 토라가 계셨다는 겁니다. 이 토라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토라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토라가 천지 창조의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셔서 창조의 사역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3절의 내용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토라가 있었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 토라를 보시고,

토라의 조언을 들으시면서 토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유대교의 해석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4절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을 이야기 하다가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왜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왜 그것이 사람들의 빛입니까?

여기서 말씀은 토라를 말하는 것인데, 토라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모든 생명이 그분에게서 나왔습니다. 당연히 토라는 생명입니다. 토라 안에 생명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 분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에 "빛이 있으라." 명하실 수 있는 겁니다. 토라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토라 자신이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고,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나 '나는 생명이다', '나는 빛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신 분, 빛이신 분,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생명을 불어넣으실 수 있는 생명 자체이고 빛 자체이신 분이시기에 '나는 생명이다, 나는 빛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5절을 볼까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이 빛은 창조 때부터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이 말씀은 빛이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드러내시기 전까지 세상은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창세기 1:2이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지 않으시면 세상은 흑암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처음이 "빛이 있으라."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심으로 혼돈하고 공허한 우주를 질서 있게 하시고 밝히시며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빛이 창조 때부터 있었고,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이 빛은 계속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빛이 이스라엘 백성에는 구약성경으로 주어지고, 이방민족들에게는 양심의 증거가 그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고, 또한 사람들을 구원할 빛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 드러내셨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 이전의 이스라엘 역사 아닙니까?

  그래서 마침내 이 빛이 세상에 직접 왔습니다. 그분이 누구라는 겁니까?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누구다? 세례 요한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6-9절까지 내용입니다.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는데, 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까?

  예수님이 바로 토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분 안에 있고 하나님의 빛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를 믿어도 구원받고, 알라를 믿어도 구원받고, 힌두교의 신을 믿어도 구원받고, 하다못해 산신령을 믿고 온갖 우상을 믿어도 구원받는다는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지요?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지요? 아니에요.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 자신이시고 생명이시고 빛이신 분만이 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것이지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우리 인간에게 보내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 자신이신 참된 토라, 참된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신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 자신이신 토라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냐? 11절에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어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땅입니다. 그분의 백성입니다.

왜 오셨느냐? 자기 백성들이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겁니다.

  천지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을 만드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해 그것이 깨졌어요. 어긋났어요. 망쳐버렸어요. 그래서 다시금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신 분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인간의 죄악과 타락으로 인해 깨어지고 망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다시금 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새로운 창조입니다. 새로운 인간창조입니다.

죄인이, 그 죄로 인해 멸망당해야 할 죄인이 죄 용서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중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무엇이냐? 자기 땅에 오신 토라이신 성자 하나님,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어요. "너희가 의인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너희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너희가 율법의 모든 조항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조건을 내세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 때나 그 이후나 다르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시고 주신 명령은 딱 하나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고 너희는 나의 자녀들이다. 자녀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존경하고 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라."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이 먹게 했냐? 함정 판 것 아니냐?' 이런 소리하지 마세요. 선악과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의 창조주라는 겁니다. 그것 인정하라는 겁니다. 뭐 다른 것 주셨습니까? 엄청 힘든 것 주셨어요?

  하나님의 뜻은 창조 때나, 인간의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에나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과 관계하는 사람,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과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합니다. 그 마음에 여러 생각이 있으면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웁니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요구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단순해요. 복잡하지 않아요.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조건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겁니다. 영접하라는 겁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그동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기지 않았거든요.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으로 살았거든요.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았거든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거든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거든요.

그러한 나의 모습을 회개하고 예수를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분으로 영접하여 믿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겁니다. 다른 조건 없어요.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다른 조건이 없거든요.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께서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시기 위해 토라이신 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방법으로는 안돼요. 인간의 혈통이나 육정으로 오실 수는 없었어요. 그분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 자신이시기에 사람의 방법으로 오실 수가 없는 겁니다. 즉 남자의 씨를 통해서 오실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자신이신 분이 어떻게 피조물이며 그것도 죄인인 인간 남자의 씨를 통해 오실 수가 있겠어요? 안 되는 겁니다.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의 몸을 통해 오신 겁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겁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오신 겁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못 믿겠다 그러는데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 자신이신 분이 어떻게 죄인인 사람의 씨를 통해 오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자신이신 분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오신 겁니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 사건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창조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또한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신 토라, 말씀이신 분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신, 히브리어로 בשר(바싸르/영어 표기로 하면 basar)입니다. 살덩어리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지 않습니까? בשר입니다. 살덩어리입니다.

왜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라고 하지 않고 말씀이 살이 되었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이단사상 때문입니다.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신성은 형이상학, 거룩한 것이고, 인간의 육체는 형이하학,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은 실제로 인간의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현현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단사상이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처럼 보였던 현현이 아니라 실제의 살덩어리를 가진 인간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살이 되었다라고 한 겁니다.

  말씀이 살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곧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자신이신 토라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살이 되었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적인 한계를 가진 인간이셨다는 겁니다. 우리와 같은 목마름, 허기를 느끼고 똑같은 감정을 경험하시고 신체적인 피로로 느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십니까? 온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분께서 사람이 되신 겁니다. 그냥 사람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겁니다. 나와 똑같은 육체적인 한계와 감정과 연약함을 경험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경험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경험하셨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경험하셨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를 100% 이해하실 수 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실 수 있다, 그 말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4:15-16절에서 어떻게 선언합니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느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체휼한다? 몸 체입니다. 나를 몸소 경험하심으로 인해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부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시지만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셨기 때문에 더욱 더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기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더욱 더 나아가는 겁니다.

  말씀이 살이 되었다, 얼마나 큰 은혜가 담겨있는 말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말씀이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셨어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이 말씀의 본래의 의미는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신다, 우리 가운데 장막을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성막에서!

  그렇다면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 자신이신 분이 우리와 같은 살덩어리 육신이 되었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 가운데 성막으로 임하셨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나 민수기 등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 하십니다. 왜? 그곳에 임하시겠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만나시겠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말씀하시겠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그렇다면 14절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 토라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막으로 임하셨다는 뜻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겠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겠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성막이시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내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내 안에 예수님이 충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감격이 넘치는 어조로 선언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막으로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됩니다. 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까?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이시고 살아계신 성막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도 얼마나 큰 감동이 담겨있는지요. 은혜와 진리, 히브리어에서 חסד ואמת(헤세드 베 에멧)를 옮긴 말입니다. חסד(헤세드)는 여러 의미로 번역됩니다. 우리를 향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비, 긍휼, 용서, 사랑, 인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이 바로 חסד입니다.

  그리고 אמת(에멧)는 보통 진리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는 보다 깊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어가 참 재미있는데, 이 אמת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철자의 첫 글자 א(엘렙)과 중간 글자 מ(멤), 그리고 마지막 글자 ת(타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유대교의 해석인데 진리가 무엇이냐? 처음과 중간과 끝이 변하지 않고 같은 것, 그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달라지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진리십니까? 왜 예수님이 나는 진리라고 하셨습니까? 변하지 않으시거든요. 그래서 이 אמת이라는 말에는 확고함, 변하지 않음, 틀림없음, 영원함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와 진리, חסד ואמת는 무엇을 말합니까? 죄인을 향하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틀림없다,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확고하고 변치 않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חסד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חסד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하다가 시험에 드십니까? 삶의 어려운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되십니까? 흔들리십니까? 염려가 찾아옵니까? 두렵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 변함없고 틀림없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חסד를 확인하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자 다시 일어섭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아요. 모든 시험에서 승리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오늘 좀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다루었는데, 이것은 사고의 결과나 명상의 결과가 아닙니다. 논리의 결과도 아닙니다. 나중에 교회에서 만들어낸 교리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경험입니다. 실제로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성막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기에 쓰여진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자신이신 토라이시며 생명이시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기에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는 경험입니다. 내가 예수를 경험하면 나 역시 이렇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도 요한과 똑같은 감격으로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선언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는 경험입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사고도 아니고 명상도 아닙니다. 교리도 아닙니다. 경험입니다.

  왜 예수를 만나야 한다고 합니까? 경험입니다. 예수를 경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를 경험하지 않으면 내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한다할지라도 나는 이렇게 고백 못합니다. 예수를 경험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예수는 성인 중에 한 명이고, 위대한 선지자, 위대한 인물, 혹은 귀신을 쫒아낸 exorcist, 혹은 혁명가 정도로 머물고 맙니다.

  예수를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를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경험한다, 예수를 살아간다, 다른 것 아닙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왜 말씀이신지,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경험한다, 내가 예수를 살아간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내가 말씀이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시다, 그것은 곧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 안에 비진리가 있습니다. 비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이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진리가 들어왔습니다.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진리와 비진리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같이 있게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합리화고 타협입니다. 게으름과 불순종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말씀하십니다. 생각나게 하십니다. 듣게 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그 진리를 덮으려고 합니다. 안 들으려고 합니다. 상황윤리가 작용합니다. 자기 합리화를 내세웁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합니다. 그럴 때 내 안에서 진리는 더 자리를 잃어갑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배는 드리는 것 같은데 나는 점점 더 비진리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 안에는 비진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거짓, 죄악, 불순종, 위선, 가식, 교만, 그릇된 사고, 미신적인 신앙, 자기합리화 등등 비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경험한다, 내가 진리이신 예수를 살아간다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진리의 길을 택한다는 겁니다. 진리의 길을 따른다는 겁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진리로 내 안에 있는 비진리를 몰아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 알량한 껍데기들, 그럴듯한 포장들, 거룩한 척 하는 그 포장들 다 뜯어내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 행함으로 비진리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내가 예수를 경험한다, 내가 예수를 살아간다는 그 뜻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내 안에 죽어있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이 다시 살아나고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 안에 순종이 없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 안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정말 겸손히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발을 씻기고 섬기는 섬김이 없습니다. 대접만 받고 섬김만 받으려 합니다. 내 안에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는 그 모습이 죽어 있습니다. 내 안에 정직, 진실, 정결한 삶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 내 안에 죽어 있는 것들, 내 안에 잃어버린 것들, 이러한 것들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다시 회복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내 안에 예배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 안에 용서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낮아져 발을 씻기고 도와주고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거룩한 삶, 정직한 삶, 성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 경험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살아가는 겁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직분은 맡았는데 이러한 것들이 없다, 희미하다, 보이지 않는다, 연약하다라고 하면 다시금 예수님으로 채워나가야 합니다. 십자가 보면서, 예수님 바라보면서 예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죽어 있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이 다시 살아나고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다시금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을 보지 못하니까 망하는 길로 가는 겁니다. 죄짓는 길로 가는 겁니다. 빛을 봐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교회를 다녀도 빛을 보지 못하면 똑같은 길로 가는 겁니다.

  빛과 어두움은 같이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빛을 향해 문을 잠그려 합니다. 예수를 믿어 내 안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죄악들, 더러움들, 음란함, 우상들, 상처와 쓴 뿌리, 교만과 열등감을 비추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자꾸만 빛을 향해 문을 닫으려 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빛을 향해 활짝 여세요. 그래서 나의 모든 어둠이 다 드러나게 하세요. 빛 되신 예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세요. 빛이 내 죄와 상처와 어둠을 비출 때 아파요. 힘들어요. 그런데 그 빛이 비춰야 치유가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으로 내 안을 채우세요. 그리고 그 빛이 나의 모든 어둠을 비추게 하셔요. 빛이신 예수님께서 고치십니다. 치료하세요. 회복시키십니다. 거룩하게 하십니다. 정결케 하십니다.

  내 안에 빛이신 예수님으로 채워져 그 빛이 나를 치유하고 깨끗케 하면 나라는 창문이 깨끗해지는 겁니다. 그런 나도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내 빛이 아니라 예수님의 빛이 나를 통해 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경험입니다. 예수를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즉, 말씀, 토라는 창조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그러기에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그리고 그 토라가, 그 말씀이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막으로 거하셨다, 우리가 그분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선언은 육신이 되신 토라, 우리와 같은 살덩어리가 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살아간 사람들의 고백이며 선언입니다. 감격적인 선언이며 고백입니다.

  말씀이요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으로 여러분들의 심령과 인격과 삶을 채우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감격적인 고백과 선언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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