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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의 울타리를 넓히라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135 추천 수 0 2013.07.27 08: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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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21-26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토라의 울타리를 넓히라
2009년 12월 2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5:21-26

  유대교의 중요한 책 중에 ‘피르케이 아보트’(פרקי אבות)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주전 3백여 년부터 주후 2백년까지 60여명의 유대교 랍비들이나 현자들이 남긴 교훈을 모아 만든 책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선조들의 어록’이라고 할 수 있는 책으로 주후 220년 경에 여섯 권 책으로 편찬된 유대교 최초의 성문법인 미쉬나의 제 4부 9편에 들어 있습니다. 이 책은 유대교 성서해석서인 미드라쉬만큼 중요한 책으로, 유월절부터 칠칠절까지 6주 동안 매주 안식일 오후에 회당에서 피르케이 아보트를 1장씩 읽고 강론을 듣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성서공부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길을 걷는데 게을리 하지 않게 되고 또한 성서공부는 예배의 연속이며 구원의 길이라는 겁니다.

이 책이 예수님 당시와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유대교 랍비들이나 현자들의 교훈을 담고 있고 그 비슷한 내용이 신약성경에 반영되어 있어서 근래에는 신학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책 1장에 보면 ‘토라에 울타리를 쳐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문구는 아주 유명한 구절인데, 이 말은 성경의 문구를 바로 해석하라는 뜻입니다. 즉 울타리는 성서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토라, 즉 성경 말씀의 바른 해석을 해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라에 울타리를 쳐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토라에 울타리를 쳐라‘는 말이 성경말씀의 바른 해석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성서해석은 그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고 있는 산상수훈과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새롭게 해석하신 성경 해석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 ’토라에 울타리를 치는 것‘에 해당합니다. 성경 말씀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을 지켜나가는 우리의 삶의 울타리를 쳐주신 것입니다.

  2주전에 마태복음 5:17 말씀을 통해 나눈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이것이 그런 맥락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성서해석을 너무 문자적으로 하다 보니 법 조항이나 규정들은 상당히 세밀해지고 많아졌지만 율법을 주신 참 뜻을 잃어버렸습니다. 성서해석의 울타리가 편협해졌습니다. 잘못 쳐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당시 유대교의 편협하고 피상적인 성서해석을 바로 잡아서 제대로 울타리를 쳐줌으로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이어지는 21절부터 이어집니다. 21절을 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서 옛 사람은 모세 오경을 받은 사람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살인하지 말라는 규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에 있는 조항입니다. 제 6조항입니다. 살인하게 되면 심판을 받는데 그 형벌은 죽음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살인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규정들이 모세 오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 당시 유대교 역시 이에 대한 해석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이 조항을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모든 나라와 문화권에는 살인을 금하는 규정과 살인에 대한 형벌은 상당히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살인금지 규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해를 보면 문자적인 이해에 머물게 됩니다. 즉 신체적으로, 행위적, 법적으로 살인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살인금지에 대한 조항을 십계명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조항을 명하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살인금지 조항을 명하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과 하나님께서 이 조항을 명하시면 원하시는 궁극적인 뜻을 아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는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이고,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사랑이시고 사랑으로 관계하시는 것인데 그것처럼 인간 역시 하나님을 닮아 서로 사랑하고 사랑으로 관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함으로 깨지고 만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어긋났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인정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관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인데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깨뜨리고 거스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살인은 단순히 법적인 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깨뜨리는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생명을 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권한입니다.

  그렇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서로 해치면서 살지 말라는 겁니다. 왜?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며 서로 사랑하며 관계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문구로 명하신 이유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가장 극단이 바로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것을 예를 드시면서 서로를 해치지 말 것을 명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서로 해치면서 사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돕고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관계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의도를 보다 더 정확하게 밝히신 부분이 바로 22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먼저 주목해서 볼 것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앞에서부터 보면“...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인데 이건 예사 말씀이 아닙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러한 말은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 역시 즐겨 쓰던 말이었습니다. “성경에, 혹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 이것은 이걸 말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말은 당시 랍비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모세 오경을 통해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셨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무엇과 무엇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모세 오경, 이것과 자신의 말씀을 동일한 선상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지금 너희에게 말하는 내 말이 같다는 겁니다. 동일한 권위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대단한 파격입니다. 당시 랍비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표현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누구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걸까요? 그분 자신이 완전하신 토라이시 때문입니다. 지난 주 설교를 기억하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이러한 법 규정이 누구에게서 나왔느냐? 바로 토라이신 예수님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자신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토라이신 분,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자신과 같으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로서의 권위가 바로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약의 말씀들을 이해할 때 예수님의 성서해석을 통해 다시금 이해하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지킬 수 있고 그럴 때 율법이 완전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22절 이하의 말씀은 단순히 여느 랍비들의 해석과 같은 또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주시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제대로 알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볼까요?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노와 욕설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어떤 경우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그렇다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라는 말과 “누구든지 살인하면”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살인과 분노를 동일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왜 살인과 분노가 같을까요? 분노가 바로 살인의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을 해칩니까? 자신의 탐욕 때문에도 그렇지만 분노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가 난다는 것이지요. 밉다는 겁니다. 싫다는 겁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다가 살인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살인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바탕에 분노가 깔려 있습니다. 막가파 아시죠? 처음에는 자신의 가난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그것이 부모에 대한 미움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가난은 부자들 때문이라는 생각에까지 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 인물이 아니라 부자라면 모두를 증오하게 됩니다. 그 분노와 증오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겁니다.

미국에서 가끔 일어나는 총기사고도 마찬가지이고 대부분의 살인사건이 마찬가지입니다. 그 바탕에 분노가 있습니다. 그 분노가 특정 사람에 대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 싸이면 불특정 다수가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고 상황이 주어지면 살인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단순히 막가파나 그런 살인범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 안에 미움이 생겼습니다. 증오심이 생겼어요. 그 사람에 대한 화가 납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으면 있을수록 더 큰 중오와 분노가 됩니다. 분노와 증오심이 점점 자라납니다. 그랬을 때 나는 과연 100% 안전한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사람을 해하거나 죽이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정말 내 안에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상황은 이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단 둘만 있습니다. 혹은 나에게 힘이 있습니다. 그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신체적인 힘, 혹은 사회적인 힘, 권력, 돈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내 손에 총이나 칼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럴 경우 정말 나는 100% 안전할까 하는 겁니다.

  실제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분노의 순간, 증오의 순간에 상황만 딱 떨어지면 나 역시 사람을 해치거나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나 많습니다. 농담으로 그런 말 하지 않습니까? ‘운전하다가 총이 있으면 여럿 죽였다.’이런 말 하지 않습니까? 이건 농담으로 받아들일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온 첫 해에 비자 문제로 인해 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전에는 관광비자로 들어 왔다가 학교에 등록을 해서 히브리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학생비자로 바꿀 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비자국 직원이 그렇게 해줄 것처럼 했는데, 다른 서류를 요청해서 가지고 갔더니 비자법이 바꿔서 이제는 카테고리 변경을 하려면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한국에 가서 받아오라는 겁니다. 그때 아내가 셋째를 임신한 상황이었고 히브리어를 배우는 과정이라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부총장의 편지까지 들고 갔는데, 대답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하면서 비자 못주니까 당장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안에서 억울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데 다른 사람들이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미 비자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만일 내 손에 폭탄이 있으면 비자국을 폭파시켰을 것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무슨 저런 말을 하나, 아무리 비자발급이나 연장이 힘들다 해도 어떻게 저런 말을 하나’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딱 겪고 나니까 그 말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물론 내 손에 폭탄이 주어진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내 안에도 그러한 말에 동의할 수 있는 분노가 생겼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살인 자체에만 초점을 둡니다. 그러면서 살인과 똑같은 분노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미워하고 분노해하고 증오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리적인 살인과 심리적인 살인입니다.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생명을 죽이는 살인이 있고, 비록 물리적인 힘을 가해 살인하지 않았으나 미음 속으로 살인하는 심리적 살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움, 분노, 증오심입니다. 이것이 생길 수는 있으나 그대로 놔두면 이것이 쌓이고 터져서 결국 물리적인 살인을 야기하거나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방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살인 금지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인간은 서로를 해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분노해하고 증오하는 것 역시 살인과 같다는 겁니다. 그 심리적 살인, 내재적인 살인, 잠재적인 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 미움과 분노, 증오심을 버리라는 겁니다. 해결하라는 겁니다. 주의하라는 겁니다. 쌓아두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관계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금하라는 겁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왜 다툼이 일어납니까? 왜 폭력이 일어나고 살인이 일어납니까? 분노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이 분노를 표출하면 상대방 역시 분노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고 폭력이 일어나고 살인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상대방이 내게 분노를 표출하거나 악으로 대할 때 내가 분노하면 그건 결국 악으로 악을 대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상대방이 악으로 대할 때 그냥 당하고 있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악으로 대할 때 지혜롭게 대하라는 겁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겁니다. 똑같이 상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상대가 분노를 표한다고 나도 똑같이 분노를 표해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 그러나 내가 그 순간 분노가 아닌 차분한 감정으로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대화를 하면 생각보다 상황은 이내 안정이 되고 문제도 해결이 됩니다. 부부싸움 해보면 알지 않습니까? 상대가 나에게 화를 낼 때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상대방의 불을 작게 만들고 끄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난 원래 성격이 욱하는 성격이야 하는 말로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의 참 의미를 가르치면서 형제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분노는 그것 자체가 심리적인 살인이고 내재적인 살인이고 잠재적인 살인입니다.

  욕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욕이 나옵니다. ‘라가’라는 욕과 ‘미련한 놈’이라는 욕입니다. 라가라는 말은 ‘레카’(ריקא) 라는 아람어 단어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음역하면서 '라가'라는 말이 되었습니다. 랍비 문헌에 욕설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데, 이 말의 뜻은 '바보, 돌대가리' 등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쓰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욕은 당시 아람어 문화권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모독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지금의 바보나 돌대가리 이상의 모독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욕설이라는 것이지요.

  '미련한 놈'이라는 욕도 헬라어 원어로는 '모레'인데 이것이 '반역자, 이단자, 어리석음'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당시 사회에서 이 말은 매우 모독적인 욕설이었다는 것이지요.

  왜 욕설에 대해 언급하셨을까요? 어떤 경우에 욕을 합니까? 그 속에 분노가 있을 때 욕을 하게 됩니다. 역시 분노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욕설을 내뱉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름의 뜻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모든 이름에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이름을 주시면서 의미를 부여해주십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반영하는 창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욕설을 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존엄성과 인격과 삶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쓰는 욕인 '개XX'만 해도 그렇습니다. 분명 이 사람의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 화가 나서 '개XX'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개로 취급을 당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존엄성과 인격과 삶이 개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 욕을 듣는 사람은 매우 불쾌하고 더 큰 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욕설은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것이고 그 욕설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고 경멸당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욕설의 내면에는 분노가 있고, 그 욕설을 통해 더 큰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욕설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불쾌해지고 화가 나는 상황에서 욕을 하지 않는 훈련을 하십시오.

  결국 분노와 욕설은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 자체가 심리적 살인, 내재적 살인, 잠재적 살인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증오심을 갖고 욕설을 해대는 것은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왠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중요성을 가진 이웃 사랑,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이 모든 율법의 강령, 즉 핵심이고 요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은 이 둘을 온전히 지킬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와 똑같은 중요성을 두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봉사, 계명 준수 등등을 해도 정작 이웃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 핵심은 사랑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그와 똑같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내 안에 사람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다른 면을 깨드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나름대로 이것저것 한다고 할지라도 내 안에 다른 사람에 대해 모독하는 욕설을 한다면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분노와 욕설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그것은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자이십니까? 그분 자신이 완전하신 토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친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피 흘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와 모욕적인 욕설이 곧 살인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면 문제는 우리 안에 생기는 분노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상처를 받게 되고 그 상처가 결국 분노가 되고 맙니다. 결국 분노의 해결은 우리 안에 있는 상처의 해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처가 해결되어야 분노라는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 그냥 참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상처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께 맡기십시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으로 오신 분, 사랑 자체이신 분, 몸소 사랑을 보여주시고 살아가신 분께 맡기십시오. 그분의 빛으로 내 안에 있는 상처를 비추게 하세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비추게 하세요. 그리고 그 상처를 숨김없이 맡기고 주님의 치유를 구하시고, 내 안에 있는 분노의 대상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지난주에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모든 청년들이 그 인에 상처가 있습니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상처가 있어요.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있어요. 그것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요. 작은 일에 상처를 받고 화가 납니다.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이 다르지 않아요. 여러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괜찮은 척, 아프지 않은 척 덮어두지 마세요. 분노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무례해서, 나를 화나게 해서가 아니라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 죄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치유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해주시고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바라본다, 십자가를 바라본다, 예수님으로 내 심령을 채운다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의 모든 상처를 맡기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상처를 만지실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치유 받는 겁니다. 그래서 건강해지는 겁니다. 내 속사람이 건강해야 내 삶도 건강해지는 겁니다. 내 속사람이 병들어 있으면 내 행동도 내 삶도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분노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열등감과 교만해지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에는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둘은 같이 가는 겁니다. 이 둘이 같이 가야지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치료자이신 예수님, 사랑이신 예수님으로 자신을 채우십시오. 예수님께 나의 모든 상처를 맡기시고 치유를 구하십시오. 내게 상처 준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화날 때마다 예수를 생각하세요. 십자가를 생각하시고 구하십시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저는 목사지만 목사 역시 인간인지라 화가 날 때가 있고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저 참는 것이 다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데,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가 됐을까요?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인해 씩씩대며 하나님 앞에 그 분노의 감정을 쏟아놓았습니다. 사실 이건 기도라고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어린 자녀들이 화가 나서 부모에게 말할 때 감정 다 가라앉히고 논리정연하게 합니까? 화나는 대로, 울면서, 씩씩대면서 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 앞에 나의 분노의 감정, 미움의 감정, 씩씩대면서 다 털어놓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구하세요. “십자가를 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참아지는 것이 아니라 품어지게 됩니다. 십자가는 참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참으신 것은 고통이고, 그분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밖은 모든 이들을 품으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본다,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게 상처준 이들, 나를 분노하게 만든 이들을 품는 것입니다. 참으면 결국 그것이 쌓이다가 언젠가 터집니다. 병납니다.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참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위해, 나를 분노케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그 사람을 축복하게 됩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의 능력입니다.

  미움이 생길 때, 상처를 받아 아플 때, 화가 치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세요. 아이가 아빠에게 하는 것처럼 그 감정 그대로 다 쏟아놓으세요. 그리고 십자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래서 참는 것이 아니라 품을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은 즉각적인 해결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해입니다. 특히 신앙공동체에서 그래야 합니다. 22절이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분노와 욕설에 대한 언급이라면 23절부터는 신앙공동체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해당되지만 신앙공동체 내에서의 관계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공동체, 즉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 경우도 해당되고 같은 교회는 아니지만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간의 관계에도 해당됩니다.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내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과 형제와의 화목을 같은 선상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조건, 나의 예물을 받으시는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형제자매와의 화목이라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느냐 하는 것은 내가 나의 형제자매에게, 이웃에게 상처 입힌 것에 대해 진실로 참회하고 그와 화해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교회공동체에서, 혹은 같은 교회는 아닐지라도 다른 교우에게 내가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다툼이 있었습니다. 관계가 불편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또한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와 예물을 받으시는 조건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서 예배가 잘 되십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와 관계가 불편한 상태에서 예배가 잘 되십니까?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까요? 제 경우는 예배가 안 되었습니다. 제가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경우임에도 내 안에 그로 인해 미움이 생기니까 예배가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하물며 내가 상처를 주었다라고 했을 때 그 예배가 제대로 드려질까요? 나는 예배 드렸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겁니다. 즉각적으로 해결하라는 겁니다. 미루지 말라는 겁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옆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가령 예배드리다가, 혹은 기도하다가, 혹은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다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상처준 일,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났어요.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셨어요. 그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각적인 해결을 하라는 겁니다. 미루지 말라는 겁니다. 찾아가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화해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참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 이러한 경우에 나 자신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나에게 조금 잘못했거나 서운하게 했거나 마음을 상하게 했거나 하면 당장 상대방의 용서와 태도 변화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이 상대방에게 잘못했을 때는 자꾸 미룹니다. 관대합니다. 내 뜻은 그것이 아니었어, 상대방도 이해할꺼야 하면서 자기가 상대방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대방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즉각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겁니다. 사과하라는 겁니다. 상처주어서 미안하다고, 내 주장만 해서 미안하다고, 내 생각이 짧았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구하라는 겁니다. 이것 어렵습니까? 아니요. 어렵지 않아요. 자존심은 이런데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분명 원망들을 만한 일을 했는데 사과하지 않는다,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겁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을 빨리 인정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내가 원망들을 만한 일을 했어도 그렇게 하면 해결되거든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질 않으려고 해요. 분명 나의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어요. 원망들을 만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생각은 나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대충 넘어가려고 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관계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즉각적인 해결을 하십시오. 우리가 살다보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수가 많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자매간의 화목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겁니다.

  호세아 6:6에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형제자매와의 화목이 없는 예배, 화목을 실천하는 노력이 없는 예배, 원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형제자매와의 화목을 실천하는 것,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예배하는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을 닮은 사랑과 화목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앞서 '토라에 울타리를 쳐라'는 문구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곧 올바른 성서해석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울타리가 제대로 쳐져야 그 의미를 알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문자적인 해석으로 편협해지고 왜곡된 성서해석을 바르게 잡고 계시고 동시에 그 울타리를 넓게 쳐주고 계십니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의 초점은 살인하지 말라는 문자적인 의미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토라의 울타리가 좁아졌습니다. 편협해지고 피상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근본적인 의미를 가르쳐주시고 나아가 즉각적인 해결까지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 울타리를 넓게 쳐주고 계십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살인을 하지 않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살인인 분노와 욕설도 하지 않는 것까지 울타리를 넓혀주셨고, 그 계명의 바탕에 있는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즉각적인 화해를 통해 형제자매와 화목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로까지 가야한다고 말씀하심으로 말씀의 울타리를 크게 넓혀주셨습니다.

  토라의 울타리를 넓게 치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넓게 쳐주셨는데,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울타리를 넓게 쳐주셨어도 내가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나는 다시 조그만 울타리에 갇혀 살아가게 됩니다. 큰 울타리 안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예전의 울타리에 갇혀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예전의 작고 편협하고 피상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십시오. 예수님께서 새롭고 완전하고 넓게 쳐주신 울타리를 채우십시오. 가르쳐 주신대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쳐주신 울타리를 채우는 일이고 그럴 때 내 안에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올 한해의 마지막 주 예배의 말씀이 이웃 사랑, 형제자매의 사랑이라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년의 처음도 사랑의 실천이어야 하고 그 마지막도 사랑의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그동안 형제자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지 생각나면 한해가 넘어가기 전에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님 바라보고 십자가 바라보면서 예수님으로 채우고 그분의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상처도 치유받고, 우리의 속사람이 에수 닮은 건강한 사람되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분노와 욕설이 아닌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축복하는 말이 나올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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